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고천염과의 대결
목진은 고천염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번엔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고개를 돌렸다. 흑발의 훤칠한 사내가 미소를 지은 채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임쟁과 고천염에 비하면 가장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그를 얕잡아 보는 것은 더없이 멍청한 짓이다.
“저분이 바로 주청산(周青山) 선배죠? 당신의 상대이기도 하고요.”
목진의 질문에 이현통도 흑발의 사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북창령원에서 주청산 선배의 별명은 불패산이었대.”
“불패산이요?”
목진이 흠칫 놀라 물었다.
“누구와 싸우든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단 말이지.”
“그런데 천방 1위는 왜 임쟁 선배인가요?”
목진이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이겼다는 말은 한 적 없어.”
이현통이 웃으며 먼 곳에 있는 흑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늘 무승부로 대결을 마쳤어. 그중 일부러 그런 결과를 만든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수두룩했지. 그가 수련한 신결은 불패신결로 듣기에는 엄청나 보이지만 아주 온화한 신결로 맹공이 없이 상대방의 영력이 바닥이 날 때까지 버티는 신결이라 대부분 무승부로 끝내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불패산이란 별명을 달아줬어.”
이토록 신기한 신결은 처음이라 목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완벽한 무승부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청산이 악랄하지 않다고 해도 그가 살기를 품는 순간, 아무리 온화한 신결이라도 결국 무서운 일면을 드러내게 되어있다.
역시 삼대장 중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목진과 이현통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심창생은 고천염에게 고개를 돌려 웃으며 말했다.
“선배들이 봐줘서 얻은 승리는 우리도 싫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최선을 다해주세요.”
“역시 현재 천방 1위라 그런지 패기가 대단하구나.”
고천염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마저도 심창생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눈치였으니, 이번 기 학생들의 실력에 이내 감탄하였다.
이에 임쟁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기다렸으니 슬슬 힘을 겨뤄볼까? 너희가 우리 셋을 뚫으면 수렵전에 참가한 학생들 모두 영광 관정을 누릴 수 있어, 대신…….”
임쟁이 말을 아꼈지만 다들 그 뜻을 잘 알아 이내 주먹을 쥐고 잔뜩 긴장한 채 곧 펼쳐질 세기의 대결을 지켜봤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심창생이 호탕하게 웃더니 주먹을 쥐어 금빛 신창을 소환하였다. 창끝은 연꽃이 한데 모인 것처럼 생겼고 금광이 반짝이며 웅장한 영력을 발산하였다.
그가 바로 임쟁이 있는 산봉우리에 내려앉아 금창을 힘껏 휘두르자 기랑과 함께 바닥이 먼지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깔끔해졌다.
심창생이 삼대장의 우두머리인 임쟁을 상대하는 것은 다들 예상하는 바였다. 전 천방 1위와 현 천방 1위가 맞서야 마땅했다.
이현통은 목진의 어깨를 다독이더니 주청산한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주청산 선배, 제가 상대해도 되겠습니다? 불패신결이 정말 궁금했거든요.”
이현통의 말에 주청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심창생과 이현통이 움직이자 다들 허공에 뜬 목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임쟁, 주청산, 고천염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나를 상대할 사람이 설마 저 소년은 아니겠지?”
고천염이 인상을 찌푸리며 먼 곳에 있는 심창생과 이현통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번 기 학생의 실력이 이렇게까지 바닥인 건 아니지? 화천경 초기밖에 안 되는 녀석이 너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단 말이야?”
고천염이 목진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화천경 초기의 소년이 통천경의 대결에 낀 것 자체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고천염 선배, 목진은 결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닙니다.”
고천염의 의심 가득한 말에 심창생과 이현통은 약속이라도 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어디 두고 보면 알겠지.”
고천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심창생 등이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화천경 초기밖에 안 되는 녀석이 엄청난 수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들이 저 녀석과 함께 이 자리에 서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목진은 고천염의 태도에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이내 정색하며 거대한 산봉우리에 내려앉았다.
영광산과 북명광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목진에게 쏠렸으니 나머지 두 사람에 비하면 목진이 가장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목진은 사람들의 눈길은 무시한 채 고천염을 노려보며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북창령원 신생 목진이 인사 올립니다. 잘 부탁드려요, 고 선배!”
목진의 목소리가 이곳 웅장한 산봉우리에 울려 퍼지자 임쟁, 주청산, 고천염은 흠칫하더니 어리둥절하여 목진을 바라봤다. 눈 앞에 서 있는 소년이 신생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삼대장의 학생 시절에 신생은 수렵전에 참가할 자격조차 없었고, 최강 3인으로 뽑힐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목진이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참으로 흥미롭군.”
임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심창생에게 말했다.
“너희 말처럼 진짜 실력자여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번 기 학생들이 형편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하하하.”
금색 장창을 쥔 심창생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임쟁 선배. 이번에는 분명 더 훌륭할 겁니다.”
“과연 그럴까?”
임쟁은 이리 말하더니 앞으로 나아가 웅장한 영력을 끌어올렸다. 주위에 있던 구름이 그 위압감에 못 이겨 스스로 물러났다.
임쟁은 자신의 통천경 중기인 실력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이에 영광산 주위에 있던 학생들은 강력한 영력의 위압감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를 나눌 사람은 역시 심창생 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천경 중기군요, 역시 한때 천방 1위를 차지했던 사람답네요.”
심창생은 흥분이 된다는 듯 금색 장창을 들고 힘껏 발을 굴렀다.
쿵!
대지가 흔들리며 비슷한 세기의 영력이 심창생을 중심으로 돌풍처럼 휘몰아쳤고, 금색 영력이 하늘을 밝히며 임쟁 체내에서 내뿜는 영력 위압감을 모조리 막아버렸다.
심창생도 임쟁과 같은 통천경 중기였고 실력도 막상막하였다!
“역시 대단해!”
학생들은 심창생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임쟁보다 젊은 나이에 그와 동일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임쟁만큼 나이가 들면 현재의 임쟁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 분명했다.
천방의 패주는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제법이군.”
임쟁도 심창생의 실력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하게 녀석을 바라봤다. 북창령원에 대한 애정이 엄청난 임쟁은 후배들이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하여 그는 심창생을 신중하게 대하였다.
임쟁과 심창생이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고 있을 때, 이현통과 주청산도 각자 영력의 최대치를 끌어올렸다. 심창생보다는 못하지만 두 사람도 통천경 초기의 실력자로 웅장한 영력이 서로 맞서자 우렛소리처럼 엄청난 소리가 나며 하늘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서로 엇비슷한 실력에 풍부한 경험이 있었고 각자 필살기까지 숨겨 승패를 가르기가 쉽지 않았다.
다들 자연스럽게 세 번째 산봉우리에 있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 사람 중 승패가 가장 쉽게 갈릴 곳은 목진이 있는 곳일 것이다.
“네가 승패의 관건이 되었구나.”
고천염도 멀리 떨어진 두 전장을 바라보더니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 두 곳은 서로 실력이 비슷해 무승부로 대결을 마칠 가능성이 컸다. 승패는 결국 자신과 목진에게서 날 것이란 걸 잘 알았다.
목진이 이번 대결에서 승리하면 수렵전에 참가한 학생들 모두 영광 관정의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전부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런 생각에 목진은 잔뜩 정색한 채 침묵을 지켰다.
“실력은 평범해 보이는데 용기가 가상하구나. 이 자리는 아무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거든.”
고천염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도 한때는 학생이었고 수렵전에 참가했었으며 그해의 최강 학생 대표였던지라 지금 목진이 얼마나 큰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화천경인 목진이 이 자리에 선 것이 더 대견했다.
“이 자리가 비록 가시방석이긴 하지만 누군가는 맡아야 하지 않나요?”
목진이 하는 말에 고천염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로 두 보 물러나며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네 용기가 가상하니 선공격은 너한테 양보할게.”
자신의 실력이 목진보다 훨씬 뛰어나단 생각에 고천염은 후배에게 선수를 치고 싶지 않았다.
“고마워요, 고 선배.”
열세에 처한 목진은 굳이 자존심을 세워 이토록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목진이 이를 거절했다면 고천염은 분명 실망했을 것이다.
자존심만 내세우는 사람은 다른 학생들의 노력마저 무시하는 꼴이라 굳이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목진의 깔끔한 대답에 고천염은 만족하듯 가볍게 고개를 들었다.
이에 목진은 깊게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나 허공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서히 눈을 감았다.
목진의 반응에 고천염은 어리둥절했는데 잇따라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흠칫 놀랐다.
“영진사였군.”
목진 주위에 영인이 아주 빠른 속도로 형성되고 있었다.
고천염은 그제야 목진과의 대결에 구미가 당겼다.
한편, 목진은 어느새 마음을 가라앉히고 외부의 간섭은 전부 배제한 채 열심히 심안을 찾았다.
고천염과 같은 상대와 맞서려면 최선을 다해야 했고 실력 차이가 크게 나 최대한 빨리 대결을 마치는 게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목진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5급 영진은 목진의 최강수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4급 영진사인 목진이 5급 영진을 치려면 심안 상태에 의존해야 하는데 아직 숙련되지 않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목진은 마음을 철저히 가라앉히고 주위에 영인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영인만 만들고 다른 동작은 하지 않는 목진이 통천경 초기인 고천염을 상대로 무엇을 하려는지 무척 궁금했다.
북명광장에 있는 장로들도 허공에 뜬 거대한 광막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뭐지?”
태장 원장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하는 말에 기타 장로들도 목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 파동은…….”
그중 한 백발노인이 눈을 번쩍 뜨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흥미롭군. 목진이 영진 수련에 이렇게 재능이 뛰어난지 몰랐는걸. 무려 초보적인 심안 상태를 장악했군. 대단해!”
백발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진 주위의 영력 파동이 갑자기 폭등하였고 그가 만들었던 영인들이 전부 사라졌다가 다시 놀라운 속도로 응결되었다.
그리고 그 수가 배로 증가하여 얼마 안 되는 사이에 200개를 넘어섰다!
“5급 영진?”
5급 영진만이 이토록 많은 양의 영인이 필요했다.
이에 고천염이 흠칫 놀라 목진을 바라봤다. 자신을 상대로 5급 영진을 펼치다니. 역시 심창생, 이현통과 함께 이곳에 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슉!
목진 주위에 수백 갈래의 영인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더니 빠르게 공기 속에 녹아들어 천지의 영력이 영력 폭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 아주 복잡한 영력 광선이 얽히고설켜 하늘에 거대한 영력 광진을 형성했는데 그 속에서 강력한 영력 파동이 느껴졌다. 두 송이의 흑련처럼 생긴 광진이 천천히 회전하며 놀라운 위력을 선보였다.
그때 목진이 눈을 번쩍 뜨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결국 5급 영진을 치는 데 성공했다.
“무려 5급 영진을 치다니, 제법이군.”
고천염이 천천히 입을 열더니 고개를 들어 거대한 영진을 바라봤다.
“저것이 네 필살기겠지?”
목진은 담담하게 웃으며 주먹을 쥐어 녹슨 금속 철구를 소환하고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금속 철구에서 영력의 빛이 솟구치며 또 다른 영진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영력 파동이 목진이 전에 친 영진보다 전혀 약하지 않았다.
목진이 5급 영진을 무려 두 개나 만들어낸 것이다!
무덤덤하던 고천염은 하늘에 떠 있는 방대한 두 개의 영진을 보더니 드디어 안색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