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27화 (28/61)

제 27 장    만 약   그 렇 다 면   볼 만 할 거 야

1

태원(太原).

태원은 산서성의 성도였다. 옛이름은 양곡(陽曲).

분하(汾河)의 상류에 있는 천연의 요새지로 예로부터

중요시되어 왔다.

춘추시대에는 진양(晋陽)으로 불리워지기도 했고,

성내에 진사(晋祠), 쌍탑사(雙塔寺), 낭자관(娘子關)등의

명승지가 많이 있었다.

봄날.

태원의 거리는 화사하기만 했다.

거리는 산지사방에서 모여드는 객상(客商)과 유람객들로

붐비었고, 길 양옆의 주루와 찻집, 점포는 번잡하고

호화롭기 그지 없었다.

취선거(醉仙居).

취선거는 태원의 남쪽에 자리한 유명한 주루였다.

정오무렵.

따사로운 한낮의 햇살을 맞으며 취선거로 들어서는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그는 질좋은 금의를 입고 풍채가 좋은 중년인이었다.

금의중년인은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지은 채 취선거안을

둘러보았다.

점심때인지라 주루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금의중년인은 빈자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한 곳에 발견하고는 그리로 다가갔다.

그곳은 창가에 면한 자리라서 그곳에 앉자 창밖으로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때마침 따뜻한 봄바람이 창문너머로 불어오자

금의중년인은 느긋하니 봄바람을 맞으며 춘색(春色)에

잠긴 태원의 거리를 내려다 보았다.

'춘풍춘수일시래(春風春水一時來)라고 하더니 어느 새

사방에 봄기운이 완연하군.'

금의중년인은 나직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봄날의

정취에 잠겨 있었다.

그때 다시 주루안으로 몇 명의 인물들이 들어왔다.

들어온 인물들을 보자 금의중년인의 얼굴에 흥미어린

빛이 떠올랐다.

그들의 행색이 몹시도 기이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였다.

남자는 앙상하게 마른데다 키가 엄청나게 컸고, 반대로

여자는 작고 뚱뚱했다.

남자는 이목구비는 그런데로 준수한 편인데 너무 말라서

보기만 해도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눈빛이

얼마나 싸늘한지 그와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려는 사람이

없었다.

여자도 뚱뚱했지만 얼굴은 예쁘고 귀염성이 있어

보였다.

눈썹이 반달처럼 구부러졌고 두 눈가에는 요염한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 미소를 보기만 해도 왠지 가슴이 짜릿해지는 것이

달려가서 한 번 안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앙상하게 마른 남자의 옆에 찰싹 딸라붙어서

걷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모습이 한층 더

대비가 되어 보였다.

두 사람이 앉은 곳은 마침 금의중년인과 마주보는

자리였다.

여자는 금의중년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러자 말할 수 없는 교태가 흘러 넘쳤다.

금의중년인은 괜히 움찔해져서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칫하다가 그 옆의 남자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무언가

성가신 일이 벌어질게 분명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고

한 모양이었다.

쿵! 쿵!

때마침 층계를 올라오는 소리와 함께 주루의 입구에

다시 두 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주루에 있던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에게로 향했다.

이번에 올라온 사람들은 일노일소(一老一少)였다.

꾀죄죄한 황삼을 걸치고 연신 곰방대를 빨고 있는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과 이제 갓 열일곱살 쯤 되었을

아리따운 청의소녀였다.

황삼노인이 입고 있는 옷은 여기저기가 더덕더덕

기운데다 너무나 세탁을 많이해서인지 이미 허옇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머리는 새하얀 백발이고, 얼굴에는 크고

작은 주름이 가득 뒤덮혀 있었다.

청의소녀는 피부가 옥(玉)처럼 고왔고, 두 눈이 유달리

크고 반짝거려 총명스러워 보였다.

탐스런 흑발에는 녹백색(綠白色)의 수유(茱萸) 한

송이를 꽂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의 사랑스러운 용모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두 조손(祖孫)은 의자에 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주루의

중앙으로 가서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보아하니 그들은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만담(漫談)이나 강호의 소식들을 전해주며 벌어먹고 사는

소리꾼들인 모양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조손을

바라보았다.

과연, 중인들의 이목이 자신들에게로 집중되었음을

확인하자 청의소녀는 생긋 웃으며 황삼노인을 향해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주실래요?"

그녀의 음성은 얼굴에 떠오른 미소만큼이나 달콤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청량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황삼노인은 몇 번 더 곰방대를 빨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허험...환아(環兒)야! 너는 혹시 무쌍류(無雙流)라는

문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청의소녀, 환아는 귀여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할아버지. 그건 혹시 백 여 년전에 절전된 것으로

알려진 신비의 문파가 아닌가요?"

황삼노인은 그런 환아의 모습이 사랑스러운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다. 바로 천 년동안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는 전설의 문파다. 너는 무쌍류가 왜

그렇게 강했는지 알고 있느냐?"

이것은 노인이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 위해서 물은 것이었다.

과연 환아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알려지기로는 그들은 철저한

실전주의(實戰主義) 무예만을 익힌다고 해요. 그들은 그

실전기술을 천 년동안 꾸준히 아랫 대(代)에 계승해서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실전에서는 아무도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고 알려졌잖아요?"

"잘 아는구나. 사실 그들이 그토록 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천 년동안 끊임없이 싸우며 터득한 기술들을

후대(後代)에 완벽하게 전수시켰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들의 무공 하나하나에는 천 년의 비법(秘法)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결코 파괴되지 않는 비법이..."

황삼노인은 곰방대를 탁탁 턴 다음 다시 품속에서

연초(煙草)를 꺼내 집어 넣었다.

"그런데 백 년전부터 강호에는 그들의 가공할

실전무예를 익힌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너는 그 이유도

알고 있느냐?"

이들이 서로 주고 받으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중인들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이들 조손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환아는 옥이 굴러가는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아마도 그들의 가공할 실전무예를 익힐 만한

인재가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를 배출하지 못한게

아닌가요?"

"바로 그렇다. 무쌍류의 실전무예는 그 위력만큼이나

익히기가 어려워서 매 세대마다 결코 한 사람씩 밖에는

익힌 사람이 없었다. 백 년전의 무쌍류는 연철산이란

사람이었는데 그는 천하를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으나 결국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북쪽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환아는 짐짓 혀를 찼다.

"천하는 넓고 인재들은 모래알처럼 많은데 그는 왜

후계자를 찾지 못했을까요?"

"허허...무쌍류의 무예는 그 위력만큼이나 익히기가

어려워서 후계자를 선정하는데도 까다롭기 그지 없다고

한다. 노부가 알기로는 무쌍류의 후계자가 되려면 세

가지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하더구나."

환아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 세 가지가 뭐지요?"

"첫째는 최고의 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두번째는

최고의 정신력이 있어야 한다."

"어렵군요. 세번째는요?"

"사실 세번째가 진짜로 어려운 것이다. 최고의 체력과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야 찾아보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번째 조건을 갖춘 자는 드넓은

천하에서도 좀처럼 찾을 수 없지."

환아는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요?"

중인들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황삼노인의 입을

주시했다.

황삼노인은 곰방대를 한 번 빤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환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죽음을 각오하다니요?"

황삼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허헛...말그대로다. 무쌍류의 무예를 익히려면

그야말로 생사(生死)의 고비를 수십, 수백번을 넘겨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무쌍류의 초창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죽었다고도 전해지고 있지. 그래서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들 각오가 없으면 걸코 후계자로

받지 않는다고 한다."

"아...정말 힘들군요."

"힘들지. 그렇지 않고서야 무쌍류의 무예가 그토록

강할리가 있겠느냐?"

환아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깝군요. 그 놀라운 무예가 익힐 사람이 없어서

사라지다니..."

황삼노인은 곰방대를 한 번 빨았다.

"아깝지. 연철산 이후로 강호무림에서는 두 번 다시

무쌍류의 무예를 본 사람이 없다."

환아는 귀여운 머리를 쫑긋거렸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에요?"

"그건 말이다. 요즘 강호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소문이라뇨?"

"강호에 무쌍류의 무예를 쓰는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지."

환아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황삼노인은 웃으며 그녀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허허...정말인지는 이 할애비도 모른다. 단지 그런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말이지."

그녀는 조금 들뜬 음성으로 조잘거렸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소문이 퍼질 리가

없잖아요."

황삼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거야 있지."

"그게 무언가요?"

"얼마전부터 강호에 몇 구의 처참한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시신들의 사인(死因)을 조사하던

강호의 명숙(名宿)들이 그 시신이 당한 흔적이 꼭

전설적인 무쌍류의 필살무예에 당한 흔적과 비슷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환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체의 사인만 보고도 그걸 알 수 있나요?"

"아암. 무쌍류의 필살무예는 그 위력이 가공스럽기

때문에 당한 사람은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거나 제대로 된

시신을 남기지 못한다. 특히 무쌍류의 무예는 거의가 다

맨손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알아보기가 수월하지."

"누가 그런 시체로 발견되었지요?"

"그것이 더욱 강호명숙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렇게 당한 자들이 하나같이 당금 무림의 정상을 달리는

절정고수들이었거든."

"그들이 누군데요?"

황삼노인은 주절주절 명호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포호산장의 칠대빈객중 하나인 새장자 단천성을

들 수 있지. 그 외에도 천상회의 고수인 혈기개천

목천파와 장홍칠절, 팔각신주 장문귀, 독시봉 전충,

귀왕곡주인 풍일립과 백매신 혁련광, 그리고 얼마전에

분하 강변에서 처참한 몰골로 발견된 흑수일겁 저일비

까지 수 십명에 달한다."

환아는 황삼노인의 입에서 나온 사람들의 면면을 듣고

입을 딱 벌렸다.

"아! 그런 고수들이 정말 모두 비명에 쓰러졌나요?"

"그렇지. 그 일 때문에 당금 무림이 온통 발칵

뒤집혀졌다."

환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눈을 반짝거렸다.

"혹시 그들을 살해한 인물은 요즘 강호를 떠들썩하게

한다는 그 냉혈무정이란 인물이 아닌가요?"

황삼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그 냉혈무정이란 인물이 바로 무쌍류의 후계자란

말인가요?"

황삼노인의 심원한 눈에 한 줄기 기이한 빛이 번뜩이고

지나갔다.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 오직 그 자 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환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왜...?"

황삼노인은 그녀를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왜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하지 않느냐고 물어보려는

것이지?"

그녀의 입가에도 배시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그걸 물어보려고 했어요."

"허허...너도 한 번 생각해 보아라. 그 냉혈무정이라는

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를

상대한 자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조리 참변을

당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냉혹한 인물인지 알 수

있지. 그런데 누가 감히 그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렇다면 그가 무쌍류의 후계자인지 아닌지는

결국 알 수 없게 되잖아요."

황삼노인은 껄껄 웃었다.

"허허...그래서 그냥 소문으로만 떠돈다는 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환아의 눈이 그의 입을 주시했다.

"그가 무쌍류의 후계자이든 아니든 앞으로의 천하는 그

자 때문에 한 바탕 거센 회오리를 겪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

"그게 무슨 말인가요?"

"너도 생각해 보아라. 그 자가 살해한 인물은 당금

무림의 양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천상회와 포호산장의

절정고수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를 가만

두려고 하겠느냐?"

"아!"

"천상회와 포호산장은 장강(長江)을 사이에 두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不文律)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자 때문에 그들이 움직인다면 천하가

소란스러워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니겠느냐?"

"정말 그렇군요. 그 자는 왜 그렇게 무모한 일을 한

걸까요?"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그 자가 강호에 나타나서

지금까지 지나온 행적을 살펴보면 그자가 천상회와 무슨

원한이 있지 않나 추측될 수 있다."

"그건 또 왜 그렇지요?"

"그 자에게 살해당한 포호산장의 고수들은 대부분이

우연히 그와 만나게 되었던 경우이다. 하지만 천상회의

고수들은 그가 일부러 찾아가서 살해한 것이지. 이것만

보아도 그는 천상회와 씻지 못할 원한을 쌓은게

분명하다."

환아는 혀를 찼다.

"쯧...그 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혼자의 힘으로

천상회를 상대할 수는 없을텐데 안타깝군요."

"허허...이제보니 우리 환아가 그 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구나."

환아는 곱게 눈을 흘겼다.

"할아버지는? 그게 아니라 혼자서 그런 강대한 세력과

싸운다고 하니까 안됐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허허...그렇게 생각할 수만은 없지."

"왜요?"

"천상회는 한 곳에 머물러 있지만 그 자는 일정한

거처가 없다. 그러니 그 자가 천상회의 외곽을 하나하나씩

무너뜨린다면 언젠가는 천상회도 달랑 대들보 하나밖에는

남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혼자라고 해서 반드시

불리하다고 만은 할 수 없지."

"그런가요?"

"두고 보아라. 아마 천상회는 그 자 때문에 한바탕 거센

홍역을 치루게 될 테니까."

환아는 고개를 끄덕인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황삼노인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제보니 할아버지도 그 자의 편이로군요?"

"허허...편이라니. 네 말대로 그가 혼자서 싸우니까

안됐다는 생각이 든거겠지."

두 조손은 서로 마주본 채 빙그레 웃었다.

"호호...잘 들었어요, 할아버지! 다음 이야기는

뭐지요?"

황삼노인은 나직히 헛기침을 했다.

"헛...험! 우선 이야기를 더 하기전에 너무 오래

떠들었더니 목도 컬컬하고 배도 출출하구나. 아쉬운데로

목이라도 축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환아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는 점잖은 대인(大人)들과 호걸님들이 많이

계시니 우리의 사정을 헤아려 주시겠죠."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밀며 사방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님들! 협객(俠客)님들! 배가 부르면 저의

할아버지는 더욱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실 거에요."

그녀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

"하하...옛다!"

"여기도 있다, 꼬마아가씨!"

사방에서 중인들이 엽전을 한 잎씩 환아가 내민

바구니로 던졌다.

중인들은 모두 이런 소리꾼들일수록 돈 맛을 보아야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흔쾌히 돈을 내놓았다.

더구나 이 조손들의 이야기는 유달리 재미가 있었다.

주루를 반도 돌지 않았는데 그녀의 작은 바구니는

엽전들로 수북히 채워졌다.

2

환아는 바구니 가득 엽전을 든 채 아리따운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숙여 사방으로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점원을 불러 몇 가지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노인이 음식을 맛있게 다 먹자 기다렸다는 듯 환아가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주실래요?"

노인은 다시 천천히 곰방대에 불을 붙이며 온화하게

웃었다.

"허히...우리 환아가 오늘따라 보채는구나."

"할아버지. 빨리요. 대인들께서 기다리시잖아요."

노인은 곰방대를 뻐끔뻐끔 빨며 담배연기를 허공을

내뿜었다.

"아...좋군! 환아야. 너는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고수가

누구인지 아느냐?"

환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석에서 입을 열었다.

"그야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포호산장의 주인인

무신(武神) 동방유아(東方唯我),

동방대협(東方大俠)이시잖아요."

동방유아의 이름이 나오자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그중에는 존경의 빛까지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 그럼 당금무림의 후기지수(後己之秀)중에서

제일인자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환아는 총명스런 눈망을을 떼구르르 굴리다가 말했다.

"그건 혹시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젊은 가주이며

강남(江南)에서 검법으로 세 손가락안에 든다는

철검서생(鐵劍書生) 남궁유룡(南宮遊龍)이 아닌가요?"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남궁유룡의 검법이 비록 빠르고 날카롭다고 해도

아직은 검에 힘이 부족하다."

"그럼 혹시 모용세가의 대제자(大弟子)인

금포옥소(金袍玉簫) 위문평(魏文平)이 아닐까요? 듣자하니

그는 소법(簫法)과 장법(掌法)에서 무림일절이라고

하던데..."

노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위문평의 무공은 변화가 많고 다양하지만 빠르고

강맹한 맛이 아직 떨어진다.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보아라."

환아는 머리를 굴리다가 손뼉을 탁 쳤다.

"맞아요. 동방대협의 수제자인 은침탈혼(銀針奪魂)

심연월(沈燕月)일거에요. 그 자의 무공은 동방대협의

진전(眞傳)을 이어받아서 무림의 명숙들도 당해내지

못한다고 해요."

노인은 껄껄 웃었다.

"허허...심연월이라...그는 물론 강하지.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

환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누군데요?"

노인은 그녀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그 자는 다섯 살때 처음 무공에 입문(入門)하여 열

두살 때는 벌써 소년층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열

여섯 살이 되자 그의 사문(師門)에서도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어 육 년동안 혼자서 아무도 익히지 못한 사문의

비전절학(秘傳絶學)을 터득했지."

노인은 곰방대를 탁탁 털며 말을 이었다.

"스물 둘에 강호에 처음 출도(出道)했는데 그때는 이미

강호의 젊은 층중에서 무적이 되어 있었다. 현재 그의

나이는 스물 일곱 인데 이미 강호최고고수의 반열에

올라섰지."

환아는 펄쩍 뛰었다.

"알았어요! 할아버지가 말씀한 사람은 소림(少林)이

배출한 사상최고의 기재(奇才)라는 무적수사(無敵秀士)

장록번(張綠飜)이지요?"

"허허...이제야 알아차렸구나."

장록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중인들은 모두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들이었다.

무적수사 장록번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당금무림의

후기제일지수(後己第一之秀)였다.

그는 비단 무공이 절대적으로 고강할 뿐 아니라

인물됨이 관옥과 같이 준수하고 기개가 헌앙해서 많은

여인들의 흠모를 받고 있었다.

환아가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짐짓 딴청을 부렸던

것은 이야기를 더욱 재미있게 이끌고 나가기 위해서였다.

노인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장록번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학(武學)의 천재(天才)다.

젊은 층은 물론이고 노년층까지 모두 합친다고 해도 그를

능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환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록번의 무공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아암. 그는 비단 소림의 최고무공을 완벽하게 터득했을

뿐 아니라 순전히 본인의 노력으로 그것을 더욱 발전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무예로 승화시켰다. 그야말로 소림역사상

최고의 고수라 할만하지."

환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쑥 물었다.

"그럼 그와 동방대협은 누가 더 강한가요?"

"허허...참 곤란한 질문을 하는구나."

황삼노인은 짐짓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장록번은 곧잘 동방대협에 비교되고는 한다. 마치

동방대협의 청년시절처럼 그도 각 문파를 돌아다니며 뭇

고수들을 연파(連破)했기 때문이지. 비슷한 나이에 강호에

출도하여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환아는 물론이고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노인의 입을

주시했다.

"지금 장록번의 실력은 동방대협의 젊은 시절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환아의 눈이 유달리 반짝거렸다.

"그렇다면 아직은 장록번이 동방대협에 비해 약간

뒤쳐진다는 말씀이군요."

"그렇게 볼 수 있지. 하지만 장록번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언젠가는 동방대협을 추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환아는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가 다시 노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장록번의 이야기를 꺼내시는거죠?"

"그 장록번이 이곳 산서성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환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그게 정말인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목격했다는 사람이 여럿 있으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듣자하니 장록번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소림사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각문파를 찾아다니며

비무행(比武行)을 벌였던 일도 오래전 일이라고

들었는데..."

"맞다. 더 이상 자신을 상대할 고수를 만나지 못해 일

년전부터 비무행을 포기해 버렸지."

환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가 왜 이곳 산서성으로 오는 걸까요?"

"그건 바로 냉혈무정 때문이다."

노인의 말에 환아는 물론이고 중인들은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뭐라고요? 그건 무엇때문이지요?"

"사실 무쌍류는 소림사와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어떤

복잡한 은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냉혈무정이

무쌍류의 후계자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자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소림사를 내려온 것이다."

환아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쌍류가 소림사와 어떤 은원관계가 있나요?"

"허허...그것까지는 이 할애비도 모르겠다. 단지

어렴풋이 들은 말로는 무쌍류의 근원(根源)이 소림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풍문이 오래전부터 내려오고

있다고 하더구나."

"그게 정말인가요? 무쌍류가 소림에서

파생(派生)되었다는 것이?"

"어디까지 풍문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너무

오래된 일이라 실제로 그런 풍문이 떠돌았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일이다."

환아는 갑자기 잔뜩 흥분한 표정이 되었다.

"장록번이 냉혈무정을 찾아간다면 무쌍류의 비밀이

벗겨질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지."

"만약....."

그녀는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얼굴에 엷은 홍조가

피어 올랐다.

"만약 냉혈무정이 무쌍류의 후계자라면 두 사람은 서로

겨루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하나 노인은 의외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과연 그렇게 될는지..."

환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장록번이 냉혈무정을 찾아간 것은

오래전에 무쌍류와 소림과의 사이에 있었던 은원관계

때문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냉혈무정이 무쌍류의

후계자임을 알게되면 장록번은 틀림없이 냉혈무정과

싸우게 될게 아니겠어요?"

노인은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치상으로야 그렇지만 세상일이란게 어디 이치만

가지고 되야 말이지. 원래 장록번 정도의 절대고수가 되면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남과 겨루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림과 무쌍류의 은원관계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질의 것인지도 확실치 않고...설사 냉혈무정이 무쌍류의

후계자임이 밝혀진다 해도 의외로 일이 싱겁게 끝날지도

모른다."

환아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될까요?"

황삼노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허허...그들이 싸운다면 우리들이야 눈요기거리가 생겨

좋다만 그들이 우리의 눈요기를 위해서 일부러 싸울리야

없지 않겠느냐?"

"그렇겠군요."

"어쨌든 만에 하나 그들이 겨룬다면 그거야 말로 백

년내 무림에서 가장 볼만한 격전이 될 것이다."

환아는 배시시 웃었다.

"우리는 그저 그런 행운이 생기기만을 기다릴 수 밖에

없군요."

"허허..."

황삼노인은 미소짓는 환아의 모습이 귀여워

못견디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두 갈래로

땋은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야기를 모두 끝냈는지 그들 조손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환아는 바구니를 든 채 다시 한 번 주루를 한 바퀴

돌았다.

조금전보다 훨씬 많은 엽전들이 그녀에게 쏟아졌다.

이들 조손들의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솜씨가 상당히

재미있었던 것이다.

환아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손님들 사이를 요리조리

옮겨 다니며 그들이 던지는 엽전을 바구니에 담았다.

그녀가 장내를 돌아 금의중년인앞을 지나자

금의중년인은 빙그레 웃으며 수중에서 은화를 꺼내

바구니에 넣었다.

"여기있다."

환아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대인."

금의중년인이 바구니에 은화를 넣고 손을 거둘때

우연인지 그의 손이 환아의 손과 슬쩍 닿았다.

두 사람의 손은 곧 떨어졌다.

환아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다음 사람에게로 갔고

금의중년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술잔을 잡은 그의 손에는 작게 접은 종이쪽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금의중년인은 술잔을 탁자위에 올려놓으며 자연스런

동작으로 그 종이쪽지를 소매자락속에 넣었다.

환아는 바구니에 가득한 엽전을 꺼내 계산을 하고

나머지는 모두 주머니속에 집어 넣었다.

황삼노인은 곰방대를 탁탁 털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환아는 다시 한 번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황삼노인과 함께 주루를 빠져나갔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금의중년인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마침 그의 앞에서 탁자 하나 건너편에 앉아 있던

두 명의 기이한 남녀들도 몸을 일으켰다.

키가 크고 앙상하게 마른 남자는 상당히 취했는지 연신

몸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뚱뚱한 여자는 그의 몸을 똑바로

세우려고 낑낑대며 투덜거렸다.

"이럴줄 알았다니까. 그러길래 작작 마시라고 그렇게

떠들었는데도 이 모양이 되다니..."

금의중년인은 빙그레 웃으며 그들의 곁을 지나 주루의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여자를 확  떠밀었다.

"뭐라고? 이 망할 놈의 여편네가 무슨 잔소리가 이렇게

많아?"

여자는 갑자기 떠밀려서 금의중년인앞으로 밀려왔다.

"음?"

금의중년인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을 잡았다. 덕분에

그녀의 몸은 반쯤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되고 말았다.

여자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그를 향해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거리고는 쌍심지를 돋구며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어디서 되례 큰 소리야? 이젠 아주 폭력까지 쓴단

말이지?"

두 사람은 서로 핏대를 높이며 주루안에서 마구

떠들었다.

금의중년인은 고소를 머금으며 그들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주루를 벗어났다.

그때까지도 두 남녀는 침을 튀기며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었다.

주루를 벗어나자 금의중년인은 모퉁이를 돌아 골목으로

들어갔다.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르자 그는 소매속에 손을 넣어

가늘게 접은 종이쪽지를 꺼내 들었다.

종이쪽지 안에는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두 번에 걸쳐 시간과 장소를 머리속에 암기한

금의중년인은 가볍게 손을 부볐다.

그러자 종이는 금새 먼지가 되어 날아갔다.

금의중년인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골목안으로 사라져갔다.

3

저녁 노을이 유달리 붉었다.

파란 하늘에 붉은 노을이 비끼자 그야말로 보는 사람을

취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홍수춘산일욕사(紅樹春山日欲斜),

장교초색녹무애(長郊草色綠無涯)...

붉게 타는 나무와 푸른 산을 물들이며 해는 지려 하고,

넓은 들판도 새싹에 덮여 끝없이 초록이 이어지고

있네...

시인이 아니라도 이런 봄날의 저녁에는

구양수(歐陽修)의 싯구절 하나쯤은 읊어보고 싶을 것이다.

쌍탑사(雙塔寺).

쌍탑사는 태원의 동남쪽에 있는 절이었다.

이 절에는 특히 이름그대로 쌍탑(雙塔)이 유명한데 높이

십 육장, 총 십 삼층의 거대한 자매탑이 나란히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모습은 가히 태원의 상징과도 같았다.

붉은 황혼이 쌍탑사의 후원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그림자를 밟으며 하나의 인영이 천천히 후원으로

걸어들어왔다.

그는 낮에 취선루에 나타났던 금의중년인이었다.

금의중년인은 유람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쌍탑사의 후원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그러다가 그의 발길이 하나의 작은 누각앞에 멈춰졌다.

이 누각은 비각(碑閣)이라고 하며 유명한

대가(大家)들의 서예 비석을 진열한 곳이었다.

금의중년인은 비각안으로 들어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비석들을 훑어 보았다.

"허! 이것은 왕우군(王右軍)의 친필 비석이로군. 역시

굉장한 힘을 느끼게 한단 말이야."

금의중년인은 중얼거리며 느긋하게 비석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때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두 명의 인영이 누각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금의중년인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비석을

감상하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등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철방주(鐵幇主)이신가요?"

금의중년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 두 명의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우측의 인물은 흑의를 입고 얼굴을 검은 망사로 가린

여인이었다.

여인의 몸매는 더할 나위없이 매혹적이었고 망사사이로

내비치는 눈빛은 영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나이가 우뚝 서 있었다.

사나이는 특이하게도 붉은 짚신으로 된 신발을 신고

있었다.

금의중년인은 그들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철력파(鐵歷坡)요."

철력파!

이 금의중년인이 바로 철모방의 방주이며 강호제일의

철한(鐵漢)이라고 알려진 광룡 철력파였던 것이다.

광룡일낙 강수서류!

한 번 내뱉은 약속은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신화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 철력파였지만 의외로 겉인상은 부드럽고

온화해 보였다.

검은 망사녀는 짤막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사마표향이에요."

철력파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주시하다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붉은 짚신의 사나이를 돌아보았다.

"이 자는?"

붉은 짚신의 사나이는 히죽 웃었다.

"나는 홍초혜 엽동이라고 합니다, 철방주."

철력파는 그를 힐끗 보다가 사마표향을 향해 말했다.

"분명히 단 둘이 만나자고 했던 것 같은데..."

사마표향의 음성은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사람은 괜찮아요. 표향령은 거의 그가 세운 것이나

다름없어요."

철력파의 눈에 번쩍하는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렇다면 이 자가 바로 예전의 그

무영기사(無影奇士)란 말이오?"

엽동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영기사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홍초혜 뿐이지요."

그의 음성에는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감회가 어려

있었다.

무영기사는 십 여년전에 강호를 떠돌던 이름이었다.

정체나 내력은 철저한 신비에 쌓인 채 놀라운 무공과

탁월한 지혜의 소유자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표향령이 불과 이십 명도 안되는 작은 인원으로 거대한

천상회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도 무영기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강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그의 종적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려 많은

사람들의 의혹과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었다.

그런데 그 무영기사가 바로 북만주의 추적전문가인

엽동의 분신(分身)이었던 것이다.

철력파는 날카로운 눈으로 엽동을 뚫어지게 주시하다가

사마표향을 돌아보았다.

"어쨌든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지. 나는 영주와

단독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소."

언뜻 엽동의 얼굴에 불만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그가 무어라고 하기도 전에 사마표향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엽동. 잠시만 자리를 비켜줘요."

엽동은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철력파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누각을 벗어나기 직전에 엽동은 한 번 더 철력파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의혹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엽동이 사라지자 철력파는 천천히 사마표향을 향해

다가왔다.

"영주는 어떤 복안(腹案)을 갖고 있소?"

"나는...."

사마표향은 막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언뜻 기이함을

느끼고 철력파를 쳐다보았다.

"철방주는 밀서(密書)를 받지 못했나요?"

철력파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나 이내 그는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아! 물론 받았소. 그런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마표향의 낮빛이

싸늘하게 굳어지며 그녀의 몸이 번개같이 뒤로 물러났다.

"엽동! 함정이에요. 이 자는 가짜에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흐흐...이미 늦었다!"

음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철력파의 몸이 번개같은 속도로

사마표향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속도는 사마표향의 예상보다 배는 빠른 것이었다.

팟!

그녀의 몸이 채 누각의 입구로 반도 나가기 전에

철력파의 손은 그녀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엽동이 누각안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몸은

철력파의 수중에 완전히 제압당해 있었다.

엽동은 안색이 변해 철력파를 향해 달려들려 했다.

그때 철력파가 사마표향의 머리위로 오른손을 쳐들며

싸늘하게 소리쳤다.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그녀의 몸이 성치 못할 것이다."

그 말에 엽동의 몸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굳어져

버렸다.

"너는 누구냐?"

엽동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이렇게 묻는 것

뿐이었다.

철력파의 입꼬리에 음산한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알고 싶으냐?"

이어 그의 왼손이 자신의 얼굴을 한 차례 문질렀다.

그러자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싸늘하면서도 냉혹한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그 얼굴을 보자 엽동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너...너는 백리독이구나."

철력파, 아니 백리독은 징그런 미소를 지었다.

"흐흐...이제야 알았군. 사마표향을 노리고 있었는데

그동안 종적이 묘연했던 무영기사마저 잡게 되다니 오늘

내 운도 그리 나쁘지는 않군."

엽동의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백리독은 천상회의 삼대사자중에서도 제일가는 인물로,

성격이 치밀하고 잔인해서 천상회에서도 상대하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오늘 사마표향이 철력파와 이곳에서 만나는 것은

극비(極秘)중의 극비로 철모방은 물론이고 표향령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죽했으면 철력파에 대한 연락도 오늘 정오에야 간신히

했을 정도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백리독이 철력파로 변장해 이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을 수 있었단 말인가?

백리독은 엽동의 의혹을 알아차린 듯 음산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흐흐...내가 어떻게 너희들이 이곳에 올줄을 알고

있었는지 궁금하겠지?"

엽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백리독은 품속에서 하나의 얇은 종이쪽지를 꺼내

엽동에게 던져주었다.

엽동은 종이를 펴 보았다.

<유시(酉時) 쌍탑사 비각.>

선명한 글씨 하나가 그의 눈을 찔렀다.

엽동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더 볼 것도 없이 그것은 자신이 직접 써서 밀사에게

전해준 그 쪽지였다.

"이것이 어떻게....."

"흐흐...궁금한 것도 당연하겠지. 사실을 알고 나면

간단하다. 이 쪽지는 우리가 철력파에게서 슬쩍한

것이다."

엽동은 아직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백리독은 득의의 웃음을 날렸다.

"흐흐...너희들의 행적은 이미 우리가 낱낱이 파악해

놓고 있다. 너희들이 오늘 정오에 취선루에서 철력파와

접선하기로 한 것을 모르는줄 알았느냐?"

"......!"

"우리는 사전에 그 사실을 알고 너희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고수를 파견해서 그곳을

감시했다. 과연 얼마있지 않아 소리꾼을 가장한 인물들이

등장을 하더군."

엽동은 할 말을 잊은 듯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조금전의 소리꾼중 황의노인은 엽동

자신이 변장한 것이었다.

그의 손녀로 행세했던 환아는 표향삼봉중의 하나인

혈선녀(血仙女) 두옥환(杜玉環)의 분장이었다.

엽동은 자신들의 분장이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백리독은 어느새 그것을 환하게 궤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이 언제 철력파에게 접선을 하는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계집년이 철력파에게 쪽지를 전해

주더군. 그래서 우리는 철력파가 쪽지를 받고 안심을 할

때 그에게 접근하여 그것을 바꿔치기 했던 것이다."

엽동은 무언가를 느낀 듯 안면근육이 가늘게 떨렸다.

"그럼 그 기이한 행색의 두 남녀가..."

"흐흐...과연 눈치가 빠르군. 너는 그들이 누구인지

아느냐?"

백리독은 엽동의 대답은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들은 바로 본회의 십대고수들인 할심독검 고현과

묘선고였다."

엽동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고현과 묘선고는 십대고수중에서도 상위서열의 인물들로

좀처럼 천상회에서 밖으로 나오는 법이 드물었다.

특히 묘선고는 강호무림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암기의

고수일 뿐 아니라 손재주가 좋아서 물건을 바꿔치는

일쯤은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게 해치울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럼 철력파는...?"

"흐흐....물론 우리가 바꿔치기할 때 적어둔 곳에서

열심히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겠지."

백리독은 득의양양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그의 신세도 너희들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다. 묘선고와 고현이 갔으니 제아무리 철력파라고

해도 그들의 수중을 벗어날 수 없다."

그는 통쾌함을 참지 못하고 연신 대소를 날렸다.

그의 마음은 더할 나위없이 흡족했다.

사마표향과 철력파를 제거하라는 총호법의 명을

완벽하게 완수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이것으로 천상회 내에서의 그의 지위는 더한층 상승되게

될 것이다.

한데 웃고 있던 백리독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점차

웃음을 멈추었다.

사색이 된 채 절망에 빠져있어야 할 엽동의 얼굴이

점차로 평정을 되찾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손에

붙잡혀 있는 사마표향의 모습도 기이하리만치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엽동과 사마표향을 돌아보고

있을 때 엽동이 냉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한 것은 바로 너다. 백리독."

백리독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무슨 헛소리냐?"

엽동의 얼굴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조금전의

놀라고 당황해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너는 내가 너의 그런 수작을 까맣게 모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느냐? 그렇다면 너는 나의 무영기사란 외호를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내가 주루에서 고현과 묘선고를 보고도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리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건 너무 나를

무시한 것이 아니냐? 나는 천상회의 고수들에 대해서는

호위무사 개개인의 얼굴이나 신상명세까지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어찌 천상회의

십대고수들을 몰라볼 수 있겠느냐?"

이번에는 백리독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물론 나는 철력파와 접선하기 위해서 취선루로 갔다.

그곳에서 고현과 묘선고가 있는 것을 보고 너희들의

음모를 짐작했지."

백리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도 철력파에게 쪽지를 전했단 말이냐?"

"물론이지. 그래야 너희들이 의심하지 않을 것 아니냐?"

백리독은 입을 다물었다.

엽동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나는 틀림없이 너희들이 철력파에게 수작을 부려 그

쪽지를 입수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철력파는 담이 크고

신뢰성이 있지만 남을 너무 쉽게 믿어 약은 수작에 잘

넘어 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나는 취선루를 나온 후 한

시진쯤 있다가 재차 철력파를 찾아가 두 번째 접선을

했지."

".....!"

"과연 철력파는 쪽지가 바뀐 것도 모르고 있더군. 나는

그에게 우리의 계획을 말해주고 그를 그곳에 있도록 했다.

그리고는 모르는 척 이곳으로 온 것이다."

백리독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왜 함정인줄 알면서도 이곳으로 온 것이냐?"

물론 백리독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함정을 풀고 토끼를 기다리는 여우의 뒤를 다시

호랑이가 노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백리독

일행을 일망타진하고 싶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복잡한

심리일 것이다.

엽동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도 알고 있겠지. 우리는 천상회의 작은 여우라는

너를 잡고 싶었다."

백리독의 몸이 한 차례 떨렸다.

하나 백리독은 자신의 수중에 붙잡혀 있는 사마표향의

손목을 내려다 보고는 이내 음산한 웃음을 날렸다.

"흐흐...확실히 내가 너를 과소평가했음을 시인하겠다.

무영기사란 명성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수중에 쥐어진 사마표향의 손목을 힘껏

움켜잡았다.

"네 놈은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바로

사마표향이 나에게 제압당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처음으로 엽동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어리석군. 너는 아직도 그녀가 진짜 사마표향이라고

생각하느냐?"

그 말에 백리독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놈. 무슨 말을 하는거냐?"

그때 그의 등뒤에서 하나의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그가 나를 결코 위험한 처지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걸 알았어야 했어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나직한 저음이었다.

백리독은 안색이 변해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

검고 흰 두 개의 인영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 검은 옷을 걸친 여인은 바로 자신의 수중에 잡혀

있는 사마표향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지 않은가?

칠흑같이 검은 옷에 검은 망사...그리고 굴곡이 완연한

몸매까지 똑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누각안으로 들어온

망사녀의 망사사이로 내비치는 눈빛이 유달리 맑고

찬란하게 반짝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심혼(心魂)을

얼려버릴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눈부신 백의를 걸친 준수한 미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하나 백리독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녀를 보는 순간 백리독은 알 수 있었다.

그 유성처럼 반짝이는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사마표향...."

그의 입술을 뚫고 억눌린 신음성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누각안으로 들어온 망사녀가 바로 진짜 사마표향이었던

것이다.

"그..그럼 너는 누구냐?"

백리독은 자신의 수중에 잡혀 있는 망사녀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망사녀는 소리없이 웃었다.

백리독은 황급히 그녀의 망사를 걷어보았다.

그러자 하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의 얼굴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단 한

가지, 전체적으로 싸늘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백리독의 입에서는 신음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엽적화...."

그녀는 바로 독부용 엽적화였던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치밀한 함정에 빠졌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백리독같이 총명한 사람도 한참동안을

생각해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는 복잡한 이중함정이었다.

상대의 심리를 환하게 궤뚫어보고 행동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예측한 다음에야 파놓을 수 있는 완벽한

함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함정을 파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물론

한 사람밖에는 없다.

백리독의 시선은 한쪽에 서 있는 엽동을 향했다.

"무영기사....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구나."

엽동은 빙긋 웃었다.

"과찬의 말씀."

백리독의 눈에 한 가닥 악독한 살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너는 비록 나를 함정에 빠뜨렸을지라도 네

여동생의 목숨을 잃게 되었다. 나는 결코 혼자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엽동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당신은 나에게 그렇게 감탄했으면서도 내가 여동생을

실없이 죽일 사람으로 보았단 말이오?"

백리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냐?"

엽동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사마표향의 대역(代役)으로 굳이 내 동생을

선택한 것은 내 동생에게 한 가지 특별한 재주가 있기

때문이오."

"그게 무엇이냐?"

엽동은 짤막하게 말했다.

"이혈대법(移穴大法)."

이혈대법이란 말을 듣자 백리독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이혈대법은 말 그대로 혈도를 마음대로 이동시켜서

상대의 손에 제압당하지 않는 기이한 무공이었다.

"너무 늦었어요!"

순간 그의 손에 잡혀 있던 엽적화가 다른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맹렬하게 후려쳐왔다.

"으득!"

백리독은 이를 부드득 갈며 황급히 그녀의 잡았던 손을

놓고 장력을 마주 갈겼다.

펑!

폭음과 함께 엽적화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아무래도 정면으로 격돌하기에는 백리독의 심후한 내공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그 탄력을 이용하여 백리독의 몸은 허공에서 한 차레

회전을 하더니 그대로 누각의 입구쪽으로 날아갔다.

그야말로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가공할 신법이었다.

누각의 입구쪽에는 조금전에 안으로 들어왔던

사마표향과 백의사나이만이 서 있을  뿐이었다.

백리독은 그들의 머리를 타넘으며 쌍장을 휘둘렀다.

꽈르릉!

굉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장력이 그들의 머리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사마표향과 백의사내는 그 위세에 놀랐는지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막 장력이 그들의 몸에 닿기 직전, 백리독은 백의사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태연자약한 미소였다.

동시에 백의사내의 오른쪽 소매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쾅!

누각이 온통 뒤흔들리는 듯한 폭음이 터져나오며 한

사람의 몸이 훨훨 날아갔다.

쿠앙!

그 사람은 거의 십여장이나 날아가 누각의 반대쪽

벽면을 뚫고 땅바닥에 쳐박혔다.

"크으으..."

오공으로 피를 뿌린 채 바닥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백리독이 아닌가?

백리독은 전신의 심맥이 가닥가닥 끊어지고 내장이

조각난 채로 피바다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어 백의사내를 쳐다보았다.

백의사내의 무공은 백리독으로서도 일찌기 본 적이 없는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아직 이토록 무시무시한 수공(袖功)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어찌 가벼운 소매짓 한 번에 백리독같은 절정고수를

이런 꼴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백리독은 꺼져가는 눈으로 백의사내를 보며 더듬거렸다.

"이...이게 무슨 무공이냐?"

백의사내는 담담하게 웃었다.

같은 남자가 보아도 반할 만한 미소였다.

"철심수(鐵心袖)."

준수한 얼굴만큼이나 낭랑하고 깨끗한 음성이었다.

백리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그것은 소림의 무공인데...."

백의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독은 소림의 무공에 이토록 가공스런 위력이 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물었다.

"너...너는 누구냐?"

백의사내는 조용하게 말했다.

"내가 바로 장록번이오."

장록번.

이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백리독은 마지막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는 죽는 순간에야 자기가 결코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장록번이라면 물론 백리독으로서도 이렇게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백리독이 아닌 누구라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결코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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