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뒤흔들다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목진과 낙리는 영왕 따위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런데 곧 두 사람이 있는 산봉우리에 닿을 영왕의 몸통이 갑자기 두 쪽으로 갈라지더니 픽 쓰러지며 양쪽 산맥을 무너뜨렸다. 이에 연기가 자욱하게 일었고 격렬하게 흔들리던 대지는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목진은 두 쪽이 된 영왕을 막연하게 바라봤다. 영왕은 빠르게 작아지며 결정화되더니 어느새 두 갈래의 눈부신 빛이 되어 땡볕처럼 이곳을 밝혔다.
그 속에서는 무서운 영력이 흘러나왔고 두 쪽이 된 영정은 영왕이 삼켰던 바로 그 영정이었다. 더 짙어진 색과 더불어 깃든 영력도 더없이 그윽했다.
이는 영왕이 남긴 영광으로 영정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때 저 멀리 숨어있던 조청삼 등이 정신을 차리고 멍하니 영정을 바라보다가 내서는 안 될 욕심을 내었다.
영왕급 영광을 얻으면 영광 관정을 통해 통천경에 이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조청삼과 모풍양은 침을 삼키며 서로 충혈된 두 눈을 마주치고는 영정을 향해 돌진했다. 목진과 낙리가 실력이 좋긴 해도 영왕과의 싸움에서 엄청난 영력을 소모했으니 분명 자신들을 당해내지 못할 거라 믿었다.
반면, 눈부신 영정을 넋 놓고 바라보던 서황은 제자리에 서서 한숨만 쉬었다. 목진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그는 소년의 손에서 물건을 빼앗기란 절대 쉽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또 목진과 낙리가 영력을 크게 소모하긴 했어도 녀석이 절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영왕에 맞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낙리를 안고 있던 목진은 영정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더니 씨익 웃었고 낙리도 바로 정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더는 숨어있지 않겠다는 건가요?”
목진은 담담하게 웃으며 모풍양과 조청삼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감히 목진을 직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영왕과의 대결을 본 이들은 녀석이 주는 위압감에 더는 전처럼 우쭐댈 수 없었다.
“영광이 우선이야, 따로따로 움직여!”
조청삼은 말을 내뱉자마자 왼쪽 영광으로 향했고 모풍양은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이를 지켜보던 목진은 녹슨 금속 철구를 소환해 손을 튕겼는데 만 갈래의 빛이 빛나며 거대한 영진이 순식간에 이들 앞에 나타나 영광이 있는 곳으로 뻗어 나갔다.
멀리서 호시탐탐 이쪽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목진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전력을 다하여 영왕과 싸울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조청삼과 모풍양은 황급히 멈춰서서 두려운 듯 눈 앞에 펼쳐진 영진을 바라봤다. 이는 목진이 영왕과 싸울 때 선보였던 영진이 주는 위압감 못지않았다. 그들이 기어코 영광을 빼앗으러 간다면 영진에 휩싸일 것이고 그들은 그의 영진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런 제기랄.”
모풍양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목진이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만 가자.”
더는 기회가 없을 거라고 여긴 조청삼은 바로 물러나려 하였다.
“온 사람을 그냥 보내는 법은 없죠.”
잠시 머뭇거리다가 떠나려는 모풍양을 보던 목진은 피식 웃더니 이들을 향해 거대한 영진을 뻗었다. 영진은 용의 울음소리를 내며 사라지더니 귀신처럼 모풍양 앞에 나타났다.
“꺼져!”
목진의 몸에서 갑자기 뇌광이 뿜어져 나오더니 피부가 은은한 은색으로 변했고, 금속처럼 단단해진 주먹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쿵!
난폭한 영력과 함께 백호가 나타나 목진의 권풍과 어우러져 사정없이 모풍양을 공격했다.
“야!”
뒤쪽에서 전해져오는 놀라운 영력에 모풍양은 순간 안색이 창백해졌고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판단되어 바로 영갑으로 몸을 감쌌다.
그런데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모풍양은 피를 토하였고 줄이 끊어진 연처럼 나풀거리면서 바닥에 떨어졌고, 그 주위가 움푹 파였다.
목진을 죽이려다 균열이 생긴 모풍양의 영갑은 목진의 회심의 일격으로 한계치에 달했다.
계속해서 피를 토한 모풍양은 잔뜩 겁에 질려 목진을 바라봤다. 녀석이 이렇게까지 독한 줄은 몰랐다.
“당신 따위를 손보는 데는 영진자까지는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목진은 씨익 웃더니 녹슨 금속 철구를 거두고 자그마한 산처럼 커다란 암석을 들어 올려 중상을 입은 모풍양에게 던졌다.
“안 돼!”
모풍양의 비명과 함께 대지가 세차게 흔들리더니 한 줄기의 빛이 내리쬐어 중상을 입은 모풍양을 영광계 밖으로 전송하였다.
그러나 목진은 어느새 멀리 피신한 조청삼은 쫓아가려 하지 않았다. 영력 소모가 상당해 조청삼까지 영광계에서 내쫓으려면 영진자를 소환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목진은 더 멀리서 이쪽을 지켜보는 사람을 쓰윽 훑었는데 다들 온몸을 파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고, 서황 역시 위압감이 상당한 소년을 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손을 저었다.
“이만 가자.”
그 뒤에 서 있던 서청청은 이를 악물며 소년을 바라봤다. 그녀가 가장 숭배하는 오라버니마저 감히 녀석을 건드리지 못하다니. 몇 개월 전에 비하면 엄청나게 향상된 녀석의 실력에 서청청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번 수렵전에서 명성을 떨칠 사람은 조청삼도, 모풍양도 아닌 목진일 거란 느낌이 확 들었다.
목진은 하나둘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왕을 물리쳤으니 순순히 물러난 것이지, 그것이 아니라면 저들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지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진이 몸을 돌려 손바닥을 뒤집자 그 위에 반 척 크기의 맑은 영정 두 개가 떠올랐다. 목진이 손가락을 튕기자 그중 하나가 낙리에게로 날아갔다.
“하나씩 가지면 되겠네.”
낙리는 웃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영왕의 영장만 있으면 이번 영광 관정에서 어쩌면 좋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단 여기를 떠나자. 한바탕 싸웠으니 조용한 곳을 찾아 회복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목진의 말에 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더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삽시간에 그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들이 떠나자 시끌벅적했던 산도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땅만이 조금 전에 있었던 치열한 전투를 보여주었다.
목진은 모르고 있다. 그들이 영왕을 격살한 사실이 이미 크나큰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북창령원의 북명광장은 며칠 동안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수많은 학생이 그곳에 모여서 광장 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거대한 광막이 있었고 광막 속에선 세 개의 거대한 산봉우리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산봉우리의 꼭대기에는 한 명씩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압력에 광장에서 구경하는 사람들마저 불편함을 느꼈다.
저곳이 바로 수렵전의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수렵전의 최종 진수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후의 날이 오면 또 얼마나 놀라운 전투를 보여줄지 벌써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까지 그들은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 예외가 있는 것일까, 늘 아무런 반응이 없던 광막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광막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학생들도 놀랐는지 바로 상황을 살피려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슨 일이지?”
“설마 벌써 마지막 관문으로 온 건가?”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수군거리기 바빴다. 대체 광막은 갑자기 왜 흔들리는 걸까?
광장 앞에 여러 개의 좌석이 놓여있었다. 그 중간엔 바로 북창령원의 태창(太蒼) 원장이 앉아 있었고 양쪽으로는 북창령원의 장로들이 차례대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광막을 예의주시했다.
수렵장 내에서 때때로 상황을 살피는 장로가 따로 있긴 하지만 마지막 관문이 아닌 이상 정말 중요한 정보가 있을 때만 광막을 통해 소식을 전하곤 했다.
모두가 의아하게 광막을 바라보고 있을 때 흔들리던 광막이 천천히 모이더니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끝내 흔들림이 멈춘 광막 속에서 수많은 산이 보였다. 산들은 흔들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수백 척의 방대한 빛과 함께 한 거인이 우뚝 솟아올랐다. 그 강력한 영력의 파동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건…… 영왕?”
거인의 등장에 광장에서는 놀라움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급기야 이를 구경하던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수렵전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며칠 동안 수렵전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게다가 영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영왕까지 나서게 하다니…….”
그들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던 장로들도 놀라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곧 미간을 찌푸렸다.
“영왕이 왜 저리 약해 보이나?”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왕이라네.”
태창 원장은 그윽한 눈으로 광막 속의 거인을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원장의 말에 장로들은 문뜩 깨달은 듯 다시 이내 흥미진진한 얼굴로 다시 광막에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금방 태어난 영왕일지라도 수렵전에 참여한 학생들이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지지리 운도 없는 이가 영왕과 상대하게 될지 궁금했다.
“목진이라는 신생이야!”
“그 옆에 서 있는 자가 바로 천방 15위의 낙리라는 여인인가? 설마 둘이서 영왕에게 도전한 거야?”
목진과 낙리의 모습에 광장은 다시금 들끓었다. 다들 의아해 하면서도 놀랍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왕을 불러낸 사람이 그들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장 구석에서 엽경령과 주령 등 낙신회 회원들도 목진과 낙리의 모습에 경악했다. 목진이 수렵전에서 조용히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낙리를 끌고 영왕을 상대하러 갈 줄은 몰랐다.
그것도 무려 통천경의 실력과 맞먹는 영왕을 말이다.
그때 광막이 흔들리더니 예고 없이 전투가 시작되었다. 광막은 끊임없이 반짝였고 광막 속의 산은 그들의 싸움 탓에 계속 뒤흔들렸다.
사람들은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더니 이내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바뀌었다.
강력한 영왕이 점점 밀려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낙리가 검을 휘두르자 파란빛과 함께 방대하던 영왕이 두 쪽으로 갈라지더니 무너졌다.
광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 누구도 영왕이 목진과 낙리의 손에 죽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장로들도 놀랍고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태창 원장은 진중하게 광막 속의 낙리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설마…… 낙신족인가? 저 검은 낙신검(洛神劍)인가? 낙신족이 지극히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이 아니던가. ”
“원장님, 저 아이의 할아버지가 아마 낙천신(洛天神)일 겁니다.”
태창 원장의 말에 그 옆에 있던 백발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 노인이 바로 목진과 낙리가 영치전에서 만났던 그 노인이었다.
“낙천신의 손녀란 말인가?”
이에 태창 원장은 더 놀란 듯하였고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그 노인네가 무슨 생각으로 자기 손녀를 북창령원으로 보냈지?”
“어린 나이에도 벌써 낙신검을 마음껏 다루다니 역시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게 분명하네.”
태창 원장은 곧바로 시선을 옆에 있는 목진에게 돌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친구가 바로 목진이라는 자인가? 영로에서 있었던 일도 저 아이가 일으킨 것이 아니었던가?”
이에 옆에 있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 그 일이 큰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성령원(聖靈院)에서 죽이겠다는 걸 원장님께서 반대하셨지요. 그래서 저자를 쫓아내는 거로 마무리 지었습니다만.”
태창 원장은 담담하게 웃었다.
“저 친구도 귀한 천재일세. 조금만 다듬으면 심창생과 이현통 못지않은 훌륭한 이가 될 걸세. 그때 성령원에서 몰래 수를 써 희현이라는 소년에게 도움을 준 사실을 정녕 다른 이가 모를 줄 알았단 말인가? 결국 그렇게 된 것도 다 성령원에서 자초한 일이라네.”
백발노인은 이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희현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봤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오원대회에서 우리 북창령원을 누르고 오대원의 꼭대기에 앉으려 했겠지요.”
태창 원장은 눈을 지그시 감더니 다시 눈을 떠 광막 속의 목진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희현이 제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목진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