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33화 (34/61)

제 33 장    나 도   이 제   할 일 이   정 해 졌 군

1

쿠쿠쿠콰콰콰....

마치 거대한 지진이 일어나는 듯 사방의 벽과 바닥이 마구

요동을 하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폭음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꽈꽈꽝!

마침내 벽이 갈라터지고 바닥이 부서진 채 거센 돌풍이

몰아쳤다.

집채만한 돌조각이 사방으로 난무하고 주위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폭발은 거의 일각(一刻)이나 계속되었다.

폭발이 멈추었을 때 반경 일백 장 이내는 완전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폭발의 여파가 어찌나 강력했던지 주위에는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온통 부서진 돌조각과

시커멓게 그슬린 파편들로 뒤덮혀 있었다.

허공을 자욱히 뒤덮었던 먼지들이 가라앉으며 주위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의 시간히 흐른 후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몇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휙휙!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연거푸 들려오며 십 여명의 인물이

폐허로 변한 장내에 내려섰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굉장하군...폭음이 들려 긴가민가했는데..."

그들중 붉은 짚신을 신고 머리가 까치집처럼 헝클어진 청년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이런 대폭발은 처음 보는군."

그는 코를 킁킁 거렸다.

바람에 섞여 희미한 화약 냄새가 풍겨왔다.

"역시....."

그의 뒤에서 낮고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화약인가요?"

붉은 짚신의 청년, 홍초혜 엽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적어도 일천근(一千斤)이상의 화약을 쓴게 분명하오.

게다가...."

엽동은 봉두난발한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건 내 추측인데 뇌화신주(雷火神珠)와 벽력화(霹靂火),

그리고 효천호(哮天狐)등 뇌문삼보(雷門三寶)도 동원된 것 같소.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폭발력이 나올 수 없지."

등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묘한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속삭이는 듯 하면서도 사람의 심금을 자극하는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대파멸진(大破滅陣)이로군요."

엽동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밖에는 생각할 수 없소. 이것을 직접 볼 줄은

몰랐는데...조향령도 어지간히 다급했던 모양이군."

"역시 그 자 때문이겠군요."

"틀림없소."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영주님!"

엽동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십 여장 떨어진 곳에서 폐허더미를 뒤적거리고 있던 붉은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그를 손짓해 불렀다.

엽동은 그의 등뒤에 서 있는 여인과 함께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적화야, 무슨 일이냐?"

붉은 옷의 여인, 엽적화는 말없이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검게 그슬린 커다란 석벽 더미 아래 하나의 시신이 깔려

있었다.

그 시신은 이마가 깨어지고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뭉게진

인물이었다.

하나 엽동은 날카로운 안력으로 그 시신이 석벽더미에 깔리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엽동을 놀라게 한 것은 시신의 처참한 상태가 아니라 시신의

정체였다.

"흑혈신권 유패!"

엽동은 나직하게 탄성 비슷한 소리를 냈다.

등뒤의 나직한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확실한가요?"

엽동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이 자는 지하뇌옥에 갇혀 있던 흑혈신권 유패요.

거 거무스름한 피부를 보시오. 아마도 유패는 죽기 전에 자신의

최고절학인 대흑마력을 펼쳤던 것 같소."

"십이마신이 다시 나왔다는 말인가요?"

"조향령이 대파멸진까지 썼는데 환마령이라고 발동하지

않았겠소?"

등뒤의 여인은 침묵을 지켰다.

그때 누군가가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눈부신 백의를 걸친 준수한 용모의 미남자였다.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키가 훤칠했고 체구도 당당했다. 무엇보다도 두 눈이 유성처럼

차갑게 반짝였고 얼굴 전체에 범접하지 못할 은은한 기상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백의사내는 슬쩍 오른 소매를 휘둘렀다.

스으으....

시신을 덮고 있던 커다란 석벽더미가 그대로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나 장내에 있는 사람들중 놀라거나 의외라는 빛을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백의사내가 무슨 짓을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설사 백의사내가 하늘을 두쪽으로 가른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건 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백의사내가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는게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생각이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을 것은 적어도 당금 무림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무적수사 장록번이기 때문이었다.

장록번이라면 가벼운 소매짓으로 석벽 하나를 가루로 만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다른 무엇을 해도 마찬가지로

생각될 것이다.

장록번은 그런 사람이었다.

장록번은 석벽이 사라지며 드러난 유패의 시신에게로 다가가

잠시 시체를 살펴 보았다.

유패의 시신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머리통은 거의 반이나 부서져 도저히 얼굴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양쪽 옆구리는 갈비뼈가 모두 부러져 움푹 꺼져 있었고,

특히 하체는 뼈없는 연체동물(軟體動物)처럼 흐물흐물해져

도저히 눈을 뜨고 똑바로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 장록번은 눈쌀조차 찡그리지 않은 채 유패의 누더기처럼

변한 옷을 벗기고 시신의 몸을 만져 보았다.

"무엇을 알아냈나요?"

엽동의 뒤에서 들렸던 낮게 가라앉은 여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장록번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백옥같이 준수한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깔려 있었다.

"좋군."

무엇이 좋다는 말인가?

중인들은 의아했으나 장록번은 곧 말을 이었다.

"이건 무쌍류의 필살무예에 의한 흔적이오."

여인의 음성은 다시 물었다.

"확실한가요?"

장록번은 빙긋 웃었다.

"무쌍류 무예는 일격 일격에 모두 전사(纏絲)의 힘을 담고

있소. 얼핏 보기엔 별게 아닌 것 같아도 일단 격중되면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지. 그래서 무쌍류 무예에 당하면 이런 상처가

남게 되오."

그는 유패의 누더기 같은 옷을 활짝 젖혔다.

드러난 유패의 끔찍한 모습에 중인들은 모두 눈쌀을

찌푸렸으나 곧 그들은 장록번이 말한 뜻을 알 수 있었다.

유패의 몸은 온통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타격(打擊)에 의한 것이었다.

한 번 힐끗 보기만 해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검게 죽어 버린 피부에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소용돌이를 이룬 듯한 나선형의 문양이 피부의

이곳저곳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문양 하나하나는 상대의 주먹이나 발, 혹은 무릎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흔적이 남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주먹이나 무릎이 몸에 닿을 때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무쌍류 무예의 가공스러움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것 같아도 무쌍류의 모든

무예는 굉장한 회전력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일단 격중되기만

하면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충격을 상대에게 가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굉장하군...."

엽동의 입에서 억눌린 듯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상대와 목숨을 건 싸움을 하면서도 이런 회전력을 구사할 수

있다는게 불가사의하게 생각되었다.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무쌍류에서는 필살무예를 익히기 전에 전신에 전사력을

발휘하는 것을 먼저 배운다는 사실을...

장록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것으로 나도 이제 한 가지 할 일이 정해졌군."

그의 음성은 너무도 나직했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단지 한 사람, 나직한 저음의 여인만이 그 음성을 들었는지

장록번을 빤히 쳐다보았다.

장록번도 그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검은 망사 사이로 빛나는 두 개의 눈은 그야말로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한없이 영롱하면서도 심혼(心魂)을 저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장록번은 그 눈빛을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당신도 할 일이 있지 않소, 표향?"

사마표향은 한동안 묵묵히 장록번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러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마천세와 조향령은 이미 이곳에 없어요. 철방주(鐵幇主)가

그들을 추적중이니 곧 연락이 올 거에요."

장록번은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자신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투였다.

사마표향은 다시 한 번 더 장록번의 얼굴을 주시하고는 몸을

돌렸다.

"주위를 살펴봐요."

그녀가 말하기 전에도 벌써 엽동과 엽적화를 비롯한 몇

사람들은 열심히 폐허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속속들이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 시체들을 본 중인들의 표정은 오직 놀라움과 경악

뿐이었다.

발견되는 시체들은 강호무림의 전설적인 인물들이었다.

천상회 내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십이마신!

개개인이 능히 천상회주에 버금가는 실력을 지닌 절세의

고수들이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시신의 흔적은

그들이 대폭발이 있기 이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마침내 어떤 하나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입에서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음...."

그것은 검은 학창의를 입은 주름진 노인의 시신이었다.

그 시신은 참혹하게도 상반신만 있었다. 하반신은 아마도

페허의 어느 한 구석에 쳐박혀 있을 것이다.

그 시신을 내려다보는 사마표향의 눈빛은 유달리 영롱하게

반짝거렸다.

"혁잔심도 당했군요...."

장록번이 천천히 상반신만 남은 혁잔심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이자가 바로 혁잔심이오? 일갑자(一甲子)전에 이미 천상회의

최고고수였다는 ...?"

"그래요."

장록번은 혁잔심의 상반신이 잘려나간 부위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빙긋 웃었다.

사마표향은 그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잠시 기다렸으나

장록번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만을 머금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록번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보는 사람을 의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딘지 모르게 만족해하는 빛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족스러운가?

사마표향은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가 현명한 점이었다.

그녀는 결코 남의 비밀을 억지로 알아내려 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억지로 알아내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감정만 상하게 될

뿐이다.

묻지 말아야 할 말은 묻지 않는게 좋다.

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아도 언제고 장록번의 마음속을 알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혁잔심외에도 몇 구의 시신이 더 발견되었다.

하나 그들이 찾고 있는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거의 백 여장에 달하는 광활한 폐허를 이잡듯이 뒤지고

다녔는데도 더 이상의 시신은 없었다.

엽동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하군. 그는 죽지 않았을까?"

말을 하면서도 엽동는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아무리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엄청난

대폭발 속에서는 살아나올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 폭발은 그를

목표로 한 것이 분명한 이상 그가 있는 곳에 집중적으로

폭발력이 미치도록 배치된게 확실했다.

그렇다면 설사 무공(武功)의 신(神)이라 할 지라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혹시 그는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 아닐까?

그때 엽동은 장록번이 입가에 계속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찡그려졌다.

그는 사마표향이 아니므로 묻고 싶은 것을 참지 못했다.

"무엇이 그렇게 우습소?"

장록번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자는 이곳에 없을 거요."

엽동뿐만 아니라 사마표향의 시선도 장록번의 얼굴을 향했다.

"어떻게 그걸 아오?"

"본파(本派)의 무공중에 오행지둔(五行地遁)이란 수법이

있소."

"오행지둔?"

장록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땅속으로 몸을 숨겨 적의 암습으로부터 피하는 수법이오.

특히 이런 폭발로부터 몸을 보호하기에는 아주 유용한 것이지."

엽동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자가 그 오행지둔법을 알고 있다는 말이오?"

"무쌍류의 무예는 본파와 그 뿌리가 같소. 그러니 무쌍류에도

오행지둔과 유사한 수법이 있을게 아니겠소? 비록 그 명칭이야

다르겠지만..."

엽동은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와 같은 엄청난 폭발 아래서 견뎌낼 수

있다는건 믿어지지 않는구료."

"물론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오. 무쌍류의 후예는 결코 쉽사리 죽지 않소."

엽동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구나 그 자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 자를 떠올리자 엽동은 잠시나마 그 자가 죽었을 거라고

믿었던 자신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그런 자가 죽었을 리가 없다.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무정한 자가....

지옥의 염라대왕도 그 자가 오는 것은 반갑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엽동은 그가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다시 폐허더미를 뒤지고 다녔다.

조금전보다는 한결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거의 반 시진이나 지나서였다.

그것은 하나의 핏자국이었다.

이곳에는 수많은 핏자국이 나 있었다. 아니, 완전히 피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너무도 많은 고수들이 너무도

처참하게 죽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내(川)를 이룰 정도였다.

그런데도 유독 이 핏자국이 시선을 끈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 핏자국에서 미약하나마 피냄새가 풍겨나왔던 것이다.

핏자국에서 피냄새가 풍겨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무엇때문에 그것이 엽동의 주의를 끈 것일까?

피냄새가 난다는 것은 핏자국이 생긴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더구나 이곳은 얼마전에 대폭발이 일어났던 곳이었다. 아무리

지독한 냄새라도 이러한 폭발이 있고 나면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 뻔했다.

그런데도 이 핏자국에서는 피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것은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을 나타낼 뿐이었다.

'이 핏자국은 대폭발 후에 생긴 것이다.'

대폭발후에도 누군가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에 떨어져 이 핏자국이 된

것이다.

엽동은 확신하고 핏자국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좀처럼 다른 핏자국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나 처음 발견한 핏자국에서 십 여장 떨어진 곳에서 그는

다시 두번째 핏자국을 찾아냈다.

냄새도 조금전보다 더욱 짙어졌다.

그 핏자국이 진행하는 방향으로 다시 십 여장쯤 가자 세 번째

핏자국이 나타났다. 이번의 핏자국은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아마도 피를 흘린 자의 상처가 상당히 심각한 모양이었다.

엽동은 그 핏자국이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때 저 멀리에서 하나의 인영이 쏜살같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엽동은 힐끗 보는 것만으로 그가 철모방(鐵矛幇)의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철모방 특유의 짙은 고동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인물은 장내로 날아오더니 황급히 사마표향을 향해

다가갔다.

"방주님의 전갈입니다. 사마천세와 조향령의 행방이

발견되었답니다."

사마표향은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디지요?"

철모방의 인물은 급히 말했다.

"횡안령(橫雁嶺)쪽입니다."

그 말에 엽동은 번쩍 눈을 빛냈다.

횡안령은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곳이다.

동남쪽!

공교롭게도 그 자가 피를 흘리며 사라진 방향이 아닌가?

이것은 단순한 우연인가, 아니면....?

'우연이라니...우연따위는 없다.'

그 자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사마천세와 조향령의 뒤를  고

있었던 것이다.

2

"대체 어디까지 가야 되는건가?"

짜증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조향령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에서는 실날 같은 광채가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삼십 리 정도 더 가면 됩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런데....그들이 정말 우리를 도와주려고 할까?"

조향령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는 저를 믿으십시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이상한 마력(魔力)을 지니고 있었다.

잠시 불안한 표정을 지었던 상대도 용기를 얻었는지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자네를 믿네. 아암. 믿고 말고. 그러지 않았으면 팔

년 전에 그런 일을 했을리가 없지."

조향령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음성에서 어딘지 모르게 후회하는 듯한 기색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사마천세(司馬千世)라 했다.

올해 나이 오십 이세.

전대의 천상회주인 사마일력(司馬日歷)의 하나뿐인 동생이며

현재의 천상회주이기도 하다.

인물됨이 준수하고 무예에 대한 소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하나 그의 인생은 비운(悲運)의 연속이었다.

한 인물의 그늘이 그를 가려 버렸던 것이다.

바로 그의 형인 사마일력이었다.

사마천세는 준수했으나 사마일력은 더욱 준수했다. 사마천세는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사마일력은 그를 몇 배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사마천세의 비극(悲劇)은 시작되었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는 자신을 형에 비교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씁쓸한 패배감 뿐이었다.

무엇을 해도 형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천상회의 회주 자리는 당연히 형의 차지였다.

이십 오세때 사마천세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사마천세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일 년도 되지 않아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

버렸다. 사마천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것은 그 상대가

다름아닌 자신의 형이라는 사실이었다.

형의 결혼식날, 그는 겉으로 웃었으나 마음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한 가지 굳은 맹세를 했다.

- 형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언제고 반드시 형의 모든 것을 빼앗고야 말리라!

그로부터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은밀히 형을 무너뜨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형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포섭했고, 나름대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마천세는 낙심하게 되었다.

형은 완벽했다.

어디에도 허점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고수들을 끌어들이고 세력을 쌓아도 형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형을 능가할 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의 앞으로 구원처럼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조향령이었다.

조향령은 당시 천상회에 가입해 눈부신 두각을 나타내며

단숨에 총호법이란 지위까지 올라온 인물이었다.

사마천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에게 미끼를 던졌는데

조향령은 금세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결맹(結盟)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꿈으로만 여겨졌던

일들이 하나 둘씩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일 년도 안돼

사마천세는 과거의 자신이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력을 규합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거의 대부분이 조향령의 능력 때문이었다.

사마천세는 조향령의 끝도 보이지 않는 능력에 내심 얼마쯤의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으나 형에 대한 복수심이 그것을 눌러

버렸다.

결맹한 지 정확히 일 년이 되는 날, 마침내 사마천세는

거사(擧事)를 시작했다.

일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

천상회의 거의 구할(九割)에 가까운 세력이 이미 이쪽으로

포섭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마일력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사마일력을 추종하는 세력 또한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예외가 있단면 단 하나, 사마표향만이 몇몇 측근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것 뿐이다.

엄격히 말하면 사마천세가 일부러 그녀의 탈출을 방조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그녀의 어머니를 생각해서

그녀에게만은 차마 살수(殺手)를 쓰지 못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녀가 몇몇 무리들을 규합하여 표향령이란 조직을

만들어 대항했으나 사마천세는 크게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오랜 숙원(宿怨)이었던 형을 누르고

강북제일의 방파인 천상회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그때의 기분은 .... 무어랄까?

생각한 것만큼 기쁘지는 않았다.

대신에 어떤 아릿한 아픔  같은 것이 마음 깊숙한 곳에

떠올랐다.

형과의 어렸을 적 모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형은 그에게 잘해 주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사마천세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형은 사마천세가 반역할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었다.

어쩌면 사마천세가 감히 반역을 하겠느냐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 형은 어려서부터 사마천세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모두

용서를 해 주곤 했었다. 형이 아끼는 물건을 깨뜨려도, 형의

애마(愛馬)를 사고로 죽게 했을 때도 형은 사마천세를 야단치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이 형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건 정말 형답지 않은 실수였다.

사마천세는 자신도 그런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요즘 들어와서 부쩍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조향령을 떠올릴 때마다 더욱 그러했다.

과연, 조향령이 자신을 도와준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조향령을 도와준 것인가?

어찌되었건 현재 천상회의 거의 모든 실권(實權)은 조향령이

쥐고 있었다.

사마천세 자신은 명목상의 주인일 뿐이었다.

사마천세는 자신이 조향령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자조섞인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어쨌든 조향령은 천상회를 잘 이끌어갔다.

적어도 그 자가 나타나기 전 까지는....

그 자!

사마천세는 그 자를 생각하자 가슴 가득히 의혹어린 공포심이

밀려왔다.

도데체 단 한 사람때문에 강북무림을 오랫동안 석권해 왔던

천상회가 뿌리째 흔들린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 없는 고수(高手)라 해도 혼자의 힘으로

천상회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것은 사마천세 뿐이 아니고 무림인이라면 누구나가 믿고

있는 확신이었다.

그런데 그 확신이 송두리째 뒤집혀진 것이다.

처음 십대고수중의 하나가 그 자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사마천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조향령의 오래된

측근인 장홍칠절과 십대고수중의 다른 몇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천상회의 최고살수조직인 흑수당이 무너지고, 그 자가

단신으로 천상회의 총단(總壇)에 뛰어들었다는 소식을 듣게되자

사마천세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사마천세는 조향령과

함께 총단을 빠져나와 어둠속을 달려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천상회의 자랑인 십대고수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삼대사자들은? 혈살대는?

그리고 십이마신은?

그들로도 그 자를 막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조향령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조향령은 오직

한마디만을 했다.

"금우두부(金牛頭府)의 사람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금우두부!

이 말을 듣자 사마천세는 눈쌀을 찌푸렸으나 그의 뒤를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금우두부는 강남에 있는 유력한 방파(幇派)였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천상회와 은밀히 왕래가 있었으며, 그 주된

목적은 강남제일방파인 포호산장에 관한 것이었다.

금우두부는 포호산장을 무너뜨리고 강남을 장악하고 싶었던

것이다.

천상회로서도 포호산장의 세력이 너무 거대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금우두부와 어느 정도까지는 친분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조향령이 말한 것은 금우두부의 인물들이 이번 일로 천상회를

도와주기 위해서 와 있다는 뜻이었다.

사마천세는 비록 금우두부의 힘을 빌린다는 것이 영

꺼림칙했으나 지금은 이것저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언제 그 악마 같은 자가 자신들의 뒤를 따라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나 조향령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사마천세는 어딘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이미 오래전부터 들었던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

형을 쓰러뜨리고 천상회의 새로운 회주가 되었을 때부터...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였다.

처음 조향령을 만나 반역을 계획했을 때부터 사마천세는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조향령은 사마천세의 얼굴을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시의 일은 제가 아니라 회주(會主)께서 앞장서서 벌이신

것입니다."

사마천세는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그렇지. 하지만 자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그와 같은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걸세."

"저는 단지 회주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조향령은 여전히 부드럽게 말했으나 그 음성속에는 한 줄기

냉혹함이 번뜩이고 있었다.

사마천세는 머뭇거리다가 무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내가 괜히 그 말을 꺼낸 것 같군.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금우두부와 제휴하는 일일세."

그때 처음으로 조향령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사마천세는 왠지 기분이 언짢아졌다. 꼭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욱하는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는 천하의 모든 일이 자네의 손바닥안에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어째서 일이 이 지경으로 악화되도록 내버려 두었나?"

조향령은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그 자의 출현은 의외였습니다."

사마천세는 코웃음을 날렸다.

"흥! 의외라니...자네의 입에서도 그런 말이 나올 때가 있나?"

자신의 말이 조금 심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항상 조향령에게

무언가 압박감을 느껴왔던 그는 일면 가슴 한 구석이 조금

후련해지는 기분도 있었다.

조향령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해졌다.

"그 자의 출현은 확실히 의외였지만..."

사마천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나하고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조향령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은 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향령의 말투가 약간 변했지만 사마천세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자네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그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되묻자 조향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마천세는 조향령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어안이 벙벙하여

우두커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조향령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빛났다.

"그들이 왔군요."

사마천세는 무심결에 조향령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양쪽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우뚝 솟아 있는 좁다란

협곡(峽谷)이었다.

고개를 들면 괴괴한 어둠에 잠겨 있는 절벽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아찔함을 느낄 정도였다.

저 멀리 협곡의 한쪽에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일단의 검은

무리들이 있었다.

사마천세는 조향령을 따라 그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을 향해 오는 무리들의 수는 의외로 그리 많지 않았다.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사마천세는 자신도 모르게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

'겨우 저 자들만으로 그 악마 같은 놈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향해 다가가던 사마천세의

얼굴에 이상한 빛이 떠올랐다.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 질수록

사마천세의 얼굴에 떠오른 빛은 짙어졌다.

그러다가 그들과의 거리가 십 여장 이내로 가까워지자

사마천세의 안색은 창백하리만치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검은 흑의를 입고 복면을 한 여섯 명의

흑의인들이었다.

사마천세의 안색을 변하게 한 것은 그들의 복장이 아니었다.

여섯 명의 흑의복면인들중 중앙에 서 있는 키가 훌쩍한

흑의인의 신형이 눈에 익었던 것이다.

그 흑의인은 유달리 키가 크고 몸이 앙상하게 말랐다.

그런데도 어깨가 유난히 넓어서 몸 전체는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 자의 복면밖으로 드러난 두 눈으로,

안광(眼光)이 기이한 금빛으로 번쩍거리고 있어서 어둠속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였다.

복면인은 사마천세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고개를 돌려

사마천세를 바라보았다.

복면인의 금빛이 이글거리는 눈빛과 마주치자 사마천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너는...."

복면인은 빙그레 웃었다.

"나를 알아보는군."

사마천세는 몸을 덜덜 떨다가 돌연 조향령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들은 금우두부의 인물들이

아닌데....!"

사마천세의 음성이 뚝 끊겼다.

조향령은 얼굴에 한 줄기 기이한 미소를 지은 채 사마천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사마천세의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자...자네...."

조향령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이 해야할 일이 없소."

그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마천세는 가슴이 후끈거림을

느끼고 두 눈을 부릅떴다.

"헉!"

어느 사이에 뚫고 들어왔는지 하나의 예리한 칼날이 그의 등을

관통하여 앞가슴으로 삐져 나와 있었다.

사마천세는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칼날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등뒤에는 흑의복면인중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유난히 두 팔이 길고 손에 뭉툭한 강도(剛刀)를 든

인물이었다.

흑의복면인이 들고 있는 강도는 길이가 두 자를 조금 넘고

도신(刀身)이 다른 칼보다 훨씬 넓었다. 칼날 전체에서 기이한

한기(寒氣)가 흘러 나오고 있었는데, 도신의 중앙으로

알록달록한 무늬의 선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사마천세는 흑의인의 손에 들린 특이한 칼을 보고 있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너...너는 칠홍개천(七虹開天) 낙태독(駱太毒)이구나..."

강도를 든 흑의복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바로 낙태독이오."

사마천세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사마천세는 휘청거리는 몸을 필사적으로 곧추세우며 조향령을

돌아보았다.

"조향령...너...너..."

조향령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은 너무 어리석었소, 사마천세."

그의 우수가 흔들렸다.

동시에 사마천세의 머리통은 잘 익은 수박처럼 갈라터졌다.

빠악!

시뻘건 피가 질펀한 뇌수와 함께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낙태독은 사마천세의 가슴에 박혀 있던 칼을 빼내며 선혈을

피해 옆으로 이 장쯤 몸을 움직였다.

그는 피묻은 강도를 옷소매로 쓰윽 닦고는 조향령을 보며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어차피 죽을 놈인데 일부러 손을 쓸 것 까지 있었소?"

조향령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이자가 나를 보며 우는 소리를 늘어 놓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네."

낙태독은 질펀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마천세의

시신을 내려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것으로 이제 천상회는 아주 끝장이 난 것인가?"

조향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목표한 것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아쉬운데로 최소한의

성과는 거둔 셈이지."

그때였다.

두 눈이 금빛으로 이글거리는 중앙의 흑의복면인이 갑자기

안광을 번뜩이며 짤막하게 소리쳤다.

"누군가 온다!"

조향령과 낙태독은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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