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영진의 방
“순아야, 혹시 그분 나이를 알아?”
목진이 주위를 살피고는 조용히 물었다. 북창령원에서 이렇게 젊은 장로는 처음이었다. 얼굴로만 보면 자신과 비슷할 것 같은데 엄청난 실력자라면 외모도 거뜬히 바꿀 수 있기에 영계도 그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촉천 장로가 소년의 모양새를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연륜이 묻어나는 것은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영계한테서는 그런 기운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언니가 알려주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으니까 나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예요.”
순아도 자연스럽게 소리를 낮춰 답했다.
이에 목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나이가 많았다면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란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젊은 나이에 영진에 대한 조예가 엄청나다는 말인데, 그녀의 실력이라면 심창생과 이현통도 손쉽게 때려잡을 수 있을 것이다.
“영계 언니마저도 나이를 제대로 모르는 눈치였어요. 기억을 잃은 모양이에요…….”
순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말에 목진은 흠칫 놀랐다.
영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젊은 나이에 엄청난 실력을 보유하고, 기억은 또 왜 잃은 걸까? 목진은 무척 궁금했다.
그때, 멀리서 낯익은 여인이 나타났다. 이에 바로 말을 거둔 순아는 혀를 날름거리며 목진의 몸에 남은 피를 닦아줬다.
영계는 천천히 다가와 목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오늘은 힘이 남아도나 보네.”
한기가 서린 여인의 말에 목진은 머쓱해 웃기만 했다.
“훈련을 마쳤으면 바로 돌아갈 것이지, 왜 아직도 거기 서 있어?”
영계는 바로 목진을 내쫓았다.
“내일부터는 영진의 수를 서른 개로 늘리고, 닷새 후에는 영진의 방에 들일 거야. 그런데도 심안을 열지 못하면 앞으로는 나한테 오지 마. 난 멍청한 놈은 싫어.”
영진의 방이 궁금한 목진은 담담하게 웃었다. 순아 말로는 아주 무서운 곳이라는데 심안을 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 조금 기대가 되었다.
목진은 순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바로 떠났다.
“앞으로 나에 대해 함부로 발설하면 혼날 줄 알아.”
목진이 떠난 것을 확인한 영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순아를 노려봤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순아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들었을 줄은 몰랐다.
“그럼 얼른 가서 죽림 청소나 해.”
“네…….”
순아는 자신보다 훨씬 큰 빗자루를 들고 아수라장이 된 죽림을 청소하러 갔다.
영계는 미소를 지으며 순아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한숨을 쉬고는 가장 안쪽에 잠겨있는 또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방에는 방석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앞의 벽에는 그림 한 폭이 걸려있었다. 그림은 흑탑 위에 한 여인이 앉아있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여인은 아주 흐릿하게 보였지만 영계는 방석에 앉아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며 하나라도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결국 괴로운 듯 숨을 고르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여인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안쓰럽고 처량해 보였다.
* * *
황량한 고봉에 검은색 도포를 입고 검은색 장검을 등에 멘 청년이 뒷짐을 쥐고 서 있었다. 청년의 미간에 새겨진 검은색 용문에서 한기가 스며 나왔다.
그는 다름 아닌 마룡자였는데, 고개를 살짝 젖히고 북쪽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다니. 의지가 대단해. 그런데 이번에는 돌아가지 못할 거야. 내가 너희를 위해 엄청난 걸 준비했거든. 그런데 북창령원 천방 1, 2위를 다 죽이면 북창령원 현상방에서 내 순위가 올라가려나? 너무 기대되는걸.”
사악한 웃음소리가 주위에 퍼졌고, 소리가 사라질 때쯤에는 녀석도 사라졌다.
* * *
영계의 말 한마디에 목진은 닷새 동안 서른 개의 4급 영진을 감당하느라 정말 괴로웠다.
다만 여태껏 해온 훈련 덕분에 항체가 생긴 그는 사흘간의 실패 끝에 나흘째부터는 겨우 버티며 영진을 뚫고 나왔다. 하지만 나오는 순간 혼절해 순아가 그를 이끌고 신생구역으로 겨우 돌아갔다.
목진은 이튿날 온종일 쉬어야만 체력이 그나마 회복되었는데 34개의 영진을 상대했던 것이 생각나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이는 훈련을 목표로 한다고 해도 통천경 실력자들이 겁먹고 도망갈 정도였다.
이를 통과한다고 해도 실전에서는 34개의 영진을 뚫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실전에서는 절대 영진을 전부 나열해 뚫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훈련으로 어느 정도 효과는 봤으니, 실전에서 4급 영진 두 개쯤 상대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고, 영진에 대한 인지도 역시 보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이렇게 목진은 여섯 번째 날에 다시 영계를 찾아갔다.
정원에 들어서자 대나무집 앞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바닥을 바라보는 영계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얼굴에 망연함이 묻어나서인지 오늘따라 인상이 그렇게까지 차가워 보이지 않았다.
목진은 여태껏 한기 어린 영계의 표정 때문에 가까이 가지 못했는데 오늘은 자못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때, 목진이 온 것을 눈치챈 영계는 다시 목진이 알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목진 오라버니, 왔군요. 상처는 다 나았어요?”
순아가 얼굴을 빼꼼 내밀며 물었다. 목진을 본 소녀는 이내 화색이 되었다.
이에 목진도 순아를 보며 방긋 웃고는 영계에게 인사를 올렸다.
“영계 장로.”
영계가 목진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영진의 방은 아주 위험해. 네가 평소 해왔던 훈련과 차원이 달라. 여태껏 한 훈련으로 넌 기껏해야 중상을 입었겠지만, 영진의 방은 네 목숨까지 앗아갈 수도 있어. 그리고 난 절대 널 구하러 들어가지 않을 거야. 네 선택에 내가 책임질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영진의 방에 들어가면 심안을 열 수 있나요?”
“넌 가능하다고 생각해?”
영계의 매정한 말에 목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미 심안 상태에 근접했지만 지금껏 열지 못한 것은 마지막 단계에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아마 생사가 오가는 긴박한 순간이 되어야 도달할 수 있을 거야. 평소에 한 훈련은 비록 위험하긴 했으나 생사를 오갈 만큼은 아니었지.”
영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영진의 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돼. 대신 난 너한테 많아야 보름만 더 줄 거야. 그때가 되어서도 심안을 열지 못하면 내 가르침도 끝이야.”
영계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목진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녀는 순아와 태창 원장만 아니었으면 절대 녀석을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보름이나 더 내어주는 것은 그녀로서는 최선이었다.
목진도 이를 잘 알고 있기에 차분하게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영진의 방에 들어갈 거예요.”
목진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심안을 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영계의 말대로 생사가 오는 순간이 돼야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건 정말 위험한 일이지만 목진은 자신이 해낼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영계는 녀석의 선택에 흠칫 놀랐지만 바로 안정을 되찾고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 따라와.”
이에 목진은 바로 뒤를 따랐고 그 뒤로 순아도 따라붙었다. 영진의 방에 대해 잘 아는 순아는 목진이 걱정되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영진의 방이었다.
세 사람은 고요한 정원을 지나서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했는데 텅 빈 곳에 바위로 만든 허름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영계가 이끼가 가득 끼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집 앞에 서서 두 손으로 결인하자 영력의 빛 한 갈래가 솟아올라 집을 감쌌다.
위잉!
그때, 자그마했던 집이 갑자기 파르르 떨며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더니 어느덧 거대한 석전이 되었고, 주위에 그려진 오묘한 문양은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이건…….”
목진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혹시 영기인가요?”
목진은 석전에서 영기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파동을 느꼈다.
“이건 보통 영기가 아니라 준신기였대요. 비록 손상된 후, 품계가 하락해 절품 영기가 되었지만 그 속에 깃든 막강한 영진은 지존경 강자라도 절대 쉽게 뚫고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순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준신기?”
목진은 화들짝 놀라 영계를 바라봤다.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지존경 강자마저 탐낼 준신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북창령원 장로 중에서 맥유나 촉천 같은 천급 장로라도 준신기는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괴물이 준신기를 절품 신기로 만들었을까?
목진은 영계란 사람이 더 궁금해졌다.
영계도 멍하니 석전을 바라보다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쉬며 손을 휘익 저었다. 그러자 꼭 닫혔던 석문이 괴성과 함께 서서히 열렸고 그 속에서 웅장한 영력 파동이 스며 나왔다.
“들어갈 준비나 해. 영진의 방은 첫 단계만 열어둘 거야. 첫 단계만으로도 네 목숨을 앗아갈 수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그리고 내 뜻엔 변함없어. 네가 사경을 헤매도 난 절대 너를 구하지 않을 거니까 스스로 해내.”
영계가 담담하게 하는 말에 목진은 숨을 깊게 들이켰다. 곧 지존경한테도 버거운 환경에 처할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수로도 즉사할 가능성이 크기에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진은 의연하게 석문을 넘었는데 영력의 빛이 그를 서서히 삼키며 잇따라 석문이 빛을 거두고 닫혔다.
한편, 순아는 꼭 닫힌 석문과 옆에 서 있는 무덤덤한 영계를 번갈아 쳐다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계 언니, 목진 오라버니가 버티지 못할 것 같으면 구해줄 거죠?"
이에 영계는 소녀를 째려보며 말했다.
“본인이 한 선택은 스스로 책임져야지. 그러다 목숨을 잃으면 그 또한 본인 몫이야. 그러다 정말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해도 난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을 거야.”
영계의 말에 순아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언니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왜 꼭 그렇게 말해요? 너무 무서워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순아를 본 영계는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착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지금의 난 오히려 그런 걸 싫어해. 냉정해져야 나 자신을 더 잘 보호할 수 있잖아.”
* * *
목진은 몸이 영광에 휩싸이자 주위 환경이 변하는 것을 느꼈고 정신을 차려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 와 있었다. 별이 수없이 많은 이곳에서 왠지 모를 위험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별들이 움직이며 한곳에 모이더니 방대한 영진을 이뤘다.
별로 만들어진 영진에 깃든 웅장한 영력은 두 송이의 흑련이 있는 목진의 요련도영진보다 더 강력했다.
이에 안색이 어두워진 목진은 눈 앞에 펼쳐진 5급 영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는 통천경 중기의 실력자라도 상대하기 어려운 수준의 영진이라 목진은 이를 뚫을 자신이 없었다.
웅장하고 난폭한 영력이 퍼지면서 별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영진이 가동되어 무서운 파동을 내뿜었다.
목진은 잔뜩 긴장하며 이를 바라봤다. 이곳의 영진을 우습게 봤다가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규칙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바로 포기했다. 이곳의 영진은 더는 전처럼 간단하지 않았고 진정한 살기를 품은 무서운 영진이었다.
준 신급 영기인 영진의 방은 간단한 의식이 있어 영계의 조종이 아니어도 스스로 영진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러니 목진이 전과 같은 방법으로 진심을 찾아 뚫기란 불가능했다.
쿵!
영진이 미친 듯이 회전하던 중 성광 한 줄기가 날아와 거대한 운석으로 변하더니 놀라운 속도로 하늘을 가르며 목진 주위를 감쌌다.
엄청난 위압감에 목진은 뒤로 물러났고 인법을 변환하며 영력을 소환하였다.
잇따라 목진이 뒤쪽에 공간을 만들자 그 뒤로 백호가 포효하며 걸어 나왔는데, 순식간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운석과 부딪쳤다.
쿵!
공간이 파르르 떨리며 생긴 난폭한 영력 충격으로 백호 성광이 산산조각이 났다.
큰 타격을 입은 목진은 다시금 뒤로 물러났다. 피가 쏠리는 것을 겨우 삼키고 앞에 놓인 영진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