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석상의 힘
두 사람은 바로 속도를 끝까지 끌어올려 지존 영장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이들은 칼부림 소리가 나는 대전을 적잖게 지났지만 멈추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2각 정도가 지나자 석전의 수는 점차 적어졌고 눈앞에는 어느덧 드넓은 사막이 펼쳐졌다.
하늘에 드물게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막의 깊은 곳으로 향했고 목진과 여정도 눈을 마주치더니 바로 영력을 끌어올렸다. 이렇게 또 1각 정도 지나 이들은 점차 속도를 줄였다.
머나먼 사막의 중심에 수십만 척 정도의 검은색 분지가 나타났고 주위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였다.
분지의 강력한 영력 파동에 천지의 영기가 들끓었다.
역시 보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건 모두 똑같았다.
어느덧 거대한 검은색 분지에 가까워진 목진 일행은 그 속에서 하늘 높이 치솟은 거대한 검은색 돌기둥을 발견했다.
분지에 골고루 분포한 돌기둥은 만 척 정도의 높이에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흐릿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며져 나오는 괴상한 기운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온몸이 파르르 떨렸는데, 꼭 하위면 사람이 상위면 사람을 만난 것과 흡사했다.
괴상한 기운의 위압감에 의해 이곳 천지의 영기마저 잔잔해졌다.
이것이 바로 지존의 위엄이었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러 기운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마저도 막강하여 이곳에 온 강자들은 전부 숙연해졌다. 아마 진정한 지존이 나타나면 다들 감히 눈도 못 마주칠 것이고, 지존 또한 이들을 개미 밟아버리듯 손쉽게 제거해 버릴 것이었다.
목진도 이곳에 남아있는 지존의 영기를 느끼고 숨을 깊게 들이켜더니 두 눈이 이글거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존, 얼마나 강력한 이름인가!
언젠가 목진이 지존급이 되면 떳떳하게 낙리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어머니를 찾으러 갈 수도, 북령경에 홀로 돌아가지 않겠다던 아버지와의 약속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언젠가 꼭 해내리라!
잠시 후, 목진과 여정은 분지의 변두리에 내려앉았는데 먼 곳에서 누군가 한이 맺힌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따가운 눈빛을 감지한 목진은 바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하얀색 도포를 입은 사람 수십 명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는 백동과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백동의 한이 서린 눈빛에 목진은 피식 웃었다. 역시 다시 만날 인연이었다.
백동 역시 사악한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아직 살아있었구나. 네가 너무 쉽게 죽어 아쉬웠는데 이번 기회에 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줄게.”
백동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고, 그 대상이 젊은 소년인 것을 알고는 무척 놀랐다.
사람들은 백동이 속이 좁은 못난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런 백룡성의 소성주를 건드린 소년이 가여웠다.
그러나 아무도 목진을 도우러 나서지는 않았다.
백룡지구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백룡성은 천강검파와 지행종만이 상대가 되었다. 이번에도 소식을 듣고 3대 세력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파견하였고, 따라서 이곳에서 백동을 건드리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그러나 목진은 이글거리는 눈을 한 백동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귀가 한쪽밖에 없어 보기에 안 좋은데 나머지 한쪽도 없애줄까?”
그 말에 백동은 잔뜩 화가나 혈안이 되었다.
여태껏 백룡지구에서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 일은 더없이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는 반드시 목진을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구 씨, 저 녀석을 잡아.”
백동이 이를 갈며 말했다.
“하느님께서 저 녀석을 다시 한번 나한테 보내주셨으니 기회를 잘 이용해서 잔인하게 죽여. 녀석한테 살아남은 걸 후회하게 해줄 거야.”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늘한 눈빛으로 목진을 노려봤다. 그러나 목진이 암장 호수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놀라운 노인은 녀석한테 신기한 영기라도 있는 건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면 다시 죽이면 되는 일이라 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노인은 화천경 초기의 실력을 마음껏 뽐내며 목진에게 다가갔다.
“화천경 초기라…….”
여정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목진이 어쩌다 저런 패거리와 엮이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절대 녀석을 버리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목진아, 내가 저 사람을 상대할게. 용교령환이 있어 크게 뒤처지지는 않을 거야.”
소훤이 없는 상황에서 나설 사람은 자신뿐이라 생각했다.
“여정 선배가 나서면 뒤에 있는 하얀색 도포를 입은 사람들도 나설 거예요. 그리고 그날, 숲에서 우리를 공격한 무리가 저들이에요. 저들이 바로 용마궁 사람들이에요.”
목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뭐?”
여정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룡성이 용마궁 소속이라니!
“그러니 노인네는 내가 상대할게요. 백룡성은 분명 강자들이 모인 이곳에서 진정한 실력을 뽐내고 싶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소훤 선배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버텨볼게요.”
목진의 말에 여정은 흠칫 놀랐다.
“그런데 넌…….”
여정은 막아 나서려다가 목진한테 기막힌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 말했다는 것은 적어도 목숨은 잃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조심해.”
여정은 결국 목진의 출전을 동의하였다.
목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며 한 발 나아갔다. 구유화가 아니었다면 노인네 때문에 암장 호수에 빠져 즉사했겠지만 더는 전처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네 놈의 명줄이 참 길구나.”
노인은 무덤덤하게 목진을 바라보더니 체내의 영력을 끌어올려 수중의 검은색 장창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천지의 영기마저 뒤흔들며 수백 척 정도의 날카로운 창날이 목진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나이를 꽤 먹은 노인이 융천경 밖에 안 된 소년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해 보이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목진은 피식 웃더니 손을 꽉 쥐고 주먹을 휘둘렀다.
쿵!
목진이 어두운 영력을 내뿜으며 여섯 갈래의 삼라사인을 만들자 천지의 영기가 순식간에 난폭해졌다.
여섯 갈래의 삼라사인은 꼬리를 물고 날카로운 창날로 향했는데 난폭한 영력이 퍼지며 혜성 같은 검은빛은 파죽지세로 창날을 부수고 노인에게 돌진했다.
주위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천경의 공격에 숨어서 방어만 해도 모자랄텐데 이토록 놀라운 공격을 선보일 줄 몰랐다.
다들 목진이 수련한 영결의 강력함에 매우 놀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인의 공격을 이토록 쉽게 막아낼 수는 없었다.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자신을 향한 검은빛을 보더니 그 속에 깃든 난폭한 영력의 파동을 느끼고 흠칫하다가 곧바로 손을 구부려 공격했다.
“마룡시천조!”
들끓는 영력은 거대한 검은색 용조가 되어 한기를 내뿜었는데 산도 쉽게 으깨어버릴 듯 강력해 보였다.
이렇게 검은색 용조와 검은빛이 허공에서 만나 난폭하기 그지없는 영력의 충격파를 일으키더니 검은빛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러나 검은색 용조도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균열이 생기더니 조금씩 무너졌다.
그때 노인은 연기처럼 피어올라 순식간에 목진 앞쪽에 나타나 그의 숨통을 찔렀다.
이에 목진은 바로 9급부도탑을 소환하여 방패로 장창을 막았는데 그 충격으로 뒤로 10보 넘게 밀려났다.
하늘 높이 튕긴 9급부도탑은 흑광을 내뿜으며 천 척 정도의 거대한 탑으로 변해 노인한테 날아갔다.
“꺼져!”
노인이 소리치며 검은색 장창을 휘두르자 그림자는 흑룡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라 9급부도탑을 가격했고 천 척도 넘는 부도탑은 맥없이 물러났다.
쿵!
노인은 한 번 더 공격해 더 멀리 튕겨 나간 부도탑을 바라보더니 이내 정색하며 움직였다.
“마등보!”
희미해진 노인은 순식간에 목진의 머리 위에 나타나 손가락을 구부려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들끓는 영력은 또다시 검은색 용조가 되어 목진을 공격했는데 그 막강한 공격에 맞으면 사지가 갈기갈기 찢길 것이 분명했다.
“목진!”
이때 여정이 주먹을 꽉 쥐자 용교령환에서 놀라운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녀는 바로 싸움에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
“죽어!”
노인은 소리를 지르며 더 매서운 공격을 날렸다.
그런데 목진은 당황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콧방귀를 뀌었다. 그 모습에 노인은 순간 불안해졌다.
“날 죽이기가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목진이 씨익 웃으며 주먹을 꽉 쥐자 상고의 석상이 튀어나와 커지면서 눈부신 빛을 뿜어내었고, 이어 산을 으깨고도 남을 힘으로 검은색 용조를 내리쳤다.
쿵!
두 힘의 충돌에 하늘이 흔들리더니 난폭한 힘의 파문이 서서히 퍼져나갔다.
노인의 몸이 갑자기 격렬하게 떨리더니 피를 토하며 멀리 튕겨 나갔다. 이에 검은색 분지는 순식간에 들끓었다.
사람들은 황급히 목진 쪽을 바라봤는데 그 위에 갑자기 수백 척의 석상이 나타나 온몸에 빛을 내뿜으며 전투 자세를 취하였다. 방금 노인을 가격한 것은 바로 저 석상이었다.
“그 석상이잖아?”
여정은 화들짝 놀라며 바로 깨달았다. 목진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놈을 장악한 것이었다. 이 정도라면 목진이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을 두려워하지 않을 법했다.
한편, 목진은 노인을 힐끗 쳐다보더니 석상의 어깨를 넘어 하늘 높이 날아올라 백동에게로 향했다.
악랄한 백동을 혐오했던 참에 기회가 될 때 바로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누군가 한 사람은 죽어야 끝날 싸움이었지만 목진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너!”
백동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목진을 보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목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백동을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그 앞에 나타나 흑염이 깃든 청광 장검을 빼 들고 놈의 숨통을 겨눴다.
이에 백동은 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는데 화천경까지는 아니지만 융천경 후기의 실력자인지라 당황하지 않고 웅장한 영력을 끌어올려 공격에 맞섰다.
“마룡붕천권!”
백동이 주먹을 휘두르자 들끓는 영력이 거대한 검은색 마룡으로 변하여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 위력으로 보아 그가 수련한 영결도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이에 목진은 주먹을 휘둘러 여섯 갈래의 삼라사인을 생성하였다. 순간, 주위의 영기가 폭동을 일으키더니 여섯 갈래의 삼라사인은 검은빛이 되어 마룡권으로 향했다.
쿵!
세찬 소리와 함께 난폭한 영력의 파동이 일었고 백동은 순간 사색이 되어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나갔다.
목진이 전력을 다하여 만들어낸 삼라사인은 화천경 초기의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의 매서운 공격마저 막아냈으니 융천경 후기인 백동 따위가 실력으로 버텨보겠다는 것은 망상이었다.
“당신 따위가 과연 나를 죽일 수 있을까?”
목진은 피식 웃더니 이내 정색하며 백동 앞에 나타나 수중의 청광장검으로 녀석의 목을 찔렀다.
이에 구경꾼들은 화들짝 놀랐다. 백룡성을 어찌 감당하려고 감히 백동을 죽일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딜 감히!”
회색 도포의 노인도 순간 낯빛이 변하여 소리를 질렀으나 백동을 구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한편, 목진은 노인의 말을 못 들은 척 사색이 된 백동한테 검을 겨눴다. 이토록 속 좁은 못난 인간은 빨리 없애는 것이 답이었다.
그런데 그때, 백룡성 무리 중 누군가한테서 빛이 반짝였다. 그 빛은 지극히 놀라운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다가와 목진의 칼을 튕겨냈고 목진도 뒤로 두 발 물러났다.
“누구야?”
목진은 바로 고개를 돌려 하얀색 도포를 입은 무리를 쓰윽 훑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씨익 웃었다.
“백룡성 성주, 오셨으면 떳떳하게 나오셔야지 왜 구차하게 사람들 속에 숨어있나요?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 나서서 지존 영장을 빼앗으려는 건가요?”
영력을 담은 목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중 천강검파와 지행종은 특히 당황했는데 아무도 백룡성 성주가 이곳에 직접 올 줄 몰랐다.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도 흠칫하였고, 이제야 목진이 백동한테 검을 겨운 진정한 이유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