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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163화 (162/1,000)

163화. 백헌(白軒)

백룡성 소성주가 옆에 있는 노인과 눈을 마주치며 피식 웃었다.

“진곤(陳坤) 장로, 대단하시군요.”

“통 큰 백룡성과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진곤이라 불리는 중년 남자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룡옥주는 우리 백룡성의 것이니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시지요.”

백동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800만!”

이에 천강검파의 진곤은 인상을 찌푸렸다.

“백룡성에서 이렇게 나오는데 우리 지행종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노란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히쭉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900만이오. 백룡성에서 이보다 더 높은 가격을 낼 수 있다면 지행종에서는 포기하겠소.”

“900만이라고?”

사람들은 이내 혀를 내둘렀다. 이토록 높은 가격을 부르다니 역시 백룡지구 천 리 안에서 손꼽히는 3대 세력이었다.

1년 전, 이곳 경매장에서 팔렸던 준신급 영결도 천만이 조금 넘었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백룡옥주가 천만 영폐를 불러 가져갔다.

백동은 이를 갈며 지행종의 노인을 노려봤다. 아무리 재력이 좋은 백룡성이라도 천만은 결코 낮은 가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서든 따내라고 한 성주의 말이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천만이오!”

백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쳤다.

백룡성 반년 수입이나 마찬가지인 돈으로 제대로 용도도 모르는 물건을 구매하려는 의도를 몰라 다들 어리둥절했다.

“놀랍군.”

곽흉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백룡성이 이토록 엄청난 가격을 줘서라도 물건을 얻으려는 것이 놀라웠다.

목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니, 목역의 한 해 수입도 천만이 안 되었다.

천강검파와 지행종에서 더는 입을 뻥긋하지 못했다. 영폐가 부족한 것도 있었지만 백룡성의 의지를 보니 더 붙어봐야 소용이 없을 거란 걸 알았다.

한편, 이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필승은 잠시 기다리다 현장이 조용해지자 경매봉을 들었다.

백룡옥주는 결국 백룡성이 가져갔다.

“소성주, 이리 박력이 넘치는 분인 줄은 몰랐네요. 부디 지존 영장이길 바랍니다. 그게 아니라면 손해가 클 테니까요.”

천강검파의 진곤이 백동 일행을 보며 피식 웃더니 사람을 거느리고 떠났다.

“백룡성에서 이번 경매에 다 내걸었군요. 우리 지행종에도 좋은 일이 있겠지요. 그럼 이만.”

노란색 도포를 입은 지행종의 노인도 씨익 웃으며 백동을 바라보더니 일행과 함께 떠났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나 끝까지 지켜볼 거야.”

백동은 이를 갈며 이들을 노려봤다.

“우리도 이만 가자.”

소훤의 말에 다들 일어났다. 백동은 아름다운 소훤의 자태를 보며 한없이 부드러운 여인을 품는 망상에 마음이 불타올랐다. 그러다 이내 소훤의 뒤에 있던 목진과 눈이 마주쳤다. 백동은 목진의 차가운 눈빛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백동은 이내 씨익 웃더니 손가락으로 목진의 목을 겨누는 듯한 손짓을 하였으나 목진은 보는 척도 안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를 무시하는 듯한 목진의 태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백동은 옆에 서 있는 노인한테 분부했다.

“구 씨, 저 녀석을 조사해보게. 도대체 누구길래 백룡성에서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건지 궁금하군.”

이에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탐험가는 아닌 것 같은데 이토록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니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백동은 백룡성에서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보여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옷깃을 휘날리며 자리를 박차고 그곳을 떠났다.

어느덧 방대한 백룡성에 어둠이 서서히 깃들었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북적거렸고 멀리서도 사람들의 소리가 들릴 만큼 시끄러웠다.

오늘의 백룡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떠들썩하였다. 이는 이날 오후 경매장에서 흘러나온 지존 영장에 관한 소식 때문이었다.

지존 영장, 이 네 글자에 사람들은 혈안이 되어 달려들었다.

대천세계에서 지존은 진정한 강자를 뜻하는 대명사인데, 해당 등급이 되어야 비로소 한 대륙의 왕으로 거장이라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물론 통천경도 실력이 좋지만 하나의 대륙을 다루고 사람들의 경배를 받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통천경 강자의 영장일지라도 절대 지존경과 비교할 수 없었다.

누군가 운 좋게 지존경의 계승을 받는다면 수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더는 평범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되었다.

백룡지구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도 다 이곳에서 죽은 백룡지존 때문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가 남긴 영장을 찾으려고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그 누구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드디어 지존 영장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으니 그게 사실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백룡지구는 이 소식으로 크나큰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 * *

목진은 백룡성 수련각의 방에 조용히 앉아 수중의 물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용안 정도 크기의 녹슨 철구의 겉면에는 미세하지만 난해하고 복잡한 무늬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오늘 소령아가 낙찰받은 영진자였다.

어차피 영진사만 쓸 수 있는 물건이라 소령아는 흔쾌히 목진에게 넘겨주었다. 영진자는 영진과 영력에 대한 제어력이 엄청난 영진사만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 보통의 영진사는 만들어 낼 수 없는데, 물론 지금의 목진도 불가능했다.

“영진자 속 영진의 등급이 역시 보통은 아니군.”

목진은 영진자를 연구할수록 낯빛이 어두워졌다. 보일 듯 말 듯한 진문에 의하면 이 속의 영진은 적어도 4급인데 목진이 현재 소환할 수 있는 요련도영진 못지않았다.

3급 영진사인 목진이 심진 상태로 들어가면 4급 영진의 문턱을 간신히 넘을 수 있었다. 보통 3급 영진사가 소환할 수 있는 영인의 수는 최대 99개이고 100개에 달하면 비로소 4급 영진사가 되는 것이다. 목진의 요련도영진은 마침 100개의 영인이었다.

다만 이는 목진이 전력을 다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고, 심진 상태에서 구유작의 힘을 빌려야만 100개를 돌파해 요련도영진을 소환할 수 있었다.

3급 영진을 소환하듯 4급 영진을 쉽게 소환하려면 적어도 융천경 중기의 실력을 지녀야 했다.

“이 속에 있는 영진에 대해 알아야 영진자를 사용할 수 있겠군.”

목진은 영진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영진자가 일반인한테 무용지물인 이유는 그 속에 깃든 영진때문이었다. 영진에 대해 모르면 결국 사용할 수 없고 그렇다고 영력을 함부로 불어넣으면 영진자가 폭발해 스스로를 해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진사라도 그 속에 깃든 영진을 알아내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천천히 알아봐야겠군.”

목진은 잔뜩 녹슨 영진자를 쥐고 서서히 눈을 감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느새 심진 상태에 들어선 목진은 영진자를 감싸 쥐고는 영력을 조금씩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속에 깃든 복잡한 영진을 조심스럽게 연구했다. 무척 번거로운 일이었으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파헤쳐나갔다.

* * *

백룡성, 성주부.

백동과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성주부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서재에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맞은편에는 백발의 중년 남자가 영력의 위압감에 빛나는 백룡옥주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내 정보는 역시 정확했네. 백룡옥주는 백룡 지존이 남긴 물건이야.”

중년 남자는 백룡옥주를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이에 백동과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이번에 나온 영장은 백룡 지존의 물건이겠죠?”

백동이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 것 같구나.”

백발의 중년 남자가 바로 이곳 백룡성의 성주 백헌이었다.

“백룡 지존은 자신의 영장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 여긴 거지? 내가 이곳에 백룡성을 세워 수십 년 동안 오늘만 기다렸는데 말이야.”

백헌은 한기 어린 눈빛으로 백룡옥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존 영장까지 찾으면 난 임무를 마치고 궁에 돌아갈 수 있어.”

“천강검파와 지행종에서도 경매에 참석해 소식을 들었으니 곧 사람을 이리로 보낼 것 같아요.”

“천강검파와 지행종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용마궁(龍魔宮)에서 북창대륙을 휘어잡았을 땐 그깟 세력을 짓밟는 건 개미를 죽이는 것처럼 쉬운 일이었단다. 북창령원만 아니었으면 용마궁이 어찌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그해, 백룡지존이 용마궁의 보물을 갖고 도망가지 않고, 북창령원의 그놈만 아니었어도 북창령원은 지금처럼 북창대륙에서 이름을 날리지 못했을 거다. 이제 영장만 찾으면 용마궁은 곧 되살아날 거야. 그때 반드시 북창령원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테다!”

그 말에 회색 옷을 입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백룡성에 낯선 젊은이들이 왔는데 어린 나이에 실력이 비범해 알아보니 북창령원 소속이더군요.”

백동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겁이 없더라니.”

“북창령원?”

백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도 지존 영장 때문에 온 걸까? 북창령원에서 이곳에 숨긴 물건을 알 리가 없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알았다면 다섯 명만 보냈을 리는 없겠지요.”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중에 북창령원 천방 3위인 소훤이라는 여인이 있는데 실력은 화천경 중기로 엄청나고, 곽흉과 여정도 천방 30위 안에 드는 영재였습니다. 곧 화천경에 입경할 것으로 보였지요. 허나 나머지 2인은 실력이 별로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노인은 북창령원에 대해 아주 빠삭했다.

“화천경 중기라…….”

백룡옥주를 쓰다듬던 백헌은 북창령원의 실력에 자못 놀랐다. 그토록 어린 나이에 화천경의 실력을 갖춘 소훤을 키워냈으니 말이다.

“북창령원에서 감히 우리 땅에 발을 들였는데 손 놓고 볼 수는 없지요. 그들이 돌아가 소식을 전해 더 막강한 실력자를 파견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여태껏 준비해온 것들이 전부 수포가 될 수도 있고요, 아버지.”

음침한 목소리와 달리 백동의 이글거리는 눈빛에는 욕망이 가득했다.

“북창령원 학생들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노인도 백동의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소훤의 실력이 대단하긴 하다만 혹여나 그녀가 도망이라도 치면 더 큰 화를 부를 건 분명하구나.”

백헌이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소훤 일행 중에 그 동생인 계집이 있었답니다. 실력은 기껏해야 융천경 후기던데 그녀를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백헌은 노인의 말에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수중의 백룡옥주로 탁자를 힘차게 두드렸다.

“불안은 빨리 잠재워야지. 대신 백룡성 밖에서 처리해. 북창령원의 주의를 끌어서는 안 돼.”

백헌이 한기 어린 눈빛을 한 채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들이 백룡성을 떠나면 용마위(龍魔衛)를 보내서 모조리 없애야 한다. 여태껏 우리 손에 죽은 북창령원 학생이 수도 없이 많으니, 그 다섯 명을 더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 * *

이튿날, 소훤 일행은 이른 아침에 백룡성에서 나와 백룡지구로 향했다. 백룡성은 비록 백룡지구 근처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영수의 습격을 막기 위해 거리가 꽤 먼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떠나는 게 좋았다.

그들은 백룡성을 떠나고 나서야 지존 영장의 소식이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몸소 느꼈다.

백룡지구로 향하는 길은 호호탕탕 나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하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는데 전부 백룡지구로 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빨리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졌다.

“서두르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백룡지구에 가서 쉴 곳을 찾아야 해. 괜히 밤에 돌아다녔다가 영수의 공격에 당할 수도 있어.”

소훤이 작은 목소리로 알렸다. 이에 목진 등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올렸다.

누군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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