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흑염
목진은 삼라사인이 완성되자마자 조용히 상대방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번 공격은 조금 전까지와는 달랐다. 석룡을 산산조각내고 번개같이 석경천을 향해 돌진했다.
“철석벽!”
석경천은 곧바로 두 팔을 모아 회백색 광벽을 형성했는데, 이는 용암에 수없이 단련된 암석만큼 견고해 보였다.
그런데 삼라사인은 곧바로 그 광벽을 뚫고 나와 석경천의 팔을 공격했다. 육안으로도 확인 가능한 충격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꺼질 사람은 너야.”
목진의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검은 빛줄기에 가속도가 붙더니 ‘쿵’하는 소리를 내며 석경천에 팔에 닿아 폭발했다. 석경천은 공격을 막지 못해 튕겨 나갔고 뒷걸음치다가 겨우 멈춰 섰다.
순식간에 뒤집힌 상황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쭐대면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를 거라고 영로에서 말하지 않았나? 역시 내 말을 흘려들었군.”
목진은 서서히 주먹을 풀고 사색이 된 석경천을 보며 말했다.
“내가 정녕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자네 앞에 나타났다고 생각했나?”
석경천은 목진을 째려보며 씩씩거리며 말했다.
“우쭐거리다니? 내가 과연 우쭐거릴만한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석경천이 있는 힘껏 땅을 구르자 강력한 영력이 솟구쳐 나와 회백색의 이무기가 되었다.
이무기는 암석처럼 견고한 비늘과 나선무늬 뿔이 하나 달려있었고, 회백색 동공에는 생기가 전혀 없었다. 회백색 이무기의 등장과 함께 석경천의 기가 다시금 폭등했다. 이는 곧 융천경에 이르는 경지였다.
“만수록 74위인 초급 천급 영수인 대지령 이무기로군.”
목진은 꿈틀대는 회백색의 이무기를 보면서 눈에서 서서히 흑염을 내뿜었다. 이에 사람들도 금세 이상한 기운을 눈치채고 목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목진의 눈은 흑염을 내뿜어 조금 이상해 보였고, 어두운 영력이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가 허공에 뜬 채 두 손을 천천히 그러쥐자 기이한 무언가가 흘러나와 그의 뒤에 모였지만 석경천처럼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지는 않았다.
이는 목진이 영수의 정백을 정련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윗 단계인 혈맥의 연결을 수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구유작의 능력을 대부분 지니고 있었고 전보다 더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었다. 또 혈맥이 연결된 구유작은 온전한 지능을 가졌기에 의식을 전부 지운 석경천의 영수보다 더 영리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목진의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력이 점차 강해짐을 느꼈다.
“목진의 영력이 이렇게 강해질 줄이야. 신백경 후기보다 더 강하잖아. 혹시 영수의 정백을 정련해서일까?”
엽경령도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낙리도 무척 놀랐는데, 목진의 어두운 영력에서 난폭하고 무서우리만큼 엄청난 파동이 숨어있음을 느꼈다.
“목진의 몸속에 엄청난 영수가 있나 본데, 일전에 얻은 빙현령교나 지심염룡은 아닌 것 같군.”
낙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씨익 웃었다. 목진은 비록 영로에서 퇴출당했지만,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가끔 보면 낙리는 자신보다 목진을 더 믿었다. 이는 영로에 있던 1년 동안, 온갖 고생 속에서도 낙관적인 목진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낙리는 무덤덤한 성격에 반해 자존심이 무척 강했는데, 목진을 만난 뒤로 한동안은 수많은 타격을 받았었다. 영로에서 낙리는 반년 동안 목진을 추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목진은 낙리를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결국은 살려주었다.
낙리는 그런 목진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 그와 싸우다 역전하여 장검이 숨통을 겨눴을 때, 자신도 더는 그의 목숨을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절의 목진과 낙리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존재였다. 낙리는 천천히 거미줄을 치고 있는 목진을 호시탐탐 노리다 어느새 거미줄에 걸려들었지만 빠져나오지도, 빠져나오고 싶지도 않았다.
목진은 역시 한 수 위였다.
사람들은 훤칠한 목진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바라보는 낙리를 보고,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다.
* * *
“역시 필살기를 숨기고 이곳에 나타난 거로군.”
석경천도 순식간에 강해진 목진의 기이한 영력을 감지하고 피식 웃었다. 그는 지금 대지령 이무기까지 소환하여 곧 융천경에 이르는 경지에 도달해 신백경 중기의 목진과는 실력 차이가 더 컸다.
“대체 누가 멋모르고 우쭐대는지 볼까?”
석경천은 손을 맞대고 으르렁거리더니 발에서 영력이 끊임없이 솟구쳤다.
그는 흔들리는 땅을 밟고 뛰어올라 합장했는데, 영기가 흘러나와 회백색의 빛을 이뤘고 그 빛이 모여 하나하나의 거대한 암석이 되어 허공에 맺혔다.
무지막지한 영력의 변화를 목격한 사람들은 상황이 심각해짐을 느꼈다. 석경천 주위에 있는 거대한 암석은 하나만으로도 신백경의 실력을 지닌 사람을 중상 입힐 위력을 가졌다.
역시 정백의 힘을 빌린 덕분인지 그의 전투력은 수직상승 했다.
“석황결, 운석천락!”
석경천은 목진을 바라보며 인법을 바꾸더니 회백색 암석들을 전부 목진에게 날려 그의 퇴로를 막으려고 했다.
목진은 무서운 속도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암석을 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대부도결을 운용했다. 그러자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신비로운 광반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영력이 몸을 감싸 안더니 희미한 검은색 광탑을 이뤘고, 그 뒤로 흑염이 보이는 것 같았다.
거대한 암석들은 형태를 갖춘 광탑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엄청난 굉음에 사람들은 거대한 암석이 폭격한 곳을 묵묵히 바라봤지만 연기가 자욱해 목진의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신백경 중기라면 절대 이토록 강력한 공격을 당해낼 수 없고 즉사할 것이 분명하였다.
이에 다들 잔뜩 긴장해 주먹을 꽉 쥐고 연기가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순아 역시 참담한 결과를 보게 될까봐 손으로 눈까지 가렸다.
하지만 낙리는 여전히 태연했다. 석경천의 공격이 아무리 강력해도 목진을 죽일 정도는 아니라고 확신했다.
공격이 잠시 멈추고 연기가 서서히 가시자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움푹 파여 있는 곳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주위를 감싼 검은색 광탑이 끄떡없는 것으로 보아 석경천의 공격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럴 리가!”
허공에 떠 있던 석경천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목진은 귀신처럼 석경천의 앞에 나타나 어두운 영력을 머금은 주먹을 휘둘렀다.
석경천은 영력을 팔에 집중시켜 막아보려 하였다. 그는 석황결로 목진의 공격을 거뜬히 막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진은 석황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고 끊임없이 석경천의 팔에 주먹을 휘둘렀다. 석경천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목진의 주먹이 닿을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팔을 타고 경맥에 스며들어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이놈의 영력이 뭔가 수상해!”
석경천은 그제야 목진이 공격을 가할 때마다 어두운 영력에서 미세한 흑염이 흘러나와 스친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대로라면 위험해.”
석경천은 목진의 공격을 피하려고 뒷걸음쳤다. 흑염이 몸에 어느 정도 스며들면 순식간에 경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싸움을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겠군.”
목진의 기이한 수법을 맛본 석경천은 드디어 불안해졌다.
“한 방에 끝내야겠어.”
석경천은 이를 악물고 두 팔을 파르르 떨며 영력을 모았다. 회백색 빛은 점점 어두워지더니 암석처럼 견고해졌다. 이렇게 석경천의 손바닥에서 회백색 빛과 함께 놀라운 파동이 일었다.
그러다 영력이 최고봉에 도달했을 때, 기합 소리와 함께 목진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석파경천수!”
회백색 빛은 수십 장 정도로 긴 암석의 손이 되었고 매우 견고해 어떤 공격에도 견뎌낼 것 같았다.
이때 목진도 맞공격을 했는데,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번개가 번쩍거리는 듯했다.
“금강부도수(金剛浮屠手)!”
어두운 영력은 검은색 장인으로 바뀌었고, 그 속에서 암금색 탑 무늬가 뿜어져 나와 파동이 솟구쳤다.
두 장인은 마치 하늘을 비껴가는 운석과도 같았는데, 큰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부딪치고 바람이 크게 일었다.
목진이 진압을 외치며 손을 내리자 석경천의 거대한 암석 수인이 산산조각이 났다.
“이럴 리가!”
석경천은 눈앞에 벌어진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목진은 개의치 않고 다시 석경천을 공격했다.
이에 석경천이 부랴부랴 영력으로 방어했지만, 쿵 소리와 함께 땅으로 꽂혔다. 땅이 움푹 파여 들어간 모습이 마치 거미줄 모양 같았다.
풉!
땅에 박힌 석경천은 피를 토하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융천경에 이르는 자신이 목진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듯했다.
그런데 목진의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흑염의 빛이 스쳐 지나가더니 그의 손가락이 마치 목숨을 앗아가는 사신의 검처럼 내리찍어 석경천의 울대 앞에 멈춰 섰다.
석경천은 두려운 나머지 식은땀이 나며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했나, 우쭐대면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를 거라고 하지 않았나.”
목진은 깜짝 놀란 석경천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제 대가를 치르지. 약속을 어기면 당장에라도 당신을 없애버릴 테니까.”
승부가 갈리자 떠들썩했던 중심 구역도 점차 조용해졌다.
석경천의 패배에 다들 믿기 어려운 눈치였으나 더는 목진을 평범한 신백경 중기로 여기지 않았고, 영로 출신들은 영로에서 명성을 날렸던 그가 쇠퇴하지 않고 더 강해져서 나타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목진의 승리로 사람들은 영로 출신이 다른 이들보다 무조건 우월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세상은 넓고 기이한 사람은 넘쳐나니 영로가 아니어도 뛰어난 존재는 어디에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상위권에 머물려면 절대 수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주령은 석경천의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찼고, 신백경 중기의 실력으로 곧 융천경에 이르는 고수와 싸워 이긴 목진을 달리 보았다.
“목진!”
그때 석호가 얼굴이 잿빛이 되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어 석경천을 구해내려고 하였다. 그가 움직이려는 찰나, 가녀린 여인이 앞을 가로막고 검은색 장검을 빼 들어 목을 겨눴다.
이에 석호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하였는데, 그 여인은 바로 낙리였다.
“네가 끼어든다면 나 또한 스스럼없이 칼을 뺄 것이야.”
융천경의 실력자와 싸울 수 없다는 생각에 석호는 감히 움직이질 못했다.
한편 목진은 석호가 달려들든 말든 안색이 엉망이 된 석경천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그리고 바로 미간을 찌르려고 손을 들었다.
“잠시만!”
석경천은 깜짝 놀라 소리부터 질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미간에 자금색 빛이 반짝이더니 목진의 손에 넘어갔고, 그의 미간의 인장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고맙네.”
목진은 기이한 영기를 뽐내는 자금색 빛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에 석경천은 뒷걸음질 치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목진, 내 절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걸세.”
“그러거나 말거나.”
목진은 이번엔 사람들한테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또 누가 나한테 불만이 있나?”
그 말에 목진을 탐탁지 않게 보던 이들은 하나같이 그의 눈길을 피하였다. 석경천에 비하면 자신들은 너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또 목진의 실력을 목격한 나머지 정예들도 감히 입을 뻥끗하지 못하였다.
“하하, 역시 혈화자 목진이로군. 영로에서 만난 적은 없지만 소문은 익히 들었네. 오늘 직접 보니 역시 명불허전일세.”
염왕 염릉이 히쭉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고 다들 이에 부응하였다. 이에 목진도 담담하게 웃으며 인장을 낙리한테 넘겨주었다.
“이것만 있으면 9급 인장이 될 거야.”
사람들은 8급 인장을 바로 낙리에게 넘기는 목진의 행동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인장을 8급까지 수련하기란 매우 어려워서 천급 영수 3마리 이상 사냥해야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모인 사람 중 8급 인장을 가진 사람이 10명이 채 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