소설리스트

독보건곤-23화 (24/61)

제 23 장    당 신 을   기 다 리 고    있 었 어 요

1

그녀는 전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훤칠한 키에 짙은 흑의.

얼굴을 검은 망사로 둘러 싸고 그 너머로 한 쌍의

유성처럼 반짝이는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 영롱한 눈동자는 노독행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눈이었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그 눈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고 말 것같은 그런 눈이었다.

노독행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각인을 새겨준

눈빛이기도 했다.

이 눈빛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으며, 자신이 매혹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너무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노독행도 이제 더 이상 나이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할 줄 알았으며,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사마표향은 그 흔들림없는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팔 년만이로군요."

사람의 마음에 묘한 자극을 주는 그녀 특유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었다.

노독행은 그녀가 용케도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만났던 일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줄 알았다.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소근거렸다.

"당신이 죽지 않았다는 소문은 들었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녀는 무엇을 알았다는 것일까?

노독행의 성격? 그의 마음?

아니면 그가 그저 복수에 날뛰는 한 마리 미친 늑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대체 그녀가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당신같은 사람은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아요. 그래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치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군.

나는 나 자신도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야.

"당신은 복수를 하고 싶겠지요? 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서로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그녀도 복수를 하고 싶다?

그녀는 과연 무슨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노독행은 그전부터 그녀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천상회의 회주인 사마일련의 딸이었다.

그녀가 노가살수문을 떠나간 직후에 노가살수문은

혈겁을 당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천상회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동안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제서야 노독행은 예전부터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을

물었다.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흑의망사사이로 내비치는 그녀의 눈빛이 유달리

반짝거렸다.

"천상회에서 반란이 일어났어요."

"........!"

"누군가가 아버지를 제거하고 천상회를 장악하려고

했어요. 아버지는 당신 부친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당신

부친이 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어요. 천상회가 완전히

그들의 수중에 들어간 후였으니까."

그녀는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엽표와 구여해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어요. 나중에야 나는 노가살수문이 그 일로

혈겁을 당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노독행은 나직하게 물었다.

"반란을 일으킨 자는?"

사마표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사마천세(司馬千世)."

그녀는 곧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 삼촌이에요."

노독행의 얼굴에는 별반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자신의 가문을 피로 씻은 원흉(元兇)의 이름을 들었는데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마표향은 그의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얼굴을 보면서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그 일의 진짜 배후자는 따로 있어요."

노독행의 시선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입부분의 망사자락이 펄럭이며 그녀 특유의 저음이

흘러나왔다.

"모든 일을 계획하고 지시한 자는 바로 총호법이에요.

삼촌은 단지 그에게 이용당한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이에요."

총호법!

이 이름을 노독행은 두 번째로 들었다.

처음은 창응검객 조양홍에게서 였다. 그때 그도 당시의

일은 총호법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고 했다.

"총호법의 이름은?"

"마효(魔梟) 조향령(趙香靈)."

두 사람의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은 지극히 냉정했다.

어찌 보면 전혀 모르는 낯선 타인들끼리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천상회의 총단(總壇)은?"

"여량산(呂粱山) 불귀곡(不歸谷)."

그 말을 듣자 노독행은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렸다.

이제 그녀에게 더 이상의 용무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다.

그래서 떠나갈 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사마표향의 시선이 그의 뒷등에 고정되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 채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한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자가 그곳에 갈 것 같소?"

그녀는 보지 않아도 그것이 엽동의 음성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엽동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이 그 자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소."

"한 번 만났을 뿐이에요. 오래전에."

엽동은 기이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구료."

사마표향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망사사이로 빛나는 그녀의 눈이 엽동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당신같으면 저런 사람을 한 번 보고 잊어버릴 수

있겠어요?"

엽동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잊지 못할거요. 하지만 당신은...."

엽동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둡시다."

사마표향의 음성은 냉랭했다.

"나는 말을 얼버무리는 남자를 싫어해요. 하지만

뭐지요?"

엽동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몇 번

피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와같은 남자에게는 별로 관심에 없는 줄

알았소. 그는 당신이 좋아하는 형(型)이 아니오."

"내가 그를 잊지 않고 있는건 그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

아니에요."

"물론 그렇겠지. 당신은 아마 언제고 그가 필요할지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나처럼 말이오."

엽동의 음성에는 자조어린 빛이 담겨 있었다.

사마표향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걸 알면서도 내 곁을

떠났나요?"

엽동의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었소. 당신이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곁에 있다는게 내게는 지옥과도

같았소."

그의 음성속에는 사나이의 고뇌가 짙게 배어 있었다.

"당신같은 여자를 만난게 애초에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만나지 않았다면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았을테니까."

사마표향의 음성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유혹하거나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요. 당신 혼자 일방적으로 좋아한 것이고 또 당신은

그것으로 만족을 한다고 했어요."

엽동은 땅이 꺼져라 탄식을 토했다.

"그랬었지. 하지만....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만족을 할

수가 없었소."

"당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가 당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엽동은 씁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랬다면 그건 전혀 당신답지 않은 일이었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면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르오."

사마표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속삭이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복잡하군요."

"복잡할 건 없소. 당신은 당신대로의 길이 있고 나는

나대로의 길이 있는거요. 단지 아쉬운건 그 길이 서로

엇갈린다는 것 뿐이지."

사마표향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망사사이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은 정말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그녀는 그런 눈으로 엽동을 보았다.

"다시 나를 도와줄건가요?"

엽동은 망설였으나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거요."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거에요."

엽동의 얼굴에 한 줄기 고통스런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알고 있소. 나는 당신의 취향이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당신을 도울거요."

사마표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려 있었다.

한참 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

"당신은 이 길로 철모방으로 가세요."

엽동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철력파를 만나라는거요?"

"그래요. 그에게 내 말을 전하세요."

이어 그녀의 망사가 가볍게 펄럭이며 전음성이 엽동의

귓전에 전해졌다.

엽동은 묵묵히 그녀의 전음을 듣고 있다가 다시 한 번

그녀를 응시했다.

"당신은 정말 무서운 여자요."

그 말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조금도 표졍이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단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그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철력파가 승락을 하겠소?"

"그로서는 승락하지 않을 수 없을 거에요. 이번이

아니면 그는 영영 천상회를 능가할 수 없을테니까."

"하지만 그러다가 그를 또 다른 호랑이로 만드는게

아니오?"

"철력파는 내가 통제할 수 있어요."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엽동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상

틀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결코 허언을 하거나 자신없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어찌보면 참으로 냉정한 여자였다.

좋고 싫은 것이 누구보다도 분명했고, 그것을 결코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일단 원하는 것은 반드시 쟁취했다. 냉정하고

침착하며 다분히 계산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번 본 남자라면 누구나가

매혹당할 수 밖에 없는 신비한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여자를 사랑한 것이 엽동으로서는

불운(不運)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은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없게 되어

버렸던 것이다.

*                  *                  *

노독행은 그녀와 만난 일을 머리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만나지 않느니만 못했다.

그녀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만남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기분을 나쁘게 한 것은 그녀가 형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형!

그녀를 보는 순간 그는 형이 생각이 났다.

부드러운 성격에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던 형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더욱 어울려 보였는데....

예전과 조금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눈을 보면서

노독행은 처참한 몰골로 변해 있던 형의 시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화가 났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아마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할 두 사람이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산 채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형의 처참한 죽음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녀의 모습이 못마땅했기 때문일까?

그리고 그때 자신같은 사람도 화가 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제는 없어져 버린줄로만 알았던 감정중의 하나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것도 역시 그녀 때문이었을까?

아직도 자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 그 별빛같은 눈동자가

남아 있는 것일까?

그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가?

그때문에 화가 난 것일까?

그것은 노독행도 알지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는 것이다.

2

강호무림에 이상한 소문 하나가 떠돌기 시작했다.

- 당금 무림에 희대(稀代)의 살성(煞星)이 나타났다!

밑도 끝도 없는 소문 하나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그 소문의 진위(眞僞)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그 소문을 들은 사람은 하나같이

안색이 변하고 몸을 떨었다.

그 소문은 멀리 장성(長城)너머 북만주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북만주 제일의 방파인 대복보의 수뇌인물들이 불과 한

나절동안에 몰살해 버렸다. 그들의 시신은 모두 처참하게

박살이 났으며 제대로 대항한 흔적조차 없었다.

며칠 후에는 강북무림을 석권하고 있는 천상회의

십대고수중 하나인 철기개천 목천파가 요양(遼陽) 근처의

이름없는 공동묘지에서 전신의 뼈가 모두 으스러진 시체로

발견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목천파가 천하에 자랑하는

그의 혈번기가 시체옆에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 이것들은 그 뒤에 들려온 소문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一角)에 불과한 것이었다.

오 일 후에는 장성 부근에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고

있던 조가장이 혈겁을 당해 버렸다.

당시 조가장에는 장주인 조양홍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인근의 절정고수들이 십 여명이나 와 있었는데 그들중

어느 누구도 참변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흉수의 정체가 알려진 것은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산수무영 학일리를 통해서 였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강호무림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살인마(殺人魔)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채 보름도 되지 않아 강호인들을 온통 경악과

공포에 떨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태행산 일대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던 귀왕곡에

하나의 인영이 뛰어들었다.

그는 정확히 한 시진 후에 다시 귀왕곡을 벗어났는데 그

일로 귀왕곡은 완전히 멸망해 버렸다는 것이다. 곡주인

풍일립이하 거의 모든 고수들이 몰살했을 뿐 아니라 당시

귀왕곡에 와 있던 장홍칠절과 천상회의 십대고수중 두

사람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소문이 무림인들을

전율케했다.

그 모든 일이 불과 한 달 사이에 단 한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임을 알았을 때 강호는 온통 피와 죽음의

공포에 젖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자는 피도 눈물도 없으며, 한 번 눈밖에 난 사람은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고 했다.

그 자가 왜 그런 혈겁을 저지르고 다니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무림에 알려진 것은 단 하나, 그 자가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한 애꾸눈의 청년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그를

냉혈무정(冷血無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냉혈무정!

이 이름은 삽시간에 천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행로(行路)를 예의 주시한 채 그의

발길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당금 무림을 온통 뒤흔들어 놓는 냉혈무정의 사나이.

그는 과연 누구인가?

*                  *                  *

그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완벽한 '군자(君子)'였다.

수려한 용모에 단정한 복장, 깔끔하고 군더기 없는

행동거지, 그리고 항상 입가를 떠나지 않는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가 그의 첫 인상이었다.

단 한 번도 남들앞에서 큰 소리를 질러본 적도 없고,

화를 내거나 사람을 꾸짖은 일도 없다.

직접 손을 써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살해한 일은

더더욱 없었다.

음성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알맞았고, 발음이 정확해서

그가 입을 열면 못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말꼬리를

얼버무리는 일도 없었고, 남을 흉보거나 헐뜯는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군자중의 군자라

할만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정말 기이한 일이었지만 그가 화를 내지 않으면 내지

않을수록, 또 부드럽게 대하면 대할수록 사람들은 그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아도

사람들은 몸을 떨며 공포에 질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화하게 웃으며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

미소를 보자 혈사자 초력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용서하십시오..."

거칠고 용맹스러워서 아무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다는

혈사자 초력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만큼 풀이 죽은 음성이었다.

그는 말없이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가뜩이나 붉은 색을 띠고 있던 초력의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이마에 땀방울이 고이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초력이 지금 몹시 더위를

느끼고 있거나 아니면 무언가를 무서워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은 더운 날씨도 아니었고, 초력이 무엇을 두려워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초력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대체 무엇이 초력으로 하여금 이토록 쩔쩔매게 하는

것일까?

그는 차를 마신 다음 찾잔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좋군. 식사후에 마시는 철관음(鐵觀音)은 각별한 맛이

있단 말이야."

그의 입이 열리며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맑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발음이 분명해서 듣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런 음성이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듣자 초력의 고개는 더욱 떨구어졌다.

그의 물처럼 고요한 눈동자가 고개를 숙인 채 엎드려

있는 초력의 뒷통수를 향했다.

"나는 일전에 자네에게 세 가지를 부탁했네."

초력은 이마를 흐르는 땀을 닦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첫째는 내 오랜 친구인 조양홍을 해친 흉수를

찾아오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귀왕곡에 사람을 보내

사마표향을 데려오라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철력파를

조용하게 만들라는 것이었네."

"......."

"자네는 십대고수중의 네 명과 장홍칠절을 요구했고

나는 자네의 요구대로 그들을 보내주었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자네와 십대고수중의 두 사람뿐이었고 나머지는

돌아오지 못했네. 그러면서 자네는 세 가지 일중 어느 한

가지도 달성하지 못했다고 말하는군."

초력의 커다란 어깨가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부르르

떨렸다.

"요...용서하십시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초력. 이건 용서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야.

아직도 그걸 모르겠나?"

그 낭랑한 웃음소리를 듣자 초력은 더욱 몸을 움츠려

들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따져봐야

한단 말일세. 자네의 문제는 오직 하나야. 상대가

누구인지 제대로 파악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지."

"아...알고 있습니다."

초력의 말에 그는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다고? 상대가 누구인지 자네가 알고 있단

말인가?"

초력은 식은 땀을 훔치며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 자는 요즘 강호에 새로이 나타난 냉혈무정이라는

인물로 아무도 그 진실한 내력을 모르는 ..."

"그자의 본명은 노독행일세."

그의 조용한 음성에 초력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봄바람같은 훈훈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계속했다.

"나이는 스물 다섯. 과거 철각령 일대에서 기반을 잡고

있던 노가살수문의 유일한 생존자지."

초력은 몸을 떤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팔년 전에 그 자에 대한 처리를 영호명에게

맡겼는데 영호명은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했네. 그래서

지금 이와같은 일이 벌어진걸세."

초력은 고개를 떨군 채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냉혈무정은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신비의 고수였다.

냉혈무정이란 이름 자체가 퍼지기 시작한 것도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그가 어찌

냉혈무정에 대해서 그토록 자세하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초력은 새삼 그에 대해서 경의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그 무한한 능력에 대해서...

그는 다시 차를 한 모금 들이킨 후 말을 이었다.

"당시 영호명이 마무리짓지 못했던 일을 자네에게

맡기려고 하는데 자네의 의향은 어떤가?"

초력은 이 말에 고개를 번쩍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자신도 모르게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마...맡겨 주십시오."

그는 담담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자신이 있나?"

초력은 자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그 자의 숨통을 끊어 놓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수당(黑水堂)을 데려가게. 그들이라면 이번 일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거야."

초력의 얼굴에 환한 빛이 떠올랐다.

흑수당을 동원한다면 냉혈무정이 제 아무리 무서운

고수라 해도 그 자를 해치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초력은 두 번 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찻잔을 기울였다.

초력은 눈치를 채고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절을 한 후

공손한 모습으로 물러갔다.

탁!

초력이 조심스레 문을 닫고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는

천천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잠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입이 조용하게

열렸다.

"백리독(百里獨)."

그의 음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텅빈 허공에서 하나의

인영이 그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눈부신 백의를 걸친 중년인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백의중년인은 비단 옷 뿐만 아니라 머리마저 새햐얀

백발이었다. 피부도 유달리 창백했고, 얼굴은 마치 분을

바른 것처럼 하 다.

그야말로 전신이 눈처럼 새하얀 인물이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백의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사마표향과 철력파에 관한 일은 자네가 처리해

줘야겠네."

백의중년인은 머리를 조아렸다.

"알겠습니다."

"사마표향이 귀왕곡을 벗어났다면 필시 태원으로

철력파를 찾아가려고 할거야. 그러니 지금 곧 태원으로

가게."

"명심하겠습니다."

"고현(古玄)과 묘선고(妙仙姑)를 데려가게."

"감사합니다."

백의중년인은 다시 한 번 사의를 표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를 올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둘째가 그 자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초력은 돌아오지 못할거야."

백의중년인은 그 말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안색이

가볍게 굳어졌다.

"그럼...그 자의 상대가 될 수 없단 말씀입니까?"

"노독행은 귀왕곡에서 전충과 장문귀, 영호명을 죽였네.

그 정도 실력이면 초력이 흑수당과 힘을 합친다 해도 결코

당해낼 수 없을걸세."

"아시면서도 그를...."

그의 음성은 물흐르듯 고요했다.

"초력은 맡긴 일을 완수하지 못했어.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겠지."

백의중년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등골을 타고 식은 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의 일처리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결코 단 한 번의 사소한 실수도 용서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전혀 그런 점을 내색하지 않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백의중년인은 새삼 각오를 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만약 이번에 태원으로 가는 일이 성공하지

않는다면 초력과 같은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백의중년인은 단정한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는 그를

경의와 공포에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사람을 적으로 삼는 다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냉혈무정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의 상대는 천하에서 가장 똑똑하며 가장 무서운

인물인 것이다.

그의 이름은 마효 조향령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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