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장 행 복 이 란 건 말 이 야
1
노독행은 드디어 똑바로 일어설 수 있었다.
그 동안 그가 흘린 땀을 모두 합치면 웬만한 양동이는 쉽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전신의 근육은 금시라도 터져버릴 듯 팽팽하게 팽창되었고, 몸
전체가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런채로 노독행은 웃옷을 입었다. 입었다기 보다는 걸쳤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침상옆에
섰다.
그리고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마터면 비명이 터져 나 올 뻔했다.
발을 움직이는 순간 전신의 근육을 찢어버릴 듯한 맹렬한
통증이 밀어닥쳤던 것이다.
그녀는 한쪽에 우두커니 선 채 그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한
발을 엉거주춤하게 앞으로 내민 채 굳어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전신의 피부가 미약하게 떨리는 것으로 보아 그가 지금
얼마나 심각한 통증을 느끼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그런 통증을 느끼는 듯한 착각이 들어
절로 몸을 움찔거렸다. 마음같아서는 자신이 그대신에 그 통증을
떠맡고 싶었다. 더 이상 그의 고통에 가득찬 얼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녀는 고개를 돌리는 대신에 그를 향해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프면 소리를 질러요. 그러면 조금 고통이 덜할 거에요."
노독행은 말없이 한 발을 바닥에 내디뎠다.
그의 몸이 쉴사이없는 경련을 일으켰다.
하나 노독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발을 움직였다.
뚝...뚝....
그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이
예리한 칼로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그의
곁으로 달려가 그를 부축하고 싶었다.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결코 그녀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방립동의 생사(生死)를 알기 전에는 그는 결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통에
가득 찬 걸음을 걷는 광경을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는 방을 가로질러 방문까지 도달했다.
그 시각은 일각정도 되었으나 그녀에게는 억겁(億劫)과도
같은 시간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보다 더욱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방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삐걱!
문이 열렸다.
그는 문고리를 잡은 채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그가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나 곧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황급히 문밖을 바라보았다.
다음순간, 그녀의 얼굴에 절망에 가득찬 빛이 떠올랐다.
문밖에는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앞에 선 인물은 남색 치마와 초록색 저고리를 걸친
여인이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얼굴이 계란형으로 동그랗고 아미(蛾眉)가 그린 듯 고왔다.
피부는 그야말로 백옥(白玉)으로 빗어 놓은 듯 뽀얗고
부드러웠다.
몸집이 조금 작아 갸날프게 느껴졌으나 키는 의외로 늘씬했다.
그녀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고요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녀에게서 뒤로 두 걸음 뒤에 한 명의 백의중년인이 그녀를
호위하듯 우뚝 서 있었다.
백의중년인의 허리춤에는 고색창연한 장검(長劍)이 매달려
있었다.
단정한 오관에 별빛처럼 차갑고 냉정한 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잘 닦인 한 자루 보검(寶劍)과도 같은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백의중년인은 물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노독행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곧장 예리한 칼날이 되어 그녀의
가슴을 후벼파고 들었다.
그녀는 그 시선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는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백의중년인의 앞에 서 있던 눈을 감고 있는 남색 치마의
여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언니로군요."
참으로 맑고 그윽한 음성이었다. 그 음성을 듣고 있으면
제아무리 흉악한 심성을 지닌 인물이라 해도 감히 경거망동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색 치마의 여인은 그녀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붉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수련향(睡蓮香)은 언니가 가장 좋아하는 향수지요.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는 달콤한 수련향은 언니 몸에서 밖에는
나지 않아요."
모용추수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가 정말로 두려워 하고 있는 사람은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한 백의중년인이 아니었다. 바로 이 남색 치마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왜 눈을 뜨지 않는 것일까?
남색 치마의 여인은 계속 그녀가 있는 곳으로 얼굴을 쳐든 채
말을 계속했다.
"언니가 집을 나간 후 산장은 쑥밭이 되었어요. 오빠도 언니를
찾겠다고 어디론가로 사라지고....아버지는 무척 화를 내셨죠.
하지만 난 언니를 책망하고 싶지 않아요."
모용추수는 금시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옆에 노독행이 있지 않았다면 그녀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남색 치마의 여인의 음성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언니에게는 언니의 길이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길이
있어요. 굳이 언니에게 다른 길로 가라고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내가 언니를 찾은 건..."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에요."
모용추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처음과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 어딘가 모르게 한 줄기 씁쓸한 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오빠는 언니를 떠나서는 살 수 없어요. 오빠는 필시 언니
근처를 맴돌고 있을 거에요. 그렇지요? 언니는 오빠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지요?"
모용추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다른 남자가 생겨 그가 어디론가로 떠나버렸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상심한 그가 어쩌면 인적없는
골짜기에서 싸늘한 시체로 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어떻게 그의 동생에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시누이에게...
남색 치마의 여인은 방립동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동방완아(東方婉娥)였다.
모용추수가 아무런 말이 없자 동방완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해요, 언니. 오빠가 있는 곳을 알려 주세요. 알려준다면
나는 결코 언니를 속박하지 않을 거에요. 언니를 산장으로 끌고
가는 일 같은 건 결코 하지 않을 거에요."
모용추수는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가 순순히 물러나 주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한 일도 하고
싶었다.
하나 방립동이 어디 있는지는 그녀도 알고 있지 못했다.
대체 그의 행방을 어떻게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간신히 한마디만을 중얼거렸을 뿐이다.
"나도...몰라요."
그 순간 동방완아의 얼굴은 눈에 띄게 냉랭해졌다.
그녀는 한동안 모용추수가 있는 쪽을 쳐다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조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미소였다.
그에 따라 그녀의 음성 또한 싸늘해졌다.
"좋은 사람이 생겼다고 오빠는 벌써 잊었단 말이군요."
이어 그녀는 몇 차례인가 허공을 두리번거리더니 노독행이 서
있는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저 사람이 냉혈무정인가요? 과연...피냄새가 진동을
하는군요. 십리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겠어요."
그녀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다른 사람과는 조금 틀리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는 사람을 보기 전에 먼저 주위를 두리번 거리고는 했다.
흡사 먹이감을 찾는 사냥개처럼....
그렇다.
그녀는 냄새로 상대를 분간해 낸다.
그녀가 지금까지 두 눈을 뜨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동방완아.
그녀는 앞이 안보이는 장님이었던 것이다.
"양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다는 살인귀와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자....당신들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군요."
동방완아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예리한 비수가 되어
모용추수의 가슴을 찔렀다.
모용추수는 물론 고통스러웠다.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그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시누이라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손가락질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다는게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웠다.
동방완아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자가 그렇게 매력이 있나요? 오빠보다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살인자에게 매력을 느끼나요? 언니는 그런 여자에요?"
모용추수는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노독행은 결코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살인자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도 함부로 몸을 굴리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게 된건 내가 여자이고 그가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내가 여자임을 느끼게 해준 첫 번째 남자이다.
그외에 다른 무엇은 없다. 아무것도 없다.
하나 그녀는 한마디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동방완아의 냉혹한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 자가 소문처럼 대단한 사람인지 확인해 봐야 겠어요.
화(華)숙부님!"
그녀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뒤에 말없이 서 있던
백의중년인이 느릿느릿 앞으로 나섰다.
모용추수의 얼굴이 공포로 새파랗게 질렸다.
모용추수는 백의중년인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똑똑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노독행은 결코 그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노독행은 백의중년인의 가벼운 손짓 조차도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비룡검객(飛龍劍客) 화비룡(華飛龍).
그는 강남의 유명한 명문(名門)인 화씨세가(華氏世家)에서
배출한 제일가는 검객이었다.
모용추수의 아버지인 모용태릉보다도 오히려 강하다고
알려졌고, 동방유아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패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일단 검을 뽑으면 하늘을 가리우고 땅을 쪼갠다는
무적(無敵)의 검객(劍客)!
그는 냉정한 눈으로 노독행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노독행의 전신을 쓰윽 켰어보다가 동방완아를
돌아보았다.
"저자에게는 손을 쓰지 않겠다."
동방완아는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화비룡의 얼굴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저자는 지금 전혀 무공을 쓸 수 없는 상태다. 나는 아직
무공을 쓰지 못하는 상대에게 검을 휘둘러 본 적이 없다."
동방완아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화숙부님의 뜻은 잘 알겠어요. 저도 화숙부님의 그런 면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녀는 혀로 붉은 입술을 살짝 축인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 집안을 파탄으로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을
해친 흉인(兇人)이에요. 지금 저자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손에 희생될 지 몰라요."
화비룡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 검(劍)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
동방완아는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화숙부님. 제발 부탁해요. 제가 언제 숙부님에게 이런 부탁을
드린 적이 있나요?"
화비룡의 냉정한 얼굴에 한 줄기 흔들림이 떠올랐다.
동방완아는 맹인 특유의 직감력으로 그의 마음이 조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숙부님이 정 망설여지신다면 그를 죽이지 않으셔도 되요.
단지 두 번 다시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양 팔과 양 다리의
힘줄을 끊어 놓기만 하세요."
동방완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화비룡으로서도 더 이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화비룡의 얼굴에 한 줄기 갈등의 빛이 떠오르더니 그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좋다. 네 말대로 하겠다."
동방완아는 그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숙부님."
화비룡은 다시 노독행의 앞으로 나섰다.
그는 노독행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은 내키지 않는 것이나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너는 네 운이 나쁜 것을 탓해라."
이어 그의 손이 느릿느릿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장검으로
움직였다.
모용추수는 애원이 가득 담긴 눈으로 화비룡을 바라보았으나
화비룡은 그녀에게는 시선 조차 주지 않았다. 마침내 화비룡의
장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자 모용추수의 얼굴에 절망어린 빛이
떠올랐다.
이어 화비룡이 막 장검을 뽑으려는 순간,
"화대협. 그만 두시오."
무거운 탄식과 함께 하나의 음울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중인들의 표정은 모두 변해 버렸다.
2
"오빠!"
동방완아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들고 애처로운
외침을 토해 냈다
모용추수는 터질 듯 했던 긴장감이 일시에 풀려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휘청거렸다.
화비룡은 장검의 손잡이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장내에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방립동의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뒤흔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수염자국 가득한 아래턱이 그랬고, 항상 낮게
가라앉아 있는 우울한 눈빛이 그랬다.
그리고 사람 자체에서 풍기는 내음이 그러했다.
방립동은 그 우울한 눈으로 중인들을 한 사람씩 바라보고
있었다.
모용추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방립동은 억지로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댄 채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립동은 더 이상은 그녀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시선을 돌리자 하나의 번뜩이는 외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들은 무섭고 소름끼친다는 눈이었다.
그런데 방립동은 그 눈을 보자 마음 한 구석에 따뜻한 기운이
샘물처럼 스며들었다. 자신의 몸 어디에 이런 따뜻함이 숨어
있었는지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잘 있었나?"
방립동은 그 말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립동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 말도 없이 단지 고개만을 끄덕거렸을 뿐이었으나
방립동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알아들었다.
노독행 같은 사람에게 그 이상을 바란다면 그건 무리였다.
방립동은 마지막으로 동방완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동방완아는 가느다랗게 경련을 일으키며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립동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수척해졌구나."
동방완아는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방립동의 손을 꼬옥
붙잡고 자신의 뺨을 부벼댔다.
그녀의 백옥 같은 두 뺨에는 어느새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오빠...."
방립동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강호는 험한 곳인데 무엇하러 나왔느냐? 그러다 무슨 일을
당할지 알고..."
오빠의 품에 안긴 그녀는 어린 소녀가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도리질을 하며 조그만 음성으로 말했다.
"화숙부님이 항상 제곁을 지켜주셔서 아무런 걱정이 없어요."
방립동은 화비룡을 돌아보며 고마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동방완아는 두 손으로 방립동의 수염이 더부룩한 뺨을
어루만졌다.
"오빠도 많이 말랐어요. 오랫동안 면도도 하지 않고...오빠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녀의 눈가에 다시 눈물 방울이 고였다.
방립동은 두툼한 손으로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오빠는 괜찮다. 그보다 아픈 곳은 없느냐?"
동방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요. 오빠는?"
"나도 건강하지."
그녀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소근거렸다.
"오빠에게 무슨 일이 닥쳤을까봐 두려웠어요. 잠이 들면
오빠가 피투성이가 되어 울부짖고 있는 꿈을 꾸곤 했어요. 너무
무서워서 몇일동안 잠을 잘 수도 없었어요."
방립동은 빙긋 웃었다.
"내가 무사한 걸 보았으니 이제 안심이 되었느냐?"
"그래요."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거라."
동방완아는 한 마리 작은 새처럼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노독행이 있는 곳으로 얼굴을 돌렸다.
"저자는...."
방립동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호는 무정(無情)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
일이란 복잡해서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지. 너는
이곳의 일은 내게 맡기고 돌아가라."
동방완아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방립동을 올려다 보았다.
"오빠도 같이가요."
방립동의 얼굴에 그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돌아갈 수 없다."
동방완아는 애틋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요? 왜 돌아갈 수 없지요?"
방립동은 다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녀 때문이라면...그녀말고도 다른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완아야. 언젠가는 너도 너 혼자만의 누군가가 생기겠지.
그때가 되면 오빠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거다. 마음속에 누군가가
들어오게 되면 그 마음은 이미 자기 것이 아니게 된다. 다른
무엇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지."
".........!"
"너는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동방완아는 한동안 그의 말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물었다.
"언젠가는....언젠가는 돌아오겠죠?"
방립동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래. 언젠가는...."
동방완아는 금시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오빠를 기다리겠어요. 집에는 언제나 오빠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방립동은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마치 깨어지기 쉬운 도자기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잊지 않으마."
동방완아는 떠나갔다.
몇 번이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면서 떠나갔다.
화비룡과 함께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방립동의 얼굴은 울적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방립동은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탄식을 토해 냈다.
"흐음...."
그것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하고 우울한 것이었다.
방립동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노독행과 모용추수는 아직도 문가에 나란히 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다정해 보였고, 방립동은 또 다시 고독을
느꼈다.
방립동은 이대로 떠날까도 생각했다.
하나 그가 아직 마음을 결정하기도 전에 노독행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위태로운 걸음으로 자신을 향해 사력을 다해 걸어오고 있는
노독행을 보자 방립동은 도저히 그를 두고 그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노독행은 방립동의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는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더 말도 없이 떠나면 용서하지 않겠어."
방립동은 노독행의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알겠네."
노독행은 표정없는 얼굴로 방립동을 응시했다.
"자네의 아내를 구해 오겠다고 했지? 그녀는 저기 있네."
방립동은 한참동안이나 머뭇거리다가 땅이 꺼질듯한 탄식을
토해 냈다.
"이럴 필요없네. 독행. 정말 이럴 필요 없어."
"그녀는 자네의 아내야. 그걸 잊은 건 아니겠지."
"나는 말이지...."
방립동은 중얼거리듯 조그만 음성으로 말했다.
"오랫동안 생각했다네.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자네가 그녀와
보통 관계가 아님을 안 그 순간부터 생각해 왔네. 어떤 길이
가장 올바른 길인가를..."
"........"
"어떻게 하면 자네와 나, 그리고 그녀가 모두 만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장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하고 말일세."
노독행은 외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래서 찾아냈나?"
방립동은 고개를 저었다.
"가장 좋은 길은 찾지 못했네. 어쩌면 그런 길이란 애당초
없었는지 모르지. 만족한 길이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아. 하지만 다른 길은 찾아냈지."
"그 길이란게 자네가 없어지고 그녀와 내가 결합하는 것인가?"
방립동은 노독행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두 사람은 행복할 수 있지. 하지만
그외의 다른 길은 최소한 두 사람이 불행해질거야."
"자네가 없어지면 그녀와 내가 행복하리라고 생각했나? 정말
그렇게 생각했나?"
방립동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모르겠네. 하지만 그 길외에 다른 길은 생각할 수
없었네."
이번에는 노독행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동안 방립동의 우울함으로 가득찬 얼굴을 바라보며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 듯한 말이야. 듣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는군. 그럼
이제 나도 행복을 찾은 건가? 이제 나는 행복해 지는 건가? 정말
행복해 지는 건가?"
"........"
"정말 내가 행복해 보이나?
방립동은 노독행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노독행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슬퍼 보이지도 않았고, 우울해 보이지도 않았다. 화가 난
얼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더더욱
아니었다.
방립동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노독행은 조금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방립동을 바라보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행복이란건 말이야. 그렇게 억지로 찾아오는게 아니야.
가지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주고
싶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건 아무때고 예고도
없이 찾아오지."
"......"
"자네를 만나서 나는 행복했어. 아주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자네는 내 마음에 들었어.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야. 나
같은 사람도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는 정말 기뻤어.
자네는 내가 유일한 친구라고 했지만, 내게도 자네가 유일한
친구야."
방립동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노독행의 입에서 자신이 유일한 친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자신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립동은 간신히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나도...행복했네...."
"바로 그거야. 행복이란 그렇게 오는 거야. 자네가 떠나면
그녀와 내가 행복하리라고 생각한건 자네의 이기심이라구.
자네는 순간적인 고통을 잊기 위해서 가장 편안한 방법을
택한거야."
방립동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그런 생각이 아니었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거야. 자네는 떠나고 남아 있는 우리들은
고통속에 파묻히는 거지. 나는 오직 하나뿐인 친구를 잃고
그녀는....그녀는 남편을 잃게 되는 거지. 그래서 난 화가 난단
말이야."
방립동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노독행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하고 나직했으나 방립동의 귀에는
천둥소리보다도 크게 들리고 있었다.
"난 정말 화가 나. 이렇게 화가 나 본 적은 형의 죽음을 본
후로 처음이야. 이런 식으로 결말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 자네를
혼내주고 싶어."
"......"
"그녀가 불쌍하지 않나? 자네는 하마터면 그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멍에를 씌워줄 뻔 한거라구."
방립동은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미안하네....내가 생각이 았어."
"자네는 항상 미안하다는 말만 하는군. 내게는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말라구."
"알았네."
방립동은 하마터면 또 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할 뻔했다.
노독행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럼 그녀를 만나봐."
방립동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여전히 문가에 몸을 기댄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전히 슬퍼 보였다.
그녀를 본 순간 방립동의 가슴에는 후회와 슬픔의 감정이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 여인을 자신은 평생 고통속에서 지내도록 만들 뻔했던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지
못하게 만들뻔 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영원히 보지 못할 뻔 했다고 생각하자 방립동은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그 순간 방립동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그녀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설사 죽어 육신(肉身)이 모두 재가 된다해도 혼백(魂魄)만은
여전히 그녀의 주위를 맴돌게 되리라는 것을....
3
노독행은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조그만 봉우리위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너무 무리하는게 아닐까 생각했으나 걸음을 걸을수록
근육에서 힘이 솟아나 그럭저럭 올라올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 보자 모옥의 지붕이 조그만 장난감처럼 보였다.
저 모옥안에 방립동과 모용추수가 있었다.
노독행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을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단지 자신이 자리를 비켜줌으로서 그들이 서로의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서로가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올바른 결정을 할 수가 있다.
물론 자신이 어떤 결정을 해야할 지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때 노독행은 등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엽동을 보았다.
엽동은 이 사람이 참으로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엽동이 그를 만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처음에 만난 곳은 북만주의 어느 허름한 주루였고, 두 번째는
무회곡의 입구에서 였다.
볼 때마다 그는 이 사람에게서 새로운 면을 느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저 한없이 무섭고 두려운 인물이라고만
생각했다. 정말 그때는 무림에 그처럼 냉혹하고 무자비한 인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두 번째로 무회곡에서 본 그는 단순히 무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냉정하고 앞뒤가 칼로 자르듯 분명했다. 그는 자신을
건드린 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결코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본 그는 먼저번과는 또 달랐다.
봉우리 꼭대기에 서서 우두커니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그는
왠지 우울하고 고독해 보였다. 특히 깊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이
그랬다.
무언가 복잡하고도 깊은 생각에 잠긴 그 눈빛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한 마력(魔力)을 담고 있었다.
그 같은 사람도 고독을 느낄까?
오직 피와 죽음밖에는 쫏지 않는 그에게도 인간다운 감정이
존재해 있는 것일까?
예전의 엽동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단언(斷言)했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냉혈무정이다.
강호 무림 역사상 가장 무섭고 잔인한 희대의 살인마,
냉혈무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엽동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냉혈무정도 결국은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이 아닐까?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슴 한 구석에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닐까?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엽동은 이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그가 엽동에게로 다가왔다.
그때는 이미 그에게서는 조금전에 보았던 우울하고 고독한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단지 냉혹하고 섬뜩하게 번뜩이는 외눈만이 시야에 가득
들어올 뿐이었다.
"여길 어떻게 왔지?"
그 음성은 엽동이 알고 있는 냉혈무정의 음성이었다.
마치 굶주린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
엽동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히죽 웃었다.
"조교연이 그러더군. 당신이 나를 찾는다고. 그래서 그 말을
듣자마자 부랴부랴 달려온거요."
노독행은 뇌리에 문득 분하의 강변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던 조교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떠난 다음 조교연은 표향령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엽동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한게 분명했다.
노독행이 아무런 말이 없자 이번에는 엽동이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만나려고 한거요?"
노독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한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어."
"그자가 누구요?"
"금안천군 석천송."
엽동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노독행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왜 그자에 대해서 알고 싶은거요?"
"그자가 내가 생각한 그 인물인지 알고 싶어서. 그자에 대해서
알고 있나?"
엽동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당신이 생각한 인물이란 누구요?"
"한 사람을 데리고 단번에 오십 장을 날 수 있는 인물."
"한 번도 땅에 내려 서지 않고 말이오?"
"한 번도 서지 않고."
엽동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 인물은 없소."
그는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구도 단숨에 오십 장을 날 수는 없소. 더구나 한 사람을
데리고 그런 일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있어."
엽동은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불쑥 말했다.
"그럼 당신이 잘못 들은거요.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소."
노독행의 외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는 엽동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직접 본거야."
노독행의 시선을 받는 순간 엽동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나 그의 말을 듣자 더욱 놀랐다.
노독행이 보았다고 한 이상 그건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노독행은 결코 잘못 보거나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누군가가 오십 장을 단숨에 날았단 말인가?
더구나 한 사람을 데리고?'
그때 문득 엽동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급히 물었다.
"혹시 당신이 그 인물을 본 것은 천상회의 뒤쪽에 있는
횡안령의 북쪽 절벽이 아니오?"
노독행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엽동은 안색이 변한 채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자는 정말로 그 절벽을 넘었단 말이오?"
노독행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엽동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자가 데리고 갔다는 인물은...혹시 조향령이
아니오?"
노독행은 세 번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엽동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제서야 횡안령의 절벽에서 노독행 등의 흔적이 끊긴
이유를 알았다. 그때 그는 믿지 않았지만, 정말로 누군가가 그
절벽을 넘어 사라졌던 것이다.
엽동의 시선이 다시 노독행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면 당신도...?"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절벽을 내려갔어."
엽동은 이제 한 가지 의문을 풀었다.
그리고 두 가지의 새로운 의문을 품게 되었다.
- 정말로 인간이 오십 장을 날 수 있을까?
- 그렇다면 그자는 대체 누구일까?
엽동은 두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당신은 혹시 금안천군 석천송이 그 인물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요?"
"석천송의 눈빛이 금빛을 띄고 있다면."
엽동의 몸이 다시 움찔거렸다.
"그때 조향령을 데리고 절벽을 넘어간 인물의 안광이
금빛이었소?"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엽동은 노독행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자가 석천송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거로군. 하지만 석천송은 아닐꺼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석천송의 별호가 비록 금안천군이지만 그것은 그가
금안신공(金眼神功)이라는 특수한 기공을 연마했기 때문에 붙은
별호요. 금안신공은 불문(佛門)의 천안통(天眼通)처럼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는 기공이긴 하지만 금색 안광과는 전혀
관계가 없소. 십이성의 금안신공을 끌어 올려 보았자 두 눈의
눈동자가 은은한 금색을 띄게 되는 정도요."
엽동은 혀로 입술을 축인 후 말을 계속했다.
"또 석천송의 무공이 비록 절강성에서는 일류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절정고수라고 하기에는 손색이 있소. 게다가 그는
무거운 권법(拳法)을 장기로 삼기 때문에 신법이 그리 빠르지도
않소."
노독행은 생각에 잠겼다.
조향령을 찾는 실마리가 다시 끊기고 말았다.
그는 금안천군 석천송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었으나 엽동의
말대로라면 석천송은 절대로 조향령을 데리고 사라진 금색
안광의 복면인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 복면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노독행은 한동안 침음하다가 다시 엽동을 바라보았다.
"현재 천하에서 신법이 가장 뛰어난 인물은 누구지?"
엽동은 그가 그런 질문을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지 즉시
입을 열었다.
"당금 무림에서 신법이 가장 뛰어난 인물은 모두 세 사람이오.
한 사람은 무당(武當)의 장로인 풍도인(風道人)이고, 또 한
사람은 개방( 幇)의 방주(幇主)인 전궁신개(電穹神 )
낙구천(洛九天)이오."
풍도인은 현(現) 무당장문인인 태평자(太平子)의 사숙으로,
무당에서 최고배분을 지닌 인물이었다.
낙구천 또한 십만 거지들의 용두방주(龍頭幇主)로 당금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한 일대괴걸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엽동은 빙그레 웃었다.
"멀다면 아득히 멀고 가깝다면 아주 가까운 곳에 있소."
노독행은 눈을 빛냈다.
"당신이란 말인가?"
"예전에는 남들이 나를 무영기사라고 불렀소. 다른건 모르지만
신법에 있어서는 나도 그런대로 재주를 가지고 있소."
엽동의 무영기사란 외호는 그냥 붙은 것이 아니었다.
엽동은 비록 대단치 않은 것처럼 말했으나 당년에 그가
강북에서 종횡할 때는 아무도 그의 종적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그만큼 신비스럽게 행동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그의 신법이 그야말로 경인(驚人)할 경지에 올라있었던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엽동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마음먹기만 하면 천하의
누구도 그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번에 오십 장을 날 수 있는 인물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한거요. 우리중 누구도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소.
나도 이십 장 이상은 날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요.
더구나 한 사람을 데리고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소."
엽동의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엽동의 신법이 비록 당대최일류(當代最一流)에 속하지만 그런
그도 이십 장이 한계였다. 무리를 한다면 이십 오장까지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 이상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풍도인이나 낙구천 또한 그와 거의 비슷한 경지이므로 그들도
크게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도데체가 인간의 몸으로 오십 장을 단숨에 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불패(不敗)의 신화를 지닌 무쌍류의 무예로도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독행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을 했다.
금빛 안광의 복면인이 조향령의 손을 붙잡고 오십 여장을 훨훨
날아 반대편 절벽 너머로 사라지는 광경을 똑똑이 보았지
않는가?
노독행이 잘못 본게 아니라면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오십
장을 단번에 날수 있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노독행의 눈은 비록 하나뿐이지만 결코 잘못 볼 리는 없었다.
노독행은 외눈을 반짝이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그렇다면 전대(前代)에는?"
엽동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전대라니?"
"당대에 없다면 전대의 누군가 이겠지. 전대에서 신법(身法)의
제일고수는 누구지?"
엽동의 입가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노독행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정말 끈질긴 인물이오. 그렇게 알고 싶다면 말해
주겠소."
엽동은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백 년내 무림에서 신법으로 가장 뛰어난 인물은
구유천자(九幽天子) 양무극(揚無極)이오. 다른 사람은 누구도
그에 견줄 수 없소."
"당신에 비하면 어떻지?"
엽동은 고소를 머금었다.
"나 따위가 어찌 양무극에 비할 수 있겠소? 양무극은
신법으로만 따진다면 누구나가 인정하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오."
노독행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자라면 한 사람을 데리고 단숨에 오십 장을 날 수도 있나?"
엽동은 조금 머뭇거렸다.
"혼자라면 아마 가능할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한 사람을
데리고라면...아무리 양무극이라도 조금 어렵지 않겠소?"
"가능하기는 하단 말이군."
엽동은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만약 그런 사람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양무극이
가장 가능성이 높을 거요."
곧이어 엽동은 단정짓듯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니오."
"왜 그렇지?"
"양무극은 이미 육십 년 전의 인물이오. 다시 말해서 이미 한
갑자(甲子)전에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단 말이오. 아마 지금은
이름모를 야산에서 한 줌의 백골이 되어 있을 거요."
노독행은 포기하지 않았다.
"시체를 직접 본 것은 아니지?"
엽동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그렇게 듣고 싶다면 말해 주겠소. 나도 아직 양무극이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그렇게 따진다면
장삼봉(張三峯)이나 달마대사(達摩大師)가 죽었다는 말도 직접
듣지 못했고 그들의 시체도 보지 못했소. 아마 그들도
어딘가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아 있을 거요."
노독행은 아무 말없이 냉정한 눈으로 엽동을 응시했다.
엽동은 더 농담을 하고 싶었으나 노독행의 눈빛을 받자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내 말은 굳이 양무극이 죽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단 말이오.
육십 년 전에 이미 그자의 나이는 거의 팔십이 다 되었소.
무덤속으로 들어갈 나이가 되었던거요. 그래서 무림에서
사라진거요. 아마 자신의 최후를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당신도 무림인이니 그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소?"
노독행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양무극의 눈빛이 금빛이었나?"
"그건 나도 모르겠소. 여보시오. 적당히 좀 하시오. 양무극이
사라진지 육십 년이 넘었단 말이오. 내 나이가 몇 인데 그자에
대해서 꼬치꼬치 알겠소? 나도 그냥 예전에 사부님께 어렴풋이
들은 말을 간신히 떠올렸을 뿐이오."
"그럼 당신 사부는 그자에 대해 알고 있겠군."
엽동은 허탈하게 웃었다.
"궁금하면 가서 직접 물어보구료."
엽동은 비꼬는 뜻으로 말했으나 노독행은 진지했다.
"당신 사부가 누구지?"
"허허참...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주지. 내 사부는..."
갑자기 엽동은 입을 다물었다.
엽동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것은 무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문득 잠을 깼을 때 알몸으로 누운 자신의 옆에 외간남자가
있는 것을 발견한 여인의 표정같기도 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상상도 못한 일을 발견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혹시...그럴리가...그럴 리가...."
엽동은 멍청하게 허공을 응시하며 이 말만을 뇌까리고 있었다.
노독행은 냉정한 눈으로 엽동의 당혹에 가득찬 표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엽동은 한참동안 안색을 실룩거리며 여러 차례 표정이
변하다가 마침내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후우...."
이어 그는 노독행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어쩌면 당신이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이건 순전히 내 짐작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