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이겨내다
구유작은 몸을 움츠리고 주위에 검은색 정층(晶層)을 만들었다. 표면에 흑염이 들끓는 것이 더없이 견고해 보였다.
쾅! 쾅!
신뇌가 정층을 가격할 때마다 구유작은 몸을 파르르 떨었는데 그 여파가 몸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는 듯했다.
잠시 후, 구유작 주위를 둘러쌌던 검은색 정층이 모두 망가지고 우아했던 구유작의 깃털이 우수수 떨어진 데다 피까지 뒤집어쓰고 있어 볼품없어 보였다.
목진은 처량한 구유작의 모습에 손에 땀을 쥐었다. 흑신 뇌겁에서 내뿜는 검은색 신뇌는 통천경의 강자를 죽이고도 남을 만큼 강력했다.
이대로라면 구유작은 버티지 못하고 또 한 번 실패할 수도 있었다.
잔뜩 긴장한 목진과 달리, 구유작은 중상을 입은 몸을 이끌고 고개를 치켜든 채 오만하게 울부짖었다.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흑신 뇌겁은 화가 난 듯했다. 외부 물건에 더없이 질색하는 뇌겁은 깃털이 구유작의 물건이 아님을 눈치챘다.
이에 뇌겁은 거대한 신뇌를 계속해서 발사했는데 깃털은 점차 빛을 잃더니 결국 사라졌다.
끼익!
그런데 그때, 구유작이 눈을 부릅뜨고 피를 철철 흘리며 울부짖었다.
한편, 목진은 구유작의 상처에서 은은한 보라색 빛을 봤다. 그것은 마치 아주 미세한 보라색 화염 같았다.
보라색 화염은 흑염 속에 숨어 발견하기조차 어려웠지만 이는 구유작의 상처 쪽에 남은 신뇌의 힘마저 무찔러버리고 상처를 빠르게 치유했다.
“저건…… 불사화(不死火)?”
보라색 화염을 목격한 목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상고 불사조의 불사화만이 뇌겁의 피해를 무시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대신 이는 불사조만 가능했는데 구유작은 불사족 혈맥이 존재하긴 했지만 불사화를 각인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구유작이 불사화를 각인하였다니, 이는 일반 구유작보다 훨씬 우월한 혈맥이었다.
어느덧 상처가 치유된 구유작은 불굴의 화염을 내뿜고 조금씩 수축하며 더 무서운 파멸의 힘을 뽐내는 흑신 뇌겁을 바라봤다.
흑신 뇌겁은 치명타를 날려 구유작을 없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구유작은 고개를 치켜들고 보라색 화염이 깃든 흑염을 휘감은 채 방대한 날개를 천천히 퍼덕였다.
꽥!
구유작은 흑신 뇌겁을 향해 마지막 도전장을 내밀었다.
구천을 떠도는 검은색 뇌운은 조용히 모였는데도 그 위압감에 주위의 공기마저 흐름을 멈춘 것 같았다.
그야말로 폭풍전야였다.
구유작은 미세한 보라색 화염이 깃든 흑염이 들끓는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겁난을 마주했다.
목진은 잔뜩 긴장하여 구유작을 바라봤다. 뇌겁의 압박에 영력이 순간 흐름을 멈춘 것 같았다. 흑신 뇌겁의 최후의 일격을 구유작이 막아낸다면 구유작은 신으로 거듭나 지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신수가 될 것이다.
대신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가 불사조의 혈맥이라도 뇌겁의 공격에 따라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구유작과 혈맥을 연결한 목진도 큰 타격을 입는 것은 물론 심지어 구유작과 함께 죽게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은 구유작이나 목진한테는 최악이었다.
그러나 목진이 구유작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존마저도 감히 덤비지 못하는 뇌겁의 위력에 준 화천경 따위가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끄떡없을 것이다.
“구유작, 힘내!”
목진이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만 장 정도를 뒤덮었던 흑신 뇌운은 어느덧 백 장으로 수축하였다. 더 짙어진 색상은 모든 물체를 빨아들일 듯 무서운 기운을 발산했다.
그때 흑신 뇌운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고 중심 부분이 회전하며 점차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곳에서 검은색 신뇌가 흉악한 흑룡처럼 꿈틀거렸다.
쿵!
움푹 파인 곳에서 검은색 신뇌가 하늘과 땅을 관통한 검은색 신광처럼 파멸의 힘을 싣고 나왔는데 천지 영기 때문에 바로 와해되었다.
한없이 조용해진 이곳에서 검은색 신광만 잔뜩 화가 난 듯 포효하였다.
한편, 구유작도 화염을 잔뜩 압축하여 머리 위에 천 장 정도의 검은색 깃털을 만들었는데 흑염이 들끓는 깃털 표면에 오묘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 신비로웠다.
흑신 뇌겁의 무서운 공격에 구유작도 최선을 다해 맞섰다.
슉!
검은색 깃털이 공간을 뛰어넘어 천지를 관통한 검은색 신광과 부딪치자 빛은 전부 흡수된 듯 주위가 어두워졌고 검은색 빛만이 주위 백 리를 둘러쌌다.
또한, 백 리 안의 산들은 전부 잿더미가 되어 주위에 더는 산이 존재하지 않았다.
목진은 이토록 강력한 파멸의 힘에 감탄할 시간도 없이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봤다. 검은색 신광의 공격으로 구유작의 검은색 깃털에 미세하게 균열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흑신 뇌겁의 최후의 일격의 위력이 너무 강력했다.
그러나 균열이 점차 많아지던 검은색 깃털은 맑은소리와 함께 어느새 부서졌고 검은색 신광은 바로 구유작의 거대한 몸뚱이를 가격했다.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구유작은 빠르게 추락해 먼 곳 산맥에 떨어졌다.
쾅!
대지는 요동쳤고 기랑이 휩쓸더니 구유작이 떨어진 곳 주변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균열이 미친 듯이 퍼져나갔다.
드넓은 산맥이 이렇게 사라졌다.
목진은 무서운 충격을 피하고자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구렁텅이에 깃털이 모조리 뽑힌 채 누워있는 구유작에게서 우아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군데군데 난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넘쳐 대지는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목진은 잔뜩 긴장해 피범벅이 된 구유작을 바라보다가 조금은 창백해진 얼굴로 다가가 영력을 불어넣었다.
이에 구유작은 그제야 파르르 떨며 눈을 뜨고 겨우 입을 열었다.
“성공한 것이냐?”
살아있는 것을 확인한 목진은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 그러나 하늘 저편에 있는 흑신 뇌운은 아직도 흑광을 번쩍이며 이들 주위를 맴돌았다.
파멸의 힘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천둥소리가 나더니 뇌운에서 또 한 갈래의 검은색 신뇌를 내렸는데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방출한 거라 그런지 전보다 훨씬 약했다.
그러나 구유작은 지금 위독한 상태라 신뇌를 맞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었다. 이를 잘 아는 구유작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기진맥진해 몸을 움질일 수 없었다.
여태껏 노력한 것이 전부 물거품이 되는 건가?
역시 또 실패하는 건가?
목진은 구유작의 이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를 악물고 그 위에 나타나 인법을 그렸다. 이에 웅장한 영력이 그의 뒤에 모이더니 거대한 백호를 형성하여 무한한 살육의 힘을 싣고 마지막 한 갈래의 검은색 신뇌에 맞섰다.
그러나 신뇌는 끄떡도 하지 않고 백호를 바로 찢어버리고 목진에게 돌격했다.
퍽!
신뇌는 목진에게서 구유작과 같은 파동을 느끼고 그를 구유작의 일부로 인식했다. 신뇌에 맞은 목진은 피를 토하며 구유작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떨어졌다.
이에 구유작은 검은색 신뇌를 휘감은 목진을 구하려고 날개를 뻗었지만 상처의 극심한 통증으로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한편, 마지막 힘까지 다 써버린 흑신 뇌운은 어느새 사라졌고 구유작의 몸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신비로운 빛이 구유작을 감싸 안더니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었다.
“드디어 성공한 건가?”
몸속에 일어나는 엄청난 변화에 구유작은 화색이 되었다. 몸과 혈맥 전체가 새로 태어나는 듯했다.
이는 진정한 탈바꿈이었다.
구유작은 신뇌를 휘감은 목진이 걱정되었다. 목진은 비록 준 화천경에 이르렀지만 신뇌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그때, 꿈쩍하지 않던 목진이 갑자기 몸을 파르르 떨더니 힘겹게 일어나 피를 토했다. 신뇌 때문에 중상을 입은 것이다.
“젠장,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목진은 사색이 되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입가의 피를 닦아내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뇌신체만 아니었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랐다.
“구유작!”
앞쪽에서 나는 눈부신 빛에 목진이 고개를 들어보니 신광에 둘러싸인 구유작의 방대한 몸이 점차 작아졌다.
한참이 지나 빛이 사라지더니 목진의 눈앞에 기다란 다리에 잘록한 허리, 보라색 눈동자에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야성미 넘치는 여인이 발가벗은 채 나타났다.
목진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중얼거렸다.
“역시 암컷이었어.”
아수라장이 된 곳에 아름다운 여인이 백옥같은 피부를 자랑하며 목진의 앞에 서 있었다.
다만 한 성격 하는 이 여인은 중얼거리는 목진의 말에 바로 눈을 부릅뜨고 돌진했다. 이에 목진은 맥없이 튕겨나 뒤쪽 암석에 몸이 부딪쳤다. 활기찬 여인이 다가와 그의 목을 조이며 입을 열었다.
“확 죽여버릴까?”
그녀의 목소리는 시냇물처럼 맑고 깨끗했으며 한기도 조금 서려 있었다.
“죽여.”
목진은 입을 삐쭉 내밀고 무안해하며 답했다.
사람이 됐지만 구유작에서는 여전히 여인의 부드러움이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여인이 목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나를 위해 마지막 신뇌를 막은 것을 봐서 이번은 용서해 줄 것이다.”
그 말에 목진은 잔뜩 움츠려 최대한 그녀와 몸이 닿지 않으려고 하였다. 화끈한 그녀의 몸매에 야성미 넘치는 외모는 남자의 욕구를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옷 좀 입을래? 아무리 영수라도 사람 형태를 했으면 주의해야지.”
“사람은 참 귀찮은 동물이야.”
구유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몸에 빛이 발하며 암청색 옷이 그녀의 예쁜 몸을 덮었다.
목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물었다.
“겁난은 무사히 이겨낸 거겠지?”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아직 네 이름도 모르네. 계속 구유작이라고 부를까?”
“구유라고 부르거라.”
흑신 뇌겁을 무사히 넘은 구유작은 활짝 웃으며 목진의 어깨를 다독였다.
“앞으로는 이 누나가 널 보호할 거란다.”
구유작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신 조금만 더 기다려라. 아직 마지막 절차가 남았구나.”
“왜?”
목진이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난 겁난을 무사히 넘기긴 했지만 육신은 아직 신수 체질이 아니라 앞으로 잠을 자며 육신을 진화할 거야. 그러다 육신까지 진화를 마치면 진정한 구유명작(冥雀)으로 거듭날 수 있다.”
구유작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구유명작이라…….”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구유작과 한 자 차이밖에 안 나지만 그것은 영수와 신수의 엄청난 차이와 같았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절대 죽지 말거라. 난 너와 혈맥이 연결돼 있으니 겁난을 건너자마자 죽고 싶지 않구나.”
구유는 목진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강력한 호위가 생긴 줄 알고 좋아했던 목진은 조금 아쉬웠다. 겁난을 건너자마자 바로 깊은 잠을 자야 한다니 이는 필살기 하나를 잃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잠든 사이, 강대한 적을 만나면 바로 피하거라. 내가 깨어나서 널 괴롭힌 녀석들을 전부 혼내줄 것이다.”
구유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그리 나약하지 않아.”
목진이 투덜대며 구유작을 바라봤다.
“그럼 난 바로 시작할 테니 너도 최대한 빨리 이곳을 떠나거라. 우리가 이곳에서 소란을 피웠으니 북창령원 노인네들이 분명 눈치를 채고 찾아올 거다.”
말을 마친 구유작의 몸에서 바로 흑염이 활활 타올랐고 눈에서는 신비로운 보라색 화염이 들끓었다.
흑염은 광막을 만들어 구유작을 감싸 안으며 그녀의 키만큼 커다랗고 단단한 알을 만들었다. 검은색 알 표면에 새겨진 상고의 난해한 날개 문양에서 은은하게 보라색 빛이 반짝였다.
이에 목진은 육신의 진화를 위해 깊은 잠에 빠진 구유를 바로 계자탁에 넣었다.
비록 한동안은 구유작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겠지만 다시 깨어났을 때는 지존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구유가 자못 기대되었다.
“얼른 이곳을 떠나야겠어.”
목진은 아수라장이 된 대지를 쓰윽 훑더니 하늘 높이 날아올라 순간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