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집결 장소
목진은 잔뜩 풀이 죽은 여인들을 보며 왠지 모를 죄책감에 휩싸였다.
“안연 선배, 우린 신생이라 영광계에 대해 잘 모르니 우리랑 함께 다닐래요? 우린 절대 영광을 독점할 생각이 없으니 영광을 얻으면 함께 나눠요.”
안연 등은 흠칫 놀라 목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도…… 될까?”
영광이 많을수록 영광 관정을 통해 얻는 것이 많다. 그런데 목진이 영광을 나누자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목진과 낙리의 실력으로 이런 호의를 베풀 필요는 전혀 없었다.
영광도 중요했지만 목진은 낙리와 둘이서 이를 독점한다면 유진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인을 내치기 어렵긴 하지.”
낙리의 가시 박힌 말에 목진은 머쓱하여 머리를 긁적였다.
“안연 선배, 앞장서요. 우리 최대한 빨리 갑시다.”
목진은 화색이 도는 안연 등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안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섰고 그 뒤로 목진 등이 따랐다.
“목진, 내가 영치전에서 정보를 살 수 있었듯이 다른 이들도 이 정보를 구매했을 거야.”
안연은 목진에게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럼 집결 장소를 노리는 사람이 또 있단 말인가요?”
목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역시 수렵전에서 영광을 얻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야.”
없으면 다행이지만 마주치면 골치 아파질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상대편의 실력에 따라 이들이 쫓겨날 수도 있었다.
“일단 가서 보죠.”
목진은 자신의 실력에 낙리까지 합세하면 무슨 상황이 닥치든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한편, 무덤덤한 목진의 태도에 안연은 시름이 놓였다. 눈앞의 훤칠한 남자는 더 이상 그날의 보잘것없는 신생이 아니었다.
그들은 집결 장소로 가는 길에 학생들을 적잖게 마주쳤지만 서로 경계하느라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 후로 반 시진쯤 지나자 안연의 속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곧 도착이야.”
안연의 말에 목진은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살폈는데 심상치 않은 영력 파동이 느껴졌다.
또 몇 각이 지나 목진 등은 산봉우리에 내려앉았다.
이들 앞쪽의 몇몇 산봉우리 중간의 움푹 파인 곳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며 놀라운 영력 파동이 일었다. 천 명 가까이 되는 영병이 모여있었다.
“영병이 이렇게 많다니.”
목진은 영병의 수에 이내 정색하였다.
“앞쪽 깊숙한 곳에 더 강력한 놈이 있어…….”
낙리가 앞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장 깊숙한 곳에 괴상하리만큼 방대한 무언가가 강력한 영력의 위압감을 내뿜었다. 이는 일반 영병보다 훨씬 강한 파동이었다.
목진은 더욱 집중했다.
‘영장(靈將)이다!’
거대한 산간에서 영력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영력은 영롱한 바다와도 같이 출렁이고 있었다. 아무런 의식도 깃들어있지 않지만 다 같이 모여있으니 꽤 놀라운 정도의 영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의 영병은 족히 수천 명이 넘는 것 같았다. 사람에 비하면 수천 명의 융천경 실력자들이 모여있는 것과 같았다. 그들이 힘을 모아 공격한다면 화천경의 고수도 순식간에 가루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건 영병에게 그 정도의 지혜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목진 일행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영병이 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안연은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목진 등에게 물었다.
“이젠 어떻게 하면 좋지?”
목진도 방대한 영병의 수에 미간을 찌푸렸다. 깊은 곳에는 분명 화천경의 실력을 갖춘 영장도 존재할 것이다. 이건 작은 군부대와 다름이 없었다.
“이들을 상대하기엔 우리의 인원이 너무 적어.”
낙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아무리 생각할 줄 모르는 영병이라지만 이 많은 영병이 한 번에 공격해 온다면 놀라운 힘을 뿜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기엔 인원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들 중에서 전투력이 강한 자는 목진과 자신뿐이었다. 두 사람이 수천 명의 영병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영장에게 대항하기엔 무리였다.
이곳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낙리는 주변을 둘러싼 산을 둘러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이곳을 탐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뿐만이 아니야.”
분명하지 않지만 낙리는 어렴풋이 주위에 숨어 있는 영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을 발견한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도 자신들처럼 수많은 영병을 보면서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낙리의 말에 동의하듯 목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낙리와 똑같이 주변에 있는 영력을 파동을 느꼈다.
목진은 눈을 반짝이며 주위의 산들을 훑어보더니 이내 웃으면서 웅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왜 다들 그렇게 숨어계십니까? 다들 알다시피 여기엔 수많은 영병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혼자 이겨낼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차라리 손을 잡는 것 어떻겠습니까?”
목진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산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도 영병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의식이 없는 그들은 그저 함께 모여있는 천지 영기에 불과했다. 그러니 목진도 그의 목소리에 영병이 놀랄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목진의 말이 끝나고 잠시 조용하더니 이내 파풍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수많은 그림자가 은밀한 곳에서 튀어나왔는데 그 수가 족히 열댓 명은 되었다. 그들은 같은 조직원들끼리 뭉쳐서 떠 있었다.
목진은 허공에 떠 있는 사람을 훑어보면서 내심 놀랐다. 소대마다 적어도 화천경의 실력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화천경 초기의 실력이지만 그래도 대단한 건 변함이 없었다.
‘역시 수렵전이야. 사람들의 실력이 순식간에 강해졌어.’
목진은 속으로 감탄했다. 보통 화천경 초기의 실력이라면 천방 20위 안에는 들 수 있다. 그리고 분명한 건 이번 수렵전에서 많은 사람이 화천경 초기에 이를 거란 것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천방 20위 안에 들려면 화천경 초기의 실력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전 목진이라고 합니다. 다들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목진은 웃으면서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며 물었다. 목진이라는 이름을 듣자 다들 놀라운 눈으로 목진을 바라봤다.
“하하, 자네가 바로 목진 후배구먼. 자자한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었다. 난 임풍(林楓)이라고 한다.”
10명 정도로 구성된 작은 소대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청년이 웃으면서 답례를 했다.
“유첨(劉瞻)이다.”
또 다른 소대의 우두머리 청년이 답했다.
“진붕(陳鵬).”
마른 청년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름을 말했다. 그의 얼굴엔 약간의 오만함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소대의 우두머리였으며 실력 또한 화천경 초기인 만큼 강했다. 그러니 그들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목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다들 알다시피 영병의 수가 워낙 많아 그 누구라도 혼자서는 상대하긴 힘들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손을 잡고 진행하되 자신의 실력만큼 영광을 얻어가는 건 어떨까요?”
세 사람은 목진의 말에 눈을 반짝였다. 임풍과 유첨은 이의가 없는지 아무 말도 없었지만 진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목진에게 말했다.
“여긴 우리가 먼저 발견했다. 네 말은 우리가 발견한 걸 나눠달라는 얘기가 아니냐? 우린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세 소대 중 진붕이 이끄는 소대에 가장 많은 사람이 있었다. 실력 또한 가장 강하다는 뜻이었다. 아마 기회를 봐서 천천히 영병을 삼킬 생각이었는데 다른 두 소대가 더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서로 염탐하고 있을 때 목진이 뜬금없이 나타난 것이다.
진붕은 목진에 대해 들은 바가 많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천경 초기의 실력은 북창령원에서도 꽤 훌륭한 편이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이끄는 자들 역시 실력이 만만치 않으니 굳이 그들과 이곳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진붕의 말에 안연 등은 화가 났다. 그러나 상대의 실력을 알고 있어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진붕 형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 겁니까?”
목진은 웃음을 잃지 않고 물었다. 그 누구도 목진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를 도와 이 영병을 모두 없앤다면 백 줄기의 영광을 나눠주도록 하겠다. 어떻겠나?”
진붕의 제안에 목진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웃었다.
“진붕 형님은 우리가 함께 나눌만한 실력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군요.”
목진의 말에 진붕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다만 몰래 체내의 영력을 끌어올렸다. 그는 오만하지만 또 신중했다. 목진이 그냥 보기엔 준 화천경의 실력밖에 안 되는 것 같지만 화천경 초기의 사람도 그를 어찌할 수 없다고 들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머릿수가 훨씬 많으니 싸운다고 해도 무조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목진은 담담하게 웃었고 옆에 서 있던 낙리가 한 걸음 다가갔다.
진붕은 낙리의 움직임에 예의주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그 뒤의 수십 명의 대원도 경계태세를 취했다. 그들의 풍부한 전투 경험과 협동심을 보여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제 검을 무사히 받아낼 수 있다면 그쪽이 말한 대로 하죠.”
낙리는 담담하게 말하며 천천히 칼자루에 손을 올렸고 유리알 같이 맑은 두 눈은 진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건방지네.”
낙리의 도발에 진붕은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웃음도 나왔다.
슝!
그때, 낙리가 검을 뽑아 들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는 하늘을 뒤덮었고 빛나는 검기가 어찌나 눈이 부신지 그 기세가 하늘을 가를 것만 같았다.
검기는 난폭하게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놀라운 검기를 본 진붕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러나 바로 기합 소리와 함께 체내의 영력을 끌어올려 자신의 앞쪽에 광벽을 세웠다.
푸직!
광벽이 만들어지자마자 검기는 이를 찔렀고 그 충격에 광벽은 급격히 흔들렸다. 이내 진붕의 놀라운 두 눈과 함께 광벽은 반으로 갈라졌다.
진붕의 얼굴은 어느새 검기에 스쳐 피를 흘리고 있었고 머리카락도 검기에 잘려나갔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대원들은 낙리의 공격을 단 하나도 받아내지 못하는 진붕을 보면서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검을 거두는 낙리를 바라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임풍과 유첨의 눈빛도 흔들렸다. 낙리를 바라보는 눈이 어느새 더 신중해졌다. 낙리가 이토록 강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또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목진은 차가운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가만히 서 있는 진붕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했음에도 반대한다면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목진의 말에 진붕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도 멍청한 사람이 아닌지라 아무리 목진 일행이 몇 안 된다고 해도 그 실력이 결코 무시할만한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좋아.”
진붕도 더는 시간을 끌기 싫어 목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실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리석게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 목진 후배는 대단해. 그러니 이현통도 자네를 어찌할 수가 없었지.”
임풍은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린 아무런 이의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임풍의 말에 유첨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의를 표했다.
“그럼 손을 잡고 잘해봅시다.”
그들의 말에 목진도 웃으면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