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안연
빨간색 빛의 한쪽엔 목진이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엔 안연이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대전은 순식간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목진은 하필 가장 강하다는 사람을 골랐을까.
옆에서 석씨 형제가 이런 상황이 고소하다는 듯 비웃었다.
지지리 운도 없는 목진을 보면서 주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을 골랐으니 말이다. 사실 여기서 안연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낙리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석경천을 이긴 목진이 놀랍긴 하지만 안연이 석경천보다 훨씬 강하다.
“신백경 중기?”
선배들은 목진을 보면서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재밌네, 재밌어. 무슨 신인이 저렇게 약해? 참 운도 없어라.”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목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운이 없긴 하네.’
낙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목진을 바라보았다. 낙리도 안연이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안연은 목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포기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아니면 옆에 있는 친구만 괜찮다면 저 친구가 널 대신하는 걸 허락하마. 아마도 여기서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저 친구밖에 없어.”
안연의 말에 낙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목진을 바라보며 잠깐 머뭇거렸다. 따뜻하고 온화해 보이는 목진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낙리는 알고 있었다. 괜히 잘못 나섰다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면이 안 설까 봐 걱정됐다.
목진은 머뭇거리는 낙리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리고 손에서 반짝이는 빨간색 빛을 꼭 쥐더니 입을 열었다.
“양홍만 아니라면 네가 나를 대신해도 괜찮아. 나도 귀찮은 건 질색이니까.”
낙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양홍만 아니라면 여기서 물러날 수도 있는데 양홍이 다른 북창계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에 목진은 절대 물러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영로에서 양홍을 이긴 목진의 자존심이 절대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밀리는 걸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힘내.”
낙리는 조용히 목진을 응원했다. 목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연을 향해 웃었다.
“제가 직접 도전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연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목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존심 때문에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도전한다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야.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나서다니 정말 멍청하군.”
안연의 말에 대전 안의 많은 사람이 분노했지만, 섣불리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안연의 도발에도 목진은 미소를 잃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안 선배, 제가 한 말씀 드리자면 안 선배가 다른 사람과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 전 참을성을 배우고 있었답니다.”
순간, 대전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뒤에서 듣고 있던 선배들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목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체 누구길래 안연을 도발하는 것인가?
백노는 미소를 지은 채 목진을 바라보았지만, 딱히 나서서 말리지는 않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안연은 분한 얼굴을 하고 목진을 노려보았다. 화를 억누르다 보니 가슴은 아래위로 들썩거렸다. 그녀가 슬쩍 움직이더니 바로 목진 앞까지 다가왔다. 엄청난 영력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왔고 그 영력은 그대로 목진을 덮쳤다.
“선배, 여기서 어떤 말을 하던 개인의 자유입니다. 선배가 먼저 저희를 비웃었으니 저희도 반격할 권리가 있습니다.”
낙리는 목진 앞에서 안연의 영력을 막아서며 조용히 말했다.
안연은 차가운 눈으로 목진을 바라보면서 답했다.
“그래, 어떤 말을 하던 개인의 자유지. 그렇지만 그 자유를 얻고 싶으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하지 않겠어? 실력이 그 자유를 따라가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실력은 없지만 입만 살아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잘 새겨두겠습니다.”
목진은 무례한 안연에게 굳이 깍듯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를 지켜보던 백노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다들 준비가 되었는가?”
백노는 소매를 휘저었고 수많은 빛기둥이 위에서 쏟아져 내려와 목진을 비롯해 도전자들과 고참들을 감쌌다.
빛기둥 속의 안연은 차가운 눈으로 목진을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건방진 신인을 톡톡히 혼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고작 저 정도 실력으로 까불다니 북창령원을 뭐로 보는지 화가 났다.
슝!
빛이 사라지자 대전에서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내 공중에 커다란 광막이 생겼고, 그 안에서 대전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광막을 통해 그들의 싸움을 구경할 수 있었다.
수많은 눈길이 광막에서 오로지 그 두 사람을 찾고 있었다. 다른 뻔한 결과인 전투보다는 목진과 막강한 실력을 지닌 선배의 싸움이 더 궁금했다.
목진의 참패일까, 아니면 석경천을 이긴 것처럼 반전이 있을 것인가?
그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지켜보았다.
* * *
목진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전보다 더 넓은 대전에 와 있었다. 넓고 큰 대전에는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네 말에 대한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됐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목진은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안연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배, 그렇게 쌀쌀맞게 굴면 어떤 남자가 좋아할까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이렇게까지 화나게 하는 사람은 목진이 처음이었다.
“그럼…….”
목진은 순간 웃음을 거두면서 말을 이어갔다.
“시작하시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진은 폭발적인 영력을 뿜으면서 안연에게 달려들었다. 어찌나 빠른지 지나가는 곳엔 그림자밖에 남지 않았다.
안연은 차가운 웃음을 지은 채 목진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강력한 영력이 활화산처럼 활활 타올랐다. 목진은 순간 그 영력에 밀려 뒤로 물러났다.
신백경 중기와 융천경 초기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다.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나댄 거냐? 최선을 다해라. 아니면 나댈 기회도 없을 테니.”
“금강부도수!”
목진은 검은 영력을 끌어모아 안연을 향해 날렸다. 검은 영력은 손바닥 모양이 되어 그대로 안연을 내리눌렀다.
안연과 같은 고수를 상대할 때엔 보통 공격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 그러니 무조건 전력을 다해야 했다.
“이제야 좀 상대할 맛이 나네.”
안연은 검은색 손바닥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이내 발에 힘을 주어 뛰어올라 그대로 손바닥을 향해 돌진했다. 안연은 손을 들어 영력을 모았고 영력은 긴 창이 되어 매섭게 날아갔다.
“파령지창(破靈之槍)!”
안연은 우렁찬 목소리로 달려들었다. 눈부신 창이 허공을 가로질러 손바닥을 무찔렀다.
쿵!
굉장한 영력의 파동이 퍼졌고 주변의 공기도 일그러졌다. 이내 몸속의 영력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쾅!
수많은 빛이 검은색 손바닥을 뚫었고 손바닥에 금이 가더니 끝내는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폭발했다.
처음으로 누군가 목진의 금강부도수를 파괴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력의 차이다.
안연은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아래에 있는 목진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비웃음 가득한 그녀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다. 목진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 위에는 강력한 금빛을 뿜어내고 있는 복잡한 진도가 있었다.
“영진?!”
안연은 놀란 눈으로 영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영력의 파동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분명 융천경에 가까운 실력이다.
“2급 영진사였어? 어쩐지 신백경 중기 주제에 건방지더라니.”
안연은 그제야 왜 목진이 그렇게 겁이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안연은 대수롭지 않은 듯 코웃음을 쳤다.
‘융천경의 강자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3급 영진사는 되어야지. 아직은 멀었어!’
목진은 천천히 흰색 기를 내뱉으면서 공중에 떠 있는 안연을 발라보았다. 이내 손을 돌리더니 묵직한 소리로 외쳤다.
“용상진!”
크아!
용과 코끼리의 포효가 들려오면서 굉장한 영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 *
대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놀라운 눈으로 목진을 지켜봤다. 직접 현장에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영진이 얼마나 강한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영진이 아무리 강해도 융천경인 안연을 이길 수 있을까?
크아!
귀청이 떨어질 듯한 용과 코끼리의 포효가 대전에서 울려 퍼져 대전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강력한 영력의 파동이 거대한 영진에서 끊임없이 퍼져 나왔다.
“용상진!”
거대한 영진이 흔들리더니 금빛 기둥이 영진을 뚫고 나왔다. 용과 코끼리의 모습을 한 금빛은 허공에서 날뛰었고 매서운 기세로 안연을 향해 달려갔다.
안연은 공중에서 차가운 눈으로 금빛용과 코끼리를 바라보았다. 한쪽 손에선 강력한 영력을 모으고 있었고 그대로 앞을 향해 뿜었다.
“쇄공령장(碎空靈掌)!”
쇄공령장이 지나는 곳의 공기는 일그러졌고, 영력으로 똘똘 뭉친 쇄공령장은 용과 코끼리를 향해 날아갔다.
쿵!
둘이 부딪치자 충격으로 엄청난 영력이 퍼져나갔다.
“용상진압!”
목진은 금광용상을 빠르게 금판으로 만들어 내리눌렀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쇄공령장과 부딪쳤고 그 파동은 안연을 향했다.
“능파참(淩波斬)!”
안연은 다시 영력을 손에 모아 파도와 같은 능파참을 만들었다. 팔을 휘두르자 빛으로 된 능파참이 허공을 가르고 용상 금판을 내리쳤다. 이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용상금판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대전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 웅성거렸다. 안연의 실력은 정말이지 막강했다. 아무리 강한 목진의 영진도 안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슝!
다들 목진과 안연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대전에서 빛이 반짝거리더니 두 사람이 나타났다. 낙리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선배였다.
“양보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낙리는 선배에게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낙리의 감사 인사에 청년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렇게 어여쁜 여인이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걸 누가 알겠는가. 융천경의 실력이라니, 그러니 안연이 유일하게 저 여인만 자신과 상대할 수 있다고 했겠지.
“낙리가 벌써 이겼어?”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는지 수군거렸고 놀라운 눈으로 조용히 광막을 보고 있는 낙리를 바라보았다. 낙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광막 속 목진의 모습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 *
쾅!
목진 앞에 나타난 안연은 강력한 영력이 담긴 손으로 있는 힘껏 목진의 가슴을 향해 쳤다. 그러나 목진은 곧바로 두 팔을 들어 안연의 공격을 막아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영력은 사방으로 퍼졌고 목진은 힘을 못 이겨 뒤로 밀려났다. 바닥을 쓸며 밀려나서야 겨우 멈췄고 공격을 막아낸 두 팔은 얼얼했다.
목진의 눈엔 진지함이 담겨있었다. 융천경의 강자와 겨루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은 류경산과의 전투였지만 그때는 영륜경이어서 차이가 크게 났었다. 구유작의 힘을 빌려서 겨우 류경산을 이길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보름 동안 혼절했었다.
지금의 목진은 그때와 비하면 많이 강해졌지만 자신의 힘으로 융천경의 강자를 상대하기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안연을 이기려면 이걸로는 부족하다.
안연은 매서운 기세로 다시 목진에게 달려들었고 강력한 영력으로 목진을 공격했다.
목진은 몸을 비틀어 안연의 공격을 피하고선 마음속 깊은 곳에 들어갔다. 그는 만다라 꽃에서 느긋하게 엎드려 쉬고 있는 구유작을 발견했다.
현재의 구유작은 빙현령교 두 천급 영수의 정백을 흡수하고 나서 실력이 조금 회복되었다. 더 윤기가 나는 깃털과 몸을 에둘러 싼 흑염도 더 농후해진 것 같았다.
“이 정도 상대에 굳이 내 힘을 빌릴 필요가 있나? 난 상당한 영력을 빨아들이고 아직 소화도 안 되어서 굳이 움직이고 싶지 않네.”
“난 내 몫의 힘을 받으러 왔어.”
목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혈맥이 연결되고 나서는 어찌 보면 구유작의 일부 힘이 목진의 힘이기도 하다. 하여 목진은 쓰고 싶을 때 구유작의 힘을 빌려 쓸 수도 있고, 구유작도 마찬가지로 목진의 힘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구유작은 아직 목진의 힘이 탐날 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쩌면 혈맥 연결의 우세이다.
빌려 쓸 힘이 그때 온 힘을 다한 구유작 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의 상황에선 충분했다.
“마음대로 하게.”
구유작은 만다라에 엎드린 채 천천히 눈을 감았고, 이내 검은 영력이 활활 타오르는 화염처럼 구유작의 몸속에서 흘러나왔다. 그 영력은 그대로 신백 경지인 목진에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