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해결
“그래도 북창령원으로 잘 찾아왔네.”
소녀가 살짝 웃자 폭포마저 빛을 잃은 것 같았다.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초기는 소녀의 모습에 얼이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곧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정말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사관은 낙리와 목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두 사람 사이가 결코 보통 친구 사이가 아님을 직감했다.
낙리는 조용히 들고 있던 검을 목진의 무릎 위에 올려놨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목진에게서 떼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용히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고, 소녀는 수련 중인 소년을 보았다.
시간이 흘러 반 시진이 지나자 드디어 목진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갑자기 환해진 세상에 적응하면서 목진은 천천히 목을 돌렸다. 그러나 이내 멈추고 멍하니 눈앞에서 웃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리따운 그녀의 얼굴을 보니 여전히 가슴이 뛰었다.
목진은 눈을 깜빡이더니 믿기 어려운지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환각인 보일 정도로 그리운 건가?”
목진의 혼잣말을 들은 소녀는 환하게 웃었다. 모든 것에 큰 동요가 없는 소녀가 이 순간만큼은 갓 피어난 꽃처럼 밝고 환했다.
그녀는 검을 들어 목진의 가슴을 콕 찌르더니 웃으면서 물었다.
“이렇게 찔러줘야지 믿을 거야?”
목진의 눈은 놀라움으로 점점 더 커졌다. 그러다 이내 크게 웃더니 눈앞의 소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목진의 행동에 소녀는 깜짝 놀랐다. 현재 그녀의 실력이라면 조금만 영력을 사용해도 목진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목진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져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목진은 낙리의 허리를 감싸 안고선 그녀의 긴 생머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낙리야, 드디어 널 다시 만나게 됐구나.”
영로를 떠난 날부터 목진은 이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목진 또한 이날을 위해서 많은 대가를 치렀다.
낙리도 그걸 느낀 것 같았다. 그렇게 잘났던 사람이 영로에서 쫓겨나면서 얼마나 많은 압력을 느꼈을까.
항상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 뒤엔 수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을 거라는 것을 낙리도 알고 있었다. 낙리 역시 손을 내밀어 똑같이 목진을 끌어안고선 생각했다.
‘목진아, 널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너무 기뻐.’
폭포 옆, 소년과 소녀가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석양이 비추니 그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공중에서 그들은 보고 있던 사관은 더는 불쾌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 누가 봐도 그들이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낙리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영로에서 그녀가 정말 대단하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고, 맑은 눈엔 그 어떤 차가움도 없었지만 가까이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영로에서 많은 사내가 그녀를 사모하기는 해도 그녀가 이성과 가까이 지낸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목진과 낙리의 모습은 그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사관과 다른 이들도 복잡미묘한 눈으로 목진을 바라봤다. 어찌 보면 순수한 질투심일지도 모른다. 평생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낙리와 같은 훌륭한 여인을 품에 안고 있으니 말이다.
“흠흠.”
뒤에서 지켜보던 엽경령이 가볍게 기침을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 둘만의 세계에 빠져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옆에선 초기가 부득부득 이를 갈고 있었다. 방종만 아니었으면 당장 달려가서 목진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달려들었다가는 분명 낙리의 손에 죽을 것이다.
엽경령의 기침 소리에 목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어색한 얼굴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목진과 눈이 마주치자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아까와 달리 다들 서둘러 눈을 피했다.
목진은 대충 어떤 일이 있었을지 예상이 갔는지 낙리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1, 2년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나 보네.”
목진의 말에 낙리도 가볍게 웃더니 답했다.
“만일 너도 영로의 마지막 전투에 참여했다면 나와 같았을 거야.”
“말 그대로 만일일 뿐이야.”
목진은 일어나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런 기회가 아니어도 난 충분히 강해질 수 있어.”
목진은 낙리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널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또한 실력도 강하지. 나중에 내가 북창령원에 들어가면 더 많은 문제가 생길 거야. 그러니까 빨리 강해져야지. 문제가 생겨도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낙리는 미소를 지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괜찮아, 내가 널 지켜주면 돼. 네가 영로에서 날 지켜줬던 것처럼.”
“난 네가 지켜줘야 할 만큼 나약하지 않아.”
목진은 고개를 들어 공중에 있는 사관 일행을 바라보고선 웃으면서 낙리에게 물었다.
“내가 처리하라는 얘기야?”
“네가 날 원망하는 게 싫어서 남겨뒀어.”
낙리는 입술을 깨물면서 어딘가 원망스러운 듯 말을 이어갔다.
“넌 다른 사람이 네 일에 끼어드는 걸 싫어하잖아.”
낙리는 영로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었다. 물론 목진도 알고 있다.
“끼어드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야. 그저 네가 어떠한 대가를 치르는 게 싫어서 그래. 어떤 부분은 남자인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목진의 말에 낙리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 일은 희현이 암암리에 계획한 거야.”
검을 잡은 낙리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나도 알아.”
목진은 웃으면서 낙리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가 계획한 거라는 걸 알고 있어도 난 그렇게 했을 거야. 누구에게나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게 있으니까.”
낙리는 목진을 바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영로에서 목진이 보여줬던 광기는 그녀에게 많은 걸 가르쳐줬다. 그 덕분에 낙리는 주저 없이 북창령원으로 올 수 있었다.
“영로는 시작일 뿐이야. 오대원에 들어갔으니 이제야 진정으로 상대할 수 있겠지.”
준수한 목진의 얼굴에 미소와 여유로움, 그리고 기대가 묻어났다.
“그가 나에게 어떠한 놀라움을 안겨줄지 기대되네. 따분한 오대원의 수행에 즐길만한 재미를 안겨줄지도 말이야.”
“내가 도와줄게.”
낙리의 말에 목진은 웃으면서 답했다.
“당연히 날 도와야지. 안 그러면 엉덩이를 마구 때릴 줄 알아.”
목진의 말에 낙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다른 사람이 낙리에게 이렇게 말했으면 아마 진작에 검을 뽑아 들고 찔렀을지도 모르지만 목진에게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전에 일단 저 사람들부터 해결해야겠어.”
목진은 사관 일행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날 그렇게 죽이고 싶은 건가?”
그들은 목진 옆에 서 있는 낙리를 보더니 머뭇거렸다. 누가 봐도 낙리가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하는 거였다.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봐. 낙리는 끼어들지 않을 거니까.”
“말하라면 말하지 못할까 봐?”
사관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낙왕을 두려워하는 거지, 널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낙왕만 아니면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를 상대하겠다는 거지? 신백경 초기밖에 안 되는 네가 무슨 왕급을 얻는다는 거야? 웃기지도 않네.”
사관의 말에 오히려 낙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검을 든 손은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고 두 눈은 차가움으로 가득 찼다.
“이젠 신백경 초기가 아니라 중기야.”
천급 영수 정백의 영력을 구유작이 대부분 흡수했지만 목진은 남은 영력으로도 충분히 신백경 중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풉.”
사관 일행은 그런 목진을 조롱했다.
“초기나 중기나 무슨 차이가 있지?”
신백경 후기인 셋은 목진의 중기가 초기만큼 하찮게 느껴졌다.
그 뒤에 있던 사람들도 그들의 말에 동의하는 듯 함께 비웃었다. 꽤 괜찮은 실력이긴 하지만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의 비웃음에도 목진은 웃음을 잃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제 나랑 놀아보는 건 어때? 너희 셋 말이야.”
그의 말에 사관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놀아? 목진 혼자서 셋을 상대한단 말인가? 신백경 중기의 실력으로는 셋 중 누구도 이길 수 없을 텐데, 감히 한 번에 세 명에게 도전한단 말인가?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목진 옆에 서 있는 낙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 상대로 목진이 싫다면 내가 대신 상대해줄 수 있어.”
그들의 시선을 느낀 낙리가 담담히 말했다.
“네 용기가 가상해서라도 상대해줘야겠는걸?”
낙리의 말에 사관 일행은 황급히 목진의 요구에 응했다.
“목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엽경령은 목진에게 다가가 다그쳤다. 현재의 목진이 아무리 신백경 중기라고 해도 신백경 후기인 저 셋을 어찌 상대할 수 있을까. 평소엔 똑똑하더니 왜 오늘은 이토록 멍청한지, 혹시 낙리가 있어 뭐라도 보여주려고 그러는 건가.
낙리는 걱정해주는 엽경령을 보더니 다시 눈길을 목진에게 돌렸다.
‘흥, 주변에 항상 예쁜 여자가 넘치네.’
낙리의 시선을 느낀 목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단호한 목진의 태도에 엽경령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엽경령은 이내 낙리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열정 가득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낙왕 낙리인가요? 이렇게 가까이서 보다니 영광입니다. 정말 존경합니다.”
이렇게 자신한테 열정적인 여인은 낙리도 처음이다. 잠깐 멈칫하더니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네, 전 엽경령이라고…….”
목진은 매우 흥분한 엽경령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렇게 좋을까?’
목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면서 두 걸음 앞으로 가서 공중에 있는 사관에게 말했다.
“내 공격을 받아낼 수 있다면 전에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하겠다. 다만 받아내지 못한다면 인장을 남겨라. 마침 내가 필요하니까.”
사관 일행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쉽게 이길 수 있다는 목진이 그저 건방지다고 느껴졌다.
“그럼 어디 한번 대단한 혈화자를 구경해보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들은 크게 웃었고, 그건 누가 들어도 비웃음이었다.
목진은 전혀 개의치 않은 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뒤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목진의 행동에 어리둥절했다. 그때 목진의 두 손에선 영인이 잇따라 나타났다.
“영인? 영진사였어?”
다들 놀란 눈으로 목진을 바라보았다.
비웃음으로 가득 찬 사관 일행의 얼굴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목진의 영인이 벌써 30개를 넘었기 때문이다.
영인이 35개를 넘으면 신백경 후기의 사람도 상대할 수 있다.
우웅!
어느새 목진의 영인은 35개에 달했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36개.
38개.
40개!
목진이 40개의 영인을 응결했을 때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려 40개의 영인이라니!
그 모습에 드디어 사관 일행의 안색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우웅!
무려 40개의 영인이 목진의 손바닥에 만들어졌다. 영인이 진동할 때마다 영력이 파동쳤고 주변의 공기도 함께 일렁였다.
사람들 모두 40개의 영인에 놀랐고, 엽경령, 초기와 방종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체 목진이 언제부터 저렇게 강해졌는가!
40개 영인의 영진은 2급 진도에서도 가장 강했다. 보통 신백경 후기의 강자도 그 위력에 밀려나기 일쑤였다.
낙리는 모든 걸 지켜보면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슉!
목진이 손바닥을 뒤집자 40개의 영인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떠올랐다. 영인 주위의 공기는 뒤틀려 일렁였고, 눈부신 금빛이 공기 중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크아!
뒤틀린 공기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용과 코끼리의 울음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사관 일행의 얼굴은 이미 굳을 대로 굳었고, 좀전의 비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들은 목진의 영진에서 진정한 위협을 느꼈다.
“공격하자!”
그들에게 이젠 체면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히 강력한 영력을 뿜어냈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뒤엔 영수의 그림자가 생겼다. 아마 그들이 연화한 영수의 정백이 분명했다. 이 정도의 영력이라면 만수록에서도 100위 안에 드는 강한 영수일 것이다.
그들은 목진의 영진을 막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수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