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26화 (27/61)

제 26 장   떠 나 갈 때 는   미 리   말 해 줘 요

1

권포사룡의 둘째는 혈룡(血龍) 황일파(黃日頗)였다.

황일파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노독행을 노려보았다.

"네 놈이 누구이든 상관없다. 대형을 죽인 이상 네 놈은

우리와 사생결단을 내야 한다."

노독행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황일파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삽시간에 장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황일파를 비롯한 권포사룡의 세 사람은 장검을 힘껏

잡은 채 무서운 눈으로 노독행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황일파였다.

"타앗!"

그는 날카로운 고함을 내지르며 노독행의 정면으로 몸을

던지다시피 날아왔다. 그와 함께 나머지 두사람의 몸이

황일파의 뒤로 바짝 붙어 다가왔다.

그들이 그런 자세로 날아오자 노독행의 눈에는 오직

가장 앞에서 날아오는 황일파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노독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황일파의 두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몸이 노독행의 지척으로 다가오는 순간,

파아앗!

그의 등뒤에서 두 줄기 섬광이 노독행의 양쪽

관자놀이를 노리고 쏘아져왔다.

황일파의 뒤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두 사람이 몸을

솟구치며 출수(出手)한 것이다.

그들의 이 합공법은 원래 일자산수파(一字散水波)라는

것으로, 여러 명이 일직선으로 달려오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동시에 다른 방향에서 공격을 해 들어오는 특이한

수법이었다. 시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위력이 뛰어났지만

너무 많은 인원은 행동상의 제약때문에 오히려 불편해서

보통 세 명 네지 네 명이 사용할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모양이 마치 일직선으로 날아오다가 물결이

퍼져나가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지금도 세 개의 검은 각기 노독행의 양쪽 관자놀이와

미간을 정면으로 노리고 들어왔다.

특히 양쪽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오는 검날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종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노독행의 얼굴이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양쪽 관자놀이로 날아드는 두 개의 검은 아예

무시한 채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황일파의 검 만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검이 막 그의 미간을 관통하려는 순간,

팍!

그의 오른손이 번개같이 앞으로 나가며 황일파의 검날을

약지와 검지의 두 손가락으로 움켜잡았다.

황일화가 미처 놀랄 겨를도 없이 노독행은 움켜쥔

황일파의 검을 앞으로 세차게 잡아 당기며 그 자리에 넙죽

주저앉았다.

그와 함께 참혹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크악!"

검에 끌려서 앞으로 당겨져 온 황일파의 몸이 노독행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날아든 두 개의 검날에 그대로

궤뚫리고 만 것이다.

권포사룡의 두 사람은 노독행의 몸이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황일파의 몸이 자신들의 검세속에 나타나자

대경실색하여 검을 거두려 했으나 너무도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검이 황일파의 몸을 관통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노독행은 앉은 자세에서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두 발을 동시에 위로 걷어찼다.

콰쾅!

주춤해 있던 권포사룡의 나머지 두 사람은 정통으로

아래턱을 강타당하고 말았다.

"아악!"

합창하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지며 그들의 몸이 이 장여

밖으로 튕겨지듯 날아갔다.

쿵!

선상의 나무갑판위에 쳐박힌 그들의 몸은 몇 차례의

경련을 일으키다가 그대로 늘어지고 말았다.

실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중인들은 무엇이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눈앞에 몇

개의 그림자가 희끗거린 직후에 권포사룡의 세 사람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방금전에 노독행이 쓴 수법은 금강십팔나법중의

신응나(神鷹拏)와 쌍비각(雙飛脚)이었다.

비교적 단순한 수법들이었지만 시기가 적절하게

들어맞아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권포사룡은 비록 최절정고수들은 아니었으나

포호산장에서도 일급의 무사들로 강호무림에 명성이

자자했었는데 너무도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중인들이 놀란 눈으로 노독행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다른

곳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져나왔다.

콰쾅!

폭음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커다란 배가 금시라도 뒤집힐

듯 세차게 기우뚱거렸다.

"아앗?"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당황하는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중인들은 황급히 폭음이 터져나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의 갑판은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

배 밑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부서진 갑판의 한쪽에

하나의 인영이 길게 누워 있었다.

"외할아버지!"

모용추수는 그 인영을 보자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그쪽으로 달려갔다.

앞가슴을 온통 피로 물들인 채 부서진 갑판에 반쯤

걸쳐진 채로 쓰러져 있는 인영은 다름아닌 상관홍이었던

것이다.

상관홍의 앞가슴에는 검은 손도장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양 옆구리에는 호두알만한 크기의 거무틱틱한

철환이 깊숙히 박혀 있었다.

저일비와 갈홍립도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했다.

저일비는 오른쪽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허리를 반쯤 숙인

채 오른쪽 옆구리를 부둥켜 안고 있었고, 갈홍립은 왼쪽

소매가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승자(勝者)만이 가질 수 있는

득의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할아버지..."

모용추수는 상관홍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붙잡았다.

"우웩!"

상관홍은 한바탕 시커먼 피를 토해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옷자락이 시뻘건 피로 물들었으나

그녀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옷소매로 상관홍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상관홍의 눈이 힘없이 떠졌다.

슬픈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모용추수의

얼굴이 보이자 상관홍은 힘없이 웃었다.

"수...수아야...미안하구나..이 할애비는 최선을

다했다만 너를 더 이상 지켜주지 못하겠구나..."

"할아버지..."

모용추수의 눈가에 처연한 빛이 감돌았다.

상관홍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요...용기를 잃지 마라...어..언젠가는 너도 행복을

찾게 되겠지..."

"할아버지... 죄송해요."

그녀는 꺼져가는 상관홍의 눈을 보면서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무림에서 은거한 채 평화롭게 살고 있는 상관홍이 이런

꼴로 변한 것은 결국 자신이 그를 찾아갔기 때문이

아닌가?

상관홍은 음성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너를 만나 즐거웠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모용추수의 눈가에 마침내 수정같이 맑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미녀의 눈물은 사나이의 가슴을 울린다고 했던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흐르자 중인들은

말못할 분위기에 젖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저일비였다.

"작은 마님. 더 이상 일을 확대시키지 말고 이제는 그만

산장으로 돌아갑시다."

이어 그의 갈쿠리같은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왔다.

막 그의 손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움켜쥐려는 순간,

"그녀에게서 손을 떼고 물러나."

하나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일비의 눈가에 스산한 살기가 감돌며 그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중인들의 틈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천천히 노독행이

걸어나왔다.

저일비는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돌아섰다.

"웬놈이냐?"

그는 조금전에 상관홍과 싸우는데 온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이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미처 알지

못했다.

노독행은 말없이 다가왔다.

저일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특히 그의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을 보자 저일비의

가슴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보통 놈이 아니군. 어디서 이런 괴상한 놈이

나타났지?'

저일비는 노독행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가오자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이 놈이?'

그러다가 문득 그의 시선이 노독행의 왼쪽 검은 안대에

고정되었다.

저일비의 눈에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네 놈은 혹시 요즘 강호를 떨게 만든다는 냉혈무정이

아니냐?"

노독행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없이 계속 걸어왔다.

저일비의 안색이 조금씩 변했다.

노독행이 계속 다가옴에 따라 그의 몸에서 가공할

기세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 기세는 그가 다가올수록 점점 더 강해져서 이대로

있다가는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이

분명했다.

갈홍립도 그것을 느꼈는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노독행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저일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 노성을 지르며

노독행을 향해 양 손을 휘둘렀다.

"미친 놈! 정말 겁없이 날뛰는구나!"

그의 양손은 어느 새 거무틱틱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꽈르릉!

뇌성벽력이 치는 듯한 음향과 함께 먹물같은

장세(掌勢)가 노도처럼 노독행의 앞가슴을 향해서 몰아쳐

갔다.

저일비의 이 장공은 흑살장(黑殺掌)이라는 것으로

마도(魔道)의 칠대장력(七大掌力)중 하나였다.

저일비는 이 흑살장을 연마하기 위해서 서장(西藏)의

깊숙한 오지에서 십 여년을 고심참담해야 했다. 이것은

장력속에 특이한 한기(寒氣)를 담고 있어서 설사 장력을

막아낸다 할지라도 어느 사이엔가 한기의 침입을 당해

심맥(心脈)이 잘라지고 마는 것이다.

노독행의 다가오던 몸이 점차 빨라지더니 나중에는

하나의 검은 선이 되어 저일비가 뿜어낸 흑살장의

장세속으로 뛰어들었다.

콰쾅!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배가 마구 뒤흔들렸다.

"큭!"

사방이 온통 경기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가운데 짤막한

신음성 하나가 흘러나왔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물러난 사람은 놀랍게도

저일비였다.

"모...몸뚱어리가 이렇게 단단하다니..."

그는 노독행이 자신의 흑살장을 맨 몸으로 받아낸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나 그가 놀란 마음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흑살장을

어깨로 받아냈던 노독행의 몸이 그 여세를 몰아 그의

눈앞으로 바짝 다가들고 있었다.

저일비는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 채 황급히 몸을

옆으로 이동하며 번개같이 손을 열 두번이나 거푸

휘둘렀다.

파파파팍!

주위가 온통 그의 검은 손그림자로 뒤덮혀 버렸다.

이것은 저일비가 회심의 절기로 생각하는

십이마영참(十二魔影斬)이라는 것으로, 열 두개의

환영(幻影)을 만들어 상대의 눈을 현혹시킨 다음 그중

하나에 흑살장의 공력을 담아 상대를 격살시키는

수법이었다.

열 두개의 환영이 육안(肉眼)으로는 구분할 수 없을만큼

똑같기 때문에 제아무리 안력이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어느 것이 진짜 흑살장의 공력이 담긴 손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쓰러지기 일쑤였다.

노독행은 자신의 코앞으로 닥쳐오는 열 두 개의

손그림자를 보면서도 덮쳐오던 몸을 조금도 늦추지 않은

채 주먹을 앞으로 곧장 내뻗었다.

쾌액!

그의 주먹은 열 두개의 수영(手影)중 왼쪽에서 두

번째의 것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딱!

무언가가 부러지는 듯한 음향이 들리며 저일비가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 채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노독행의 주먹이 열 두개의 환영중에서 정확하게 진짜를

찾아내어 손등을 가격했던 것이다.

노독행의 주먹에 격중당한 손등뼈가 부러져 손이 금세

퉁퉁 부어 올랐다.

하나 고통을 느끼고 있을 사이도 없이 노독행의 몸은

그의 가슴앞으로 바짝 다가들며 팔꿈치를 수평으로

쓸어오고 있었다.

저일비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뒤로 다섯 걸음이나

정신없이 후퇴했다.

하나 그때 수평으로 휘둘러왔던 노독행의 팔꿈치가

방향을 바꾸어 곧장 직선으로 날아들었다.

아무리 저일비의 뒤로 물러나는 속도가 빠르다고 해도

무섭게 돌진해오는 노독행의 몸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직선으로 내밀어진 팔꿈치는 더욱 빨랐다.

저일비의 가슴이 노독행의 팔꿈치에 그대로 강타당할

순간,

쾌애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무언가 시커먼 것이 무서운

속도로 노독행의 뒤통수를 향해 쏘아져왔다.

지켜보고 있던 갈홍립이 드디어 출수를 한 것이다.

갈홍립의 철환(鐵丸)을 튕겨내는 솜씨는 그야말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두 개의

쇠구슬이 두 가닥 뇌전(雷電)마냥 날아들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쇠구슬은 쏘아져 오는 방위(方位)와 시차(時差)가

미묘해서 설사 하나를 피할 수 있다 해도 다른 하나에는

반드시 격중당하게 되어 있었다.

노독행은 자신의 뒤통수로 두 개의 쇠구슬이 날아들고

있는 것을 알았을텐데도 몸을 돌리거나 피하지 않고 계속

저일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쾅!

마침내 노독행의 팔꿈치가 저일비의 명치끝에 정통으로

처박혔다.

"훅!"

저일비는 괴상한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반으로 푹

꺾었다.

그 순간 노독행은 저일비의 명치에 팔꿈치를 꽂은 채로

손목을 돌려 저일비의 숙여지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와 함께 그의 몸이 저일비의 몸과 반대로 교차되었다.

파팍!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던 두 개의 쇠구슬은 그대로

저일비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저일비는 입을 딱 벌린 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입과 귀, 눈에서 시커먼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제서야 붙잡았던 그의 머리를 놓았다.

저일비는 몇 번 몸을 비틀거리다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쿵!

쓰러진 그의 뒷머리는 두개골이 완전히 함몰되어 두

개의 쇠구슬이 머리속에 깊숙히 틀어박힌 끔찍한

모습이었다.

갈홍립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안면에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킨 채 망연자실 서 있었다.

그의 철환은 아직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는 노독행이 저일비와 겨루는 사이에 완벽한

빈틈을 노려 출수를 했다.

그는 철환을 날릴 때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고, 철환이

거의 노독행의 뒤통수에 닿을 때까지도 그가 피할 생각을

하지 않자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새 그의 몸이 저일비와 위치가 뒤바뀌어져

오히려 저일비가 쓰러지고 만 것이다.

노독행이 달려들던 자세에서는 절대로 저일비와 위치를

바꿀 수 없었다. 저일비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몸이

바뀌도록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하나 노독행의 팔꿈치가 가슴에 틀어박히자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머리가 앞으로 숙여졌고, 노독행은

숙여진 머리를 붙잡고 그의 몸을  끌어당기며 그 탄력을

이용해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던 것이다.

설명은 간단하지만 그 짧은 생사(生死)의 순간에 상대의

반응까지 모두 계산하여 오히려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노독행의 솜씨에는 갈홍립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치밀한 심계와 날렵한 동작, 그리고 주저움없이

실행하는 결단력은 강호경험이 풍부한 갈홍립으로서도

일찌기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갈홍립이 경악에 잠겨 있을 때 노독행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2

노독행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나 그 미소를 보자 갈홍립은 소름이 쭈욱 끼쳤다.

"멋진 솜씨였다고 칭찬을 해주지."

갈홍립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미소를 보고 그 음성을 듣자 도저히 냉정을 되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갈홍립같이 암기를 사용하는 고수들에게는 마음의

평정(平靜)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마음이 흔들리면

상대의 빈틈을 발견할 수가 없고, 손끝이 떨려서 제대로

암기를 발출할 수가 없게 된다.

갈홍립은 아무리 두려운 적수를 만나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몸을 떨거나 마음의 평정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예외였다.

이 자는 지금까지 그가 만났던 인물들과는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이런 눈을 가진 자가 존재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옥에서나 볼 수 있는 눈이 아닌가?

자신이 이런 자를 향해서 철환을 던졌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노독행의 눈은 그에게 한 번 더 솜씨를 부려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나 갈홍립은 알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철환을 던지면 그땐 죽는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의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갈홍립은 그럴 수만

있으면 그러고 싶었다.

이대로 발길을 돌려 영원히 어디론가로 떠나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괴물같은 자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 발길을 돌리는 대신에 갈홍립은 노독행의 앞으로

달려들며 다섯 손가락을 튕겼다.

타타탁!

다섯 개의 철환이 눈부신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날아갔다.

그 다섯 개의 철환에는 갈홍립의 모든 것이 담아져

있었다.

그의 필생(必生)의 땀과 눈물, 그리고 염원이 담겨

있었다.

오선제탄(五線齊彈)은 암기를 사용하는 모든 고수들의

꿈이었다.

그것을 익히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수많은

나날을 씨름했는지 모른다.

갈홍립 조차도 칠 년동안의 남모르는 각고(刻苦)끝에

얼마전에야 비로소 오선제탄을 완성할 수 있었다.

왜 이 순간에 노독행을 향해서 오선제탄을 펼쳤는지는

갈홍립 자신도 정확히 몰랐다.

아마 무인(武人)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평생을 비겁자로 낙인찍혀 보내느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무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게

아니었을까?

갈홍립이 어떻게 생각했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선제탄은 빨랐지만 노독행의 몸은 더욱 빨랐다.

따땅!

힘을 잃고 떨어지는 다섯 개의 철환.

그리고 번뜩이는 도광 하나!

갈홍립은 천천히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아랫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그어진 채 한

방울씩 선혈을 흘러내고 있었다.

갈홍립의 고개가 천천히 쳐들어졌다.

노독행은 언제 뽑아들었는지 왼손에 장난감처럼 작은 칼

하나를 쥐어 들고 있었다.

뚝!

칼끝으로 떨어지는 핏방울 하나...

갈홍립은 그 핏방울을 바라보다가 노독행을 보며

물었다.

"어땠나?"

노독행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멋진 오선제탄이었어."

갈홍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그랬지?

그는 자신의 아랫배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었다.

"언제고 한 번은 꼭 써보고 싶었어...정말 후회없이

사용해 보고 싶었다구..."

말을 하면서 그의 무릎이 조금씩 꺽여지기 시작했다.

갈홍립은 서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몸이 거의 닿을 때까지도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난 최고의 솜씨를 가졌다구..."

갈홍립은 입가에 미소를 남기고 죽었다.

죽는 순간에도 그는 흐뭇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바를 보여 주었으며,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도 자신의 솜씨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는 떳떳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무인(武人)으로서 이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지하에서도 그는 가슴을 활짝 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분하의 푸른 물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두 개의

자그마한 무덤이 새로 생겨났다.

모용추수는 그 무덤앞에 하염없이 서 있었다.

그 무덤은 상관홍과 서문정의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은 이 삭막한 세상에서 오직 유일하게 그녀를

이해해주고 아껴주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있으므로서 그녀는 그나마 삶의 의지(意志)같은

것이 있었다.

하나 이제 그들은 모두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 몰랐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몰랐다.

노독행은 무덤이 멀지 않은 나무등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그녀를 바라다 보았다.

그녀를 구해주었으므로 그도 이제 지하에 있는

서문정이나 형에게 미안할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대로 그냥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선뜻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무언가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 보려고 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무언가가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곁에 있으면 그의 행로(行路)에 막대한 지장을

줄게 뻔했다.

무엇보다도 그녀와 그는 본질적인 남남이었다. 그가

그녀의 일에 개입할 필요도 없고, 그녀가 그의 일속에

뛰어들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가 마음을 결정하고 몸을 돌리려 할 때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도 그가 떠나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표정은 쓸쓸했다.

하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까닥거린 채 잘가라는 눈인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왠지 모르지만 더 이상 그 슬픈 눈망울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뒤로 아직도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노독행은 그것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한 발 두 발 발걸음을 떼면서 생각했다.

결국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다.

무림에 퍼진 나에 대한 소문은 나를 정확하게 꼬집은

것이다.

한낮 여인의 눈물 따위로는 마음이 흔들리거나 하지

않는 냉혈무정의 사나이인 것이다.

세 발자국을 떼었을 때 그녀의 탄식소리가 들렸다.

다섯 발자국을 옮겼을 때 그녀의 치마가 땅위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걷고 있다. 어디로...?

아홉 발자국인가를 걸었을 때 그녀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귓전에 들려왔다.

무언가 입속으로 속삭이는 듯한 기도같은 것이었다.

이제 두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모퉁이를 돌아 영원히

그녀에게서 떠날 수 있다.

그녀 따위는 깨끗하게 뇌리에서 지우고 다시 하고자

하는 일에 전념할 수가 있다.

나는 자유(自由)다!

그때 그녀의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그의

몸은 뒤로 돌아 온 길을 되돌아 달려가고 있었다.

제기랄...빌어먹을....

나에게 아직도 감정같은 것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노독행은 조금전에 그녀가 서 있던 곳을 지나 언덕뒤로

날아갔다.

분하의 강물이 빤히 내려다 보이는 벼랑이 나타났다.

그곳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나 노독행의

몸은 주저없이 그 벼랑 너머로 날아가고 있었다.

있었다.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채 벼랑 아래의 시퍼런

강물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치맛자락이 세차게 펄럭이는 광경이 푸른

강물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시야에 쏘아져 들어왔다.

노독행은 천근추(千斤錘)공력을 사용하여 몸을 무겁게

했다.

쉬익!

그의 몸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그는 공간을 압축해 자신보다 먼저 떨어져

내린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노독행이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잡는 순간 그들의 몸은

거의 강물 바로 위에  떠 있었다.

노독행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을 때 그들의 몸은 강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풍덩!

차가운 물의 촉감이 채 느껴지기도 전에 숨이 막혀

왔다.

너무도 빨리 물속으로 떨어졌기 때문인지 노독행은

전신이 얼얼해왔다.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그의 몸으로도

한 사람을 안은 채 천근의 무게로 물속에 쳐박힌 것은

상당한 충격을 느끼게 했다.

하나 곧 그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안은 채 위로

올라갔다.

파아!

물밖으로 나오자 파란 하늘이 눈을 찔렀다.

노독행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의식을 잃었는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이렇게 그녀를 안아보는 것도 벌써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자신의 가슴에 닿아 있는

그녀의 몸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노독행은 더 이상 그녀를 내려보지 않고 강가로

헤엄쳐갔다.

강변에 도착해서 땅위로 올라올 때까지도 그녀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물밖으로 걸어나온 노독행은 그녀를 근처의

모래사장위에 내려놓았다.

전신이 흠뻑 젖은 채 축 늘어져 있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노독행은 자신도 그녀처럼 젖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길다란 속눈썹 아래 고여있는 저 이슬같은 물방울은

눈물일까? 아니면 그저 강물이 고인 것일까?

노독행은 고독하고 외로운 젊은이였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만은 분명히

그랬다.

그는 이때만큼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때만큼 자기 자신이 외롭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슬프고 아릿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녀가 깨어나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노독행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뺨을 만져볼 뻔 했다.

유리처럼 투명한 그 뺨이 너무도 애처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녀가 눈을 떴고, 노독행은 반쯤 내밀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 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은 왜 그렇게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는지...

그녀는 하염없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보며 소곤거렸다.

"항상 눈을 뜨면 당신의 얼굴이 보이는군요."

너무도 나직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무시해 버릴 수도 있었는데 노독행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녀의 눈가에 금시라도 떨어질 듯 고여있는

물방울이 흘러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것은 단지 그의 핑계에 불과한 것일까?

노독행은 조용하게 말했다.

"어리석은 짓을 했어."

목이 무언가에 잠긴 것 같은 음성이었다.

그녀는 그 음성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창백한 입술을

살짝 열었다.

열려진 입술 사이로 살짝 내비치는 하얀 이빨이 유달리

시선을 끌었다.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나에게는 다른 길이 없어요..."

노독행은 물끄머리 그녀를 내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길은 항상 있지. 단지 가볼 생각을 못하고 있을

뿐이야."

그녀는 빤히 그를 올려다 보았다.

한참동안이나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보기만 해도 두려워하는데 그녀는

전혀 그런 빛이 없었다.

홀연듯 노독행은 그녀의 눈에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하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에도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보일까?

그러면 어떻고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자신이 언제 그런 것에 신경을 쓴 적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왜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그녀의 창백한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쓸쓸하고 처연(凄然)한 미소였다.

"더 이상 가볼 용기가 없어요...혼자서는..."

그녀의 입술은 파리했다. 한 점 핏기도 없이 파리한 그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추위때문인가...외로움때문인가....

아니면 두려움?

노독행은 '혼자' 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도 항상 혼자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과 같이 있어도 그는 항상 고독해 왔으며,

철저하게 혼자가 된 지금도 역시 고독했다.

고독(孤獨)이라는 놈은 소리도 없이 슬금슬금 다가와서

어느 사이엔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어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노독행의 지금까지의 삶은 고독과의 끝없는

투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것인가?

그녀는 계속 몸을 떨었다.

그제서야 노독행은 그녀의 몸이 흠뻑 젖었으며 날이

이미 어두워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가 떨어지는 저녁의 강바람은 제법 오슬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몸을 녹일 곳을 찾아야겠어."

그가 일어나라는 뜻으로 말했으나 그녀는 누운 채

힘없이 웃었다.

"미안해요...나는 더 움직이지 못하겠어요."

거듭된 충격으로 그녀는 이미 완전히 탈진(脫盡)해 버린

모양이었다.

노독행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노독행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어 보였다.

노독행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는 양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노독행이 그녀의 몸을 안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녀의 눈가에 아직까지도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그제서야 주르르 흘러 내렸다.

이제서야 겨우 그녀는 혼자가 아니게 된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3

그녀는 계속 아팠다.

머리가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열이 몸 전체로 퍼져

있었다.

이곳은 분하의 강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고 허름한 객점의 후원이었다.

이곳에 올 때부터 그녀의 몸이 이상하더니 침대에

눕자마자 몸이 계속 뜨거워졌다.

그녀는 꼬박 하루 반나절을 앓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워

있었다.

그녀는 불현듯 두려워졌다.

"당신...거기 있나요?"

그녀는 조그맣게 소곤거렸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아직도

전신이 나른나른하고 눈이 가물가물해서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떨구어졌다.

'가버렸구나....'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또 다시 혼자가 되고 말았다는 외로움이 그녀의 가슴을

비수처럼 후비고 지나갔다.

그때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일 아침이면 일어날 수 있을거야."

나직한 음성이었으나 그녀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그녀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있었다.

희무끄레한 어둠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검은 안대와 얼굴을 보자 그녀의 눈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신...가지 않았군요."

그녀는 가슴이 벅차서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노독행의 음성은 여전히 차가웠다.

"우는 여자는 질색이야."

그녀는 급히 눈물을 훔쳤다.

하나 이내 배시시 웃었다.

"겁이 났어요."

살짝 웃었을 뿐인데도 어두운 방안이 온통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당신이 말도 없이 가버렸는 줄 알고...다시 혼자가 된

줄 알았어요..."

그녀의 음성은 점차 나직해지더니 마지막 말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하나 노독행은 똑똑이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음성은 너무나 차가워서 무뚝뚝하기 조차 했다.

"말도 없이 가지는 않아."

그녀는 다시 웃었다.

안심했다는 미소였다.

마음이 놓이자 다시 피로가 강물처럼 쏟아지며 두 눈이

감겨왔다.

그녀의 눈까풀이 조금씩 내려왔다.

잠이 들기 직전 그녀는 노독행을 향해 말했다.

"나는 아직 당신 이름도 몰라요."

노독행은 졸음이 반쯤 찾아온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독행."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독행...좋은 이름이군요.

외롭고...쓸쓸하고...감미롭고..."

그녀의 음성이 점차 잦아들며 눈까풀이 감겼다.

잠이 들었을 때 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잠이 깼다.

꿈을 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깊은 잠속에서 일어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어디더라...?'

주위는 괴괴한 어둠속에 잠겨 있었다.

낯선 방이었고, 낯선 침대였다.

한동안 그녀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리고 잠시후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짙은 어둠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을 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조그맣게 불렀다.

"독행....?"

어둠속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 있어."

노독행의 차가운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그 얼굴을 보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안심했어요."

노독행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안심했다는 그녀의 음성을 듣자 그는 불현듯 한 사람이

생각났다.

그자도 그녀처럼 자신에게 거듭 묻고는 했었다.

- 우리는 친구지?

몇 번이나 그것을 확인하려고 했다.

노독행이 그렇다고 하자 그때 그의 입가에도 지금

그녀처럼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한 마디.

- 안심했어.

그들은 무엇이 그토록 불안한 것일까?

매 순간마다 확인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그들을

다그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은 왜 자신에게 그토록 기대려 하는 것일까?

노독행이 물끄러미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자 그녀의

얼굴에 엷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까 당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이름을 불렀어요.

미안해요."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상관없어."

그녀는 다시 웃었다.

그녀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어린 소녀같은

천진한 웃음이었다.

"아직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죠? 나는 모용추수에요."

노독행의 음성은 변함이 없었다.

"알고 있어."

노독행은 물론 알고 있었다.

- 강남의 연꽃은 피다가 말았으나 보는 사람은 모두

취하고 만다...

강남취련(江南醉蓮) 모용추수(慕容秋水)는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중 하나였다.

그녀와 사마표향을 일컬어 남련북향(南蓮北香)이라고

하여 절대쌍염(絶代雙艶)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꺾여진 꽃...

그녀를 이야기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강남의 유명한 가문(家門)인

모용세가(慕容世家)의 천금(千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모용태릉(慕容太凌)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녀의 나이가 열 네 살이 되었을 때 모용태릉은 그녀를

포호산장으로 시집보냈다.

이유는 단 하나, 포호산장의 막강한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녀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기 때문에 포호산장에서의

하루하루는 그녀에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포호산장의 소장주(小莊主)였으나

실권(實權)은 전혀 없는 무능력한 인물이었다. 포호산장의

모든 것은 장주(莊主)이며 그녀의 시아버지인

'노주인'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조차 '노주인'의 부속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의 절대적인 권위앞에는 누구도 대항하거나 거역할

생각을 말아야 했다.

그녀는 그것이 싫었다.

아무런 속박도 받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포호산장에서

나름대로의 꿈을 펼치려고 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힘도,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남편처럼....

그런 일이 십 년동안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한창 꽃필 나이의 그녀가 점차 시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녀

자신도 자기가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이상은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이 새장속에 갇힌 한 마리 새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꼈다.

그녀가 불만에 빠지면 빠질수록 그녀에게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나중에는 외출조차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고, 그녀는 대화할

상대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녀는 죽음을 생각했다.

죽어서라도 이 지옥같은 사슬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마 그때 서문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라도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을 것이다.

서문정은 포호산자의 총관인 귀견수(鬼見愁)

허잔양(許殘陽)의 먼 친척뻘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포호산장에 곧잘 놀러 왔으며 그녀의 남편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녀가 자살을 결심하고 남몰래 독약을 구하고 있을 때

서문정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문정은 그녀의 고민을 알고 그녀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녀의 남편도 해주지 못한 일을

서문정은 해주었다.

그녀는 그때만큼 기뻤던 적이 없었다.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자신의 어려움을 같이

고민해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하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녀가 서문정과 몇 차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목격되어 산장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즉시 '노주인'에게서 불호령이 떨어졌고 서문정은

축객령(逐客令)을 받고 산장을 떠나야 했다.

그때 그녀는 절망했다.

일생에 있어 유일하게 찾아온 기쁨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가 떠난다면 누가 있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줄 것인가? 이제 누가 또 다시 그녀를 이해해주고

그녀와 같이 고민하고 그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단

말인가?

서문정이 작별인사를 하러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그가 거절하면 그녀는 자살할

생각이었다.

서문정은 그녀의 결심을 눈치채고 깊은 고민을 했다. 그

일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하나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마저 그녀를 저버린다면 그녀가 어찌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녀를 위해서...그 불행한 여인을 위해서 그는 기꺼이

자신의 한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녀를 시비로 변장시켜 산장을 나오는 자신의

일행속에 숨겨 놓았다.

어느 누구도 감히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수월하게 산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무서운 추격이 시작되었다.

산장이 발칵 뒤집혔고, 노주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서문정을 향해 추살령(追殺令)을 내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고 있는 것 같았다.

한달동안 그들은 오 천리를 도망쳤고 마침내 막다른

구석에 몰리게 되었다.

그때 그들을 구해준 것이 노독행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흐르고 결국은 서문정도 죽게

되었다.

그는 결코 그렇게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는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천하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혈육인 외할아버지조차 비명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라고는 이 애꾸눈의

비정한 사나이 뿐이었다.

강제로 그를 붙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그의 길이 있고, 그녀에게는 그녀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의 길은 여러 갈래이겠지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마저 그녀에게서 떠난다면 그녀에게는 오직 한 가지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길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알고, 그도 알고 있었다.

한동안 두 사람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한참후에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줘요."

노독행은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노독행을 올려보는 그녀의 눈빛은 영롱하리만치 맑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떠나갈 때는 꼭 미리 말해줘요. 당신을 찾지 않도록."

노독행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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