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염제
한편, 이현통의 말에 목진은 낙리가 너무 가여웠고 마음이 아팠다.
“낙리도 곧 네 곁을 떠날 거야…….”
이현통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목진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낙천신께서는 길면 다섯 해가 지나면 돌아가실 거야. 하여 그 전에 분명 낙리를 소환할 텐데 그녀가 낙신족을 온전히 지켜내려면 하루빨리 지존경에 이르러야 해. 안 그럼 기타 삼대 신족한테 먹힐 수 있어. 서로 맺힌 원한이 많아 낙신 황족은 물론이고 낙신족에 충성하던 백성들도 다 죽일 거야. 이는 서천계에서 자주 있는 일이거든.”
“지존경이요?”
통천경 다음이 곧 지존경인데 아홉 등급으로 나눈다. 그중 1품이 최하위, 9품이 최상급이고 9품 이상을 또 천, 지 두 개의 등급으로 나눠 천지존, 지지존으로 칭한다.
지존급은 대천세계에서 놓고 봐도 강자라 한 대륙을 책임질 능력이 충분했고 그중 9품 지존은 지존 중 최강자며 지지존과 천지존은 더 무서운 존재였다. 하여 대천세계에 이름을 날리고 영토를 보유한 사람 중 누구 하나 호락호락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낙리가 5년 사이에 적어도 지존급이 되어야 한다니.
“방대한 종족의 황이 되려면 적어도 지존급이어야만 해. 또 지지존이신 낙천신께서 중상을 입고 위독하셔서 낙신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훌륭한 낙황을 만드시려는 거야. 낙리는 순수 혈통인 데다 실력도 가장 뛰어나서 성공할 확률이 높아.”
“성공할 확률이 높다니요?”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목진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이 세상에 위험 부담이 없는 일은 결코 없어.”
이현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황위의 계승에서 실패하면 낙리도 죽겠지. 그런데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낙천신께서는 시간이 없거든. 그래서 낙리는 언젠가 낙신족에 돌아가야 해. 그게 반년 후든, 일 년 후든 그날은 언젠가 올 거야.”
이현통은 피식 웃더니 말했다.
“낙신족의 전성기에는 천지존 한 분에, 지지존 두 분이 있어서 삼대 신족이 감히 덤비지 못했고 대천세계에도 널리 이름을 알렸어. 그런데 고작 천년 만에 곧 죽을 노인네가 겨우 지탱하는 것도 부족해 어리고 여린 소녀한테 마지막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제야 낙리가 수련에 목숨을 거는 이유를 알겠어?”
목진을 바라보며 말하는 이현통도 점차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에 목진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제야 이현통이 두 사람 사이를 배척하는 이유를 알았다. 낙리에게 지금은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 북창령원까지 온 것이다. 목진은 낙리의 마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 수련하는 게 너 때문만은 아니야. 만약 낙리가 충분히 강해지면 모든 걸 혼자 떠안을 수 있을 거고, 네가 이 사실을 알더라도 부담이 크지 않을 테니까.”
이현통은 쓸쓸하게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다.
“낙리는 도대체 왜 널 좋아할까?”
이에 목진은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낙리가 꼭 돌아가야만 하나요?”
“그것만큼은 막지 마. 안 그럼 그녀가 네 곁에 남아있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
이현통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내가 그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목진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사람들이 아직 낙신족을 건드리지 않는 건 다 낙천신 때문이야. 비록 나이가 많긴 해도 그 위엄에 감히 도전장을 내밀 사람은 없고, 수십 년 전에 맺은 엄청난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 그 해, 낙천신께서 우연히 하위 면에서 온 젊은이를 구한 적 있어.”
“네?”
목진이 어리둥절하여 바라보자 무덤덤하기만 했던 이현통이 고개를 들고 화색이 되어 말했다.
“그때 만난 청년이 지금은 대천세계의 패주가 되어 이름을 떨치고 있거든.”
“그 사람이 누군데요?”
“그 사람은 천지존에 이른 지 오래된 화영족의 노조께서도 어찌할 수 없는, 지금은 대천세계에 이름을 떨친 무궁한 화역의 주인 염제, 소염(蕭炎)이야.”
염제, 소염.
목진은 패기 넘치는 이름에 흠칫했다. 하지만 북령원에 있을 때 접하여 대충 인상만 있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명확한 개념이 섰다.
위면의 경계를 뚫고 하위면에서 대천세계에 온 사람 중 평범한 사람은 없었고 전부 의지가 굳셌다. 아마 위면 특정상 하위면에서는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어 대천세계에서 마음껏 활개를 펼친 것일지도 몰랐다.
혼자 빙영족과 싸워 이긴 무조도 이현통이 말한 염제와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진정한 이현통은 목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운이 좋았던 것이 낙천신께서 염제를 구한 것은 아니었고 기껏해야 도움을 조금 주신 것뿐이었어. 그해, 염제는 금방 대천세계에 발을 들였는데 마침 낙신족의 구역에 떨어졌지. 하위에서는 영기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수련했는데 염제는 투기를 수련했어.
투기란 것은 이곳에 오면 더욱 순수한 영기로 변하는데 위면을 뚫고 대천세계에 온 강자는 대부분 고생하여 수련한 투기가 낯선 영기로 변하는 걸 원치 않아.”
이현통은 이내 피식 웃었다. 이런 문제는 대천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한테는 그저 웃어넘길 일이었으나 위면을 뚫고 이곳에 온 강자들한테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낙천신께서는 바로 그때 염제를 만나 영력 변환을 도와주셨어. 염제는 비록 어렸으나 박학다식했고 대천세계에 금방 발을 들여 실력이 엄청나진 않았지만 그 잠재력은 대단했어. 위면을 뚫고 이곳에 온 사람은 능력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던 낙천신은 한 대륙의 통치자란 신분을 잠시 내려놓으셨지. 그런데 염제는 낙신족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났어. 아내를 찾으러 간다고만 했는데 그 뒤로 십수 년간 소식이 끊겼지.
그러다 어느 날, 염제라 불리는 남자가 천지존에 이른 지 오래된 노조와 싸웠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그 대결에 폐대륙이 잿더미가 되었어. 화영족의 노조는 전력을 다했지만 염제한테 상대가 안 돼 끝내 패배를 인정하고 화영족의 불씨 하나를 내어줬지. 그렇게 염제는 대천세계에 이름을 알렸어.”
이현통의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천지존인 것만으로도 대천세계의 거장인데 염제한테는 그저 손쉽게 이기는 적수 중 하나였으니, 말 그대로 화염의 제왕이었다.
“이렇게 염제가 무궁한 화역을 만들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어. 염제는 천지의 불을 다스리는 것 외에도 연단술에 뛰어나 강자들이 그가 제련한 단약을 받으려고 애걸복걸했어. 덕분에 화역은 수십 년 사이에 대천세계에서 크게 성장했지.”
대천세계는 광활하기 그지없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수없이 많아 명성을 떨치고 자기 땅을 얻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염제의 위엄에 목진도 이내 감탄했다.
“낙천신께서도 염제가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거야. 그해, 더없이 평범했던 젊은이가 십수 년 사이에 엄청나게 성장했으니 말이야. 그런데 노인네도 고집이 있으셔서 무궁한 화역에 잘 보이려고 하지 않으셨어. 아마 그해에 줬던 도움이 너무 하찮아 인연을 이어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던 거야.
그러다 낙리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낙신족이 위기에 빠졌을 때, 낙천신께서 생신 잔치를 여셨는데 염제가 축하 인사를 보내와 낙신족을 호시탐탐 노리던 삼대 신족이 바로 꼬리를 내렸지. 아무도 낙신족과 염제가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거든. 이렇게 낙신족은 낙천신의 위엄과 염제의 축하 인사 덕분에 십수 년간 무사했어.”
이현통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낙천신께서 운명하시면 낙신족은 바로 위험에 빠질 거야. 사람들이 비록 염제를 두려워하지만 무궁한 화역과 서천계는 거리가 너무 멀고 삼대 신족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 기회가 오면 곧바로 덤벼들 거야.”
“외부의 힘으로 낙신족을 돕는 건 한계가 있네요.”
목진이 속삭였다. 현재 낙신족에는 낙천신과 낙황이 될 자격이 부족한 낙리 외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여 낙천신께서 돌아가시면 낙리가 국면을 바로잡기 전에 낙신족은 큰 위기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낙리 혼자서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목진은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자신은 낙리가 돌아가는 것을 막지도, 막아서도 안 되었다.
목진은 결국 한참을 고민해보고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낙리가 낙황이 되었을 때 도움이 될 수 있게 수련에 더욱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많이 힘들고 어렵겠지만 목진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너한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5년이야. 그 사이에 네가 낙리한테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란 어렵다고 봐.”
이현통은 주먹을 꽉 쥔 목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목진은 이리 말하며 가볍게 웃었다.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걱정하기보다는 목표를 정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인을 품을 수 있을까?
이현통은 가볍게 웃는 목진의 눈에서 확고한 의지를 읽었다. 이는 절대 낙리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목진의 확고한 신념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고단한 낙리의 마음을 흔든 걸까?
“너희 사이에 더는 끼어들지 않겠다고 낙리와 약속했어. 다만…….”
이현통은 갑자기 날렵해진 눈빛으로 목진을 쏘아봤다.
“내가 실망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네가 낙리한테 도움을 주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까 발목만 잡지 마. 비참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낙리는 한시도 쉴 자격이 없어. 그러지 않으면 곧 목숨을 잃을 테니까.”
이에 목진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난 당신보다 그녀를 더 아껴요, 이현통.”
목진은 처음으로 이름을 부르며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앞으로 난 그녀 옆에 서서 그녀를 괴롭혔던 사람들을 혼내줄 거고, 그녀를 힘들게 하는 모든 일을 전부 해결해 줄 거예요.”
이현통은 욕망 가득한 목진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말한 대로 이뤘으면 좋겠어. 너한텐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이에 목진은 씨익 웃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물었다.
“지금 염제의 실력은 어떤가요? 홀로 빙영족을 발칵 뒤집은 무조와 비교하면 누가 더 센가요?”
“염제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천지존에 이른 화영족의 노조와 싸워 이겼어. 비록 요즘 들어 그에 관한 소문이 적지만 그 천부적인 재능으로 절대 제자리걸음은 하지 않을 거야. 지금쯤 천지존을 뛰어넘어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을 수도 있어. 광활한 대천세계에서 염제라도 천하무적은 아니니까.”
이현통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조도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지. 홀로 방대한 빙영족을 발칵 뒤집었으니 말이야. 그런데 빙영족은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먼저 꼬리를 내리고 무조를 도와 무언가를 완성한 것 같았어. 그 뒤로 무조는 무경을 만들었고, 현재는 무궁한 화역 못지않은 거물로 성장했지.
또한, 무경과 빙영족은 지금 관계가 아주 좋아. 누군가 빙영족을 노리면 그 뒤에 선 무경과 무조를 염두에 둬야 해. 두 사람 중 실력이 더 좋은 자가 누군지는 서로 힘을 겨룬 적 없어서 잘 모르겠네.”
이현통은 턱을 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염제와 무조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하긴 하네.”
이에 목진도 피식 웃었다.
목진은 아직 무궁무진한 대천세계의 묘미를 접할 자격이 충분하지 않지만 언젠가 그 중심에 설 자격을 갖춰 지존급 인물들과 힘을 겨뤄볼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