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 장 그 들 에 게 전 해 줘
1
그들중 한 사람은 서문방이었다.
서문방의 얼굴은 처음의 냉정함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의 눈은 생전 처음이다 싶을 정도로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오늘 자신이 보았던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총명한 재지로 가득찼던 그의 머리로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천살조!
무려 백아흔 두명의 강호무림 최고의 살수들이 덤벼들었건만
모두 몰살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한 사람, 단 한 사람에 의해서.
마지막에 펼쳤던 천살조 최고의 수법인
삼십이탈혼참(三十二奪魂慘)은 무림역사상 가장 완벽한
대일인합격술(對一人合擊術)이었다.
그 가공할 수법으로도 상대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지 못했던
것이다.
상대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그의 손끝은 자신도 모르게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오늘같은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설마 자신의 손을 떨리게 하는 인물을 만나게 될 줄이야...
나머지 두 사람중 하나는 전신을 흑포로 칭칭 감은
괴인이었다.
흑포괴인의 몸은 앙상하리만치 마르고, 위태로우리만치
길었다.
얼굴마저 흑포로 감싼 괴인의 몸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두 개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뿐이었다.
붉은 빛이 이글거리는 그 눈동자는 오직 끔찍한 살기로
번쩍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흑포괴인의 손에는 흑의인들과 비슷한 모양의 칼이 쥐어져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칼의 중앙에 일직선으로 금빛 선이 그어져
있다는 것 뿐이었다.
이 흑포괴인이 바로 당금 천하의 제일살수(第一殺手)이자
천살조의 조장(組長)인 흑의사신(黑衣死神) 종일도(宗一刀)였다.
지금 종일도의 가슴은 솟구치는 분노와 원한으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이 수십 년간 피땀을 흘려 만들었던
천살조가 모조리 몰살해 버린 것이 아닌가?
그로서는 상대의 뼈를 가르고 심장을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심정일 것이다.
세 번째의 인물은 다른 두 사람과는 달리 아직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푸른 청의를 입고 머리에는 청색 두건을 쓴 청년이었다.
청년의 허리춤에는 도(刀)도 아니고 검(劍)도 아닌 괴이한
병기가 매달려 있었다.
모양은 도인데 검처럼 양쪽으로 날이 있고, 그 끝이
갈구리처럼 날카롭게 구부러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재질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기이한 마음(魔音)을 뿌려내고 있었다.
세 사람은 피투성이로 변한 채 다섯 개의 칼날에 궤뚫려 있는
중앙의 혈인(血人)을 향해 다가갔다.
혈인은 아직도 그자리에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전신이 피로 물든 혈인의 몸에서 단 하나 성한 것이 있다면
바로 번뜩거리는 외눈뿐이었다.
서문방은 그 외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혈인의 입술부근 근육이 움직이며 하얀 이빨이 드러났다.
혈인은 웃고 있었다.
그것을 어찌 인간의 웃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서문방은 핼쓱한 눈으로 혈인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너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무림역사상 최고의
승부사(勝負士)였다는 것을 인정하겠다."
혈인은 여전히 이빨을 드러낸 채 웃었다.
"하지만...이제 너의 신화도 끝이 날 때가 되었다. 그런
몸으로는 결코 우리들을 당해내지 못한다. 냉혈무정. 너는 비록
터무니없이 강했지만 그 강함으로 인해서 스스로의 종말을
앞당기게 된 것이다."
냉혈무정!
전신을 피로 물들이고 몸에 다섯 개의 칼날이 박혀 있는 이
혈인이 바로 냉혈무정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 혈인이야말로 삼십이탈혼참에서 살아남은 노독행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하나 지금의 그를 어찌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때 종일도의 냉혹하리만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네 놈을 결코 쉽게 죽이지 않겠다. 네 놈의 두 발을 자르고
두 팔을 잘라 그 잘려진 팔 다리를 네 놈의 뱃속에 쳐박아 주고
말겠다!"
노독행의 입이 천천히 열리며 나직하게 쉰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는 반드시 그렇게 죽을 수 있을거야."
이 음성을 듣자 종일도의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살광이 더이상
강할 수 없을만큼 강해졌다.
"미친 놈! 아직도 지껄일 힘이 남아 있다니..."
이제껏 말이 없이 서 있던 청의두건을 쓴 청년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의 무공과 배짱에는 경의를 표하오. 하지만 당신은 너무
무모했소."
노독행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청의청년은 그의 시선을 받자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남궁유룡이라 하오."
남궁유룡!
이 청의두건을 쓴 청년이 남궁세가의 당대가주이며 젊은 층의
고수들중에서 검의 일인자(一人者)라는 철검서생 남궁유룡이었던
것이다.
서문방.
흑의사신 종일도.
철검서생 남궁유룡.
그야말로 당금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절정고수 세 사람이
거의 빈사상태에 있는 한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란히 다가온
것이다.
그들의 눈에 비친 노독행의 모습은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목골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아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노독행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생각하면 완전히 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문득 노독행의 입술이 열리며 표정없는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말해줄 수 있겠지? 너희들은 산장에서 나왔나?"
서문방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으려 했다.
하나 그때 종일도가 차갑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죽기 전에 네놈의 머리통속에 똑똑히 새겨 두어라.
우리는 동방어르신을 모시고 있다."
서문방이 그의 말을 제지하려 했으나 이미 종일도는 할 말을
모두 내뱉은 후였다.
그 순간 노독행의 외눈에서 무시무시한 빛이 뿜어나왔다.
이어서 흘러나오는 음성 하나.
"그것으로 동방유아의 운명은 결정된거야."
그 음성속에 담겨 있는 끝도 모를 기이한 살기에 세 사람의
몸이 움찔하는 순간,
파앗!
노독행의 몸이 한바탕 크게 떨리며 그들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쾌구!
그의 왼쪽 어깨와 손 등에 꽂혀 있던 두 개의 칼날이 어느새
뽑혀져 종일도의 미간을 향해 쏘아져 왔다. 동시에 그의 양쪽
옆구리에 박혀 있던 칼날도 뽑혀져 서문방의 양쪽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등에 박혀 있던 칼날은 남궁유룡의 목덜미를 향해
폭사되어 오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노독행의 몸이 크게 흔들린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섯 개의 칼날이 뽑혀 나오며 노독행의 몸에서 다섯
줄기의피가 솟구쳐 나왔다.
하나 그것은 더욱 끔찍한 피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가장 먼저 처참한 꼴을 당한 사람은 종일도였다.
종일도는 상대가 설마 그런 몸을 하고도 반격할 힘이
남아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가 두 개의 칼날이
미간을 향해 날아오자 엉겁결에 손을 들어 칼날을 막았다.
팍!
두 개의 칼날이 그의 팔뚝을 꼬치처럼 뚫고 들어왔다.
"큭!"
종일도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뒤로 주춤 물러나는 순간,
노독행의 몸이 질풍노도처럼 그를 향해 달려들어왔다.
파앗!
그의 손이 움직이자 종일도는 양 팔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으악!"
그의 양 팔은 팔뚝 아래로 싹뚝 잘려져 나가 버렸다. 하나
잘려진 팔에서 채 피가 뿜어나오기도 전에 노독행의 월영도는
그의 두 다리마저 그대로 베어 버렸다.
싹둑!
종일도의 몸이 기우뚱하며 바닥에 쓰러지려 했다.
그 순간 노독행은 잘려진 종일도의 양 팔과 양 다리를 들어
그대로 그의 아랫배에 쑤셔 박았다.
콱!
잘려진 팔다리가 종일도의 아랫배를 뚫고 등뒤로 삐져 나왔다.
"나는 약속은 꼭 지켜."
노독행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종일도는 학질걸린 사람처럼 몸을
마구 떨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서문방과 남궁유룡은 종일도보다는 조금 상황이 좋았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한 가닥의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독행이 날린 칼날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하나 간신히 한숨을 돌린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종일도의
처참하기 이를데 없는 최후였다.
"악독한 놈!"
서문방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며 노독행을 향해
쌍수(雙手)를 휘둘렀다.
남궁유룡은 하마터면 구토가 나올 뻔했었다.
강남의 유수한 명문중에서도 명문인 남궁세가에서 고귀하게만
자로온 그로서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끔찍스러운 광경이었다.
하나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칫하면 자신이 그런 꼴을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남궁유룡은 수중에 차고 있던 마음검(魔音劍)을 번개같이 뽑아
전력을 다해 십삼검(十三劍)을 발출했다.
바로 남궁세가의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한
섬전십삼뢰(閃電十三雷)였다.
쾌쾌구!
장내가 온통 장영과 검풍에 휩싸여 버렸다.
노독행은 서문방의 공세는 무시한 채 남궁유룡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따땅!
그의 월영도는 남궁유룡의 섬전십삼뢰를 모두 봉쇄했다.
남궁유룡은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채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 순간 서문방의 장력은 한치의 착오도 없이 노독행의 등판에
작렬했다.
꽝!
벼락치는 듯한 폭음과 함께 노독행의 입에서 피화살이 뿜어져
나왔다.
"푸웃!"
그 피화살은 그대로 남궁유룡을 향해 날아갔다.
남궁유룡은 설마 상대가 자신을 향해 피를 토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지라 황급히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노독행의
몸이 그를 따라 이동하며 그대로 맹렬하게 무릎으로 남궁유룡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뿌득!
남궁유룡은 갈비뼈가 부러져 나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렸다.
그로서는 난생 처음으로 당해보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찰나 노독행의 반대쪽 무릎이 그의 벌려진 입에 틀어박혔다.
파아아...
아래턱 뼈가 부서진 이빨과 함께 뇌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남궁유룡은 냉혹무비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피가 묻는 걸 두려워 피한다면 검을 쥘 자격도 없는거야."
그것이 강남의 명문인 남궁세가의 당대가주의 최후였다.
2
서문방은 정신없이 뒤로 몸을 날렸다.
도저히 도망치지 않고서는 배길 재간이 없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저럴 수가 없었다.
저런 상처를 입고도 저런 무자비한 솜씨를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 채 십장을 달리기도 전에 그는 오른쪽 다리에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큭!"
그의 몸은 달려가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이장 쯤
굴렀다. 그때서야 서문방은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에 하나의 칼이
꽂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칼보다 유난히 작고 둥그런 칼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여인의 장신구와도 같았다.
하나 그 칼이야말로 당금무림에서 공포의 대명사인 냉혈무정의
독문병기(獨門兵器), 월영도인 것이다.
서문방은 오른쪽 다리에 월영도가 꽂힌 채로 바닥에서 기를
쓰고 일어나 앞으로 전진했다.
하나 채 두 걸음을 더 걷기도 전에 이번에는 왼쪽 다리에
극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의 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다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어느 사이엔가 왼쪽 허벅지에도 하나의 칼이 꽂혀 있었다.
서문방은 양쪽 다리에 칼을 하나씩 꽂은 채 두 팔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도저히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공포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하나의 발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피로 젖은 발이었다.
서문방은 몸을 떨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시뻘겋게 피로 물든 다리가 나타나고 그 위로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너덜너덜한 혈의(血衣)가 보였다. 그리고 좀더
고개를 올리자 마침내 볼 수 있었다.
피와 죽음과 공포의 얼굴을...
그 얼굴은 서문방을 내려보면서 웃고 있었다.
"네 본명은 뭐지?"
나직한 음성이었다.
하나 그 음성을 듣자 서문방의 몸은 격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문세령(西門世靈)...."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본명은 조향령도 아니었고 담세악도 아니었다. 서문방도
물론 본명이 아니었다.
바로 서문세령이었다.
서문방과 담세악, 조향령의 세 이름은 서문세령이라는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에 불과했다.
공포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노가살수문을 없앤 것은 동방유아의 지시였나?"
문득 서문세령은 고개를 쳐들고 노독행을 올려다 보았다.
몸은 덜덜 떨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이상하게 평온한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노가살수문 정도를 없애는데 그분이 직접 지시를 할 것 같나?
그 정도는 내 선에서 결정할 수 있지."
노독행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때 천상회에서 너를 구해간 인물은?"
서문세령은 다시 웃었다.
"직접 알아봐. 내 입에서는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할테니까."
노독행은 물끄러미 그를 내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고 싶은 거로군. 무섭고 두려우니까 빨리 죽어 버리려고
하는 거로군."
"......"
서문세령은 입을 벌렸으나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죽음이란 그렇게 손쉬운 것일까? 그래서 함부로 사람을
죽였나? 노가살수문 쯤이야 그냥 없어져도 좋은 존재라고
생각했나?"
노독행은 더이상 그를 내려다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다.
노가살수문의 일흔 여섯 명의 피의 원한을 갚게 된 지금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말하는 것 뿐이다.
그것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생명이란 그런게 아니란 말이야. 나도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가만히 있는 사람을 죽인 적은 없어. 나도 안단
말이야. 나같은 살인마도 누구에게나 가족이 있고 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이야."
서문세령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멍하니 그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런데 너만 몰랐나? 그들에게 자식이 있고 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너만 몰랐나? 그래서 그냥 죽이라고 한거야? 정말
몰랐나? 그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는지 정말 알지 못했나?"
"......."
"나는 그 동안 많은 밤들을 뜬 눈으로 지새웠어. 괴로웠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니까.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건 말이야. 아무리 이를 갈며 복수를 해도, 아무리 많은
사람을 쳐죽여도, 너의 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낸다 해도 죽은
사람들이 살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야. 그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단 말이야. 내 아버지와 형...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단 말이야. 그게 정말 화가 나."
노독행은 어두운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에 빛나는 별 하나 하나가 그리운 얼굴들로 생각되었다.
그날의 별빛도 저렇게 밝았었지.
검은 하늘에 선연히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일흔 여섯 개의 별...
일흔 여섯 개의 목숨...
그 목숨의 빚을 갚지 않고서는 살아있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끊고 끝내 별이 되어 사라진 일흔
여섯 명의 식솔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단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때 그들이 내질렀던 소리없는 외침이 잊혀지지 않았다.
- 부탁한다!
- 노독행이라면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 그가 우리의 복수를 해줄테니까!
그의 지난 구년에 걸친 세월은 오직 그 복수를 위한
세월이었다.
이제 복수의 한쪽 가닥은 붙잡은 셈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마음속에 회한(悔恨)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봐. 지하에 가면 그들에게 전해줘. 다시 한 번 내게 그런
부탁을 하면 정말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나도 한 번쯤은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다고 말이야."
사마세령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노독행은 사마세령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몸은 이미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혀를 깨문
것이다.
노독행은 식어가는 그의 몸을 내려보고 있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이 말도 전해줘. 이제는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말이야."
사마세령의 시체는 말이 없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잠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 보다가 중얼거렸다.
"이제 구경은 끝났어."
멀지않은 숲속에서 움찔하는 기색이 들려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천천히 숲속에서 걸어나왔다.
그들은 금포를 입은 위맹한 인상의 중년인과 준수한
청년이었다.
바로 모용태릉과 위문평이었다.
그들은 모용세가에 멀지 않은 곳에서 검광이 난무하고 처절한
비명소가 들려오는 것을 알고 달려왔다가 실로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 충격의 여파가 아직도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누구라 할지라도 그런 장면을 보았다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지금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피투성이의 괴인이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자는 악마이거나 악마와 비슷한 무엇일 것이다.
결코 인간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두 사람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노독행은 위문평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모용태릉의 살찐 배와 호화로운 금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이 모용태릉인가?"
평상시의 모용태릉이라면 누가 자신에게 이런 무례한 태도를
보였다면 벼락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하나 지금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런 자에게 화를 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모용태릉은 아직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노독행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그들로서는 본 적도 없고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냉혹한 미소였다.
"당신이 주선검을 완성했다고 하더군. 어디 내게 한 번
펼쳐봐."
모용태릉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불현 듯 화가 치밀어 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하나 검을 뽑지는 못했다.
뽑을 수가 없었다.
노독행의 외눈에서 번들거리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도저히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뽑기만 하면 자신의 가슴이 갈라지고 머리가 잘려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남들이 그러더군. 당신은 좀처럼 남과 싸우지 않는다고. 난
그 말을 듣고 알았지. 당신은 겁장이야."
모용태릉의 턱수염이 격하게 흔들거렸다.
그것은 모용태릉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노독행은 그가 화를 내건 말건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하수와는 싸우지 않겠다는 말은 이기지 않겠다는 소리야.
상수(上手)와 싸우면 어차피 질게 뻔하지 않겠어? 당신은 남과
싸워 패하는게 두려운거야. 그게 상수이든 하수이든. 그래서
하수와 싸우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 집안 깊숙히 틀어 박혀
있기만 하는거야."
"........"
"진짜 고수란 말이야. 패하는 걸 두려워 하지 않아. 남과
싸우는 걸 두려워 하지 않는거야. 진짜 실력은 싸울 때 나타나는
법이거든. 당신이 익혔다는 주선검이 진정한 위력을 나타내려면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필요해. 그 피는 숨어 있는 사람은 얻을
수 없어."
모용태릉은 몸이 뻗뻗하게 굳은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의 고리눈은 부릅떠진 채 노독행을 쏘아보고 있었다.
노독행은 태어나서 아직 이렇게 많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처음 봤겠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여러번 생각을
했었지. 난 당신을 때려주고 싶어. 이곳까지 올 때는 당신을
정말 혼내주려고 생각했지. 하지만 한 번만 참기로 했어."
"........"
"당신이 잘나서가 아니야. 당신 딸 때문이야."
모용태릉의 눈꼬리가 덜덜 떨렸다. 항상 붉은 기가 감돌았던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도 창백하게 핼쓱하게 변한 것 같았다.
노독행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더이상 불행해지는 건 참을 수가 없어. 난 부모없은
고아가 어떤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 그녀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 그래서 참는거야. 하지만 한 번 뿐이야. 다음에는
정말 용서하지 않을거야."
노독행은 한 번 더 모용태릉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는 가겠어. 주선검의 진정한 위력을 알고 싶다면 언제든지
덤벼. 상대해 줄테니까."
노독행은 느릿느릿 몸을 움직였다.
피로 물들은 그의 몸은 유난히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하나 모용태릉은 여전히 그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노독행의 몸이 어둠속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그는 그자리에
못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죽음같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위문평은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왔다.
모용태릉은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노독행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위문평은 몇 번 망설이다가 그를 불렀다.
"사부님."
순간 모용태릉은 번갯불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 보았다.
위문평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모용태릉은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얼 보고 있는거냐? 어서 꺼지지 않고."
위문평은 영문을 몰라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사부님...."
모용태릉은 분기탱천하여 시뻘개진 얼굴로 검을 움켜잡았다.
"정말 가지 않을테냐? 나의 주선검을 맛보고 싶단 말이냐?"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위문평은 허겁지겁 몸을 돌려
사라져갔다.
위문평이 사라진 다음에도 모용태릉은 한참동안이나 검의
손잡이를 잡은 채 씩씩거렸다.
하나 그는 끝내 검을 뽑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