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49화 (50/61)

제 49 장     향 기 가    나 지   않 아 요

1

절강성(浙江省)의 북서쪽에 있는 임안현(臨安縣)에서 멀리

서쪽하늘을 바라보면 두 개의 유난히 끝이 날카로운 봉우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이것이 바로 천지차(天池茶)와 용정차(龍井茶)의 산지로

유명한 천목산(天目山)이다.

천목산은 산세가 유달리 험하고 끝이 뾰쪽해서 그 모습이 마치

'하늘(天)'의 '눈(目)'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동쪽에

있는 것이 동천목산(東天目山), 서쪽에 있는 것이

서천목산(西天目山)이다.

천목산의 높은 봉우리 끝에 붉은 해가 반쯤 걸리었다.

석양은 천목산의 꼭대기에 걸린 듯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그 붉은 석양을 받으며 천목산의 오솔길을 오르는 마차 한

대가 있었다.

두 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는 아담하면서도 고아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노독행은 아직 한 번도 마차를 끌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마부석에 앉아 고삐를 잡는 신세가 되었다.

그가 천목산으로 온 것은 물론 양무극이 거처했다는 구유곡을

찾기 위해서였다. 동방완아의 집인 포호산장은 이곳에서 오

백리나 북쭉에 위치한 금릉(金陵)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곳부터 먼저 들리게 된 것이다.

동방완아를 데리고 구유곡을 찾는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그녀를 두고 올 수도 없었다.

날씨는 청명했고, 하늘은 끝없이 맑았다. 주위는 울창한

신록으로 우거져 한껏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쪼로롱.....

어디선가 날아가는 한 마리 산새의 울부짖음이 더할 나위 없이

청량감을 느끼게 했다.

노독행이 마차를 몰고 얕은 언덕 하나를 넘고 있을 때 창문이

열리면서 동방완아의 얼굴이 밖으로 불쑥 나왔다.

동방완아는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 채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정말 상쾌하군요. 이곳은 어딘가요?"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접안령(接雁嶺)."

"기러기도 닿는 고개라...정말 운치있는 이름이군요. 이곳의

공기는 어쩐지 낮설지 않아요."

노독행은 그녀의 말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마차를

몰았다.

접안령의 정상을 지나자 유난히 짙은 수림이 시야에 확

들어왔다.

수림은 양쪽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 사이에 위치헤 있었는데

푸른 색 일색의 산중(山中)에서 유달리 검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노독행은 그 검푸른 수림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수림으로 가는 길은 유달리 돌들이 많아서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돌로 이루어진 길을 반쯤 지났을 때 등뒤에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돌길은 상당히 길군요. 여기는 뭐라고 하지요?"

"소보보(小寶步)."

"소보보? 상당히 재미있군요. 작은 보석들의

걸음이라...이곳의 돌들은 유난히 작고 동그랗지요?"

노독행은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그냥. 소보보라는 이름과 마차의 흔들림이 그런 느낌을 들게

했어요. 뭐랄까...이곳에 오니 꼭 고향에 온 듯한 기분이에요."

말을 할 때의 그녀의 표정은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긴 소녀의

모습과도 같았다.

소보보를 지나자 해단림(海丹林)이 나왔다.

이 검붉은 수림을 벗어나면 깎아지른 듯한 벼랑 사이로 하나의

좁고 은밀한 계곡이 나타난다.

그곳이 바로 엽동이 알려준 구유곡이었다.

해단림의 붉은 수림속을 지날 때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해단림의 길이는 거의 일리(一里) 쯤 되었다.

해단림을 거의 빠져나왔을 때 그녀는 갑자기 불쑥 입을

열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아주 좁은 길이 나오지요?"

노독행은 흠칫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해단림을 거의 벗어낫기 때문에 멀리 눈앞에 좁다란 계곡이

보이기는 했다.

하나 그녀는 앞이 안보이는 장님이 아닌가?

대체 그녀는 해단림 앞에 계곡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의 얼굴에는 한 줄기 기이한 표정이 맴돌고 있었다.

"그 좁은 길을 따라가면 아주 넓고 꽃이 만발한 화원이 있을

거에요....그리고 화원에는...화원에는...."

그녀의 눈까풀이 가느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노독행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그녀는 두 손을 꼬옥 잡은 채 몸을 가늘게 떨었다.

그녀의 음성도 희미하게 떨려나오고 있었다.

"나...나는...이곳에 와 본적이 있어요."

이때만큼은 노독행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이미 육십 년 전에 모습이 사라진 구유천자 양무극의

거처이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왔었단 말인가?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그녀는 결코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었다.

노독행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올 때부터 줄곧 기분이 이상했어요. 접안령을 넘고

소보보를 지나올 때 나는 예전에 그 길을 지났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노독행은 묵묵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수림속을 지날 때 비로소 깨달았어요. 그 수림의

특이한 향기...무언가 나뭇잎이  는 냄새 같았지만 더럽거나

역겹기 보다는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그 냄새를 맡고

알았어요. 나는 이곳에 온 적이 있어요. 오래전...아주

오래전에..."

"그게 언제인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몰라요. 너무 오래되어서...아주 어렸을 때 왔던 것

같아요. 그때...그때도 오늘처럼 마차에 흔들리면서 이곳에

왔었어요. 수림을 지나고...작고 좁은 길을 지나자 갑자기

달콤한 꽃향기가 밀려오면서 아주 넓은 곳이 나타났어요.

꽃밭이었어요. 그리고 그 화원의 한쪽에....작은 정자(亭子)가

있고...정자에는...정자에는..."

"정자에는 뭐가 있었지?"

그녀의 몸이 끊임없이 떨렸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 채 몸을 가늘게

떨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

"그래요. 외할아버지가 계셨어요. 나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노독행은 다시 물었다.

"외할아버지가 누구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름은 몰라요. 그냥 외할아버지라고만 했어요. 그분은 나를

꼬옥 안아주셨어요. 그때의 수염과 따뜻한 감촉이 지금도

생각나요."

노독행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음성이나 표정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히 아주 어렸을 때 이곳에 온 것이 확실하다.

이곳에서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구유천자 양무극인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계곡의 입구는 좁아서 마차를 몰고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노독행은 그녀를 마차에서 내리게 해서 계곡안으로 들어갔다.

계곡의 입구는 어른 두 명이 간신히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갈 만큼 협소했다.

입구를 빠져나오자 길이 조금씩 넓어지더니 십 여장을 더

나아가자 제법 커다란 대로(大路)가 되었다.

그의 뒤를 말없이 따라오던 그녀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여기에요. 여기에서 조금만 더 가면 화원이 나와요. 꽃향기가

가득한 아름다운 화원..."

그녀는 그를 지나쳐 앞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그녀의 몸이 그대로 멈춰졌다.

노독행은 황급히 그녀를 따라 몸을 날렸다.

길은 끝이 났다.

그리고 넓은 분지(盆地)가 나타났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상당히 넓은 분지였다.

분지는 예전에는 틀림없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던 그 아름다운 화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긴 듯 분지안은 잡초와 나무들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그녀는 분지의 앞에 서서 당혹스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향기가 나지 않아요. 정말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가득했었는데....지금은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아요.

이곳은...죽었어요."

그녀의 말대로 이곳은 죽어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황량하고 쓸쓸하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장소가 되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분지의 앞에서 서로 다른 상념에 잠긴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이곳은 과연 그녀의 말대로 아름다운 화원이었을까?

진한 꽃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고 그린 듯한 정자가

서 있는 곳이었을까?

문득 정자에 생각이 미치자 노독행은 분지의 주변을 살펴

보았다.

정자는 없었다.

단지 예전에 무언가 건물이 세워져 있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네 개의 대들보만이 잡초 무성한 분지 한쪽에 쓸쓸하게 박혀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무너진 대들보의 흔적을 쓰다듬었다.

"이곳이었는데...이곳에 작고 예쁜 정자가 있었는데...여섯

개의 계단과 난간이 있고 아주 푹신한 의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곳이 과연 구유곡일까?

그리고 그녀는 이곳에서 양무극을 만난 것일까?

양무극이 과연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때 그녀의 나이가 대 여섯 살이라고 가정해도

양무극은 거의 백 이십이 넘는 나이였을 것이다.

인간이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살 수 있을까?

아니, 그녀가 만났던 인물이 양무극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났고, 그 인물은 양무극이

죽고 사라진 이곳을 잠깐 빌렸을 뿐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이곳이 이렇게 황폐해 있을 리가

없었다.

노독행은 그녀를 이곳에 남겨 둔 채 분지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넓다란 분지의 구석구석을 수색했다.

정자가 있던 곳에서 백 여장 떨어진 곳에 몇 채의 전각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 예전에는 분명히 크고 아름다운 전각이었을

것이나 노독행이 발견한 것은 금시라도 무너질 듯 부서져 있는

흉가(凶家)였다.

담벼락은 무너지고 군데군데가 갈라져 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고, 지붕도 구멍이 뚫려 하늘이 그대로 올려다 보였다.

적어도 십여 년 이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것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몇 채의 무너져 가는 흉가외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노독행은 다시 그녀가 있던 정자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독행은 주위를 두리번 거렸으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2

노독행은 황급히 계곡을 빠져나왔다.

마차는 그대로 있었다.

마차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으나 그녀는 없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노독행이 분지의 뒤쪽을 돌아간 시각은 채 반각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의 모습은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혼자서는 열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그녀가...

노독행은 계곡의 양쪽을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타고 올라갔다.

십 여장이나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그녀를 데리고 간 것이라고 해도 이 정도

높이에서라면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반각도 되지 않는 동안에 한 사람을 데리고

이 높이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의 먼 곳까지 움직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               *

쉬이익....

주위의 공기가 미친 듯이 요동을 치며 귓전에 쉴사이없이

울려퍼졌다.

그녀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으나 도저히 손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너무도 빨리 움직이고 있어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마 앞을 볼 수 있었다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

보다가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을지 모른다.

울창한 수림과 커다란 바위들이 발밑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십 여장이 넘는 개울위도 단숨에 건너 버렸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마치 평지처럼 다가와서는 곧 몸 뒤로 날아가

버렸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이 움직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바위가 나오면 바위를 넘고, 숲이 나오면 숲위를 훨훨

날아갔다. 웬만한 얕은 야산은 땅에 한 번도 내려서지 않고 그냥

건너뛰었다.

쉬아악!

귓전을 가르고 지나가는 공기의 파공음은 지금 그녀의 몸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여실히 나타내 주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두려움과 공포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노독행과 함께 구유곡의 분지에서 정자의 대들보를 만지고

있었다. 그가 분지 뒤를 보고 오겠다며 간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려 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허공을 날아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너무도 놀라고 당황하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서운 질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참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누군가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옆구리에 끼고 달려가는 사람의

몸을 살짝 만져 보았다.

그때 그 사람의 손이 그녀의 손을 덥썩 움켜 잡았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음을 느끼며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그때 그 사람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랫만이구나."

그 음성을 듣는 순간 그녀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몸을 마구

떨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눈을 들어 그 사람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그 사람은 옆구리에 끼었던 그녀의 몸을 앞으로 돌려 안았다.

순간 그녀는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자신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자 그녀의

눈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부드러운 수염...따뜻한 품속...그리고 그 음성...

그녀는 두손을 들어 있는 힘껏 그 사람을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외할아버지...."

*                 *                *

술은 투명했다.

노독행은 물끄러미 술잔속에 담긴 술을 바라보았다.

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희미하게 투영(投影)되었다. 술잔이

작아서인지 제대로 영상이 맺혀지지 않았다. 단지 유난히도 검은

안대만이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술속에 비친 검은 안대...

노독행은 검은 안대를 마셨다.

그가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랐을 때 주루안으로 한떼의 인영이

들어왔다.

그들은 검은 피풍을 두른 흑의인들이었다.

흑의인들은 눈빛이 비수처럼 날카로웠고, 태양혈(太陽穴)이

불룩 솟아 있어서 내외공(內外功)을 겸비한 고수들임을 알 수

있었다.

손에는 각기 검(劍)이나 도(刀), 창(槍) 같은 병장기들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그들이 들고 있는 병기들이 모두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흑의인들의 수는 여덟이나 되었다.

여덟 명의 흑의인.

여덟 개의 병기.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주루안의 여기저기에 자연스런 자세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이 앉은 방위는 아주 묘해서 주루를

나가거나 들어오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들의 옆을 지나야만

했다.

제법 넓은 주루안이 일순간에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하나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노독행은 자신이 방금 따라놓은

술잔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술잔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약간 우스꽝스러운 것 같았다.

노독행은 그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마셨다.

다시 한 잔 따랐을 때 또 한 사람의 흑의인이 주루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먼저 들어온 여덟 명의 흑의인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검은 피풍을 두르지도 않았고, 병기를 들고 있지도

않았다.

남들처럼 태양혈이 불룩하지도 않았다.

그저 유난히 길쭉한 얼굴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흑의인의 오른쪽 가슴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무슨 둥그런 과일문양같았다.

하나 자세히 보면 금색 실로 수놓아진 소(牛)의 머리(頭)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들어온 흑의인들의 피풍속에 입고 있는 흑의에도 이와

같은 문양이 있을게 틀림없을 것이다.

나중에 들어온 흑의인은 천천히 주루안을 둘러 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발걸음이 한 쪽으로 움직였다.

그에 따라 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흑의인들이 흑의인이 움직이는

방향쪽으로 한 두 걸음씩 이동했다. 단순히 한 두걸음 이동했을

뿐인데도 그들의 배치는 흑의인이 향하고 있는 곳을 몇 겹으로

에워싼 모습이 되고 말았다.

이미 주루안에 있던 몇몇 손님들은 이들의 기세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꽁무니를 뺀지 오래였다.

텅빈 주루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외로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흑의인의 발길은 그 사람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물론 노독행이었다.

흑의인은 노독행의 바로 옆으로 와서 정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귀하는 혹시 냉혈무정 노대협(路大俠) 아니시오?"

말을 할 때의 흑의인의 모습은 담담하면서도 신중한 것이었다.

노독행은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묵묵히 술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흑의인은 찬찬한 눈길로 노독행을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귀하를 뵙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오."

노독행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분을 만나는 일은 귀하에게도 아주 중대한 일이 될거요.

결코 귀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장담하겠소."

노독행은 들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탁!

빈 술잔을 탁자에 내려 놓을 때 그의 입술이 처음으로 열렸다.

"술맛 떨어지게 하는군."

흑의인의 눈꼬리가 쭈욱 올라갔다.

"뭐라고 했소?"

노독행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용건이 있으면 오라고 해. 한 번 더 술마시는 걸 방해하면

용서하지 않겠어."

나직한 음성이었다.

흑의인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의 눈은 날카로운 빛을 번뜩이면서 노독행을 쏘아보고

있었다.

노독행의 말에 크게 심기가 상한 모양이었다.

그로서는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해보는 수모인 듯 했다.

상대가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 없는 인물이라 해도 이런 모욕은

참을 수 없었다.

흑의인의 눈꼬리가 꿈틀거리며 그의 입에서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정독(丁禿). 무례를 범하지 마라."

돌연 하나의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을 듣자 흑의인의 표정은 눈에 띄게 수그러 들었다.

단순한 말 한마디에 금시라도 폭발할 것 같은 흑의인이

고분고분해진 것으로 보아 흑의인이 이 음성의 주인을 얼마나

공경하고 있는 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언제나타났는지 주루의 입구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중앙에 있는 인물은 비쩍 마르고 병색이 완연한 오십 대

후반의 중늙은이였다.

늙은이의 주름진 얼굴에는 누런 기운이 가득했고, 안색은

초췌했다.

하나 눈빛만은 시리도록 차가워서 결코 병(病)에 걸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 주었다.

늙은이의 양쪽으로는 검고 하얀 장포를 걸친 두 명의 괴인이

시립하듯 서 있었다.

검은 장포를 입은 괴인은 머리색뿐만 아니라 허리띠와 신발도

검었고, 심지어는 옷밖으로 드러난 피부까지 거무스름했다.

그야말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색 일색이었다.

반면에 그와 나란히 서 있는 백의괴인은 의복부터 머리색까지

눈처럼 새하얗다.

그야말로 흑(黑)과 백(白)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인물들이었다.

조금전에 말을 한 사람은 중앙의 병색이 완연한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남의 부축을 받지 못하면 한 걸음도 걷지 못할

것같이 초라한 몰골이었으나 용케도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노독행의 앞으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그 뒤를 흑백의 두 괴인이 말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정독이라 불리웠던 흑의인은 늙은이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늙은이는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죄송할게 뭐있나? 용무가 있는 사람이 오는게 당연한

일이지."

이어 늙은이는 노독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앉아도 되겠나?"

노독행은 늙은이를 힐끗 올려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정독은 그의 이 무례해 보이는 행동에 다시 노화가 치민 듯한

인상이었으나 늙은이는 빙그레 웃으며 노독행의 맞은 편 의자에

얌전하게 앉았다.

그의 뒤에는 여전히 흑백괴인들이 찰싹 달라붙다시피 서

있었다.

늙은이는 의자에 편안히 몸을 기댄 채로 노독행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늙은이는 유난히 눈꺼풀이 수북하고 눈자위 주위에 잔 주름이

많았다.

하나 그 수북한 눈꺼풀 밑으로 자리잡은 두 개의 눈동자는

차가운 섬광과도 같은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늙은이의 마음이 겉모습과는 달리 지극히 냉정하고

차갑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늙은이는 한동안 노독행을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노독행의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정상적인 무림인들에

비하면 오히려 약간 왜소한 몸집이었다.

무림인들이 중요시하는 것처럼 팔이 길지도 않았고, 주먹이

크거나 손가락의 마디가 굵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딘가 달랐다.

크지 않은 몸집에 평범한 용모를 하고 있었지만 그를 보는

사람들은 무언지 모를 중압감을 느껴야 했다. 마치 건드리면

터져버릴 것 같은 불붙은 폭약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금시라도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드려는 사나운 맹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헝클어진 흑발사이로 내비치는 외눈을 볼 때 더욱 그런

느낌이 강했다.

그 눈은 늙은이의 차가운 성광(星光) 같은 눈과는 또 달랐다.

나직히 깊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무서운 폭발력을 지닌 눈!

그 눈이 한 번 번뜩거리면 제아무리 담력이 강하고 강인한

심장을 가진 인물이라 할지라도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사람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중 거의 절반이 저 눈에

관련된 것이었다.

저 눈과 한 번 마주치기만 하면 누구라도 오금이 저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저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면 지옥의 염라대왕이라도 꼬리를

말고 도망치고 말거라고 했다.

저 눈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죽을 때 까지도 영원히 잊지

못할 그런 눈이라고 했다.

오늘 늙은이는 드디어 그 유명한 눈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눈에 대한 소문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직접

확인했다.

늙은이는 천천히 주름진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먼저 노부의 소개부터 해야겠지. 노부는

담세악(譚世鄂)이라고 하네. 남들은 병마군(病魔君)이라고도

부르지."

병마군 담세악!

이 금시라도 무덤속으로 들어가 버릴 듯한 병색이 완연한

늙은이가 바로 포호산장에 버금가는 위세를 지녔다는 금우두부의

셋째 주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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