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보건곤-59화 (60/61)

제 59 장     하  루  만    기  다  리  게

1

금릉이 코앞에 보이는 작은 야산이었다.

그 사나이는 야산의 중턱에 앉은 채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사납게 불어 흙먼지가 하늘높이 휘몰아쳤다.

사나이는 흙먼지 가득한 바람을 맞으면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노독행은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사나이는 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흙먼지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날 같군. 그날의 하늘같아."

그의 입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사나이의 수염가득한 얼굴과 우수에 젖은 눈을 보며 노독행은

사나이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사나이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을

응시했다.

"그렇군. 북만주의 그 하늘같군."

사나이는 문득 빙그레 웃었다.

"하늘도 그때 그 하늘이고 사람도 그때 그 사람이군. 이런 날

술이 없을 수없지."

사나이는 몸을 일으켰다.

"가세. 모처럼 술이나 한 잔 하세."

노독행은 몸을 일으킨 사나이의 왼쪽 소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왼쪽 소매가 그렇게 쓸쓸할 수 없었다.

사나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오른팔로

노독행을 잡아 일으켰다.

"가자니까. 오늘은 내가 사겠네."

노독행은 사나이가 이끄는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나이의 없어진 왼쪽 팔에 대해서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 않아도 사나이는 알고 있을테니까.

친구 사이에 말이란 필요없는 존재일 뿐이다.

주루는 작고 허름했다.

하나 술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은 주루안이 한없이 넓고 아늑해

보였다.

두 사람은 나물 몇 가지를 안주삼아 몇 병의 술을 비웠다.

방립동은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빈 술잔을 만지작 거렸다.

"죽엽청은 정말 맑고 투명해. 언제고 이 투명한 세계속에 빠져

죽고 싶었네."

노독행도 자신이 들고 있는 술잔을 바라보았다.

"또 죽는 타령인가?"

방립동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자네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었지."

"어떤가, 요즘?"

"나?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 아무도 내게 간섭하는 사람이

없네."

방립동은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어떤가?"

"나도 그럭저럭. 자네가 없어서 조금 쓸쓸했어."

방립동은 다시 웃었다.

"나만큼은 아니겠지."

"글쎄...그럴까?"

"나는 말이지 요새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네."

"무슨 버릇이지?"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지 않아."

방립동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차가운 물기의 촉감이 마음에 든다네. 물기가 조금씩

말라가면서 기분이 상쾌해지지. 때로는 땀같기도 하고

눈물같기도 한 생각이 들어 몇 차례나 거울을 본다네. 똑 같은

물인데 땀이나 눈물과는 또 달라."

"......"

"어떤 때는 그 촉감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하루종일 세수만 할

때도 있네. 세수를 하고 마를만 하면 다시 하고...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저문다네. 그때 비로소 세수를 멈추지."

"왜 그런가?"

"그때는 아무도 내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거든. 물기젖은 내

얼굴을 아무도 보지 않아."

노독행은 물끄러미 방립동을 바라보았다.

방립동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그렇게

우울해 보일 수 없었다.

그 깊게 가라앉아 있는 두 눈은 눈물 가득한 어린 아이의

눈같았다.

방립동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바보 같은 이야기지. 자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아무런

재미도 없을거야."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이제부터는 세수를 하고 물기를 닦지 않겠네."

"왜?"

"나도 그런 감촉을 느껴보고 싶어서. 자네가 느꼈던 그 감촉을

그대로 느껴보고 싶어."

방립동은 멍하니 노독행을 바라보다가 눈을 몇 차례

껌벅거렸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술잔을 내려다 보았다.

한참을 그런 자세로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독행."

노독행은 그를 돌아보았다.

"음?"

"자네는 내세(來世)를 믿나?"

"그건 왜 물어보지?"

"그냥. 내세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

"어떤 모습을 원하나?"

"글쎄...자네같았으면 좋겠지만...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 지금보다 좀더

강하고...남자답고...울지 않는 사나이?"

노독행은 술잔을 들었다. 그 안에 든 술을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넘겨 버린 다음 그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지금 그대로가 제일 좋아."

방립동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자네에서 조금만 달라져도 나는 달갑지 않을거야.

지금처럼 조금은 우울하고...조금은 쓸쓸하고...조금은 슬픈

자네가 내 마음에 꼭 들어. 내가 다가갈 수 있는 텅빈 공간이

많이 있거든."

방립동은 다시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텅빈 공간이라...그 말은 나도 마음에 드는군. 내 마음의

텅빈 공간..."

두 사람은 오랜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 갈 무렵.

방립동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탁자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잠든 그의 얼굴은 어린 아이의 얼굴처럼 순진해 보였다.

노독행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도

그의 옆에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나직하게 코를 골며 잠에 떨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방립동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노독행은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방립동은 꼼짝도 않고 앉은 채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컴컴한 주루안에서 그는 한 시진이 넘게 그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푸른 빛이 번뜩이는 작고 예리한 비수였다.

비수의 날은 요사스러울 정도로 시퍼렇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비수의 이름은 영롱비(玲瓏匕)라 했다. 영롱비는 이름과는

달리 마물(魔物)이었다.

이 파랗고 요사스런 광채를 번뜩이는 비수는 사람의 몸에

들어가면 피에 녹아 하나의 액체로 변해 버린다. 그 액체는

인체에 치명적인 극독(劇毒)으로, 해독(解毒)따위는 아예 기대도

할 수 없는 살인적인 맹독이었다.

방립동은 영롱비를 손에 든 채 노독행의 자는 모습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몇 번이나 그는 영롱비로 노독행의 등을 찌르려고 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리고 영롱비의 날카로운 끝이 노독행의

옷자락을 뚫고 거의 피부에 닿은 적도 있었다.

하나 방립동은 찌르지 못했다.

결국은 찌르지 못했다.

갑자기 그는 영롱비를 내던지면서 고개를 파묻고 흐느꼈다.

"못하겠어....나는 못하겠어..."

방립동의 흐느낌이 주루안을 조용하게 울려퍼졌다.

그때 하나의 음성이 들려왔다.

"바보 같은 친구. 눈을 감고 찌르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나?"

노독행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방립동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흐느낀 채로 중얼거렸다.

"나는 자네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 자네는

일부러 내게 기회를 주었지만....나는 도저히..도저히..."

방립동의 눈가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독행의 눈빛도 더할 나위 없이 우울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네. 칼을 집어 들고 나를 찌르게. 나는 결코

반항하지 않을거야."

방립동은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를 원망하지도 않을거야. 정말이야."

방립동은 아무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한참동안이나 흐느낀 다음에야 그는 울음을 멈췄다.

그는 오른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찍은 다음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친구에게 칼을 겨누는 일은 평생에 한 번이면 족해. 두 번

다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노독행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방립동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나와 그녀를 풀어주겠다고 했네. 우리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했지."

"......."

"우리에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 좋다고 했어. 두 번 다시

우리를 찾지 않는다고 말이야. 자네를 죽여주기만 하면."

방립동은 코를 훌쩍거렸다.

"나는 거절하려고 했지. 하지만 거절하지 못했네. 그는 내가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도 똑똑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거지."

노독행은 불쑥 물었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데?"

방립동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결국은 이기적인 사람이지. 나약하고 소심하며...친구보다는

자기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노독행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네."

"자네는 자네를 위해서 그랬던게 아니야. 나는 알지. 자네는

그녀를 위해서 거절하지 못했던거야."

방립동은 입을 다문 채 노독행을 쳐다보았다.

"자네 혼자만의 이익을 생각했다면 자네는 거절했을거야.

그런데 그녀는 다르지. 그녀는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거야. 고통과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얻은거지. 자네는 그녀에게서 그 기회를 빼앗을 수 없었던거야.

그래서 거절하지 못했던거야."

"......."

"나라도 그랬을거야. 친구는 이해해 주겠지. 그녀가 행복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나라도 그렇게 생각했을거야. 반대로 자네가

나라도 이해했을거야. 그렇지 않나?"

방립동은 한참동안 어둠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네. 자네라면....자네라면....하지만

나는 도저히 친구를 찌를 수 없었네."

"그게 바로 자네야. 그게 바로 미워할 수 없는 자네의

모습이란 말일세."

방립동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의 음성은 너무도 나직해서 입속으로 옹알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와 나는...그녀와 자네는...그리고 자네와 나는..."

노독행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오래전부터 그 문제로 많은 생각을 했네. 그리고

해결방법을 찾았지."

방립동은 고개를 번쩍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그의 눈은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 소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인가?"

노독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야.

나도...자네도...그녀도..."

방립동은 고함을 내지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떤 방법인가? 빨리 말해 주게."

노독행의 음성은 여전히 담담했다.

"이곳에서 하루만 기다리고 있게. 그러면 알려주겠네."

방립동은 몸을 움찔했다.

"이곳에서?"

"그렇네."

"왜? 왜 이곳에서 하루를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그건 내일 알게 될걸세."

방립동은 간절한 표정으로 노독행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독행? 지금 말해 주게. 하루를 기다린다면 나는

미쳐버리고 말걸세."

"지금까지 기다려 왔는데 하루를 더 못참겠나? 하루만 더

참게."

방립동은 노독행의 표정을 보고서 그가 지금은 절대로 말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노독행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한 가지만 말해 주지. 그 방법은 우리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거야. 전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거야."

방립동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인가? 거짓말은 아니지?"

"나를 믿게."

방립동은 한참동안이나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곳에서 하루를 기다리지."

노독행은 다시 한 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는 틀림없이 만족할 수 있을거야."

그의 음성은 유난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틀림없이...."

2

포호산장의 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노독행은 천천히 열려진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드넓은 포호산장의 광장안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텅빈 광장은 한없는 적막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노독행은 광장의 한복판에 가서 우뚝 섰다.

그때 그는 광장의 저편에 있는 거대한 전각의 앞에 한 사람이

선 채로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유난히 뚜렷한

마의청년이었다.

금의청년은 노독행을 향해서 침착한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노독행은 한동안 마의청년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이었군."

마의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요."

그는 풍조산이었다.

귀왕곡의 곡주인 풍일립의 하나뿐인 아들이며, 귀왕곡의

유일한 생존자.

그는 과거와는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당시의 그는 질좋은 금의를 입고 전신에는 호화스러운

장신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피부도 여인의 그것처럼 새하 고 입술에는 연지까지 살짝

발라 유약해 보이기까지 했었다.

하나 지금 그는 거친 마의(麻衣)를 입었고, 몸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걸치지 않았다. 피부는 거무튀튀했고,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특히 그의 어딘지 들떠 있던 두 눈은 낮게 가라앉아있어 그

동안 그가 인간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귀왕곡의 유일한 생존자인 풍조산이 포호산장에 나타난 것은

확실히 뜻밖이었다. 더구나 그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풍조산은 노독행을 바라보며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귀왕곡이 멸망한 후 나는 당신을 꺾을 수 있는

무공을 익히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소."

노독행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나는 동방대협에게 오직 한 가지의 무공만을 배웠소. 그래서

그것으로 당신과 승부를 겨뤄보려고 하오."

"......."

"동방대협은 이곳의 뒤쪽 화원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당신이 나를 꺾는다면 그곳에서 동방대협을 만날 수 있을거요."

노독행은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동방유아가 어디에 있든 자신은 그를 찾아갈 것이다. 그가

피하든 피하지 않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중요한건 자신은 반드시 동방유아를 찾아갈 것이고,

동방유아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풍조산은 별빛처럼 차가운 눈으로 노독행을 응시하다가

품속에서 하나의 기이한 병기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길이가 두 자쯤 된 금색의 쇠몽둥이였다. 쇠몽둥이에는

금빛 강침(剛針)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손잡이를 제외하고는 온통 금침(金針)으로 뒤덮혀 있는

쇠몽둥이.

"이것은 금과추(金瓜鎚)라는 것이오. 나는 이 금과추로 당신의

무쌍류에 도전해 보겠소."

노독행은 풍조산의 음성을 귓전으로 흘려보냈다.

동방유아의 가장 큰 절기는 반혼장이었다.

그는 왜 풍조산에게 반혼장을 가리키지 않은 것일까?

이 괴이한 병기로 노독행을 상대하게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풍조산은 금과추의 예리한 강침으로 손으로 살짝 만졌다.

닿기만 했는데도 손가락 끝이 갈라지며 한 방울의 핏물이

흘러나왔다.

피맛을 본 금과추는 요사한 광채를 뿌려내고 있었다.

풍조산은 금과추를 힘껏 잡은 채 노독행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내게 복수의 기회를 준걸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래서 한 가지만 알려주지. 이 금과추에 꽂혀 있는

쇄혼금침(碎魂金針)은 일단 한 번 찔리기만 하면 그대로 혈관을

타고 인체로 들어가기 때문에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소.

그걸 기억해 두시오."

노독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풍조산은 금과추를 휘두르며 노독행을 향해 덤벼들었다.

쉬악!

금과추가 예리한 파공음을 울리며 노독행의 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풍조산의 금과추를 휘두르는 수법은 확실히 놀라웠다.

빠르고 직선적이며, 강력한 힘을 동반하고 있었다.

노독행은 금과추가 자신의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묵묵히 서

있다가 슬쩍 몸을 옆으로 이동시켰다.

풍조산은 그가 그렇게 움직일 것을 미리 알고나 있었다는 듯이

도중에 미끄러지듯 몸을 비틀며 여전히 금과추를 휘둘러왔다.

노독행은 다시 우측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풍조산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 붙으며 육박해 들어왔다.

금과추는 쇄혼금침으로 뒤덮혀 있기 때문에 맨손으로는

맞부딪칠 수가 없었다.

노독행은 다시 빠르게 왼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풍조산의 몸이 그쪽으로 움직일 순간에 노독행의 몸은

팽이처럼 회전하며 그의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실로 번개가 무색할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하나 노독행이 비어있는 풍조산의 옆구리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구!

풍조산이 허리를 뒤집으며 금과추를 찔러왔다.

그 한 수(手)만 보아도 풍조산이 그 동안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었다.

노독행은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금과추의 살인적인 일격을

피해 냈다.

풍조산은 어느새 몸을 똑바로 뒤집으며 허공에 떠 있는

노독행을 향해 다섯 번이나 맹렬하게 금과추를 수직으로

그어댔다.

팟! 팟!

노독행의 옷자락 하나가 금과추에 달려 있는 쇄혼강침에

잘려나갔다.

노독행은 다시 허공에서 왼쪽 발로 오른쪽 발 등을 차며

솟구쳐 올랐다.

풍조산은 계속 따라오며 금과추를 찔러왔다.

노독행은 맨손으로는 더이상 금과추의 공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고슴도치처럼 꽂혀 있는 쇄혼강침은 천하의 어떤

무기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일단 닿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장나 버리는 것이다.

마침내 노독행은 월영도를 뽑아 들었다.

창!

월영도의 도광(刀光)이 허공을 자욱하게 수놓으며 금과추를

향해 맞서갔다.

풍조산은 피하지 않고 금과추로 월영도를 후려쳐갔다.

막 월영도와 금과추가 정면으로 부딛치려는 순간,

노독행은 풍조산의 얼굴을 보았다.

풍조산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풍조산은 금과추를 후려쳐 오면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순간 노독행은 깨달았다.

왜 동방유아가 풍조산에게 반혼장의 공력을 가르켜주지

않았는지를....

왜 이토록 기이한 병기로 자신을 상대하게 했는지를....

땅!

월영도와 금과추가 부딛쳤다.

순간 금과추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파파파파파......

금과추에 꽂혀 있던 수 백개의 쇄혼강침이 무서운 속도로

사방을 향해 폭사되어 갔다.

"크악!"

풍조산은 수십 개의 쇄혼강침에 전신을 격중당한 채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파아아...

무서운 폭발력으로 터져 나간 수 백개의 쇄혼강침은 반경 십

여장 이내를 완전히 초토화시켜 버렸다.

찢겨진 살점과 자욱한 피비가 장내를 뒤덮었다.

바닥이 온톤 무서운 속도로 파고든 쇄혼강침에 꽂혀 움푹움푹

파여들어가 있었다.

풍조산은 중앙에 질펀한 피를 뿌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의 전신은 쇄혼강침에 철저히 짓이겨져 도저히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나 그는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전신에 수십개의 구멍이 뚫린 채로 필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노독행의 모습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무엇을 보았는지 그의 입술을 뚫고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크으...."

그의 앞에서 이장밖에  있는 땅거죽이 꿈틀거리면서 그곳에서

하나의 인영이 뛰쳐 나왔다.

그는 바로 노독행이었다.

절대절명의 순간, 노독행은 오행지둔의 수법으로 땅속으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

그의 옷에도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어 조금전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한 것이었는지를 그대로 나타내 주고 있었다.

노독행은 자신의 옷에 뚫린 구멍은 신경도  쓰지 않고

풍조산을 바라보았다.

풍조산은 이미 기식이 엄엄해 있었다.

"요...용케도 피했구료..."

그의 음성은 거의 갈라터져 있어 알아들을 수 없었다.

"도...동방유아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이

동귀어진(同歸於塵)수법이었소. 그...그는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당신을 이길 수 없을거라며...이것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지..."

노독행은 말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전 풍조산의 얼굴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자신도 이와 같은 몰골로 변해 있었을 것이다.

풍조산의 몸이 한차례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나...나는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지만....한 가닥 가책을

느끼고 있었소...다...당신이 죽지 않아 정말 다행.."

풍조산의 말은 채 맺어지지 않았다.

풍조산은 눈도 감지 못하고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노독행은 자신이 흘린 피속에 누워 있는 풍조산의 시신을

묵묵히 내려보고 있었다.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풍조산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동방유아의 수법에 대해서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선량한 젊은이를 죽음의 길로 인도했던

것이다.

오직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인재를

아무 꺼리낌없이 희생시켰던 것이다.

마치 노가살수문의 일흔 여섯 개의 목숨을 희생시키듯이...

그는 대체 피의 소중함을 알고나 있을까?

이들이 흘리는 한 방울 한 방울의 피가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를 알고 있을까?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

그에게도 이 피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줄테다.

자신이 흘리는 피 한 방울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줄테다.

그 피의 고통과 원한을 몸소리쳐지도록 느끼게 해 주고야

말테다.

노독행은 천천히 몸을 움직여 전각너머로 사라져갔다.

외눈을 번뜩인 채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피의 살육전(殺戮戰)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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