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천급 임무
이현통을 통해 낙리에 대해 알게 된 목진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진 소녀가 가여웠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일을 뒷전으로 하고 북창령원에 왔다니 목진은 마음이 뭉클하였다.
이현통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한 갈래의 빛줄기가 옥상에 내려앉았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낙리였다.
낙리는 목진이 옥상에 있는 것이 조금은 이상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자신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목진 때문에 바로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왜 그래?”
낙리는 괜히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물었다.
이에 목진이 다가와 허리를 꼭 끌어안자 낙리는 주변을 살피더니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살포시 그의 품에 안겼다. 목진한테서 나는 익숙하고 포근한 향기에 며칠 동안 수련으로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미안해.”
목진은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갑자기 왜 그래?”
낙리가 흠칫 놀라 물었다.
“날 좋아하면 수련에 방해가 될 거라고 했던 네 말이 생각나. 그때는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였는데 사실이었어.”
목진은 소녀가 영로에서 자신을 반년 동안 추격한 일이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습기만 했던 이유가 지금은 무겁기만 했다. 낙리는 그때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다. 목진이 곧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수련을 대체할 거란 것을.
낙리는 목진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난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싫어.”
낙리는 목진이 죄책감은 안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싫었다.
“뭘 들은 거야?”
목진의 태도에서 곧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낙리가 옥상을 쓰윽 훑더니 물었다.
“이현통이 다녀갔어? 너한테 뭐라고 말한 거야?”
낙리는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현통이 또 자기 몰래 이상한 짓을 했을까 봐 두려웠다. 이에 목진은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너무 뭐라 하지 마. 이건 내가 마땅히 알아야 하는 사실이야. 난 항상 네 곁을 지킬 거고 언젠가 너를 괴롭히는 모든 걸 없앨 거야.”
“우리 그만 얘기하자.”
낙리는 한숨을 쉬며 목진의 가슴을 가볍게 밀었다.
너무 무거운 주제라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고, 목진이 자기처럼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했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난 절대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넌 평생 나 목진의 사람인걸.”
목진이 방긋 웃으며 소녀를 꼭 끌어안았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모르겠네. 우리 사이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는걸?”
낙리는 가볍게 웃으며 목진을 흘겨봤다.
“내 품에 안기고도 그런 말을 하다니, 아주 매를 버는구나, 네가.”
목진은 히쭉 웃더니 소녀의 엉덩이를 살짝 때렸다. 이에 낙리는 얼굴이 화끈거려 목진의 가슴을 있는 힘껏 물었다.
목진은 소녀를 품에 안고 드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깊게 내뱉었다.
“내가 지금은 평범하고 별 볼 일이 없어도 언젠가 꼭 네 앞에 떳떳하게 나설 거야. 널 괴롭히는 모든 걸 부숴버릴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나는 이 세상을 뒤흔들 만큼 놀라운 사람이 될 테니까.”
목진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작았지만 그 의지는 누구보다 확고했다. 이에 낙리는 눈시울을 적히며 목진의 허리를 감싸 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진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얹었다.
목진, 네가 평범하든 천하무적이든 언제까지나 기다릴게.
* * *
이튿날, 소령아가 목진을 찾아 신생 구역에 왔다.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하여 소령아를 바라보는 목진과 달리 소녀는 뒷짐을 쥐고 흥미진진하게 주위를 살폈다.
“좋은 소식이 있어.”
소령아는 방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언니가 널 찾아.”
“네 언니라면 소훤 말이야?”
목진은 전혀 친분 없는 소훤이 자신을 찾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
소령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한테 나쁠 건 없어. 이런 기회는 쉽게 찾아오는 게 아니거든.”
소령아가 말을 마치고 바로 떠날 채비를 하자 목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뒤를 따랐다. 반 시진 후, 두 사람은 북창령원 북쪽에 있는 거대한 호수에 도착했다.
호수 중심에 있는 자그마한 섬에는 깔끔한 방이 두 칸 있었는데, 그 앞에서 하얀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언니.”
소령아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이에 목진도 북창령원에서 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한 여인한테 눈길을 돌렸는데 풍만한 몸매에 검은색 장발을 축 드리운 것이 여간 아름답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소훤 선배.”
“편하게 해.”
소훤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북창령원에서 천급 임무를 받았는데 같이 할 생각이 있나 물어보려고 불렀어.”
“천급 임무요?”
목진은 흠칫 놀랐다.
“난 그런 임무에 참가할 자격이 없을걸요?”
북창령원에는 임무전이 있는데 그곳에서 받은 임무를 완성하면 엄청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 임무는 천, 지, 인 세 가지로 나누는데 천급 임무가 가장 높은 단계로 실력을 어느 정도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자격이 있어야만 참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목진의 경우 실력은 충분해도 참석할 명분이 없었다.
“실력은 충분한 것 같으니까 명분은 내가 만들어줄게.”
소훤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저를 찾았죠?”
천급 임무는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험하긴 해도 일단 성공하면 보상이 더할 나위 없이 많고 좋았다. 그래서 소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실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목진의 질문에 소훤은 소령아를 힐끗 쳐다봤다. 소령아가 매일같이 설득하려 애썼고 목진에 대한 인상이 괜찮지만 않았어도 소훤은 목진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영투장에서 너와 이현통이 대결하는 걸 봤어. 다른 사람은 실력이 충분해도 인상은 별로거든.”
소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이번 천급 임무는 최대 5명까지 참가할 수 있는데 너까지 하면 5명이야. 그리고 이번 임무를 완성하면 우리는 1인당 150만 영치를 얻을 수 있어.”
“그렇게나 많이요?”
목진이 아무리 매사에 태연해도 150만 영치란 말에는 화들짝 놀랐다. 천급 임무 한 번에 150만 영치면 3번 정도 더 하면 북명룡곤의 정혈을 바로 구매할 수 있다.
“이번에 맡은 임무가 천급 하급 임무라 150만밖에 안 되는데 상급이면 최대 800만 영치까지 받을 수 있어. 비록 해낸 사람이 여태껏 한 사람뿐이었지만 말이야. ”
소령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800만…….”
목진은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사람이 설마 심창생인가요?”
“그래, 그 녀석만 가능한 일이었지.”
소훤은 이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훤도 천방 3위지만 심창생과 실력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또 이번 임무는 추격이나 검거하는 것이 아닌 영장(灵藏) 임무야.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동굴을 찾으러 가는 것인데 선인이 남긴 영결, 영기와 보물도 얻을 수 있어. 우리 임무가 동굴을 찾는 것인 만큼 보물은 북창령원에 주지 않아도 돼.”
소훤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영장(灵藏) 임무가 북창령원에서 가장 인기가 많아. 북창령원에서 수집한 정보로 보물찾기를 하는 셈이니까.”
목진은 매우 흥미진진했다. 다른 건 차치하고 150만 영치만으로도 엄청 솔깃했다.
“소훤 선배… 아주 흥미로운 제안인데 결정에 앞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
소훤이 미소를 띤 채 물었다.
“한 사람만 더 들이면 안 될까요?”
목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한 사람을 더 들이고 싶다고?”
소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은 자리는 하나뿐인데 너로 정했고 나머지는 미리 정해뒀던 거라…….”
소훤은 괜히 목진에게 미안했다.
그는 낙리와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유감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낙리를 혼자 남겨두면 수련밖에 모르는 바보가 될까 봐 두려웠다.
“나, 언니, 너 외에 천방 23위인 여정(黎箐) 선배도 있는데 북창령원에서 유명한 미인이야.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천방 20위인 곽흉(郭匈)이야. 네가 마지막으로 들어온 사람인지라 인원 교체는 좀 어려워.”
“내가 괜한 말을 했네.”
목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정할까? 사흘 뒤에 움직일 건데 이곳에서 보자.”
소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깥세상이 궁금했던 목진은 잠시 북창령원을 떠나게 된 것이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목진은 소령아 자매의 거처에 오래 머물지 않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바로 떠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바람을 가르며 왔는데 늘씬한 몸매에 청발을 가진 이상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청년한테서 위험한 영력 파동이 느껴졌다. 청발 청년은 천방 4위인 학요였는데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뭔가 눈치챈 듯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소훤, 지난번 일은 어떻게 됐어?”
학요가 씨익 웃으며 소훤을 바라봤다. 이에 소훤은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말투는 딱딱해졌다.
“미안하지만 이미 사람이 찼어. 그런데 네 그 엄청난 실력으로 이토록 쉬운 임무에 참가한다고 수련에 과연 도움이 될까?”
목진은 흠칫 놀랐다. 학요도 이번 임무에 참가하고 싶었을 줄은 몰랐지만 소훤처럼 예쁘게 거절하는 사람 또한 흔치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영장(灵藏) 임무는 보상이 가장 많고 다른 임무에 비해서 위험 부담이 적긴 하지만 북창령원에서는 기본 정보만 주는지라 영장이 무슨 등급인지 모르잖아. 게다가 예상 밖의 사건이 벌어지면 모두가 위험해지니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이에 소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고급 영장(灵藏)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어.”
“만일의 경우는 대비하는 게 좋잖아.”
학요가 피식 웃더니 목진한테 눈길을 돌렸는데 며칠 전 이현통과의 대결에서 깊은 인상을 심어줬던 사람임을 그제야 알아챘다.
“목진 후배, 난 학요라고 해.”
학요가 목진한테 다가가자 소훤은 바로 정색했다.
“학요 선배군요.”
목진은 바로 소훤의 속내를 알아채고 웃으며 반겼다.
이 녀석이 곧 천방 4위인 학요군, 북창령원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지.
“본론부터 말할게.”
학요는 진지한 듯한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이번 임무에 참석하고 싶어. 목진 네가 다섯 명 중 한 명일 것 같은데 나한테 자리를 양보하면 안 될까?”
역시 예상과 빗나가지 않았다.
이에 목진이 인상을 찌푸리자 학요는 이내 웃으며 말했다.
“이번 임무를 무사히 마치면 150만 영치를 보상으로 준다는 걸 알아. 네가 나한테 자리를 양보해주면 이번 임무에 성공했을 때, 그 반을 너한테 넘길게. 그럼 넌 75만 영치를 그냥 갖는 거야. 솔깃하지 않아?”
‘대단한 자선가 납셨군.’
목진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소훤을 힐끗 쳐다봤는데 학요를 전혀 원치 않아 보여 마음대로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미안해요, 선배. 소훤 선배의 동의를 받고 참가한 거라 함부로 양도할 권리는 없는 것 같네요. 정 원하면 소훤 선배한테 물어보세요. 만약 선배께서 괜찮다면 얼마든지 자리를 내줄 수 있어요, 75만 영치도 필요 없고요.”
목진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이렇게 결정권은 다시 소훤한테 넘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절대 학요한테 자리를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간교하기는.”
소훤은 목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학요도 목진이 거절했음을 눈치챘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전보다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이번만 나한테 자리를 양보하면 안 될까? 앞으로 북창령원에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힘이 닿는 데까지 도울게.”
목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순간 학요의 눈빛에 깃든 어두운 기운을 느꼈다. 소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년은 늘 가면을 쓰고 살아 성격이 좋아 보여도 속내가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여러 차례 거절을 당한 학요는 조금 언짢았지만 애써 웃었다.
“내가 괜한 부탁을 했나 보군.”
그는 소훤한테 눈길을 돌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훤, 이번에는 안 가는 거로 할게. 무사히 돌아와. 그리고 다음번엔 나도 불러줬으면 좋겠어. 내가 있으면 적어도 널 보호할 수는 있잖아?”
훤칠한 외모에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더하면 학요도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그런 것에 넘어갈 정도로 다들 바보가 아니었다.
소훤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난 먼저 갈게.”
학요가 웃으며 소훤한테 인사하고 목진을 한참 쳐다보더니 이내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