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장 이 정 도 로 는 막 을 수 없 어
1
노독행은 문득 잠을 깼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그의 품속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그녀의 쌔근거리는 소리뿐이었다.
노독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꿈틀거리며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잘께요..."
노독행은 계속 그녀를 흔들었다.
마침내 그녀는 눈을 비비며 잠을 깼다.
고개를 들어 노독행을 올려보던 그녀의 눈에 흠칫하는
빛이 떠올랐다.
달빛에 비친 노독행의 얼굴이 철갑을 씌운 듯 딱딱하게
굳어있던 것이다.
"독행...."
그녀는 너무도 놀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치마를 벗어."
그녀는 잘못들었나 싶었다.
"네?"
노독행의 음성은 냉혹하기 그지없었다.
"치마를 벗으라구."
그녀는 움찔했으나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치마를 벗기
시작했다.
치마의 끈을 푸를 때는 조금 머뭇거리기도 했으나 별로
주저하지 않고 치마를 벗었다.
그녀는 얇은 속치마 차림이 되었다.
노독행은 손을 내밀었다.
"치마를 이리 줘."
그녀는 영문을 몰랐으나 순순히 벗은 치마를 그에게
내밀었다.
치마라고 해봐야 조금전에 사냥을 하는 통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져 누더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노독행은 치마를 반으로 찢어서 그것을 서로 연결해
하나의 길다란 끈을 만들었다.
그런다음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 등에 업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분고분 그의 등에
업혔다.
노독행은 치마를 찢어 만든 끈으로 그녀를 자신의 등에
단단하게 조여맸다.
끈이 저절로 풀어지지는 않게 된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노독행은 바닥에서 일어났다.
"내 말 잘들어."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그녀의 귓전에는 천둥처럼
들려왔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등에서 떨어지면 안돼.
떨어지면 우린 영영 이별이야."
등뒤에 매달린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노독행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그녀가 새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독행은 등뒤로 손을 돌려 그녀의 양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목을 끌어안게 했다.
그녀는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녀의 팔을 통해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노독행은 왼쪽 손가락을 몇 번 까닥거려 보았다.
그녀가 등뒤에 매달려 있어도 월영도를 뽑는데는 별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는 자신의 목을 끌어안은
그녀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준비해. 이제 시작이다."
그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로 그의 등에 찰싹 달라
붙어 있었다.
노독행은 땅을 박차고 날아 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
그의 바로 앞의 땅가죽이 뒤집히며 두 개의 시커먼
인영이 무서운 속도로 노독행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와
함께 사방의 어둠속에서 수십 개의 흑영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중에 흑수겁(黑水劫)이라고 불리웠던, 천상회의 최고
살수조직(殺手組織)인 흑수당(黑水堂)의
구십구살(九十九煞)과 강호무림의 최고살성인 냉혈무정의
처절한 격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따땅!
두 개의 독도(毒刀)가 박살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튕겼다.
노독행은 몸을 솟구쳐 그 파편을 피하며 오른손을 쭈욱
내뻗었다.
칼을 쥐고 있던 흑의인의 손목이 잡혀지자 그는 그것을
사정없이 비틀었다.
우드득!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음향과 함께 흑의인의 팔이
기이하게 뒤틀려 버렸다.
하나 아무런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흑의인은 비명을 지르기는 커녕 오히려 다른 손으로
노독행의 아랫배를 가격해왔다.
그 순간 한 발 먼저 노독행의 무릎팍이 그의 아래턱을
그대로 강타했다.
쾅!
흑의인의 아래턱이 흐물흐물해지며 얼굴의 반쪽이
달아났다.
흑의인은 죽는 순간까지도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이자 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모든 흑의인들은 일체의 비명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주위는 아주 조용했다.
단지 간간이 들려오는 뼈가 으스러지거나 칼이 날아오는
소리만이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흉험함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네 개의 칼이 노독행의 전후사방을 향해
휘몰아쳐왔다.
노독행은 어떻게 피하든 그 네개의 칼중 하나와는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주저없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칼을 선택했다.
옆이나 뒤로 날아오는 칼은 자칫 잘못하면 그녀를
다치게할지도 몰라서였다.
그는 곧장 앞으로 쏘아져가며 오른손으로 칼을 덥썩
움켜 잡았다.
팟!
그동안 수많은 병장기를 움켜쥐고도 단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았던 그의 손에 핏물이 뿜어나왔다. 칼이 특수한
곤옥(昆玉)으로 만들어져 날카롭기가 어떤
신병이기(神兵利器)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 노독행은 움츠려들기는 커녕 붙잡은 칼을 강력하게
잡아당기며 오른손을 세차게 떨쳤다.
그 자의 몸이 주르르 딸려왔다.
그와 함께 자신의 등뒤와 좌우측에서 다가오는 세 개의
칼끝의 기운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과 그 자의 몸은 서로 위치를
교환해 버렸다.
파팍!
세 개의 칼날은 정확하게 흑의인의 등짝과 양쪽
옆구리에 틀어벅혔다.
노독행은 고치처럼 세 개의 칼에 궤뚫린 그의 몸을
그대로 밀어붙이며 다른 세 명의 흑의인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그들은 자신의 동료에 가려 노독행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놓쳐 버렸다.
쾅!
하나의 흑의인이 피분수를 뿌리며 십 여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노독행이 다시 또 하나의 흑의인을 개산벽으로 박살내고
있을 때 그제서야 네 번째 흑의인이 그를 향해 달려
들었다.
그때는 이미 노독행의 연환철주가 죽음의 수레바퀴처럼
그의 면상을 정통으로 가격하고 있었다.
콰쾅!
연거푸 폭음이 터지며 그 자의 얼굴은 완전히 그 형체를
잃어 버렸다.
그 자의 신형은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가 노독행의
곁을 몇 발자국 지나쳐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순식간에 네 명의 흑의인들이 처참한 시신이 되어
쓰러져 버린 것이다.
하나 상황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다시 어둠속에서 세 개의 인영이 노독행의 전면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노독행은 막 그들을 향해 몸을 날리려다가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허공을 올려 보았다.
달을 등지고 까마득한 허공에서 그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두 개의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시에 등뒤에서도 섬뜩한 기운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방이 온통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혀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피할 곳은 보이지 않았다.
노독행은 결단을 내리고 주저없이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쐐액!
세 개의 칼날이 시퍼런 섬광을 번뜩이며 그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노독행의 몸이 좌우로 세차게 흔들렸다.
파파팟!
세 개의 칼날이 요동치는 그의 몸을 격중시키지 못하고
스쳐지나갔다.
그 순간 노독행의 양 손은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칼을
잡은 두 개의 손목을 힘껏 움켜잡았다. 동시에 오른 발은
다른 하나의 인영의 아랫배를 꿰뚫고 있었다.
우두둑!
손목이 부러지는 음향과 함께 두 개의 인영이 그에게
손을 잡힌 채 비틀거리며 끌려왔다. 그뒤에는 아랫배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흑의인 하나가 질펀한 피를 뿌리며 막
쓰러지려 하고 있었다.
노독행은 양 손으로 움켜잡은 두 개의 손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휘이익!
그의 손에 잡힌 두 명의 흑의인이 마치 두 개의
풍차처럼 허공에서 휘둘러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을 흡사 검(劍)처럼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막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던 두 명의 흑의인은 이것을
보고 사력을 다해 몸을 피하려 했으나 그들의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도 맹렬했는지라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파파팍!
피비가 하늘높이 솟구치고 잘려진 살점들이 사방을
난비(亂飛)했다.
노독행의 양 손에 붙잡힌 채 휘둘러지던 두 명의
흑의인과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던 두 명의 흑의인은
공중에서 정면으로 부딪쳐 실로 끔찍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들중 누구도 온전한 시신을 남긴 자가 없었다.
노독행의 전신도 그들이 뿌려낸 선혈과 살점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노독행은 악귀처럼 두 눈을 번뜩인 채 계속해서 양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처음에는 분명 살아 숨쉬는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그저 하나의 혈구(血球)에 지나지
않았다.
등뒤와 양 옆에서 덤벼들던 흑의인들중 몇 명이 그
혈구에 부딪쳐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흉신악살(兇神惡殺)같은 모습에 질려 버렸는지
그토록 가공할 기세로 덮쳐들던 흑의인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다시 몇 차례 더 손을 휘두르자 이제 노독행의 손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노독행의 몸은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땀과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얼마나 손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노독행은 눈에 띄는 것은 가리지 않고 무조건 박살내며
앞으로 전진해갔다.
그가 지나온 자리는 시체의 산이었고, 피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흑의인들의 공세는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끊이지 않고
공격해 들어왔다.
삼 장을 전진하면서 노독행은 다시 네 명의 흑의인을
쓰러뜨리고 한 번의 칼질을 당했다.
다시 하나의 칼날이 그의 발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노독행은 거의 반사적인 동작으로 다리를 들었다가
옆으로 휘둘렀다.
빠악!
회륜각(廻輪脚)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부서진
두개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구! 구!
이번에는 동시에 여섯 개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그중 두
개는 노독행의 등뒤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노독행이 등뒤에 매고 있는 모용추수를
노린 것이었다. 무방비상태의 그녀를 공격해서 노독행을
당황하게 만들어 보자는 의도임이 분명했다.
전후사방으로 날아오는 여섯 개의 칼날은 그야말로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노독행은 그 공격을 완벽하게 피하기 위해서는 바닥으로
몸을 날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 그녀를
업은 채로는 도저히 바닥으로 몸을 날릴 수가 없었다.
절대절명의 순간,
노독행의 외눈이 무섭게 번뜩거렸다.
그의 왼손가락이 까닥거리며 월영도가 툭 튀어 나왔다.
노독행은 월영도를 잡음과 동시에 몸을 회전시켜
월영도를 사방으로 폭발치듯 사십팔도(四十八刀)나
내갈겼다.
파파파파파....
주위 사방이 온통 칼그림자로 뒤덮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를 향해 다가들던 여섯 명의 흑의인들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이것이 바로 무쌍류의 필살무예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십대절학(十大絶學)중 하나인 대윤회(大輪廻)였던 것이다.
출도한 이래 노독행이 십대절학중 하나를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위력은 가히 가공(可恐), 바로 그것이었다.
콰콰쾅!
대윤회의 도광(刀光)에 부딪친 여섯 자루의 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처절한 피비린내가 주위를 진동시켰다.
도광이 걷혔을 때 바닥에는 도저히 인간의 몸이라고는
생각되어질 수 없는 여섯 구의 처참한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시신들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난도질되어 형체를
분간할 수 조차 없었다.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노독행은 월영도를 든 채 전면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달려드는 흑의인은 없었다.
짙은 어둠속, 두 개의 희끄레한 인영이 그를 노려본 채
우뚝 서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들은 전신을 흑의로 칭칭 감은 흑포인과 우람한
체구에 피처럼 붉은 장포를 걸친 홍의중년인이었다.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노독행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이렇게 강하다니..."
홍의중년인, 혈사자 초력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것이 흑수당의 최고살수들인 구십구살이 거의
한 시진도 되지 않아 한 사람에 의해서 몰살을 당해 버린
것이 아닌가?
오늘 그가 목격한 것은 차라리 악몽(惡夢)이었다.
노독행은 전신에 피칠을 한 채로 웃었다.
"이 정도로는 무쌍류를 막을 수 없어."
"무...무쌍류?"
초력과 흑포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랬었나....? 무쌍류였나?"
초력은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노독행의 손에 들린 월영도가 달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거렸다.
순간 그의 몸은 허공을 압축해 초력과 흑포인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었다.
흑포인은 흑수당의 당주(堂主)인 흑혈신마(黑血神魔)
이견심(易見心)이었다.
이견심은 자신이 피땀을 흘려 가꾸어온 흑수당의
구십구살이 노독행의 손에 거의 박살이 나자 분노와
좌절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노독행이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자 그는 피하지 않고
사력을 다해 마주 달려갔다.
초력 또한 이대로는 도저히 천상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비장한 표정으로 쌍장을 휘둘렀다.
그들의 공세가 노독행에게 도달하기 직전, 노독행의
월영도가 크게 움직이며 반달모양의 도광이 주위를 휩쓸어
버렸다.
"크악!"
오늘 처음으로 처참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초력이 내지른 비명소리였다.
이견심은 흑수당주답게 몸이 두동강이나는 순간에도
비명을 내지르지 않았다.
노독행은 천천히 월영도를 거두었다.
장내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하나 뿐이었다.
멀리 먼동이 터오는 가운데 희미하게 드러나는 주위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를 보는 것
같았다.
2
노독행은 등뒤에 매단 끈을 풀고 그녀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런 다음 빠른 눈으로 그녀의 전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격전중에 그는 등뒤에서 그녀의 나직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을 알고 있었다.
막으려고 애는 썼지만 단 한 번, 흑의인의 칼이 그의
엄밀한 방어막을 뚫고 그녀의 몸에 격중되었던 것이다.
상처는 곧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왼쪽 팔이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노독행은 그녀의 옷자락을 고 상세(傷勢)를 살폈다.
그녀는 온 몸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그를 올려다 보며
조그맣게 물었다.
"팔이 잘렸나요?"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의 그는 조금전에 구십구살을 죽일 때와는 전혀
다른 인간같았다.
피와 눈물도 없는 냉혈무정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다시 고독하고 외로운 젊은이로 변해 있었다.
모용추수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런데 굉장히 아파요."
"운이 좋았어. 칼날이 꽤 깊이 들어갔지만 다행히
신경이나 동맥은 건드리지 않았어."
말을 하면서도 노독행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하마터면 그녀는 그대로 팔이 잘려질 뻔 했던 것이다.
설사 잘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칼이 한 치만 더 깊이
들어갔더라도 영원히 팔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하마터면 병신이 될 뻔 했다.
이 불쌍한 여자가....나때문에 병신이 될 뻔 한 것이다.
만약 조금전에 나타났던 자들보다 더욱 강한 자들이
나타났었다면....
자신은 앞으로 더욱 무서운 적들과 싸워야만 한다.
이제 가려고 하는 곳은 오늘 상대한 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서운 고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그런 곳에 만약 그녀가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얼굴을 펴요.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멀쩡하다는게 믿어지지 않잖아요."
노독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통을 참느라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노독행은 그 미소를 보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좋은 여자야."
그녀는 웃으면서 조용하게 속삭였다.
"당신도 좋은 남자에요."
노독행은 고개를 돌렸다.
태어나서 남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나를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니...
나같은 냉혈한(冷血漢)을....
하마터면 자신을 병신으로 만들 뻔 했는데도 좋은
남자란 말인가?
그녀에게 좋은 남자라는 말을 들었다면 무언가 그에
합당한 일을 해야할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노독행은 자신의 마음을 결정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녀는 놀랐으나 비명을 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노독행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노독행은 그녀를 안고 여명(黎明)이 터오르는 산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산아래 마을은 황가둔(黃家屯)이라고 했다.
물론 황가둔이라고 해서 황씨 성만 살고 있지는 않았다.
마을의 촌장인 하노인(何老人)만해도 황씨 성이
아니었다.
하노인은 나이가 벌써 칠십이 넘어 외롭게 혼자 살고
있었다.
촌장이 아니었다면 그는 더욱 외로웠을 것이다.
새벽잠이 유난히 없는 하노인은 아침해가 동터오를때면
항상 마을 앞을 깨끗이 닦는 것이 하루일과의 시작이었다.
인가(人家)라고는 겨우 이십 호(戶)남짓하는 작은
동네지만 그래도 언제 어떤 외지인(外地人)이 이곳을
지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그들의 눈에 이 황가둔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을로 비친다면 하노인으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것은 곧 촌장인 그의 기쁨이기도 했다.
그날도 하노인은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마을
어귀에 서서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홀연히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그의 눈앞에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원래 하노인정도로 나이를 먹게 되면 좀처럼 놀랄 일이
없는 법이다.
하나 나타난 사람을 보자 하노인은 움찔 놀라고 말았다.
그는 품속에 여인을 안고 있는 애꾸의 젊은이였다.
하노인이 놀란 것은 애꾸청년의 전신이 완전히 피로
범벅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하노인을 바라볼 때
번뜩거리던 그 외눈이란....
그것은 하노인의 평생에 본 가장 무서운 눈이었다.
하나 애꾸청년의 가슴에 안겨있는 여인을 보는 순간
하노인은 더욱 놀라고 말았다.
늑대의 품속에 웬 선녀란 말인가?
그렇게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여자는 상상조차 해
본적이 없었다.
전설의 서시(西施)가 되살아난다 해도 그녀보다는
아름답지 못할 것이다.
하노인이 멍하니 그 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애꾸청년이 불쑥 입을 열었다.
"방을 하나만 구해줘."
하노인은 그의 음성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도 어린 녀석이 반말을 지껄인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다.
오랜 동안의 경험으로 그는 이런 자의 말은 되도록
들어주는게 평지풍파를 일으키지 않는 길임을 알고
있었다.
하노인은 마침 비어있는 집 하나가 생각나 그들을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의 일족들은 일 년전에 커다란
성시(城市)로 이사를 가 버렸다.
두 남녀가 기거하기에는 약간 큰 집이었으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 오히려 남들의 눈을 피해 지내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애꾸사내는 집안을 둘러보고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열흘만 빌리겠어."
그는 품속에서 열 냥의 은자를 꺼내 하노인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하노인이 평생동안 처음으로 만져본
거금(巨金)이었다.
하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은자를 잡기 직전, 애꾸사내는
빤히 하노인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는 이곳에 없는거야."
하노인은 갑자기 몸이 사시나무떨 듯 떨려왔다.
그는 애꾸사내의 음성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다시 정신을 들었을 때는 하노인은 자신이
멍하니 자신의 방안에 앉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날 새벽에 겪은 일은 보지도, 듣지도 않은 것처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일을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그는 자신의 수명이 단축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이먹은 노인에게 너무 심한게 아니에요?"
하노인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부들부들 떨며 나가자
모용추수는 노독행을 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독행은 그 문제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으며, 그것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녀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팔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져서 그 고통을 참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독행은 그녀를 침상에 누이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온 그의 손에는 약초들이 잔뜩 쥐어져 있었다.
그는 약초를 갈아서 그 즙을 그녀의 팔에 붙였다.
'악!'
그녀는 약즙이 상처에 닿는 순간 펄쩍 뛰도록 아팠으나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목구멍속으로 집어 삼켰다.
그녀가 아파하면 아파할수록 노독행이 미안해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게 분명했다.
"아프면 소리를 질러."
그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으나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억지로 웃었다.
"참을 수 있어요."
그는 말없이 고통을 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가 발라준 약즙은 신통하게도 효과가 빨랐다.
그날 저녁에 세 번째로 약즙을 발랐을 때는 통증도 거의
가시고 상처도 반쯤 아물어 있었다.
그녀는 신기해서 그가 자신의 팔에 약초를 바를 때
물어보았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고 있죠?"
그는 세번째로 듣는 대답을 했다.
"사냥을 좋아했어."
그녀는 아마 사냥을 하다가 다치면 이런 식으로 치료를
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노독행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녀는 가슴 한 구석에 달콤한 기운이 샘솟듯
올라왔다.
그와 같은 사람은 그런 일은 전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과 싸울 때의 그가 얼마나 무서운지 몇 번이나
보아서 알고 있었다.
그가 사람을 가볍게 쳐죽이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소름이 오싹 끼쳤으나 평상시의 그는 말없고 과묵한
청년이었다.
가끔 고독한 눈빛을 뿌릴 뿐 전혀 무서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특히 그랬다.
그녀는 그것이 고마웠다.
그녀는 만일 그가 자신에게 무섭게 대하면 도저히
견디지 모할 것 같았다.
그런 것은 남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노독행마저 남들과 같이 자신을 대하면 그녀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가 아침상을 들고 들어왔던 것이다.
상위에는 연자탕(燕子湯)이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그가 연자탕을 들고 그녀의 침상위에 올려놓은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것은 평상시의 그가 취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연자탕을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는 연자탕을 들어 한 입씩 떠먹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달콤하고 맛있었을 것이나 그녀는 아무런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에 혼이 나간 사람같았다.
하루종일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점심 때 두 번째로 그가 연자탕을 가져다 주었을 때도
말없이 받아먹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노독행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의 침상옆으로
다가왔을 때 그녀는 이불속으로 덜덜 떨리는 자신의
손끝을 꼭 움켜 잡았다.
노독행은 침상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감히 그 시선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떠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에게 연자탕을 끓여주는 따위의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가야할 곳이 있어."
그녀는 자신이 떨지 않도로 기도했다.
하느님...제발 이이 앞에서 떠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도록 하세요.
그녀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길면 삼 일이고 짧으면 이틀쯤 걸릴거야."
그녀는 그곳이 어디인지 묻지 않았다.
물어도 그는 대답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곳이 그와같은 사람도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는 무서운 곳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반드시 돌아올 자신이 있으면 그는 이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독행같은 능력을 지닌 사람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그곳은 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그녀는 묻지 않으려 했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올 건가요?"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는 것에 그는 하느님께
감사했다.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살아만 있다면 반드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더 이상은 목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뺨을 살짝 건드렸다.
그녀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참으려고 했는데 어느 새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노독행은 그 눈을 들여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무쌍류를 꺾을 무예란 없어."
그녀는 멍하니 그를 올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쌍류를 꺾을 무예란 없다!
그의 말이니만큼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돌아온다고 자신있게 장담하지 못하는
것일까?
만약에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녀는 대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간단 말인가?
그녀는 간신히 한 마디를 했다.
"나는 기다릴거에요...."
비록 그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노독행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기다릴거에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고 영원히....
노독행은 몸을 돌렸다.
처량한 표정따위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살아올 것이다.
살아서 다시 그녀에게 돌아올 것이다.
내 집안을 멸망시키고 내 형과 아버지를 죽인 그 자들을
처단하고 반드시 살아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탁!
방문이 닫혔다.
그녀는 힘없이 침상위에 쓰러졌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불이 흠뻑 젖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밤새 소리없이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