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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236화 (235/1,000)

236화. 영계

어느덧 북창령원에 차가운 달빛이 드리웠지만 열기는 전혀 가시지 않았다. 다들 목진의 최후의 일격에 감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북창령원이 한 번 패한다고 해서 완전히 명성을 잃는 것은 아니지만 소문이란 무서운 법이었다. 이에 다들 목진의 승리에 더없는 기쁨을 느꼈다.

목진이 복귀해 상대 학원의 최강자를 제패한 일로 천방 3위의 자리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는 목진이 곧 이현통을 따라잡을 것 같다고 말했다.

목진의 성장 속도로 봤을 때, 순위권에 다시 변화가 생길 날도 멀지 않았다. 심지어 한 해도 걸리지 않아 심창생을 뒤로한 채 천방 패주의 자리에 등극할 가능성도 컸다.

그때야말로 용쟁호투로 볼거리가 많아질 것이다.

* * *

집으로 돌아온 낙리는 수중의 낙신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내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뒤편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목진이 소녀의 허리를 꼭 껴안으며 물었다.

“내가 낙신족을 떠난 소식이 이미 알려졌나 봐.”

낙리는 목진의 품에 안겨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 일을 낙천신이 알게 되면 약속했던 시간이 앞당겨질 수도 있었다.

낙신족 차기 낙황이 될 낙리는 이 짐을 짊어질 유일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낙신족 백성들은 나머지 3대 신족한테 도살당할 것이고 낙신족은 이대로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혈시가 깨어나면 분명 낙리가 북창령원에 있다는 걸 혈신족에 알릴 것이다. 그리되면 낙천신이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 일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

이에 목진은 소녀를 꽉 껴안으며 씩씩거렸다. 비청송이 있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혈시를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다시 낙신족에 돌아가 짊어져야 할 짐의 무게를 잘 아는 낙리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듯 소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억만 백성의 생사가 어린 낙리의 손에 달렸으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낙리가 낙황이 되면 지금처럼 기댈 수 있는 따뜻한 품은 없을 것이다. 혼자 외로이 모든 일에 맞서야 하고, 그때가 되면 그녀가 입은 상처에 진심으로 아파해줄 사람도 더는 곁에 없을 것이다.

목진은 품속에 안긴 소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너무 괴로웠다. 이별은 언젠가 찾아올 것이고 다시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 것이다. 낙리는 더 이상 몰래 뛰쳐나와 자신을 찾아올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기 전까지 목진도 그녀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낙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지언정 짐이 되는 건 절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나와 함께 있자.”

목진은 낙리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절세의 강자가 되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리라.

* * *

이튿날, 목진은 낙리와 함께 신생구역에서 반나절 정도 있다가 귀찮다는 소녀의 말에 시무룩하여 수련하러 떠났다.

신생구역에서 나온 목진은 주위를 살피고는 북창령원 남쪽, 영계 장로의 거처로 향했다.

영계 장로에 관한 소식은 대부분 엽경령에게 들었는데 영계 장로가 바로 순아의 사부님이 되었다던 그분이었다.

그녀는 북창령원에서 조용히 지내며 얼굴을 거의 비추지 않아 마주칠 확률이 아주 낮았고, 영진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사람도 매우 적었다. 보통 북창령원에서 장로의 가르침을 받으려면 대량의 영치가 필요한데 영계 장로는 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거절했다.

목진도 혹여나 장로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원장의 옥패를 수중에 넣었다고는 하나 과연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2각이 지나 목진은 안개가 그윽한 산봉우리에 내려앉았는데 그곳에 정원 하나가 있었다.

목진은 대문을 꼭 닫은 채 아무도 없는 정원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고는 쓸쓸하게 웃으며 어제 원장한테서 받은 옥패를 꺼냈다.

“학생 목진이 원장의 명으로 영계 장로를 뵈러 왔습니다.”

목진의 목소리가 영력을 타고 그윽한 정원에 들어갔는데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결국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반 시진이 지나 정원의 깊숙한 곳에서 한 줄기 빛이 날아오더니 목진 수중의 옥패를 거뒀고 꼭 닫혔던 대문도 서서히 열렸다.

그제야 목진은 시름이 놓인 듯 숨을 고르고 천천히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길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는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목진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을 시험하는 거라 여긴 목진은 영력을 주위로 보냈지만 바로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그를 이 구역에 가둬놓은 것 같았다.

“영진인가?”

목진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는데 영인이 공기에 스며들어 생긴 파동도 진도의 흔적도 없었다.

이에 목진이 뒤로 물러나자 주위의 환경이 바뀌더니 앞쪽에 다시 오솔길이 나타났다. 그리고 뒤쪽에 활짝 열린 문이 보였다. 마치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거면 바로 물러나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떠나기 아쉬웠던 목진은 분명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길이 있을 거라 여기고 주위를 한참 동안 살폈다. 그러다 오솔길 옆에 있는 맑은 호수에 시선을 멈추고는 바로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발이 수면에 닿았는데도 아무런 파동이 일지 않았다. 역시 목진의 판단은 정확했다.

호수는 조금씩 목진의 몸을 삼켰는데 주위의 공간이 다시 바뀌더니 앞쪽에 단아한 대나무집이 나타났고, 그 위에는 영계의 집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드디어 무한 굴레에서 벗어났단 생각에 목진은 이내 화색이 되어 주위를 살폈는데, 대나무집 앞에 백의를 입은 아름다운 소녀가 조용히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뽀얀 피부에 그윽한 눈을 가진 소녀한테서 한기가 풍겼지만 목진은 용기 내어 말을 건넸다.

“저기요, 학생…….”

목진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백의 소녀는 그를 힐끗 보더니 대나무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닫았다.

목진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목진 오라버니?”

그때 앳된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와 목진이 돌아서자 백의를 입은 순아가 눈이 휘둥그레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왜 여기 있어요?”

순아가 생긋 웃으며 묻자 목진은 시무룩하게 답했다.

“난 영진을 배우려고 영계 장로를 찾아왔는데 아직 만나 뵙지 못했어.”

“영계 언니는 계속 여기 있었어요.”

순아가 대나무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있었다니, 그리고 영계 언니라니?”

목진은 눈이 휘둥그레져 꼭 닫힌 대문을 바라봤다. 방금 본 아름다운 백의 소녀가 영계 장로란 말인가?

목진은 조용히 차를 마시는 백의 소녀를 어색하게 바라봤다. 하얀 치마를 입은 소녀는 예쁘장한 얼굴에 뾰족한 턱을 지닌 것이 소훤만큼 예뻤지만 쉽게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차가워 보였다.

괴팍한 영계 장로가 이렇게 젊고 예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편, 목진 옆에 앉은 순아는 목진의 어색한 표정에 피식 웃었는데 정작 백의 소녀는 목진을 보지 못한 척 계속해서 차만 마셨다.

“학생 목진, 영계 장로를 뵙습니다. 일전에 한 망언은 부디 잊어주세요.”

목진이 먼저 정적을 깨고 말을 건넸다.

“왜 왔어?”

백의 소녀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원장님께서 영계…… 장로께 영진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목진은 앳된 소녀를 상대로 장로란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난 사람을 가르치지 않아.”

백의 소녀가 차를 조금 삼키고 천천히 하는 말에 목진은 자연스레 순아를 바라봤다. 사람을 가르치지 않으면 순아도 이곳에 없어야 했다.

“남자를 가르치지 않아.”

백의 소녀는 목진의 뜻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대충 둘러댔다. 그러나 목진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원장님께서 가보라고 했어요.”

백의 소녀는 고개를 들어 목진을 힐끗 봤다.

“난 북창령원 사람이 아니야. 이번엔 태창 원장한테 진 빚이 있어서 영진을 구축하는 것을 돕는다고 한 거야. 난 언제든지 이곳을 떠날 수 있어.”

태창 원장이란 핑계도 먹히지 않자 목진은 더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지자 옆에 있던 순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영계 언니, 영진에 관한 재능은 목진 오라버니가 저보다도 더 뛰어나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 널리고 널렸어. 누구나 재능이 있다고 나를 찾아오면 나는 다 가르쳐줘야 해?”

“제발 도와주세요, 오라버니가 저한테 진짜 잘해줘요.”

자신의 애교에도 아무런 반응 없는 영계에 순아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오라버니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앞으로 부탁한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럼 영진의 방에 가두는 수밖에…….”

영계가 담담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순아는 순간 안색이 어두워져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영계는 목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4급 영진사야?”

“네.”

목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뭘 물어보고 싶어서 왔어?”

“심안 상태를 파악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요.”

이를 제대로 장악해야만 4급 영진사의 실력으로 5급 영진을 칠 수 있었다.

목진은 지금도 가끔 심안 상태에 이르긴 했지만 혼자 터득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심안이라…….”

영계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아직 4급 영진사인 목진이 심안 상태에 접했다니, 역시 순아의 말처럼 녀석의 재능이 뛰어나단 생각이 들었다.

“심안 상태는 영진사들이 수련할 때 나타나는 심오한 형태로 허상 심안과 실상 심안으로 나누어지지. 그런데 넌 아직 허상 심안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을 거야.”

목진은 심안 상태를 두 가지로 나눈다는 것조차 몰랐다.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똑같은 영진을 놓고 말할 때, 허상 심안을 장악한 영진사는 일반 영진사보다 영력 소모도 적고 영진의 위력은 뛰어나지. 게다가 실패 확률도 적어. 실력 좋은 영진사들이 자신의 급을 뛰어넘어 영진을 치는 것도 대부분 이런 상태를 장악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실상 심안은…….”

영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복잡한 영진이라도 실상 심안을 장악한 영진사한테는 그 취약점이 바로 보이지. 이런 사람을 상대로 싸운다면 영진으로 이기기란 절대 쉽지 않아. 그러다 실상 심안에 대한 조예가 어느 정도 깊어지면 더는 허무한 감각이 아니라 심안이 실체로 변할 거야. 그야말로 진정한 심안이지. 진정한 심안 아래 살아남은 영진이란 없으니까, 이런 사람을 상대로는 영진을 치지 않는 게 좋아. 왜냐면 단숨에 이를 알아채고 네가 친 영진과 똑같은 영진을 칠 수도 있으니까.”

목진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바로 타인의 영진을 복제할 수 있다니, 너무 놀라웠다. 목진은 심안 상태가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일단은 다음 단계의 영진을 치는 법이라도 배우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심안 상태를 제대로 장악할 수 있나요?”

목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별거 없어. 부지런히 연습하면 돼.”

영계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자 목진은 식은땀이 흘렀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말 배우고 싶어?”

목진의 질문에 영계는 차가운 눈빛을 조금 거두고 담담하게 웃었다.

“네.”

목진은 조금 불안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옆에 있던 순아가 가여운 듯 목진을 바라봤다. 곧 닥치게 될 그의 운명이 훤히 보인다는 듯.

“날 따라와.”

세 사람은 죽림 깊숙이 위치한 널찍한 공간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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