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그림
어느새 완전히 폭발한 영진은 회전하며 화려한 빛을 발산하였고 성광이 모이며 운석을 만들었다.
이 영진을 뚫지 못하면 목진은 이곳에서 영력을 소진하여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을 찾지 못하면 힘으로 부숴야지.”
평소에는 영계의 말 때문에 진심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 그러다가는 바로 죽을 수도 있었다.
영진이 완전히 가동되면 그 위력은 통천경 중기의 실력자나 혈시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거라 생각한 목진은 최대한 빨리 이를 격파해야 했다.
결정을 내린 목진은 바로 흑염이 깃든 영력을 소환해 다시 뒤쪽 하늘에 별빛 공간을 형성하였는데 이번에는 더 넓어진 공간에서 신수 세 마리가 신속하게 형태를 갖췄다.
“사신성숙경, 백호신인!”
“현무신인!”
“주작신인!”
목진이 영력을 한껏 끌어올려 삼대 신인을 동시에 소환하자 삼대 신수는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며 나타났다.
슈슉!
이때, 영진 속 운석들도 형태를 갖춰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목진도 바로 결인해 주먹을 휘둘렀다.
크으으으!
삼대 신수는 포효하며 난폭한 영력 파동을 싣고 운석들과 맞섰다.
퍽! 퍽! 퍽!
신수들은 파죽지세로 운석을 부수며 거대한 영진으로 향했는데 엄청난 영력이 주위를 휩싸더니 영진이 힘에 못 이겨 부서졌다.
광점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에 목진은 한시름 놓은 듯 숨을 내뱉었는데 곧바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영진이 부서진 곳에서 다시 웅장한 영력이 모이며 빛을 발하더니 또 하나의 영진이 나타났다. 목진이 부순 것과 다른 영진이었지만 풍기는 파동으로 볼 때 파괴력은 비슷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영진 외곽에 더 방대한 영진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에 목진은 얼굴이 하얘졌다. 영진의 방이 스스로 영진을 칠 수 있다니, 이는 영기가 아니라 경험이 아주 풍부한 영진사나 다름없었고 목진보다 단계가 더 높은 영진사로 영진 대가의 수준과 비슷했다.
“대단한 영기일세.”
이는 자신의 명을 무조건 따르는 영진 대가를 곁에 둔 것과 같았다.
영진의 방에 지존급 실력자도 가둘 수 있다는 순아의 말을 믿지 않았던 목진은 지금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힘으로 뚫는 방법도 안 되겠군.”
영계가 영진의 방의 첫 단계만 열었다고 한 것은 이곳만으로도 목진을 상대하기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힘만으로는 절대 영진의 방을 나가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목진은 인상을 찌푸리고 한참을 고민했다. 역시 심안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그사이에 심안을 열지 못하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별수 없군.”
그러나 목진은 결코 두려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방대한 영진을 바라보더니 서서히 눈을 감았다.
다시 심진 상태에 들어가 미묘한 느낌을 찾았다.
쿠쿵!
목진은 용등술을 소환해 영력 폭풍을 피하였고 차마 피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몸으로 받아냈다. 순식간에 흑뢰를 휘감은 목진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고 외부의 간섭을 전부 차단한 채 계속해서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내려앉았다.
영진 밖에서 사색이 된 채 이를 지켜보는 순아는 너무 괴로웠다. 무서운 영력 돌풍에 비해 목진은 한없이 왜소해 보였고 공격을 당할 때마다 온몸을 파르르 떨며 피를 토하는 것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런데 영계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묵묵히 광막을 지켜봤으니, 꼭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녀한테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퍽!
그러다 또다시 영력 돌풍에 가격당해 가슴에 깊은 상처가 났는데 살이 찢겨 그 속의 뼈까지 선명히 보였다. 이에 검은색 뇌망은 부단히 상처를 치유했지만, 어느새 목진의 주위를 감쌌던 영력도 그의 숨결처럼 미약해졌다.
목진의 심신도 곧 죽음이 닥칠 걸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목진이 심안을 열기엔 아직 부족했다.
조금만 더 가면 심안이 열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 뭔가 부족했다.
목진은 분노한 듯 속으로 표효를 하더니 눈을 번쩍 뜨고 자신을 공격하려 하는 영력 폭풍을 향해 뛰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순아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영계는 무덤덤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봤다.
퍽!
영력 폭풍에 맞은 목진은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나갔고, 주위를 감싼 영력 파동도 서서히 사라졌다.
의식을 잃은 목진의 심신은 끝없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목진의 심신이 죽음의 어둠 속에 갇혀있든 말든 영진의 방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목진을 때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진동하더니 눈 하나가 서서히 열렸다.
“영계 언니, 어서 오라버니를 구해줘요!”
순아가 팔을 흔들며 빌자 영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때, 광막 속 목진의 체내에서 흑광이 뿜어져 나와 주위를 감싸며 거대한 흑탑을 형성했다.
퍽! 퍽!
영력 폭풍이 흑탑을 가격하며 눈부신 빛을 발했다.
“뭐지?”
순아도 흠칫 놀라 이 광경을 바라보더니 목진이 이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계 언니.”
순아가 고개를 들고 영계를 바라봤는데 그녀는 온몸을 파르르 떨며 목진을 감싼 흑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는 순아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영진의 방에 나타난 거대한 흑탑이 목진을 감싸 안아 무서운 공격을 대신 받았는데 난폭한 영력 충격으로 흑탑은 부단히 떨렸다.
그리고 영진에 변화가 생기더니 가장 바깥쪽에 있던 방대한 영진이 서서히 움직이며 통천경 강자마저 두려워할 만큼 굉장한 영력 파동을 주위에 퍼트렸다.
검은색 광탑의 견고함을 감지한 영진의 방은 힘을 더 끌어올려 이를 없애려 하였다.
위험을 감지한 흑탑은 몸체를 떨며 방어벽을 형성하였다.
쿵!
거대한 영진이 회전하며 굵은 빛줄기를 내뿜었는데 스친 공간이 바로 일그러졌고, 이에 비해 검은색 광탑은 한없이 왜소해 보였다.
그 순간, 흑탑 속에 있던 목진이 눈을 번쩍 떴다. 만물을 꿰뚫을 것처럼 맑아진 눈동자가 더없이 괴이해 보였다.
그는 흑탑을 넘어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는 빛줄기를 바라봤는데 일반 통천경의 강자라도 그 속에 깃든 힘을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흑탑에 닿기만 하면 곧바로 부서질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이에 목진은 뭔가 결심한 듯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고 흑탑은 빠르게 작아져 체내로 돌아갔다. 그는 점차 투명해지는 눈으로 거대한 빛줄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목진은 수많은 영력이 요동치는 영력의 바다 같은 빛줄기를 보더니 체내의 영력을 전부 끌어올려 정면으로 맞섰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영진은 첫 번째 단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진으로 통천경의 강자라도 바로 잿더미가 될 정도로 막강했다.
“영계 언니, 빨리…….”
순아가 순간 사색이 되어 영계의 손을 잡고 사정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영계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져 손을 휘둘렀다.
“당장 멈춰!”
위잉.
영계의 고함과 함께 영진의 방을 맴돌던 웅장한 영광이 사라졌고, 방대한 영진들도 서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나 조용해진 영진의 집에는 마치 목진이 영력 빛줄기에 맞아 잿더미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순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텅 빈 광막 속 영진의 방을 바라보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고 옆에 서 있던 영계도 눈길이 갈 곳을 잃었다. 자신이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직감했다.
목진을 감싸고 있었던 흑탑은 바로 그림 속 그 흑탑이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했다. 영계는 손톱이 살을 파고든 것도 모르고 주먹을 꼭 쥔 채 멍하니 광막만 바라봤다.
기억을 잃긴 했지만 흑탑이 자신한테 아주 중요한 물건임은 확실했다.
두 사람은 아수라장이 된 영진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는데 문이 서서히 열리더니 피투성이가 된 소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두 여인은 고개를 들어 온몸이 빨갛게 물든 목진을 한참 바라봤다.
“목진 오라버니, 살아있었어요?!”
순아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화색이 되어 달려갔다. 목진은 이를 막으려고 손을 뻗다가 갑자기 몰려오는 힘에 피를 토하였다.
“죄송해요, 오라버니. 괜찮아요?”
목진이 중상을 입은 것을 그제야 발견한 순아는 바로 뒤로 물러났다.
이에 목진은 괜찮다는 듯 애써 손을 저었다. 뇌신체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때, 영계가 귀신처럼 나타나 목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영계 장로, 장난은 그만하시죠.”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난 목진은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심안이 열리지만 않았다면 목진은 정말 영진의 방에서 죽었을 것이다.
창백한 목진을 바라보던 영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소년의 손을 잡고 영력을 불어넣어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목진은 화들짝 놀라 영계를 바라봤다.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이런 태도는 처음이라 괜히 어색했다.
옆에 있던 순아도 놀란 눈치였다. 낯선 것과 더러운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영계는 남자의 손을 잡기는커녕 말도 섞고 싶지 않아 목진이 훈련을 마치면 바로 내쫓곤 하였다.
목진이 훈련하다가 쓰러졌을 때도 순아 보고 배웅하라고 했는데, 지금은 먼저 나서서 목진의 상처를 치유하다니, 순아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믿기지 않았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지긴 했으나 목진은 상대방의 호의를 단칼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체내의 고통이 조금 가신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영계 장로, 이 정도면 된 것 같아요.”
그제야 목진의 손을 놓고 뒤로 한 보 물러난 영계는 목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심안은 열렸어?”
“마지막 순간에 열렸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목진은 이내 화색이 되었다. 여태껏 한 훈련이 드디어 빛을 발했단 생각에 더없이 기뻤다.
이는 그의 영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영계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여태껏 신세를 많이 졌네요. 고마워요, 영계 장로. 그럼 전 이만 돌아갈게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영계가 부담스러웠던 목진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뒤돌아서 떠나려고 하였는데 영계가 다시 앞에 나타났다.
“물어볼 것이 있어.”
영계가 다급하게 말했다.
“순아야, 넌 일단 나가 있어.”
영계가 어리둥절하여 자신을 쳐다보는 순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영계 언니, 목진 오라버니는 마음에 둔 여인이 있어요.”
순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괜히 걱정되어 말했다. 그래도 혹시나 영계가 화낼까 봐 말을 마친 소녀는 바로 자리를 피했다.
소녀의 말에 한참 생각하던 영계가 그제야 뜻을 알아채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순아가 어디로 갔는지 바로 짐작이 갔다.
그러나 목진은 알았다. 영계의 눈빛이 이상해지긴 했어도 절대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아마 자신에게 조금의 호감조차도 없을 것이다.
“물어보려는 게 뭔가요, 장로?”
목진의 질문에 영계는 한참 동안 녀석을 쳐다보다가 그제야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 체내에 왜 흑탑이 있는지 알려줘.”
“흑탑이요?”
잠시 생각하던 목진은 영계가 말한 흑탑이 곧 구급부도탑이란 것을 알아챘다. 구급부도탑은 대부도결을 수련하면서 생긴 물건이었고 대부도결은 어머니께서 남긴 물건이라 영계가 어머니와 연관되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엄청난 분이라고 하였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진은 그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방어 영기일 뿐이에요. 특별한 건 없어요.”
목진도 잔뜩 경계하며 영계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토록 어처구니없는 목진의 말을 믿을 영계가 아니었다.
“영계 장로, 이만 가봐도 될까요?”
영계가 믿든 말든 관심 없는 목진은 이만 집에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때, 영계가 갑자기 목진의 손을 잡더니 정원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목진은 발버둥 쳤지만 그녀의 힘을 감당하기에 벅차 결국 포기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지 궁금했다.
“낙리 언니한테 말해야 할까?”
멀리서 몰래 두 사람을 지켜보던 순아가 손을 꿈틀거리며 고뇌에 빠졌다.
목진과 함께 방에 들어간 영계는 문을 잠그고 방석에 앉아 우두커니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봤다. 목진은 멍든 손목을 주무르며 주위를 훑다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는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래된 듯한 그림에 흑탑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홉 층으로 된 흑탑은 천지를 관통하듯 우뚝 솟아올랐다. 그러나 목진은 이보다 그 위에 앉아있는 한 여인에게 더 눈길이 갔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장발의 여인한테서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졌고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뒀던 그리움이 솟아났다.
목진의 흐릿한 기억 속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이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흐뭇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목진이 몰래 간직한 지 10년도 넘는 소중한 기억이었다.
어느덧 눈가가 촉촉해진 목진은 몸을 파르르 떨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