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소훤 등장
수많은 사람의 주시하에 백룡성 무리에 숨어있던 한 중년 남자가 서서히 걸어 나왔다. 바로 백룡성 성주 백헌이었다.
“속이 참 깊은 소년이구나.”
백헌은 담담하게 웃고 있었으나 목진을 바라보는 눈빛에 한기가 가득했다. 그는 목진의 말대로 끝까지 숨어있다가 한 방을 노릴 계획이었는데 어린 소년한테 들켜 버렸다.
“백룡성에서 이번에 지존 영장을 반드시 얻을 기세네요.”
목진은 백헌한테서 강력한 영력의 파동을 느꼈고, 적어도 화천경 중기인 그는 막강한 상대였다.
“왜 그런 당연한 소리를…….”
백헌은 무덤덤하게 웃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이리 불러냈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백헌은 정색하며 놀라운 영력 파동을 일으키며 목진에게 달려갔다.
“네가 과연 피할 수 있을까?”
목진이 뒤로 물러나자 백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바로 목진을 따라잡아 공격했는데 들끓는 영력이 파도처럼 거침없이 일었고 이에 공기마저 폭발하는 것 같았다.
목진은 백헌의 공격에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석상 수위를 소환하였는데 엄청난 소리와 함께 석상 수위의 공격은 흩어져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단숨에 석상 수위를 물리치다니, 역시 백룡성 성주의 실력은 정말 놀라웠다.
“이것만으로 너를 지킬 수는 없어.”
백헌은 무덤덤한 얼굴로 다시 목진한테 다가가 손가락을 구부려 할퀴었다.
“마룡사천조!”
백헌의 마룡사천조는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선보인 것보다 훨씬 강력하여 하늘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다.
이에 목진은 두 손을 모아 신결을 소환하려 했는데 뒤쪽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날아오더니 목진 주위에 영력 광막을 형성하였다.
쿵!
백동의 날카로운 공격이 영력 광막을 가격하자 난폭하기 그지없는 영력 파동이 일었으나 광막만은 끄떡없었다.
“누구냐?”
백헌이 차가운 눈빛으로 뒤돌아보며 물었다.
“백룡성 성주처럼 유명한 분이 소년한테 살수를 두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요?”
뒤쪽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세 사람이 빠르게 그곳으로 날아왔다.
맨 앞에는 젊은 여인이 서 있었는데, 하얀색 치마를 입은 그녀는 예쁘장한 얼굴에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더하여 기품이 남달랐다.
“소훤!”
눈앞에 나타난 세 사람에 여정은 화색이 되었다. 소훤이 드디어 나타났다.
백헌은 소훤한테서 자신 못지않은 영력 파동을 감지하고는 곧바로 북창령원 천방 3위인 소훤이란 것을 눈치챘다.
역시 북창령원에서 배양한 학생은 실력이 엄청났다. 어린 나이에 이 정도면 용마궁의 제일가는 제자 못지않았다.
“북창령원이 제법이구나.”
백헌은 소훤을 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칭찬은 고맙게 받을게요.”
소훤이 담담하게 웃으며 손을 휘두르자 목진을 감쌌던 영력 광막이 사라졌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쩌다 백룡성과 시비가 붙은 거야?”
소훤은 눈을 부릅뜨고 자신한테 다가온 목진한테 말했다.
“그날 밤 우리를 습격한 것이 저들이에요. 저들은 용마궁 사람이에요.”
목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소령아와 곽흉은 흠칫 놀랐고 소훤마저 눈빛이 흔들렸다.
백룡성은 이곳 백룡지구에 존재한 지 10년도 넘는데 용마궁에서 일부러 파견한 것이라니, 북창령원에서 용마궁을 꺼릴 법했다.
그때 백헌은 소령아 일행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 기괴하게 웃으며 다시 무리로 돌아갔다. 소훤이 나타난 이상, 목진을 죽이기란 어려웠고 지금은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그 물건만 얻으면 목진 하나쯤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백헌은 물러났지만 주위 사람들은 백룡성 무리에 대한 경계심을 높였다. 특히 천강검파와 지행종은 연맹이라도 맺은 듯 나란히 서서 백룡성을 지켜봤다. 이참에 실력이 가장 강한 백룡성과 싸워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를 감지한 백헌은 그저 웃어넘겼다.
“성주님, 저 녀석 때문에 괜히 우리만 이목을 끌었네요.”
음침한 눈빛에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이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 것이냐? 백룡성이 그따위밖에 안 되는 줄 알아?”
“아버지, 우리가 얻으려는 물건이 도대체 뭐예요?”
백동은 목진 쪽을 째려보더니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난 백룡 지존의 영장 중 가장 진귀한 물건을 얻으란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백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가장 진귀한 물건이라…….”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검은색 분지의 깊숙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곳에 있겠네요. 이곳이 바로 백룡 지존이 사망한 곳이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백동이 어리둥절하며 말했다.
“봉인해서 보이지 않는 거야. 해와 달이 교체할 때, 이곳 영기가 갑자기 무질서해지면 봉인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을 없애면 영장은 자연스레 나타나겠지?”
백헌이 검은색 분지를 노려보며 서서히 말했다.
“지금은 잠자코 기다리기만 하면 돼.”
말을 마친 백헌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이를 아는 건 백룡성 뿐만이 아니었으니, 다른 세력과 강자들도 검은색 분지의 신비로움에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반나절이 지나 어둠이 깃들자 천지의 영기가 서서히 무질서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목진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검은색 분지를 바라봤는데 만 척도 넘는 커다랗고 신비한 검은색 돌기둥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곧 영장이 나타날 것 같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목진은 눈빛이 뜨거워졌다.
주위는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천지에 맴돌던 그윽한 영기는 서서히 무질서해졌으며 잔잔하게 안개도 끼기 시작했다.
다들 진지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영력을 끌어올렸다. 지존이 사망한 곳이라 조심해야 했다. 백룡지구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진정한 지존 앞에서는 그들은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비록 지존이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남긴 물건 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피해를 볼 수 있었다.
목진 등도 경계하며 거대한 검은색 분지를 바라봤는데 만 척이 넘는 방대한 검은색 돌기둥에서 서서히 빛이 발하더니 오묘한 광문이 나타났다. 그리고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돌기둥을 타고 올랐다.
그때 갑자기 검은색 돌기둥에서 빛줄기를 발사하며 뒤엉켜 분지를 층층이 덮었다.
그러다 천지의 영기가 검은색 분지에 미친 듯이 몰려들었는데 그 광경에 다들 안색이 어두워졌다. 분지에 들어가지 않아 다행이었지,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 영기에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빛줄기가 검은색 분지를 완벽하게 덮어버렸어.”
소훤은 인상을 찌푸리며 분지를 바라봤는데 수만 척 정도의 방대한 광막이 검은색 분지를 덮어 완벽하게 차단했다.
“분지 안에 백룡 지존이 남긴 물건이 있을 거야. 그래서 자신이 죽은 곳을 광막으로 보호하려는 거지.”
목진도 인상을 찌푸리며 광막을 바라봤다. 광막에서 지극히 무서운 영력의 파동이 느껴졌는데 이들이 뚫고 지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막무가내로 덤비다가 공격이 반사하면 즉사였다.
“지존 영장을 얻는 건 역시 쉽지 않군.”
곽흉이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렵게 이곳까지 왔는데 광막 하나가 이들을 철저히 차단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죠.”
목진의 말에 소훤 등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외, 다른 사람들도 광막의 위력을 감지하고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광막이 드리우면 지존 영장은 도대체 어떻게 얻는단 말인가?
주위에 정적이 흘렀다.
“여러분, 우리 힘을 모아 광막을 뚫을까요? 이 물건은 백룡 지존이 남긴 것이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고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합세하면 분명 뚫을 수 있을 거예요.”
삐쩍 메마른 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사람들은 대부분 동의하는 눈치였다. 광막을 뚫지 않으면 아무도 영장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 함께 가볼까요?”
어느덧 사람들이 모여 웅장한 영력을 휘감고 광막에 뛰어들었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우리도 도울까?”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 소령아가 흥분하여 묻자 목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소훤도 째려보며 답했다.
“경솔한 행동은 금지야. 광막은 백룡 지존이 남긴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과연 저들이 뚫을 수 있을까? 광막에 뛰어든 사람들은 분명 지존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몰라서 저러는 거고. 이를 아는 사람들은 적을 하나라도 없애려고 부추기는 거야.”
소훤한테 한 소리 들은 소령아는 입을 삐쭉 내밀더니 말을 아꼈다. 이런 일에 섣불리 나서면 안 된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백룡성에서도 조용히 보고만 있네.”
백헌 등도 이들과 마찬가지였는데 백동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광막에 뛰어든 사람들을 바라봤다.
“저들을 조심해. 진정 용마궁 사람이라면 분명 이번 일에 대비해 완벽하게 준비했을 거야.”
소훤은 정색하며 말했다.
“백룡 지존도 용마궁 사람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배신하고 그곳에서 나왔어. 용마궁에서는 그를 죽이려고 애썼지만 결국 처참한 대가를 치렀지. 북창령원에서는 그 기회를 잡아 용마궁을 없앴고.”
이에 목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백헌 등은 거대한 광막에 그다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소훤의 말대로 이런 상황에 미리 대비한 것 같았다.
그때 수만 명의 영력이 한곳에 모이면서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으로, 몹시 세상(世上)을 놀라게 함)할 고함과 함께 영력 기(氣)의 회오리를 이루어 검은색 분지를 덮은 광막을 공격하였다.
목진은 잔뜩 긴장해 상황을 지켜봤다. 수만 명의 강자가 합세한 공격에 통천경도 정면으로 맞서긴 어려울 것 같은데 백룡 지존이 남긴 광막은 어떨지 궁금했다.
쿵!
영력 기(氣)의 회오리에 적중당한 광막에 물결이 일더니 중심에 밝은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흐릿한 빛의 그림자를 형성했는데 훤칠한 청년 모양에 동공마저 하얀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하얀색 도포를 입은 빛의 그림자는 조용히 광막의 중심에 앉아있었고, 그 주위에 빛이 모였는데 백룡처럼 날아다니며 포효하는 것 같았다.
이와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위엄있는 기운이 이곳에 가득 찼다. 그 기운에 천지마저 무서워 파르르 떠는 것 같았는데 그만이 이곳 천지의 영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그는 하얀색 동공으로 쏟아져 내리는 영력 기(氣)의 회오리를 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손을 휘익 저었다.
영력 기(氣)의 회오리는 그와 천 척 정도 떨어졌을 때쯤, 갑자기 공격을 멈췄는데 순간 공기마저 흐름을 멈춘 것 같았다.
그러다 광막에 앉은 빛의 그림자가 손을 가볍게 튕기자 잠시 멈췄던 영력 기(氣)의 회오리가 갑자기 놀라운 속도로 날아가 광막을 공격했던 사람들한테 되돌아갔다.
이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고,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황급히 도망쳤다.
목진 일행도 순간 흠칫했다.
“저건…….”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겁에 질린 채 광막에 앉아있는 하얀색 도포를 입은 빛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룡 지존?”
그의 이름에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다들 일전에 한 무모한 행동을 후회하였다.
“저분이 바로 백룡 지존이에요?”
소령아가 잔뜩 놀라 빛의 그림자를 바라봤다.
“백룡 지존이긴 한데 영력으로 만든 잔상일 거야.”
소훤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영력 잔상도 이토록 엄청난 힘을 가졌다니, 지존은 역시 무서운 존재야.”
이에 목진도 동의하였다. 역시 이토록 막강한 힘을 가져야 비로소 한 대륙을 지배할 자격이 주어진다.
사람들은 당황하여 더는 검은색 분지를 공격하지 않았다. 빛의 그림자가 정녕 백룡 지존이 아니더라도 그들을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