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수호자
목진이 다시 눈을 떠보니 광하 대신 눈앞에는 어두운 황금빛의 거대한 궁전이 나타났다. 차가운 궁전에서는 한기가 느껴졌다.
목진은 주위를 쓱 훑어보다가 대전의 중심에 눈길을 돌렸고, 그곳에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똑바로 놓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검은색 무늬를 띈 갑주였다.
목진은 전혀 생기 없는 검은색 갑주를 보며 순간 위험을 감지하고 체내의 영력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이때, 무언가 되살아난 듯 철컥하고 소리가 나더니 갑주에서 새빨간 빛을 내뿜었는데 꼭 차가운 시선 같았다.
새빨간 빛은 어느덧 목진의 몸에 모이더니 갑주에서 검은색 광파를 형성하였고 놀라운 영력을 내뿜었다.
“나와 싸워 이겨야 영결을 얻을 수 있단다.”
갑주에서 전혀 생기가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바로 수호자란 말인가?”
갑주는 인간이 아니라 꼭두각시 같은 특수한 물건이었지만 보아하니 촉천 장로가 말한 수호자인 것 같았다.
수호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뒤로 석대가 천천히 나타났고, 위에 검은색 빛이 보였는데 그 속에는 검은색 족자가 은은하게 보였다.
영수의 그림자가 한데 모여 형태를 이루었고 상고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신성숙경을 얻으려면 신비로운 수호자를 이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싸우기도 전에 목진은 이미 강대한 압박감을 느꼈고 자신은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목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역시나 이렇게 엄청난 등급의 영결은 신생 따위가 감히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속에 있는 신비로운 검은색 종이가 이토록 엄청난 영결을 불러올 줄 누가 알았을까.
이때, 수호자의 차가운 갑옷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왔고 놀라운 영력이 순식간에 응결되었으며 수호자는 바로 한 줄기의 검은빛이 되어 귀신처럼 목진의 앞에 나타나 주먹을 휘둘렀다.
난폭한 검은 영력은 화가 잔뜩 난 이무기처럼 날뛰었는데 이에 공기마저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목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으니 차라리 공격을 날렸다. 그러나 목진의 네 갈래의 삼라사인은 금세 무산되었고 상대방의 권풍은 목진의 팔을 가격했다.
목진은 순식간에 튕겨 나갔고 체내에서는 기혈이 솟구쳤으며 팔도 욱신거렸다.
한참을 물러나서야 간신히 멈춰선 목진은 불안했고, 융천경을 초월한 듯한 수호자를 무슨 수로 이길지 몰라 두렵기만 했다.
목진은 석대 위에 놓은 검은색 족자를 보고 있으려니 헛웃음부터 났다. 촉천 장로의 말대로 욕심을 부리지 말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호자는 목진에게 숨 돌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대전을 뒤흔들만한 위력을 뽐내며 광풍을 휩쓸며 목진한테 다가갔다.
이에 목진은 일단 최선을 다하여 도망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 * *
촉천 장로 등이 고개를 들자 그들 앞에 광막이 나타났고 광막을 통하여 목진의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젊은 녀석이 우연히 사신성숙경을 소환했지만 아직 수호자를 이길만한 능력은 아닌가 보네.”
백발노인의 말에 촉천 장로도 고개를 끄덕이었다.
“사신성숙경의 수호자는 화천경 초기의 실력 보유자인데 기껏해야 신백경 후기인 목진이 어찌 이길 수 있겠나? 그 엄청난 실력 차이는 한순간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네.”
목진이 융천경 중기의 양홍과 싸워 이긴 것에 촉천 장로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목진이 괜한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저 아이와 사신성숙경은 인연이 아닌 것 같네. 사실 저 아이라면 이 영결을 수련하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네.”
백발노인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영결전에서 만든 규칙을 따르는 수밖에 없네. 하여 목진이 수호자를 이기지 못하면 우리라도 결코 도울 수 없을 걸세.”
촉천 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에 백발노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광막을 봤는데 기진맥진한 목진은 얼마 못 버틸 것 같았다.
* * *
목진은 다시금 수호자의 난폭한 권풍에 밀려났는데 대전의 바닥에 기다란 흔적을 남겼고 입가엔 핏기가 아른거렸다.
목진은 수호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졌다. 이것은 엄청난 실력 차이 때문이었다. 목진이 당장 융천경에 이른다고 해도 절대 수호자와 싸워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낭패를 보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목진은 도움이 절실하여 바로 구유작을 찾아 기해에 들어갔다.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니 날 찾지 말아라.”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는 구유작의 말에 목진은 자연스레 신비로운 검은색 종이에 시선을 돌렸는데, 그것은 어두운 보라색 빛만 은은하게 비출 뿐, 미동이 없었다.
“지금 네 실력으로는 수호자를 절대 못 이길 거다. 그런데 모든 싸움을 정면 돌파하라는 법은 없지 않더냐? 영결전 자체가 영기이고 수호자는 영결전이 조종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니 서로의 연계를 끊으면 되지 않을까?”
구유작은 사색이 된 목진을 보더니 언짢은 듯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연계를 끊다니, 어떻게?”
속수무책이던 목진은 순간 희망이 보였다.
“그거야 나도 모른다.”
구유작은 흑염이 불타오르는 날개를 퍼덕이며 답했는데 뭐든 자신한테 묻는 목진에 대한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목진은 종이며 새며 무엇 하나 기댈 곳 없다는 생각에 씁쓸했다. 목진은 결국 자신을 믿고 최후의 한 방을 노렸다.
* * *
목진은 수호자의 공격에 다시 튕겨 나갔다. 다행히 도망만 쳐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는 도망치면서 수호자와 영결전 사이의 연계를 끊을 방법을 생각했다. 일단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부터 알아보기로 하였다.
목진은 수호자의 무거운 갑옷을 힐끗 쳐다봤고 그 표면엔 은은하게 광문이 반짝이며 기이한 파동을 내뿜었다.
이것은 영진의 파동이었다.
영결전에서는 영진으로 수호자를 조종하기 때문에 영진만 파괴하면 그 연계를 끊을 수 있었다.
하여 목진은 수호자가 다시 공격하려고 다가왔을 때, 신속하게 검은색 갑옷에 있는 복잡한 광문을 기억하였고 다시금 튕겨 나갔다.
목진은 끝없는 공격에 피를 토했지만 어쩐 일인지 점점 흥분되었다. 끝내는 수호자의 갑옷에 있는 영진의 전술도를 알아냈고 어디를 공격해야 수호자와 영결전의 연계가 끊어지는지도 알았다.
한편, 수호자는 지치지도 않고 주먹을 휘둘렀고 이에 맞서 목진도 흑염이 깃든 어두운 영력을 모아 수호자의 가슴을 가격했다.
갑옷을 타격하는 소리와 함께 목진은 피를 토하며 멀리 튕겨 나갔다.
멀리 튕겨 나간 목진은 결국 거대한 돌기둥에 부딪혀 또 피를 토하였다. 역시 화천경은 대단했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덤볐지만 그래도 타격이 어마어마했다.
목진은 주머니에서 산산조각이 난 흑정을 꺼냈는데 아직 미세하게나마 영력이 남아있었다. 이는 목진이 북창계에서 얻은 하품 영기인데 여태껏 사용하지 않다가 방금 몰래 영력을 불어넣어 수호자의 공격을 조금이나마 막았다. 만약 흑정이 아니었다면 목진의 상처는 더 심했을 것이다.
목진은 흑정 파편을 버리고 입가의 핏자국을 닦으며 대전의 반대편에 서 있는 수호자를 바라봤다. 그쪽에서도 멈춰서 새빨간 눈으로 목진을 노려봤다.
이미 모든 판단과 공격을 마친 목진은 주먹을 꽉 쥐고 상대방을 바라봤다.
여태껏 한 판단은 대부분 정확했지만 구체적인 것은 결과를 봐야 아는 것으로 목진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만약 수호자와 영결전의 연계가 끊어지지 않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한편, 촉천 장로 등 사람들도 광막을 통하여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멈춰선 수호자를 보며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때 수호자한테서 무질서한 영력의 파동이 나타나더니 새빨간 눈이 빛을 점차 잃었고 어느새 픽하니 쓰러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촉천 장로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목진이 수호자의 숨은 영진을 건드려 나와의 연계를 끊었네.”
영결전의 말에 촉천 장로와 백발노인은 사뭇 놀랐다. 그토록 복잡한 영진을 짧은 시간 내에 파괴한 목진이 놀라웠다.
목진의 눈썰미와 판단력에 다들 탄복하였다.
“수호자와 다시 연결해야 하나?”
영결전의 질문에 촉천 장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녀석이 비록 수호자와 싸워 이긴 것은 아니나 그의 공격을 막아낸 것만은 사실이니 시험 통과로 간주하겠네.”
이에 백발노인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영결전도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물러났다.
“이런 방법으로 수호자를 막을 생각을 하다니, 어린 녀석이 여러모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
촉천 장로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 기수 신생 중에 기대주가 생기지 않았나? 이대로라면 곧 정예 고참과도 힘을 겨룰 수 있을 것 같네.”
백발노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기진맥진한 소년을 보며 말했다.
“좋은 구경이 생길 것 같네.”
* * *
수호자의 몸을 감싸던 영력이 마침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목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목진의 실력으로 오늘 같은 영진을 정면 돌파하여 파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부단히 관찰하여 치명적인 약점과 중요한 노선을 알아내서 그중 하나라도 파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영진의 진행을 막아 보다 유리한 환경을 가져올 수 있다.
목진이 단숨에 영진을 파괴할 수 있었던 건 구유작의 구유화와도 직결되었다. 영력을 태워 없애는 구유화가 없었더라면 목진이 아무리 영진의 치명적인 약점을 찾아냈다고 한들 그 연계를 한 방에 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구유화는 역시 대단해.”
목진은 수호자의 차가운 몸에 불타오르는 흑염을 보며 이내 감탄하였다. 영결전을 떠나자마자 바로 구유작과 영력을 융합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수련에 성공하면 구유화의 특성까지 살려 목진의 영력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목진은 수호자를 상대하고 나서야 화천경의 실력을 실감하였다. 이현통은 이보다 더 강할 거란 생각에 지금의 실력으로는 그와 맞설 자격조차 없다고 여겼다. 이는 목진이 절대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빨리 실력을 키워야겠어.”
목진은 중얼거리면서 들끓는 기혈을 가까스로 억누르고선 수호자를 피하여 조심스럽게 석대에 올랐다.
수호자가 더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목진이 비록 꼼수를 썼지만 승리로 인정한 것 같았다.
이렇게 목진은 석대에 올라 검은색 족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주위를 감싼 영수는 용, 호랑이, 참새와 거북이 같았고 상고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목진은 검은색 족자를 냉큼 집었고 족자는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목진은 수중에 넣은 사신성숙경을 보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고생 끝에 엄청난 물건을 얻은 것에 큰 보람을 느꼈다.
이때, 대전에서 눈부신 빛과 함께 공간이 뒤엉키며 흐려졌고 잇따라 흐뭇하게 웃는 촉천 장로와 백발노인 및 십수 명의 수련자들이 목진의 눈앞에 나타났다.
“너 이 녀석, 사신성숙경처럼 귀한 영결을 얻다니. 참 행운아구나. 규칙대로라면 신생은 아직 이 영결에 손을 댈 자격조차 없는데 말이야.”
촉천 장로는 목진을 쓱 훑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이에 목진은 어색하게 웃었고 촉천 장로가 사신성숙경을 빼앗을까 봐 두려웠다. 목진도 체내의 신비로운 검은 종이만 아니었으면 절대 이 영결을 접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촉천 장로는 목진의 속이라도 꿰뚫은 듯 말을 이어갔다.
“걱정하지 말아라. 사신성숙경이 네 손에 들어간 이상 다시 빼앗는 법은 없단다. 이 또한 인연이 아니겠느냐?”
“고맙습니다, 촉천 장로.”
목진은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