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51화 (2권 하) (52/61)

독보건곤 2부(하) - 용대운 저

제 51 장    살 아 있 는 걸   후 회 하 게   될 거 야

1

방립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물을 뜨러 나간 그녀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초옥에서 뒤로 조금만 돌아가면 수정처럼 맑은 시냇물이

나온다. 그녀의 걸음이 아무리 느려도 반각이면 충분히 갔다 올

수 있는데 벌써 반 시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도무지 돌아올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방립동은 공연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이제 그 혼자만의 여자가 아니었다.

노독행이 돌아올 때까지는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노독행!

그를 생각하자 방립동은 가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그가 그리워졌다.

그의 검은 안대와 번뜩이는 눈이 못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헤어진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 버린

것 같았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웃는 낯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자신들 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방립동은 그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의 차갑고 메마른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기를 바랬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도 결코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과연 세 사람이 모두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방립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일은 그가 돌아오고 난 다음에 고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왕이면 아주 늦게 고민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될 수 있으면 늦게....될 수 있으면 고통받는 시간이

짧게...될 수 있으면 헤어지는 순간이 멀게....

아주 멀게...어쩌면 영원히 멀게....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 순간의 행복이란 얼마나 짜릿할 것인가?

방립동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비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자신과 그녀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자신과 그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그녀와 그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방립동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고 있는 세 개의 칼날을 보았다.

노랗고, 빨갛고, 파란 세 개의 칼날.

칼날은 하나같이 예리했고, 수법은 냉정하고 악독했다.

방립동은 간신히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드는 치명적인

일도(一刀)를 피해 냈다.

하나 두번째 칼날에 어깨를 찔렸고, 세번째 칼날은 그의 왼쪽

팔을 싹둑 잘라 버렸다.

팟!

피가 천장까지 솟구쳐 올랐다.

떨어지는 하나의 팔....

방립동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잘려진

팔이 꼭 다른 사람의 팔처럼 생각되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마치 혼백이 달아난 사람처럼 바닥으로 뒹구는 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팔이 잘려나간 부분에서는 시뻘건 피가 계속 뿜어나왔다.

방립동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눈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세 사람이 천천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각기 노랗고, 빨갛고, 파란 색의 옷을 걸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옷도 그런 색이었고, 들고 있는 칼도 그런 색이었다.

방립동은 그들의 옷과 그들이 들고 있는 칼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빛나는 금색의 소머리 문양을 보았다.

방립동은 창백한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사색도(四色刀)...!"

그렇다.

이들은 금우두부가 천하에 자랑하는 공포의 살수(殺手)들인

사색도였다.

단순히 황도(黃刀), 홍도(紅刀), 청도(靑刀), 녹도(綠刀)로

불리우는 이들 네 명의 살수들은 수 백번에 걸친 살겁(殺劫)을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방립동은 그제서야 잘려진 팔에서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그는 아직도 뿜어나오는 피를 지혈(止血)시킨 후 물었다.

"녹도는 어디 있느냐?"

중앙에 서 있는 붉은 칼을 든 홍도가 징그럽게 웃었다.

"네 계집을 요리하고 있지."

방립동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너희들이 감히...."

"흐흐...그녀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극진히

모실테니까."

청도가 음충맞게 따라 웃었다.

"그 정도 미녀라면 기꺼이 모실만하지.

흐흐...삼부주(三府主)가 신신당부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

속살을 마음껏 맛보았을텐데..."

청도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방립동은 일단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에게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무슨 낯으로 노독행을 대할 수 있겠는가?

황도가 피묻은 누런 칼을 들고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동방립. 네가 예전에 강남대공자(江南大公子)로 불리웠었다는

말을 들었다. 어디 오늘 강남대공자의 피맛을 좀 보자."

강남대공자!

이이름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던

이름이었다.

하나 한때 이이름은 강남의 모든 젊은 고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천하제일고수를 아버지로 두고 천하제일미녀를 아내로 거느린

사나이.

무공은 능히 청년층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고, 술과 멋을 아는

최고의 풍류남아! 그는 무림인들이 바라는 온갖 조건을 모두

구비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그와같이 되기를 열망했다.

하나 영화(榮華)는 덧없이 사라지고, 과거의 강남대공자는

이제 퇴락한 주정뱅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방립동 자신도 잊고 있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들어보는 강남대공자라는 이름에 방립동의

얼굴에는 잠시 아련한 표정이 떠올랐다.

한없이 화려하고 부러울 것이 없었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도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나 그때의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앞으로는 행복해 질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자신은....?

과연 나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그 화려했던 시절에도 찾지 못했던 파랑새를 지금은 찾을 수

있을까?

아마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파랑새를 찾을 기회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쾌액!

황도의 누런 칼이 차가운 도광(刀光)을 뿌리며 날아들었다.

방립동은 뒤뚱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나 어느새 옆구리에 섬뜩한 통증을 느꼈다.

황도의 칼이 옆구리를 한치쯤 베고 지나간 것이다.

황도는 방립동은 단번에 죽이지 않을 생각인 듯 했다.

쥐를 잡은 고양이가 쉽게 쥐를 죽이지 않는 것은 쥐를 가지고

노는 재미를 즐기기 위해서다. 황도도 그런 즐거움을 누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천천히 다섯 번의 칼질을 했다.

방립동의 몸에 새로운 다섯 개의 핏자국이 났다.

방립동은 전신으로 피를 흘린 채 계속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상대의 칼이 움직이는 것을 뻔히 보고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마음은 능히 피할 수 있었건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상대의 칼은 집요하게 따라와서 새로운

칼자국을 만들어 주었다.

마침내 열 두 번째의 칼질을 당했을 때 방립동은 더이상 발을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댄 채 피를 흘리며 서 있었다.

방안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로 온통 시뻘겋게 젖어

있었다.

방립동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눈앞이 흐릿해졌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편안한 심정이었다.

자신은 이제 이렇게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그와 그녀만이 남게 된다.

그라면 그녀를 구할 수 있겠지.

그리고 아마 행복할 수 있을지도....

어쩌면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가 아닐까?

하늘이 내 마음을 알고 이들을 내려보낸 것일까?

이렇게해서 세 사람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려고 했던 것일까?

이렇게 해서라도 행복해 질수만 있다면...

방립동은 히죽 웃었다. 왠지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죽음이란 것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군.

이봐! 좀 더 사납게 칼질을 하라고.

이왕이면 급소를 찔러줘.

두 번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깊숙히 찌르란 말이야.

아니면 한 칼에 목을 쳐 주거나.

정말 그것밖에 못 휘두르겠나?

좀 더 무자비한 솜씨를 보여달라고.

지옥에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황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립동의 전신은 단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이 유혈낭자했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에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도데체 이자는 무엇이 우스운 것일까?

이자는 이제 곧 자신이 숨을 거두게 된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니면...자신을 비웃는 것인가?

갑자기 황도는 더이상 유희(遊戱)를 즐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상대가 아마 고통스러워 하거나 죽이지 말아달라고 빌었다면

황도는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놀이를 계속했을 것이다.

하나 이자는 고통스러워 하지도 않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이상한 웃음...그건 또 뭐란

말인가?

황도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자식. 끝까지 한 가닥은 있단 말이지? 좋아. 단숨에 끝장을

내주지."

그는 거칠게 말하며 칼을 번쩍 치켜 올렸다.

그리고는 단숨에 방립동의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듯 그의

목덜미를 향해 세차게 칼을 휘둘렀다.

쉬악!

칼날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무서운 속도로 방립동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막 방립동의 목이 잘려질 순간,

콰창!

갑자기 창문을 뚫고 무언가 희끗한 물체가 황도를 향해

날아왔다.

"뭐야, 이건?"

황도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방립동의 목을 찔러가던 칼을 돌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물체를 후려쳤다.

파아...

시뻘건 선혈과 잘려진 뇌수가 허공을 자욱히 수놓았다.

황도는 자신의 칼에 잘려지는 물체가 다름아닌 사람의

머리통임을 알고 움찔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반토막난 그 머리통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의 몸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두...둘째형!"

반토막 난채로 바닥을 구르고 있는 그 머리통은 바로

녹도(綠刀)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방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조용히 걸어들어왔다.

하늘색 유삼이 피로 물든 방안에서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너...너는...?"

들어온 사람을 본 황도와 홍도, 청도의 얼굴이 일제히 변했다.

들어온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금시라도 쓰러질 듯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방립동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을 때, 그의 눈에서는 끔찍스런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결코 편안하게 죽지 못할거야."

다음 순간 그의 몸은 그대로 그들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방립동은 꺼져가는 눈을 들어 필사적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희끗한 것이 어른거리고 세찬 칼바람이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방안에 뛰어 들어와 사색도와 싸우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가 누구인지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다.

'독행...자네인가? 자네가 온건가....?'

방립동은 흐릿해져 가는 눈으로 계속 멀거니 앞을 바라보았다.

처절한 비명이 연거푸 터져 나오며 피비가 온통 방안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방립동의 몸은 자신이 의식하지도 않은 사이에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황급히 방립동을 부둥켜 안았다.

방립동은 있는 힘껏 눈을 부릅떴으나 뿌연 막이 어린 듯

도무지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었다.

'독행은 아닌데...누구인가? 자네는 누구인가?'

그때 문득 방립동은 그자가 입고 있는 것이 하늘색 유삼임을

알았다.

그제서야 방립동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늘색 유삼...그리고 냉정한 눈!

"여...연월! 자네로군..."

심연월은 냉정한 눈으로 방립동을 내려다 보았다.

"그렇소, 대사형!"

방립동은 꺼져가는 의식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물었다.

"그녀는....그녀는...?"

심연월은 방립동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잘있소. 지금쯤은 산장에 도착했을거요."

방립동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안돼....그녀를 산장으로 보내선 안돼...그곳은

그녀에게는 지옥이야...'

하나 그의 말은 채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방립동은 서서히 의식을 잃어버렸다.

2

멀리 초옥이 보였다.

노독행은 더욱 빨리 달려갔다.

오백리가 넘는 거리를 그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강철처럼 단단한 그의 몸도 힘이 떨어졌고, 숨은 턱까지

차올라 금시라도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전신은 땀으로 온통 목욕을 한 듯 흠뻑 젖어 달릴 때마다

땀방울이 비처럼 뿌려졌다.

하나 그는 몸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만 몸을 늦추어도 피투성이로 변한 방립동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지는 광경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마침내 초옥에 도착했다.

그는 벽을 통째로 부수며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굳혔다.

방안은 온통 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그 피로 물든 방바닥에는 여기저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노독행은 심호흡을 했다.

몇 차례나 그자리에 선 채로 심호흡을 했다.

그런다음 시체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토록 떨릴 줄 몰랐던 그의 손끝이 시체의 몸을 하나씩

뒤집을 때마다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시체는 모두 세 구였다.

전혀 처음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잘려진 두 토막의 머리통이 있었다.

방립동은 아니었다.

방립동은 어디에도 없었다.

방립동은 이곳에 없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때 노독행은 바닥에서 하나의 팔을 발견했다.

방안에 있는 세 구의 시체는 모두 양 팔이 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이 팔은....?

노독행은 팔을 집어 들었다.

집어 들기 전부터 그는 알 수 있었다. 한 번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똑똑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방립동의 팔이다.

내 친구의 팔이다.

나에게 술을 따라주던 바로 그 팔이다.

이 팔의 부성부성한 솜털 하나, 땀 구멍 하나까지 그의

것이다.

그의 팔이 잘린 것이다.

노독행은 지금처럼 가슴이 아픈 적이 없었다. 또 지금처럼

분노한 적도 없었다.

자신의 팔이 잘렸다 할지라도 이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살을 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죽지 못했던 사나이.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람을

살리려고 의원을 불러온 사나이.

고통을 잊기 위해서 술주정뱅이가 되었건만 더욱 고통속에

몸부림치던 사나이.

그는 이제 팔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외팔이 주정뱅이가 된 것이다.

노독행은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초옥의 주변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방립동의 모습은 없었다.

그녀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노독행은 그날 내내, 그리고 다음 날 내내 초옥안을

서성거리며 혹시라도 그들이 돌아올까 기다렸다.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삼일 째 되는 날,

노독행은 방립동의 잘려진 팔을 땅에 묻고 초옥을 벗어났다.

*              *              *

황산(黃山).

황산의 옛이름은 검산(黔山)이라고 하며 안휘성의

태평현(太平縣)과 검현(黔縣)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산 높이는 수천 길에 달하며, 기봉준령들이 구름을 뚫고

사시사철 백설(白雪)을 뒤집어 쓴 채 솟아 있었다.

유난히 구름과 소나무, 그리고 바위가 많아 운해(雲海),

송해(松海), 석해(石海)의 삼해(三海)로 특히 유명했다.

황산에서 세 번째로 큰 광명정(光明頂)의 주위에는 유난히

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구름은 산의 중턱부터 깔리기 시작해 정상부근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한치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광명정의 아래에서 정상을 올려보면 그저 희뿌연 구름만이

보일 뿐이었다. 어디가 산봉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도저히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 짙은 구름속을  뚫고 광명정의 봉우리를 넘어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허름한 흑의....헝클어진 머리...그리고 검은 안대!

구름에 반쯤 가린 노독행의 모습은 왠지 적막해 보였다.

하나 안개처럼 자욱한 구름사이로 그의 번뜩이는 외눈이

드러났을 때 그는 더이상 적막해 보이지 않았다. 그 번뜩이는

외눈은 소름끼치도록 냉혹한 살기로 뭉쳐져 있었다.

그는 왜 이곳에 왔는가?

왜 이토록 무서운 살기를 뿜어내고 있는가?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는가?

광명정의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하나의 거대한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은 유난히 짙은 운해(雲海)속에 쌓여 있어 흡사 환상

속의 조각품같았다.

이토록 깊은 산중에 이토록 거대한 건축물이 있다는 것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진 건물의 위로 우뚝우뚝 솟은 전각의

지붕이 그림처럼 드러나 있었다.

노독행은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건물에서 십 여장 떨어진 곳에 하나의 거대한 암석이 서

있었다.

암석의 중앙에는 황금색 조각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소의 머리 모양의 조각이었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포호산장과 강남의 패권을 다투고 있는

금우두부(金牛頭府)의 본부(本府)인 것이다.

노독행은 소머리가 조각된 거대한 암석앞에 우뚝 섰다.

암석의 크기는 무려 삼 장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노독행은 암석에 파여진 거의 일 장에 달하는 소머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벼락같이 주먹을 휘둘렀다.

꽝!

광명정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요란한 폭음과 함께 거대한

소머리의 암석이 그대로 박살나 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가공할 주먹이었다.

사방으로 비산되는 돌조각을 우박처럼 맞으며 노독행은 부서진

암석앞에 묵묵히 서 있었다.

침묵에 잠겨 있던 금우두부의 건물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한 떼의 인영이 건물밖으로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앞으로 달려나왔다가 거대한 금우두상(金牛頭像)이

박살나 있는 것을 보고 대경실색하여 경악성을 내질렀다.

"앗?"

그들은 너무도 엄청난 광경에 놀라 모두들 멍청하게 부서진

금우상의 잔해와 그앞에 서 있는 노독행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들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에 놀라 달려와보니 삼장에

달하는 거대한 금우두상이 돌조각으로 변해 있다니....혹시

이자가 폭약(爆藥)이라도 쓴게 아닐까?

그들중 유난히 눈썹이 짙은 장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웬 놈이기에 감히 금우두부 앞에 와서 행패를

부린단 말이냐?"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쳐들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막 소리를 질렀던 장한은 노독행의 무시무시한 눈과 마주치자

모골이 송연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노독행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냉혹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담세악을 불러와."

그 음성...그 태도...그 눈빛!

장내에는 이십 여명의 장한이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입을 뻥긋거리기만 해도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하나 누군가는 입을 열어야 했다.

마침내 처음에 소리를 질렀던 장한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무엇 때문에 삼부주님을 만나려고

하는거냐?"

그 순간 노독행은 차갑게 웃었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냉혹한 웃음이었다.

중인들은 왠지 소름이 오싹 끼쳐서 자신도 모르게 일제히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들려오는 음성 하나.

"그는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될거야."

동시에 노독행의 몸은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세 명의 장한들이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그에게 맞서려 했다.

하나 그것은 너무도 무의미하고 부질없는 짓에 불과했다.

콰쾅!

굉음과 함께 세 명의 장한들은 세 가닥의 비명을 지르며

십여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크아악!"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사방에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피...피해라!"

"미..미친 놈이다!"

놀란 중인들이 다급한 외침을 토하며 물러섰다가 노독행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하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노독행의 몸은 한 줄기 돌풍처럼 그들의 몸을 사정없이 휩쓸어

버렸다.

콰직!

노독행을 향해 장력을 날리던 장한 하나가 목덜미가 꺾인

괴상한 모습으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또 다른 장한 하나는 노독행의 주먹에 왼쪽 옆구리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그대로 관통되어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었다.

양쪽에서 달려들던 두 장한은 노독행의 어깨에 부딪쳐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그것은 가히 일방적인 도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를 매단 채로 외눈을 번뜩이며 사람들을

쳐죽이는 노독행의 모습은 지옥의 사신(死神)과 다를 바가

없었다.

휘잉!

때마침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머리카락이 뒤로 제켜지며 검은 안대가 나타났다.

그 순간 중인들의 틈에서 비명에 가까운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내....냉혈무정!"

"냉혈무정이닷!"

그것은 가뜩이나 공포에 질려 있던 중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사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게중에는 너무도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발만 달달 떨고

있는 인물도 있었다. 노독행의 주먹은 용서없이 그의 머리통을

부수고 지나갔다.

파아아...

잘려진 머리통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갈 때 노독행의 몸은 그

뒤를 따라 장내를 휩쓸고 있었다.

"케엑!"

처절한 비명이 연거푸 터져 나오고 피비가 허공에 자욱하게

뿌려졌다.

노독행은 광폭한 살기에 휩싸여 미친 듯이 장한들을 격살하고

있었다.

그때의 그의 모습은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마침내 마지막 남은 장한이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등짝이 부러져 쓰러졌을 때 비로소 노독행은 손을 멈추었다.

그는 전신에 피칠을 한 채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한 폭의 지옥도(地獄圖)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잘려진 팔과 부러진 다리...뭉게진 머리통들...그 선열한

핏물과 시체의 산은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는 참혹한 것이었다.

노독행은 핏물을 밟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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