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30화 (1권하 끝) (31/61)

제 30 장     이 제   슬 슬   시 작 해 볼 까

1

조향령은 철관음을 한 모금 들이켰다.

따뜻하면서도 청량한 액체가 목을 넘어가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좋군."

그는 찻잔을 탁자위에 내려놓으며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자네들 두 사람만 돌아왔다고?"

그의 음성은 입가에  떠있는 미소만큼이나 부드러웠다.

하나 그 음성을 듣자 그의 앞에 엎드려 있던 두 사람의

몸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할심독검 고현과 묘선고.

천상회의 십대고수중에서도 상위 서열에 올라있는 두

절정고수는 조향령의 부드러운 한 마디에 떨고 있었다.

고현은 머리를 조아리며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뜻하지 않게 무적수사 장록번이 나타나는

바람에 저희들로서도 손쓸 여지가 없었습니다."

조향령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장록번...장록번...그 자가 왜 그곳에 나타났지?"

이번에는 묘선고가 입을 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자와 사마표향이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합니다."

조향령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여자때문에 본회와 적(敵)이 된다... 장록번답지 않은

일이군."

두 사람은 달리 할 말이 없어 머리를 조아린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향령은 한동안 허공을 응시한 채 무언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사마표향과 철력파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거기에다

장록번과 냉혈무정까지라.... 일이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느낌이 드는군."

그때 갑자기 밖에서 나직한 음성 하나가 들려왔다.

"총호법님. 임빙입니다."

조향령은 찻잔을 한모금 들이킨 후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들어오게."

소리없이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천상회의 삼대사자중 하나인 냉면판관 임빙이었다.

임빙의 얼굴에는 한 줄기 다급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임빙은 급히 그에게 다가가 무어라고 소곤거렸다.

고현과 묘선고는 임빙이 전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가 무엇때문에 저렇게 당황해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졌다.

임빙은 별호 그대로 성격이 냉정하고 차가워서 좀처럼

흥분하거나 놀라지 않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총호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쑥 찾아왔다는

것은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임빙이 무슨 말을 했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조향령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임빙이 전음을 끝내자 조향령은 잠시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고현과 묘선고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한 번 더 나를 도와줄 의향이 있나?"

말이야 이랬지만 사실은 일방적인 명령에 가까운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현과 묘선고는 물론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들은 태원에서 백리독만 잃은 채 허겁지겁  기듯

도망쳐온 일로 추궁을 받을 것이 두려웠으나 조향령이

자신들을 다시 쓰겠다는 말에 화색이 만면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먼저번과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명(下命)하십시오."

두 사람이 앞을 다투어 머리를 조아리자 조향령의

눈가에 냉랭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한 사람이 본회의 입구에 나타나 소란을 부린다고

하더군. 그 자를 막아주지 않겠나?"

그들은 약간 의아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어떤 미친 놈이 천상회의 총단으로 와서 행패를

부리겠는가?

하나 조향령이 쓸데없이 그들을 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즉시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알겠습니다."

"그 놈의 목을 따와 총호법께 바치겠습니다."

그들은 정중하게 절을 하고는 몸을 돌려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조향령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슬쩍 임빙을 바라보았다.

"그 자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다고 했지?"

임빙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입천문(入天門)과 대천관(待天關)을 지나 지금

운천평(運天坪)에 있습니다."

"정말 성격은 못버리는군. 단신으로 이곳까지 쳐들어

오다니..."

"그 자는 어려서부터 남다른데가 있었습니다."

"별로 좋은 것은 아니지."

임빙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향령은 이미 생각을 정리한 듯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가 고현과 묘선고를 쓰러뜨리면 그때

금천동(禁天洞)의 그 자를 끌고 오게."

임빙의 눈이 번쩍 빛났다.

"금천동의 그 자가 아직까지 살아 있습니까?"

"물론이지. 나는 팔년전부터 오늘같은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해 왔네."

"팔년전부터 말씀입니까?"

"그렇지. 팔년전에 그가 도망쳤다는 말을

들었을때부터."

조향령은 임빙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무엇때문에 그 자를 여지껏

살려두었겠나?"

임빙은 그 미소를 보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는 새삼 이 총호법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팔년후에 벌어질 일을 대비해서 완벽한 준비를 해놓은

그에 대해 어느 누가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과 적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밖에 와 있는 사람을 떠올리자 임빙은

다시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향령같을 두려워 하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천하에

오직 그 자뿐일 것이다.

임빙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금천동의 그 자로 그 괴물같은 놈을 막을 수

있을까요?"

조향령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한동안 천정을

바라보았다.

한참후에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그의 음성에도

얼마쯤의 당혹감이 배어 있었다.

"그건 알 수 없지. 워낙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자이니.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향령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밤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유달리 긴 밤이

되리라는 것이지."

*                  *                  *

노독행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두 인물들을 쳐다보았다.

이곳에 들어와서 열 다섯 번째 만나는 인물들이었다.

다른 열 세명은 이미 차디찬 시신이 되어 그가 지나왔던

곳에 쓰러져 있었다.

이 자들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덤빌 것인가?

차륜전(車輪戰)을 사용하면 내가 지쳐 쓰러지리라고

본단 말인가?

내가 이미 오래전에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다는 것을 이들은 짐작도 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번에 그의 앞에 나타난 인물들은 유달리 키가 크고

앙상하게 마른 중년인과 반대로 키가 작고 뚱뚱한

홍의여인이었다.

노독행은 처음에는 그들도 지금까지 쓰러뜨렸던

인물들과 별반 차이없을줄 알고 그냥 간단히 해치우려

했다.

한데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나 대적(對敵)에 임하는

자세등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다가 문득 노독행은 앙상하게 마른 중년인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하나의 장검을 보게 되었다.

마치 대꼬챙이처럼 유달리 길쭉하면서도 끝이 뾰쪽한

장검이 검집도 없이 그냥 허리춤에 꽂혀 있었다.

그 장검을 보자 그는 문득 천상회의 십대고수중 한 명이

이와 유사한 장검을 사용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는 앙상하게 마른 중년인을 보며 불쑥 물었다.

"이름이 뭐지?"

그것은 오늘 노독행이 이곳에 와서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앙상하게 마른 중년인은 그의 이 말을 듣자 눈꼬리가 쭉

찢어지며 살기등등한 표정이 되었다.

"미친 놈. 이 할심독검 고현 어르신네를 몰라보고 감히

함부로 아가리질을 하다니..."

순간 노독행의 외눈에서 번갯불같은 섬광이 번뜩였다.

"할심독검 고현?"

그 눈빛을 받자 고현은 갑자기 전신이 얼음굴속에

빠져든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움찔하여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무슨 놈의 눈빛이 이렇게 싸늘하지?'

노독행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현이란 말이지?"

마치 피에 굶주린 늑대를 연상시키는 미소였다.

고현은 내심 섬뜩함을 느꼈으나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인지라 어쩔 수 없이 냉혹하게 호통을

쳤다.

"그렇다. 이제야 네 놈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았느냐?"

할심독검 고현.

천상회의 십대고수중 하나이며 한 자루

투풍검(透風劍)으로 강호를 공포에 떨게했던 절세의 검객.

하나 노독행이 웃은 것은 그것때문이 아니었다.

"기억나나?"

그는 유달리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팔년전의 늦은 가을에 철각령에서 누군가를 죽인 적이

있지?"

고현은 그의 난데없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팔년전? 미친 놈.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벌써 잊었나? 철각령 정상에서 멀지않은 적석평에서 한

젊은이를 죽였잖아. 양 팔과 양 다리, 앞가슴을

난자질해서 말이야."

이상하게도 나직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고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문득 눈을 번쩍 빛냈다.

"네 놈이 말하는 것은 혹시 노가살수문의 그 얌생이같은

서생녀석 말이냐?"

노독행은 웃었다.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가 내 형이야."

고현의 안색이 가볍게 굳어졌다.

"노군행이 네 형이라고? 그러면 네 놈은 그때

도망쳤뎐..."

"노독행."

짤막한 음성이었다.

고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무어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이제까지 말없이 그의 옆에서 노독행을 지켜보고

있던 묘선고가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을 크게 뜨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호...혹시 당신은 냉혈무정...?"

노독행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바로 냉혈무정이야."

그 말을 듣자 고현의 안색은 푸르뎅뎅하게 변해 버렸다.

"내...냉혈무정이라고?"

노독행은 그를 보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활짝 웃었다.

그것은 마치 늑대가 먹이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알았겠지? 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그와 함께 노독행의 몸은 고현을 향해서 질풍처럼

쏘아져가고 있었다.

2

고현은 노독행이 냉혈무정이라는 말에 심장이

목구멍밖으로 튀어나오도록 놀랐다.

냉혈무정!

이 이름을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출도한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당금 무림에 전설적인

존재로 떠오른 사나이!

일단 손을 쓰면 졀대로 상대를 살려두는 법이 없는

냉혹무비한 희대의 살성!

그에게 쓰러진 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었다.

그 공포의 살성이 자신을 향해서 짓쳐오자 고현은

새파랗게 질린 채 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현의 몸이 노독행의 어깨에 박살나려는 찰나,

쐐액!

솜털같이 미세한 암기가 우박처럼 노독행을 향해

퍼부어졌다.

묘선고가 때마침 출수를 한 것이다.

노독행은 그대로 고현의 몸을 짓뭉개버릴 수도 있었다.

그다음에도 얼마든지 묘선고의 암기를 피할 수도 있었다.

하나 그는 고현을 향해 달려들던 몸을 돌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고현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금 노독행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결코 안도의 한숨따위는 쉬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파파파팍!

솜털같은 암기가 방금전까지만 해도 노독행이 있던

자리에 꽂히며 시커먼 연기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극독(劇毒)이 발라진 암기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묘선고가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데 혁혁한

공헌을 한 화형망(化形芒)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그대로 살이 썩어지고 뼈가 문드러지는 악독한

암기였다.

노독행의 몸인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묘선고는 다시 몸을 돌리며 허공에 떠 있는 노독행을

향해 화형망을 발출했다.

고현도 정신을 차리고 투풍검을 뽑아든 채 노독행을

찔러갔다.

두 절대고수의 합공은 확실히 놀라운 점이 있었다.

묘선고의 화형망은 노독행이 피할 모든 방위를 향해

쏘아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고현의 투풍검은 일직선으로 노독행의 목덜미를

향해 짓쳐들고 있는 것이다.

피하면 화형망에 의해 핏물이 되어 버리고, 가만히

있으면 투풍검에 목이 꿰뚫린다.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든

것이다.

'흐흣...이놈! 너무 방심했다!'

고현의 입가에는 악독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자신의 투풍검이 강호를 공포에 떨게 했던

냉혈무정을 쓰러뜨린다고 생각하자 한 줄기 전율같은

쾌감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투풍검이 막 노독행의 목덜미를 궤뚫으려는 찰나,

스윽!

노독행의 오른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콱!

그와 함께 그의 손이 가공할 기세로 찔러오던 투풍검을

그대로 움켜쥐는 것이 아닌가?

"으헉?"

고현은 그야말로 까무러치듯 놀랐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의 투풍검은 검신(劍身)이 온통 날(刃)로 뒤덮혀

있어서 아무쪽으로나 스쳐도 그대로 뼈가 갈라져 나가고

만다. 더구나 그 끝은 예리한 만년강모(萬年剛母)를

덧씌웠기 때문에 설사 호신용 갑옷을 입고 있다 해도

그대로 뚫고 나가고 만다.

그런데 그 투풍검을 맨손으로 덥썩 잡아 버렸으니 이게

어찌 사람의 솜씨란 말인가?

고현이 투풍검의 끝을 노독행의 수중에 잡힌 채

주춤거리는 순간,

뚝!

노독행이 힘을 주자 그토록 단단하던 투풍검의 끝이

그대로 부러져 나가고 말았다.

동시에 노독행은 수중에 들고 있던 투풍검의 끝을

그대로 집어던졌다.

팟!

섬광과 함께 찢어질 듯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끼악!"

비명을 지른 사람은 묘선고였다.

그녀는 이마에 투풍검의 끝이 그대로 박힌 채 두 눈을

부릅떴다.

"이...이...."

그녀는 입을 딱 벌린 채 무어라고 중얼거리려다가

그대로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쿵!

그녀의 뚱뚱한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고현의 가슴을

송두리째 진동시켰다.

고현은 끝이 부러져나간 투풍검을 든 채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전력을 다해 찔렀던 투풍검을 맨 손으로

잡고, 그 검끝을 부러뜨려 그것으로 천하제일의

암기명인을 살해하다니....

'이...이자는 악마다!'

그제서야 고현은 무림에 퍼져있는 냉혈무정의 전설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절실하게 깨달았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어느 새 그의 앞에는 노독행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번뜩이는 외눈으로 고현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고현의 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대체 무얼 시작한다는 것일까?

고현이 주춤거리고 있을 때 노독행이 달려들었다.

쉬익!

그의 오른손이 한 가닥 예리한 광채를 뿌리며 고현의

왼팔을 향해 날아들었다.

고현은 전력을 다해 피했다. 그는 분명히 피했다고

느꼈다.

한데 다음순간, 그는 왼팔에 엄청난 고통을 느낀 채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아악!"

그의 왼팔은 어느 새 팔꿈치 아래로 예리하게 잘려나가

있는 것이었다.

사람의 손이 스치기만 했는데도 어찌 팔이 잘려져

나간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무쌍류의 비전절학인 구절수(九截手)의

위력이었다.

"으으..."

고현이 왼팔이 잘라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야수같은

신음을 토하고 있을 때 노독행의 몸이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건 시작일 뿐이야."

동시에 그의 오른손에서 다시 예의 광채가 번뜩였다.

고현은 촉망중에도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하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팟!

"크악!"

선혈이 뿜어지며 그의 오른팔마저 싹둑 잘라지고

말았다.

고현은 순식간에 양 팔이 잘라진 채 몸을 마구

뒤틀었다. 잘려진 양팔에서 뿜어나오는 피가 그의 몸을

시뻘겋게 물들였으나 그는 내색할 겨를도 없었다.

노독행이 다시 웃으면서 다가왔다.

"이제 겨우 반이로군."

고현은 정신없이 뒷걸음질치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이 악마같은 놈! 오지 마라!"

하나 노독행은 비호같이 그의 앞으로 날아오며 오른손을

아래로 그어댔다.

팟!

섬광이 그의 오른쪽 다리를 가르고 지나가며 고현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쿵!

"크으으...."

고현은 전신을 뒤틀며 마구 몸부림을 쳤다.

양 팔과 한쪽 다리가 잘려진 채 바닥에서 바둥거리는

그의 모습은 끔찍함을 넘어 애처로움을 느끼게 했다.

하나 노독행은 웃으면서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이거야, 고현. 형도 이렇게 당했던거야."

그는 천천히 발을 들어 고현의 유일하게 남은 왼쪽

다리위에 올려 놓았다.

고현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제...제발...."

팔 다리가 잘려지는 고통보다도, 이 자에 대한 공포가

더욱 더 그를 떨게했다.

노독행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다리를 힘껏 내려밟았다.

콰직!

고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입과 코에서는 시커먼 선혈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끄으으....끄으으..."

고현은 도저히 사람의 입에서 나는 음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괴이한 신음을 토하며 바닥에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숙여 그의 얼굴을 바짝 내려다

보았다.

고현의 고통과 공포로 벌겋게 핏발이 곤두선 눈은

노독행의 얼굴이 다가오자 점점 크게 부릅떠졌다.

노독행은 그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아직 한 가지가 남았어."

그의 손이 고현의 피로 물든 가슴으로 향했다.

고현은 팔다리가 잘려나간 고통도 잊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자신의 가슴으로 다가오는 노독행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노독행은 고현의 앞가슴 옷을 풀어 헤치고 그의 맨살에

손을 갖다 대었다.

부르르....

노독행의 손이 닿자 고현의 몸이 확연히 알아볼 수

있도록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노독행은 고현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중얼거렸다.

"이게 마지막이야."

동시에 그의 손은 고현의 앞가슴을 뚫고 그대로

등뒤까지 관통하고 말았다.

"커억!"

고현의 동공이 찢어질 듯 부릅떠지며 전신이 학질걸린

사람처럼 마구 떨렸다.

그러다가 점차로 힘이 빠지며 축 늘어졌다.

그제서야 노독행은 천천히 고현의 앞가슴에 박혀 있던

손을 빼내었다.

그의 손은 고현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으나 그는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형님을 위한 피(血)였다.

결코 더럽거나 잔인한게 아니다.

노독행은 아직도 팔년전의 그날 보았던 형님의 처참한

죽음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고현이 오늘 당한 것은 그리 심하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때 형님의 풀어헤쳐진 머리사이에 박혀 있는 두 눈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고통과 분노에 부릅떠진 처절한 눈을...

'형님. 이제 눈을 감으십시오.'

노독행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한동안 노독행은 알 수 없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이

이중삼중(二重三重)으로 포위되어 있는 것을 알았다.

어느 사이에 나타났는지 수십 명의 고수들이 그를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노독행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 자들이 천상회의 정예(精銳)들인가?

겨우 이런 자들때문에 자신의 가문이 혈겁을 당하고,

일흔 여섯 명의 아까운 생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형이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단 말인가?

노독행은 이들을 용서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그때 그들의 가운데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하나의 이상한 물체가 놓여졌다.

그것은 누렇게 변색된 호랑이 가죽으로 둘러싸인

의자였다.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처음에는 하 을게 분명한 호랑이

가죽은 구석구석이 검은 때로 물들어 있었고, 여기저기가

털이 빠져나가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동나무로 된 의자또한 너무나 낡아서 금시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의자위에 하나의 괴이한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노독행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은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더구나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두 팔과 두 다리는 모두 잘려져 나가 보기 흉한

몸뚱아리만이 동그마니 남아 있었다.

온 몸이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혀 있었고, 두 귀와 두

눈마저 모두 없어진 채 검은 구멍만이 공허하게 뚫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노독행의 몸은 그대로 굳어졌다.

아무리 처참한 몰골로 변했어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설사 썩어서 재가 된다 해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         3          권         끝         >

1부를 마치며...

이 한편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너무도 오랜 시간을

움츠려 있었다.

처음 의도는 지금까지 나왔던 어떤 무협소설보다도

통쾌한 일대 복수극(復讐劇)을 써보고 싶었으나 이제 막

반환점을 통과한 지금 과연 처음 의도한 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본 저자의 다른 작품들과는 어느 정도의

차별성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졸저 <태극문(太極門)>을 낸 이후에 두 번째로 출간한

<강호무뢰한(江湖無賴漢)>은 의외로 많은 분들에게서

질책어린 충고를 들었다.

본 저자 자신은 천편일률를 벗어나 멋진 활극을 써보고

싶었는데 필력(筆力)의 부족으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아마도 <태극문>의 진중(眞重)한 분위기가 더

독자들의 마음에 와 닿는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이 작품은 <태극문>과도 다르고 <강호무뢰한>과도

다르다.

또 본 저자가 예전에 내놓았던 어떤 작품들과도 약간은

색 다르다.

주인공의 성격이나 캐릭터를 굉장히 중요시 했는데

그때문에 너무 괴물같은 인물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1부 후반에서 보았듯이 2부에서는 괴물같은

면보다는 인간적인 면이 조금씩 더 부각될 것이다.

또한 본 저자가 항상 취약하게 생각했던

여인(女人)들과의 애정관계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상당한 부분을 할애할 예정이다.

2부에서는 복수를 위해 단신으로 천상회에 뛰어든

노독행의 앞으로의 행적(行迹)과, 모용추수와의 애끓는

사랑, 그리고 사마표향, 방립동, 장록번간에 서로 얽히고

히는 애증(愛憎)문제가 본격적으로 펼쳐질 전망이다.

물론 노독행 자신도 과거 노가살수문의 혈사(血史)에

숨은 진정한 비밀을 파헤치게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두 명의 숙적(宿敵), 동방유아와

장록번과의 목숨을 건 승부도 벌어질 것이다.

1부가 노독행 개인의 복수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2부는

무도(武道)와 애정(愛情)이라는 약간은 상반된 내용에

역점을 둘 것이다.

가문의 처절한 원한을 등에 지고 강호무림에 홀연히

뛰어든 냉혈무정의 사나이, 노독행!

그는 과연 가문의 피맺힌 원한을 갚고 일흔 여섯 명

원혼(寃魂)들의 넋을 달랠 수 있을 것인가?

노독행과 모용추수와의 가슴을 치는 사랑은 어떤 결말을

맡게 될 것인가?

당대의 천하제일고수인 동방유아와의 승부는?

천 년동안 내려오는 무쌍류와 소림사의 끈질긴 운명은

노독행과 장록번의 결투로 그 정점(頂点)을 이루게 될

것인데...

앞으로 2부에서 더욱 뜨겁게 펼쳐질 노독행의 외로운

복수극을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기 바란다.

독자제현의 건투를 빈다.

입하지절(立夏之節)   용대운(龍大雲) 배상(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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