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35화 (36/61)

제 35 장      목  이   마  르  다

1

절벽은 깊었다.

아무리 내려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독행은 내려가는 몸을 멈추지 않았다.

추적을 포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설사

조향령이 지옥끝으로 도망갔다고 해도 그 지옥의 끝까지  아가

반드시 직접 손으로 숨통을 끊어놓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아버지의 영혼앞에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떳떳하다는 것은 무가치(無價値)한 일이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일이란 없는 법이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버지도, 형도, 일흔 여섯 명의 식솔도 되살아 날 수 없다.

그가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이고, 조향령의 몸을 갈가리 찢고,

양 손을 피로 물들인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되살아 날리가 없다.

하지만 중도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오직 그 일만이 전부인 것이다.

그외에 그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를  고, 죽이는 일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결국 피에 굶주린 살인마일 뿐이다.

노독행은 이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그는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의식적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녀였다.

천상회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그녀에 대한 생각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자칫 마음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토록 억지로라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일단 그녀에 대한 생각이 나자 미치도록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것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목이 마르다!'

노독행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노독행 자신도 지금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 한 사람을 이렇게 보고 싶었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

아니, 있기는 있었다.

사마표향을 처음 보았을 때도 이와 같은 갈증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때 그는 그 갈증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노독행은 갈증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복수에 미친 한 마리 살인귀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절규해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속은 점점 더 타들어가기만 했다.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의 몸과 마음을 새카맣게 태워버릴

것이다.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다 해도 과연 갈증은 사라질 것인가?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이 타는 듯한 목마름을 없앨 수

있겠는가?

그녀의 몸에 손을 대지 않고 단지 보는 것만으로 이 갈증을

억제할 수 있을까?

'그래. 나는 그녀를 안고 싶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안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설사 제아무리 피에 미친 한 마리

야수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를  고, 죽이는 것외에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단 말인가?

마침내 절벽의 바닥에 도달했다.

하나 노독행은 반대쪽 절벽을 오르는 것도 잊은 채 우두커니

텅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과연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복수외에 내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이 존재한단 말인가?

나 같은 사람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노독행은 문득 고개를 들어 반대편 절벽을 올려다 보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앞이 침침해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노독행은 몇 번이고 눈을 깜박거렸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한 절벽이 괴괴한 어둠속에서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노독행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절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나는 그녀가 보고 싶다.

그녀의 품속에 안겨 잠깐만이라도 쉬고 싶다.

피로 물든 내 영혼을 아주 조금만이라도 닦아내고 싶다.

하지만....

나는 과연 그녀의 품속에서 쉴 수 있을까?

내 영혼에 묻은 피가 닦일 수 있을까?

그녀의 한없이 깨끗한 영혼이 내 피로 얼룩지는 것은 아닐까?

절벽을 삼분의 일쯤 올라왔을 때 노독행은 심한 피로를

느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는 거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더 이상의 추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이런

상태로는 설사 그들의 뒤를 추적한다 해도 그들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나치게 진력을 소모하고, 지나치게 다치고, 지나치게

피를 흘려서 도저히 남과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노독행은 절벽에 매달린 채로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깎아지를 듯 솟아 있는 절벽위의 어둠이 유난히 음침해

보였다.

그 어둠의 한 곳에서 조향령이 자신을 내려다 본 채 웃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노독행은 묵묵히 그 웃음을 쏘아보았다.

'그래. 지금은 웃고 있으라구. 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 웃음을 피눈물로 만들어 주고야 말테다.

노독행은 천천히 절벽을 내려왔다.

멀리 불빛이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그녀를 볼 수가 있다.

그녀의 품속에 안겨 쉴 수가 있다.

한 순간, 정말 한 순간 노독행은 이대로 그녀와 함께 영원히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그 충동이 강렬했던 만큼 그 후에 찾아온 자괴감(自愧感)도

더욱 강렬했다.

내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아버지와 형의 영혼을 앞에 두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보고 싶다!'

어쩌면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인간(人間)'이 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인간'이 되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게 있어 '인간'이란 아직은 머나먼 곳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불빛이 가까워지며 뜨락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십 여장 남았다.

피는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다. 흘러내릴 피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 눈앞이 흐릿하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나

그는 작은 뜨락과 그녀가 잠들어 있을 허름한 초옥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저곳에 그녀가 있다.

저 작고 아담한, 아스라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바로 저 방에...

마침내 도착했다.

이제 뜨락을 지나 방문을 열면 그녀를 볼 수가 있다.

그녀는 아마도 잠을 자고 있겠지.

어쩌면 꿈속에서 그를 만나 풀밭을 뛰어놀고 있을지 모른다.

입가에는 방긋 미소를 지은 채...

아니면 그를 그리워하다가 꿈결에서도 한 방울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미소를 짓든 눈물을 흘리든 그녀는 아름다울 것이다. 틀림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이제 뜨락을 모두 지나왔다.

방문을 열기만 하면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다.

잠들어 있는 그녀를 깨울까?

아니면 그녀옆에 누워 함께 잠을 잘까?

그녀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녀를 보기만 하고 끌어안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방고리를 잡았다.

그녀를 안을 수 있을까?

아마 그녀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그것은 모두 나의 착각이고, 그녀는 단지 나를 안전한

보호자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상관없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갈증은 사라질 것이다.

다음에는...?

노독행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

방안은 조금도 어질러지지 않았다.

그가 떠나올 때와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노독행은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단 한 가지,

그녀만이 없을 뿐인데....

그녀가 없다!

그녀가 없어졌다!

그녀가 사라져 버렸다!

노독행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침상은 싸늘했다.

이불을 잡고 얼굴에 갖다 대었다.

그녀의 냄새가 났다.

그녀의 체취....

그 아릿한 듯한 달콤한 체취....

콱!

그는 이불을 힘껏 움켜 쥐었다.

파스스...

이불이 그의 손에서 먼지가 되어 흩날릴 때, 그의 입에서는

성난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

그녀가 사라졌다.

내 꿈도 사라져 갔다.

"아아아--!"

이제 무엇으로 내 갈증을 막을 것인가?

이 불타버릴 것 같은 갈증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아아아--!"

대체 무엇이 그녀를 사라지게 했단 말인가?

그녀는 나를 기다리겠다고 했는데...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그녀의 약속은 단지 달콤한

사탕발림에 불과했단 말인가?

"아아아--!"

아니면, 누군가가 그녀를 데려갔단 말인가?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을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스스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것은 더욱더 불가능한 일이다.

"아아아--!"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같이 누군가를  고 죽이는 일밖에는 할 수 없는 인간이...

"아아아--!"

이제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내게 있어 그녀는 이미 내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아아아--!"

2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노독행은 자신이 한바탕 꿈을 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단신으로 천상회를 쳐들어 간 일도, 그곳에서 처절한

혈투(血鬪)를 벌이고 만신창이의 몸으로 조향령의 뒤를  아간

일도, 그리고 천길 절벽을 내려와 그녀에게 돌아간 일도 모두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사라진 것도...

그래.

난 한바탕 악몽(惡夢)을 꾼 거야.

이제 잠을 깼으니 악몽도 사라졌겠지.

노독행은 눈을 떴다.

그리고 한 쌍의 영롱한 눈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맞았어. 나는 꿈을 꿨던 거야.'

노독행의 입에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그 미소는 채 완전히 떠오르기도 전에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은 분명 여인이었으나, 그녀가

아니었다.

자신만의 '그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깨어 났군요."

여인은 그를 보고 방긋 웃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환한 미소를 가진 여인이었다.

흑나찰 조교연.

그를 내려다 본 채 웃고 있는 여인은 뜻밖에도 흑나찰

조교연이었던 것이다.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박속같이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냈다.

"당신이 이틀동안이나 깨어나지 않아서 이대로 죽는줄

알았어요."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으나 그는 눈살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안돼요. 당신은 더 누워 있어야되요."

조교연은 급히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누르려 했다.

탁!

그는 거칠게 그녀의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혹하기조차한 행동이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너무 상처가 심해요. 이대로 움직이면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다시 터져서 출혈(出血)이 계속될 거에요. 그때는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와도 당신을 살릴 수 없어요."

노독행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녀'는 없었다.

텅빈 방안에 단지 자신과 조교연만이 있을 뿐이었다.

노독행은 이때처럼 가슴이 공허한 적이 없었다.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으로도 그

뚫린 구멍을 메우지 못할 것 같았다.

조교연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내 말 들어요. 당신은 더 누워서 쉬어야 해요."

그녀는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뉘이려 했다.

노독행의 외눈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었으나 그의 번뜩거리는 외눈은 그녀에게

어떻게 된거냐고 묻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받자 조교연의 가무잡잡한 얼굴에 한 줄기 희미한

홍조가 피어 올랐다.

조교연은 다시 방긋 웃었다.

"길을 가다가 어디선가 미친 듯한 고함소리를 들었어요.

산(山)이 무너지는 듯한 무서운 소리였어요. 이상해서 소리가 난

곳으로 와보니 당신이 쓰러져 있었어요."

노독행은 여전히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당신이 죽은 줄로만 알았어요. 그때 당신은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피를 흘리며 바닥에 누워 있었거든요. 나는

당신처럼 피를 많이 흘리고 심한 부상을 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붉은 혀로 살짝 입술을 축였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으나 무척 고혹적인 모습이었다.

하나 노독행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그녀는 조금 어깨를 떨었다.

"당신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침상에 누인

다음 상처에 가지고 있던 금창약(金瘡藥)을 발랐어요.

내상(內傷)은 너무 심해서 손도 쓰지 못했는데....당신은

이틀만에 저절로 깨어난 거에요."

말과는 달리 그녀의 안색은 몹시 초췌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녀는 지난 이틀동안 그를 간호하느라

침식(寢食)도 잊은 채 많은 고생을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자신이 아끼던 두

알의 자령단(紫靈丹)과 세 뿌리의 설삼(雪蔘)을 미련없이 그에게

복용시켰다. 그러지 않았다면 천하의 노독행이라 해도 이틀만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당한 상처는

막중한 것이었다.

하나 그녀는 그것을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노독행도 그 점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묵묵히 있었다.

조교연은 처음에는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줄 알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으나 이내 그가 자신이 있는

곳으로 얼굴만 돌리고 있을 뿐 시선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텅빈 공간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왜 갑자기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단지 창백한 얼굴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로 보이는 그의

외눈이 허무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본 순간 그녀의

가슴속에는 무언지 모를 감정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피로 범벅이 되어 있던 그의 머리카락은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낮빛은 더욱 창백하고 핼쑥하게 보였다.

핼쑥한 얼굴에 공허한 눈....

그것은 그녀가 알고 있던 그 냉혹하고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혈한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모습이었다.

그렇다.

그도 결국은 한낮 고독한 젊은이일 뿐이다.

무섭고, 냉혹하고, 잔인한 그의 모습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그의 가면(假面)일 뿐 그도 내심은 하나의 평범한 청년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

오히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욱 외롭고 고독할

것이다.

가면이 부서지고 드러난 그의 내면(內面)을 본 그녀는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은 이내 아릿한 슬픔으로 변해갔다.

무엇이 그의 가면을 부수어 놓았을까?

무엇이 그를 냉혹한 살성에서 고독한 젊은이로 바꾸어

놓았을까?

그녀는 문득 분수(汾水)의 배위에서 자신이 느꼈던 고독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지금 얼마나 심한 고독감에 휩싸여 있는지를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속의 슬픔이 더욱 깊어갔다.

그때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눈가에 아롱아롱 눈물을 매달고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의 몸이 한 차례 휘청거렸다. 하나 이내 그는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봐요...!"

그녀는 급히 일어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돼요. 당신은 지금 움직여서는...."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그대로 몸이 굳어졌다.

그의 얼굴은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했다.

외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빛 또한 표정만큼이나 차갑기 그지

없었다.

조금전에 그녀가 보았던 허무하고 공허한 모습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냉혹한 희대(稀代)의 살성, 냉혈무정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의 창백한 입술이 살짝 열리며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치료를 해줘서 고맙다고 해야겠지. 이 빚은 갚겠어."

"이봐요. 난...."

그녀는 그런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그의 다음 말이 그녀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내 앞을 가로막으면 용서하지 않겠어."

그녀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 말의 내용보다도 그 음성속에 담긴 냉혹함이 그녀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할 작정이다. 그녀가 한 번만 더 앞을

가로막으면 정말로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녀의 몸을 스치듯 지나 방문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도

그녀는 우두커니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래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몸이 밖으로 나와 작은 뜨락을 반쯤 지나갔을 때 비로소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뒷등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한 줄기 결연한 빛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는 조금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뒤에서 이 장 쯤 떨어진 곳을

말없이 따라갔다.

노독행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 보며 다부진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의 앞을 가로막지는 않을 거에요. 그러니 내가 어디를

가건 당신도 상관하지 마세요."

노독행은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피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한동안 주위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앞으로 걸어나갔다.

조교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저만큼 걸어가는 그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가 가면 그녀도 갔고, 그가 서면 그녀도 섰다.

노독행의 걸음은 점점 깊은 산중으로 향했다. 노독행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조교연은 그가 가는 곳이 어딘지를 몰라 잠시

의아한 모습이었다.

한 시진쯤을 가자 그들의 앞에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절벽이 나타났다.

노독행은 서슴없이 좌측의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조향령에 대한 추적을 계속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조교연은 절벽을 올라가는 노독행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도 절벽을 올라갔다. 그가 절벽을 오르는 이유를 몰랐으나

그가 어디를 가든 따라가려는 생각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었다.

절벽을 오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가 않았다.

특히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는 상당히 고역스러운 일임이

분명했다.

노독행의 전신은 금세 땀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하나

노독행은 절벽을 오르는 것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거의 삼백

여장에 달하는 절벽을 반쯤 올라왔을 때는 노독행도 잠깐 절벽에

붙어서 숨을 고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끝도 없이 푸른 숲이 어디까지고 계속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날은 청명했다. 한 조각 구름이 하늘 한

모퉁이에서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중간에 매달린 채 바라본 세상은 한없이

푸르기만 했다.

푸르른 날....푸르른 숲....

다시 목이 말라왔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나의 갈증을 풀어줄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가....

절벽을 모두 올라왔을 때 노독행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하나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근육 사이사이에서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독고무정의 고된 수련이 가져다 준 결과였다. 인간의 한계를

돌파한 그의 육체는 약간의 휴식과 적당한 자극으로 이제 거의

정상상태로 되돌아온 것이다.

절벽을 올라온 노독행은 절벽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 절벽은 며칠 전에 조향령이 정체불명의 금빛 눈동자를 지닌

흑의복면인과 함께 사라진 곳이었다.

그때 금안복면인은 조향령을 이끌고 오십 장이 넘는 이 절벽을

뛰어넘어갔다.

노독행이 찾고 있는 것은 그때 그들이 내려선 위치였다.

제아무리 금안복면인이 신법의 신(神)이라 할지라도 오십

여장을 날아온 이상 진력이 어느 정도 소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닥에 착지(着地)했을 때 아무래도 발에 힘이

들어가게 되고, 자연히 그 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자국을 찾을 수만 있다면 다시 추적을 시작할 수 있다.

지금의 그에게 조향령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나 좀처럼 별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가 절벽가를 뒤지고 있을 때 뒤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악...하악...."

노독행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것이 조교연의 숨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조교연은 온 몸이 파김치처럼 늘어진 채 절벽위로 올라와서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노독행은 그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수색을 계속했다.

마침내 그는 하나의 희미한 자국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절벽에서 이 장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두 개의 반쯤 파인 자국.

그것은 분명 사람의 발뒤꿈치가 땅을 판 자국이었다.

그 자국의 옆에는 언뜻 보아서는 좀처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두 개의 자국이 있었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자국들이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이 이곳에

내려섰을 때 전신에 잔뜩 공력(功力)을 끌어올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쌍의 발자국중 하나는 그런데로 선명한데 다른 하나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듯 희미한 것은 그들이 운기(運氣)한 공력이 전혀

판이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공력은 지극히 패도(覇道)적인 무거운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의 공력은 반대로 경묘(輕妙)하기 짝이 없는 날렵하고

빠른 것일 것이다.

노독행은 그 발자국들의 위치를 자세하게 살폈다.

발자국의 앞부분은 남서쪽을 향해 있었다.

그쪽으로 오 장쯤 조심스럽게 전진하자 다시 희미한 발자국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역시 한쌍의 발자국이 보일 뿐, 다른

발자국은 아무리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남아 있는 발자국은 좀더 분명한 방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노독행은 서슴없이 그 발자국이 향하는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조향령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누워 있다가 그가 앞으로

달려나가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노독행은 그녀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오직 희미하게 드러난

흔적을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앞서 가는 자와 따르는 자.

남자와 여자.

그들의 모습은 곧 풀밭너머 어디론가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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