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50화 (51/61)

제 50 장       죽  지  마 ,   친  구  !

1

날은 점차 어두어 오고 있었다.

주루의 밖에는 어느 사이엔가 등불이 내걸려 있었다.

기름먹인 유지(油紙)로 만들어진 등불의 네 귀퉁이에는 금색의

소머리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강호에 견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금우등(金牛燈)을 보는 순간 이 주루에서 금우두부의 중요한

회합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절대로 접근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 금우등이 걸린 곳에는 접근하지 마라!

그것은 강남에서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불문률(不問律)이었다.

마치 포호산장의 혈호기(血虎旗)가 꽂혀 있는 곳에 출입할 수

없는 것처럼.

주루 안에도 두 개의 등불에 불이 밝혀지며 환한 불빛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노랗고 빨간 불빛이 어둑어둑해진 주루안을 조용히 비추었다.

담세악은 그 흔들리는 불빛을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지 모르지만 노부가 속해 있는 금우두부는 요즘

포호산장과 보이지 않는 암투(暗鬪)를 벌이고 있네. 이 암투는

겉으로는 그리 치열하지 않지만 그 결과는 말로 할 수 없이

중대한 의미를 초래할 수 있지."

노독행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담세악은 신경쓰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이 암투에서 승리하는 자는 강남뿐만 아니라 천하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네. 하지만 패하게 되면...영원히 보이지 않는

암흑속에서 살아야만 하지. 다시 말해서 이번 싸움은 강호의

주인(主人)을 결정하는 자리가 된걸세."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강북을 오랫동안 제패하고 있던 천상회가 무너진 지금, 강남의

패자는 곧 천하를 장악할 수 있다.

현재 강북을 대표하는 표향령이나 철모방으로는 도저히

포호산장이나 금우두부중 어느 한 쪽과도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

담세악의 나직한 음성은 음울하게 빛나는 등불에 뒤섞여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게 만들고 있었다.

"아쉽게도 본부(本府)의 힘은 포호산장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네. 강호인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지. 그래서 우리에게는

유력한 방조자(幇助者)가 필요하네."

담세악의 시선은 느릿느릿 노독행에게로 향했다.

"자네가 산장과 좋지 못한 관계라는 걸 알고 있네. 동방유아는

결코 마음이 넓은 인물이 아니야. 한 번 눈밖에 난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를 제거하려고 할 거야."

"........"

"자네가 우리와 손을 잡는다면 그땐 정말 자웅을 겨루어 볼만

하지. 재미있는 승부가 될거야."

담세악은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가 이긴다면 자네에게 천하의 반(半)을 주겠네. 우리는

강북에는 욕심이 없어. 강남만 장악해도 충분하지. 자네에게도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닐거야."

천하의 반을 준다!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금우두부와 포호산장의 실력은 확실히 포호산장이 몇 단계

위에 있었다.

절대고수의 숫자를 보아도 그렇고, 휘하세력의 인원을 놓고

보면 비교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금우두부의

약세를 알고 있는 이상 무림인들중 누구도 그들편에 서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력의 열세보다도 더욱 두려운 것이었다.

하나 담세악은 이러한 국면(局面)을 전환시킬 결정적인 요소를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냉혈무정이었다.

냉혈무정은 누가 뭐라해도 당금무림 최고의

풍운아(風雲兒)였다. 그가 무림인들의 뇌리에 차지하는 비중이란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냉혈무정만 가세한다면 금우두부에 동조하기를 망설여왔던

많은 세력들이 그들의 편에 설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단번에

지금까지의 열세(劣勢)를 뒤집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를

가려볼 수 있다는게 담세악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한 실현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냉혈무정이 승락하기만 한다면....

냉혈무정의 승낙여부에 따라 이번 싸움의 성패(成敗)가 달려

있는 것이다.

담세악은 노독행을 주시하며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물음을

던졌다.

"어떤가? 우리의 제안을 승낙할텐가?"

담세악뿐만 아니라 정독과 여덟 명의 흑의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심지어는 시체처럼 묵묵히 전면을 바라보고만

있던 흑백괴인들도 힐끗 노독행을 쳐다보고 있었다.

승낙이냐, 거절이냐?

당금 무림의 판세(判勢)를 좌우하게 될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금우두부의 인물들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긴장되고

초조한 순간이었다.

노독행은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잔을 만지작 거렸다. 그러다가 그것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탁!

술잔이 탁자위에 놓여졌을 때 노독행은 짤막하게 말했다.

"웃기는 소리야."

중인들의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담세악은 노독행을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노독행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금우두부인지 포호산장인지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무림의 주인이 어떻든 천하가 어떻든 내가 신경 쓸건 없어. 나는

내가 갈 길만 가면 돼."

"......."

담세악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노독행은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내 앞길을 가로막지만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없어. 하나 내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어."

주위가 아주 조용해졌다.

이상한 적막감이 주루안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담세악은 무심한 눈으로 말없이 노독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매만졌다.

"안타까운 일이야."

그의 입가에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이 세상에는 모두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지. 말을 해서

통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노부는 자네가 말을 해서 통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노부가 잘못 보았군."

이번에는 노독행이 입을 다물고 그를 쳐다보았다.

담세악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자네를 위협하려거나 협박하려는 건 아니야. 그렇게

해서 일이 해결될 수 없다는 건 노부도 잘 알고 있네. 그런게

통할 상대는 따로 있지. 노부는 다른 제안을 하려는 거야."

담세악의 모습은 노독행이 거절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했다.

담세악은 금우두부에서도 손꼽히는 지낭(知囊:꾀주머니)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은 아직 제대로 본 사람이 없어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두뇌가 말할

수 없이 명석하고 영리하다는 것은 적어도 강남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 금우두부의 손은 삼수마겁(三手魔劫) 조천세(趙賤世)이고,

머리는 병마군 담세악이다!

이런 소문이 오랫동안 강호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 말은 금우두부의 인물들중 무공은 삼수마겁 조천세가 가장

강호고, 두뇌는 담세악이 가장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조천세는 금우두부의 두 번째 부주(府主)로, 양 손 무공이

천하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담세악의 두뇌에 필적할 수 있는 인물은 강북 표향령의 군사인

천기일사(天機逸士) 서문방(西門尨) 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담세악은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을 반짝이며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자네가 출도한 후 자네에 대한 조사를 많이 했지.

자네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의깊게 관찰해 왔다는 말일세. 그래서

자네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지."

노독행은 물끄러미 술잔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이

이상하게 신경쓰였다.

이자는 대체 무슨 사실을 안다고 하는 걸까?

나에 대해 얼만큼 안다고 하는 것일까?

담세악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자네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하나 있지."

노독행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 올랐다.

담세악은 그의 표정의 변화를 유심히 살피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그녀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네. 그녀는 유부녀지.

남편이 있는 여자란 말일세. 자네는 그 때문에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는 것 같더군."

"........"

"그래서 우리가 그 고민을 해결해 주기로 했네."

노독행은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 늙은이는 도데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그녀의 남편이 불의(不意)의 사고를 당한다면 그녀는

자유로운 몸이 될걸세. 그래서..."

노독행의 안색이 처음으로 가볍게 변했다.

담세악은 철탑같이 흔들림이 없었던 그의 얼굴이 변하는 것을

보고 더욱 자신을 가지고 말했다.

"우리는 그자에게 몇 사람을 보냈지. 그들은 무척 불길한

운세를 타고난 자들이어서 그들을 만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좋지 않은 사고를 당하고는 한다네."

챙!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노독행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술잔이

깨어졌다.

술이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고 노독행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노독행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서운 눈으로 담세악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담세악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정말 모르겠나? 아마 지금쯤 그는 뜻밖의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르지.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거야. 그리고 자네가 사랑하는

그 여자는 불쌍한 과부가 되어 있겠지. 우리는 그녀를 정중히

모실걸세."

깨어진 술잔을 쥐고 있는 노독행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들이....

그들이....

"그녀는 무사할 거야. 그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고히

모실거라는 걸 장담하지. 자네가 우리와 동료가 되는 순간

그녀는 자네의 품속에 안겨질 걸세."

노독행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깨어진 술잔의 파편들이 손에 박혀 시뻘건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금도 아픔을 느낄 수가 없었다.

노독행의 손바닥은 금세 피로 물들었다.

그 피는 앞으로 닥칠 엄청난 피의 향연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노독행은 물끄러미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노독행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담세악은 그의 얼굴을

보자 흠칫 놀랐다.

노독행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데 그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매어 달려 있었다.

그 차가운 미소를 보는 순간 담세악은 왠지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때 노독행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한 가지를 잘못 알고 있군."

담세악은 안색이 변해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

노독행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담세악은 소름이 쭈욱 끼쳤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을 듣는 순간 담세악은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지만 그는 내 친구야. 너희들은

하나뿐인 내 친구를 죽인거야."

다음순간 노독행의 몸은 담세악을 향해서 무섭게 돌진해

들어가고 있었다.

2

탁자는 흔적도 없이 부서져 버렸다.

노독행의 몸이 담세악에 거의 닿는 거리에 접근했을 때 두

가닥의 예리한 강기가 그의 전면으로 날아왔다.

담세악의 뒤에 서 있던 흑백괴인이 손을 떨쳐온 것이다.

노독행은 피하지 않고 양쪽 팔꿈치를 휘둘렀다.

꽝!

벼락치는 듯한 폭음이 터지며 흑백의 두 괴인이 인상을 찡그린

채 손목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노독행의 팔꿈치와 부딛치는 순간 장력을 날렸던 손목이 모두

탈골(脫骨)되어 버린 것이다.

노독행은 숨쉴 틈없이 담세악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파아....!

담세악이 앉아 있던 의자가 산산히 박살나며 사방으로 파편을

튕겼다.

하나 담세악은 없었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몸은 이 장 밖의 허공을 날아가고 있었다.

노독행이 다시 그를 향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어림없다!"

싸늘한 폭갈과 함께 정독이 양 손을 휘두르며 날아왔다.

그와 함께 여덞 여의 흑의인이 노독행과 담세악의 사이를

철통같이 가로막았다.

노독행은 주저없이 정독의 공세속으로 뛰어들었다.

콰콱!

정독은 열 손가락을 매의 발톱처럼 웅크린 채 노독행의 왼쪽

옆구리와 앞가슴을 노리고 들어왔다.

그의 손가락 끝이 푸른 색으로 물들은 것으로 보아

마도(魔道)의 조공(爪功)중에서도 제일 무섭다는

쇄심마혼조(碎心魔魂爪)를 연성한 것이 틀림없었다.

노독행은 피하지 않고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정독의 손가락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우둑!

쇄심마혼조와 노독행의 주먹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뼈마디

으스러지는 소리가 터져 나 왔다.

"으윽!"

정독은 노독행의 주먹에 부딪친 다섯 손가락이 모두 부러진 채

뒤로 비실비실 물러났다. 노독행의 손등에도 다섯 개의 구멍이

뚫려 피가 뿜어나오고 있었다.

하나 노독행은 물러서는 정독의 앞가슴으로 달려들며 팔꿈치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정독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급히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이 빙글 돌며 그의 어깨가 정독의 몸을

측면에서 사정없이 강타해 버렸다.

고산팔벽중의 평산벽(平山壁)이란 수법이었다.

콰쾅!

폭음이 터져 나오고 정독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뿜어나왔다.

"크악!"

정독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삼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는 바닥에서 몇 번 꿈틀거리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실로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정독은 가공할 쇄심마혼조로 금우두부에서도 막강한 지위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그가 노독행의 손에 단 삼 초를 견디지 못하고 피떡이 되어

나뒹굴고 만 것이다.

검고 흰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흑백쌍괴가 우박과 같은 장세를

퍼부어왔다.

원래 이들은 운남성 일대를 횡행(橫行)하던

흑백쌍마신(黑白雙魔神)이었다. 흑마신(黑魔神) 엄팽(嚴彭)과

백마신(白魔神) 나표(羅杓)라는 이름은 운남 일대에서는 거의

사신(死神)과도 같은 위력이 있었다.

하나 그들은 어느 날 담세악을 만났고, 그에게 굴복당해 그의

휘하에 포섭되었다. 그 후로 그들은 담세악의 손발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지금 엄팽이 구사하는 흑마수(黑魔手)와 나표의

백마장(白魔掌)은 주위를 갈가리 찢어버릴 듯한 기세로 노독행을

향해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노독행의 몸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엄팽과 나표의 몸이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노독행은

어느새 왼쪽으로 다가와 그들의 측면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실로

번개가 무색할 몸놀림이었다.

"헛!"

엄팽은 다급한 헛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빙글 돌려 노독행의

미간을 향해 흑마수를 휘둘렀다.

나표는 조금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도 몸을 돌리기는 했으나 엄팽이 가로막고 있어 노독행을

향해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다시 앞으로 한 걸음 움직여 노독행을 향해

백마장을 휘두르려 했다. 하나 그가 막 앞으로 한 걸음

튀어나오는 순간, 무언가 시커먼 것이 나표의 턱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그것이 노독행의 발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나표는

그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쉬앙!

발이 무시무시한 파공음을 내면서 나표의 머리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표는 모골이 송연해졌으나 발이 지나가자 다시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였다.

방금 그의 머리위를 스치고 지나갔던 발이 허공에서 뚝 꺽이며

그대로 나표의 관자놀이를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피할 사이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쾅!

"크악!"

나표는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가격당하고 입으로 폭포수처럼

피를 내뿜으면서 휘청거렸다. 그 순간 그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던

발이 다시 연거푸 그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동시에 다리가 반으로 접혀지며 무릎이 나표의 아래턱을

사정없이 파고 들어왔다.

콰쾅!

폭음과 함께 나표의 몸은 십 여장 밖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날아가는 나표의 머리통은 이미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실로 무시무시한 연환삼퇴(連環三腿)였다.

어어 하는 사이에 흑백쌍마신중의 한 사람이 처참하게

짓뭉개진 것이다.

엄팽은 너무도 돌발적인 사태에 놀라 손을 쓰는 것도 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로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른쪽으로 움직일 줄 알았던 노독행의 몸이 어느새 왼쪽으로

다가와 있고, 그쪽을 향해서 공격하는 순간 그의 몸은 어느새

앞으로 이동해서 나표의 몸을 박살내 버린 것이다.

그가 채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노독행의 주먹이 날아왔다.

때마침 여덞 명의 흑의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지 않았다면

엄팽은 영문도 모른 채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흑령팔귀(黑靈八鬼)가 가세했어도 상황은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노독행은 풍차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양 팔과 양 다리를

질풍처럼 휘둘렀다.

파파파파파...

흑풍팔귀는 달려들던 방향 그대로 후퇴해야만 했다.

그 살인적인 공세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은 회전하는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엄팽에게로 쏘아져갔다.

엄팽은 시커멓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며 양 손을 마구

휘둘렀다.

물러서거나 피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퍼펑!

그의 흑마수중 이장(二掌)이 노독행의 어깨부근에 작렬했다.

하나 노독행의 몸은 조금도 멈추지않고 엄팽의 가슴앞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꽝!

전신을 거대한 철퇴로 가격당한 듯한 아찔한 충격에 엄팽은

순간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전신의 혈맥이란 혈맥은 모조리 터져 버리고 뼈란 뼈는

송두리째 박살나 버렸다. 코와 귀, 입에서 뜨거운 선혈이

꾸역꾸역 뿜어나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너무도 강한 충격을 받아서 아픔은 채 느껴지지 않았다.

신경이 통증을 뇌에 전달하기도 전에 모조리 끊겨나가 버렸던

것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야 엄팽은 왜 다른 사람들이

냉혈무정이란 이름을 그토록 두려워 하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이런 고수가....'

그것이 흑백쌍마신의 최후였다.

흑령팔귀는 십여 년이 넘은 세월을 담세악의 곁에서 지내온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비록 강호무림의 최절정고수들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같이 한 가지 병기(兵器)에 정통하여 누구도 무시못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각기 쌍수검(雙手劍), 귀령도(鬼靈刀),

단사모(短蛇矛), 낭아곤(狼牙棍), 월아권(月牙圈),

연자창(練子槍), 유성추(流星鎚), 그리고 사문편(蛇紋鞭)이었다.

그들이 이 여덟 개의 병기를 이용해 펼쳐내는

팔절쇄천진(八絶鎖天陣)은 담세악이 이들을 위해 특별히 오랜

시간동안 연구하여 만든 것으로, 이들보다 훨씬 강한

절대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동안 이 팔절쇄천진으로 자신들보다 월등이 강한

고수들도 모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상대를 만나도 전혀 두렵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하나 지금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자는 지금까지 그들이 싸워왔던 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었다.

그들은 아직 이자처럼 냉혹하고, 잔인하며, 무서운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인물이 있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막연히 말로만 듣던 냉혈무정의 소문은 이자를 전혀 표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자는 소문으로 듣던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보다 백배는 더 무섭고, 냉혹하며, 무자비한 인물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로 적(敵)으로 삼으면 안되는 인물을

적으로 삼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이었다.

이제는 이자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당하거나 아니면 실날 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필사의 저항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팔절천쇄진은 만들어진지 처음으로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자에게는 팔절천쇄진이 가지고 있는 기괴한 배합이라던지

절묘한 연환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따땅!

지금도 철귀(鐵鬼)의 단사모가 그토록 예리한 각도로 쳐들어

갔건만 그자는 너무도 간단하게 단사모를 막아냈다.

그것도 맨 손으로 덥썩 단사모의 날카로운 끝을 잡아버린

것이다.

철귀는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하나

놀라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땅!

그자의 손아귀에 잡혀진 단사모의 끝이 부러지며 그 날카로운

파편이 철귀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철귀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땅!

철귀가 절망하여 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소귀(笑鬼)의

귀령도가 때마침 날라와 그의 미간을 막 뚫고 들어오려는

단사모의 파편을 쳐냈다.

하나 그 결과로 소귀는 영원히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소귀가 파편에 실린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휘청거리는 순간, 그자의 팔굽이 소귀의 안면을 처참하게 짓이겨

버렸던 것이다.

"크아악!"

소귀는 인간이 내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얼굴은 부러진 뼈와 뭉게진 살점, 그리고 조각난

근육들로 인해서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형상이 되어

있었다.

"아...악마 같은 놈!"

곡귀(哭鬼)와 혈귀(血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들었다.

곡귀의 월아권과 혈귀의 연자창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냉혈무정의 목덜미를 찔러갔다.

그와 동시에 독귀(禿鬼)의 유성추와 색귀(色鬼)의 사문편도

예리한 파공음을 내면서 그의 양쪽 허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이 네 명의 합격은 그 속도와 공격위치가 완벽한 배합을

이루어 천하의 누구라도 도저히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이번에야 말로 저 무서운 놈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 그것은 흑령팔귀의 간절한 바램일 뿐이었다.

노독행은 그자리에 우뚝 선 채로 목을 한 자쯤 옆으로

이동시켰다.

팟!

연자창이 아슬아슬하게 목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그때 곡귀의 월아권이 노독행이 목을 움직인 쪽에서

빠르게 다가들었다.

그때 노독행은 그쪽으로 목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격중되었다!'

곡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려고 했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목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곡귀는 영문을 몰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월아권은 방금까지도 노독행의 목이 있던 허공을 정확하게

가르고 지나갔다. 월아권이 지나가자 마자 노독행의 목이 다시

나타났다.

인간의 목이 어떻게 마음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눈의 착각 때문임을 곡귀는 한참후에야 알 수 있었다.

노독행은 단지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일으켰을

뿐이었다.

단지 그 속도가 너무도 빠르고 시기가 정확했기 때문에 곡귀의

눈이 순간적인 착각을 일으켰을 뿐이다.

그 순간에도 독귀의 유성추와 색귀의 사문편은 노독행의

허리춤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노독행은 양 손을 옆으로 쭉 내뻗었다.

팟!

유성추와 사문편이 각기 그의 양손에 붙잡혔다.

독귀와 색귀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찰나 노독행은 자신의 앞에 멍청하게 서 있는 곡귀를 그대로

걷어차 버렸다.

곡귀가 자신의 월아권을 미처 회수할 사이도 없이 노독행의

오른발은 그의 복부를 사정없이 꿰뚫어 버렸다.

퍽!

가죽이 뚫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곡귀의 몸이 한차례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곡귀는 엄팽과는 전혀 다르게 엄청난 고통을 느꼈다.

자신의 배를 뚫고 들어온 노독행의 발이 자신의 등뒤를  뚫고

나오는 것을 느끼며 곡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입을 딱

벌렸다.

비명 대신에 잘려진 내장조각이 섞인 뜨거운 핏물이

뿜어나왔다.

그 핏물은 노독행의 옷에까지 튀었다.

노독행은 자신의 상체가 피로 물드는 것도 개의치 않고 양

손으로 움켜잡은 유성추와 사문편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독귀와 색귀의 몸이 병기들과 함께 주르르 딸려왔다.

"아...안돼!"

그들은 사색이 되어 병기를 놓고 물러나려 했다.

노독행은 곡귀의 배에서 발을 뽑아냄과 동시에 반대쪽 발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퇴법(腿法)중에서도 가장 위력이 강한 선척퇴(旋 腿)가

독귀의 옆구리에 틀어박혔다.

뿌드득!

"헉!"

독귀는 옆구리뼈가 모조리 박살난 채 급살맞은 개구리처럼

허리를 수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순간 그의 옆구리에 박혀 있던 다리가 굽혀지며 무릎이

숙여진 그의 관자놀이를 위에서 아래로 찍어버렸다.

쾅!

슬격술에서도 이 무릎찍기는 가장 살인적인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독귀의 관자놀이 부근이 움푹 꺼지며 그의 눈이 툭 튀어

나왔다. 그는 미처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부서진 뼈가 뇌속에

틀어 박혀 즉사해 버렸다.

색귀의 죽음은 더욱 처참했다.

그가 사문편을 놓고 뒤로 물러나는 순간에 노독행은 들고 있던

유성추와 사문편을 그를 향해 집어 던졌다.

색귀가 그것을 피했을 때 노독행은 어느새 독귀의 관자놀이를

강타한 후 그의 코앞으로 육박해 오고 있었다.

색귀는 공포에 가득 질린 얼굴로 자신의 눈안에 가득히 쏘아져

들어오는 냉혈무정의 냉혹한 모습을 보고 있었다.

피하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단지 너무도 두렵고 무서워서 악몽(惡夢)이라면 빨리 깨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악몽은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왔다.

콰직!

노독행의 오른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그의 파자권(把子拳)이 날아와 색귀의 콧 등을 가격했다.

색귀는 코뼈가 주저앉는 고통에 눈물을 흘렸다.

하나 그 눈물이 채 뺨을 타고 흐르기도 전에 그의 콧 등을

부숴버렸던 파자권이 바짝 쥐어지며 주먹으로 변해 왼쪽 뺨을

짓이겨 놓았다.

이어 손목과 팔꿈치가 연거푸 날아 들었고, 마지막으로

다가오는 노독행의 뒷등....!

색귀는 그 뒷 등에 부딪힌 자신의 몸이 십 여장이나 날아가는

것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그의 몸은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가공스럽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오타연환벽의

위력이었다.

순식간에 흑령팔귀중의 절반이 처참한 시신으로 나뒹굴었다.

남아 있는 네명의 흑의인들은 공포와 경악으로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그들을 향해서 몸을 돌렸다.

그들은 도저히 더 이상 노독행의 헝클어진 흑발 사이로

번뜩이는 눈을 볼 수가 없었다.

"죽어랏! 이놈!"

"이놈...제발 좀 죽어라!"

절규에 가까운 고함을 지르며 그들은 일제히 노독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노독행은 주저없이 그들 사이로 뛰어들며 양 손과 두 무릎을

휘둘렀다.

파파파팍!

빛발치는 듯한 검광과 도풍, 권영과 손그림자가 허공을 온통

뒤덮었다.

하나 그것도 잠시,

"크악!"

철귀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쓰러지는 것을 시작으로

싸움은 순식간에 끝이 나 버렸다.

콰쾅!

연거푸 터져 나 오는 폭음....

고막을 찢을 듯한 처절한 비명소리....

그리고 토해 버릴 것만 같은 끔찍한 피의 폭죽...

순식간에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흘러내린 핏물과 부서진 팔 다리만이 사방으로 널려 있을 뿐,

신음소리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주루안은 그야말로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피의 도살장이었다.

노독행은 그 피와 죽음의 도살장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주먹에는 아직도 피묻은 살점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 보았다.

담세악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금우두부의 늙은 여우라는 이름 그대로 약삭빠르게 도망쳐

버린 것이 분명했다.

노독행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주루를 쓸어보다가 몸을 날려

주루를 벗어났다.

이어 그는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방립동과 모용추수가 있는 초옥으로....

노독행은 전신을 피로 물들인 채로 있는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달리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 죽지 마, 친구.

절대로 죽어서는 안돼!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죽는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지옥 끝이라도  아가 혼내주고 말거야!

<       2             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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