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기억
한편, 영계는 수련 중인 목진을 보고는 계속해서 영력을 공급하였고 어느덧 눈앞이 아른거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끝없는 어둠 속에 빠졌는데 물결이 일며 무언가 희미하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곳은 전쟁 때문에 피바다가 된 폐허였다. 먼지투성이인 한 소녀가 온몸을 파르르 떨며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비를 맞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이 곧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인간의 잔혹함을 너무 많이 겪은 소녀는 태어나서부터 단 한 번도 인간의 온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이렇게 죽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소녀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따스한 손길에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소녀의 몸에 온기가 스며들었다.
소녀는 자기 앞에 음식을 내려놓고 떠나려는 여인을 보자 용기를 내 그 뒤를 따랐다. 소녀는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여인의 뒤를 따라가다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차가운 바닥이 아닌 따뜻한 여인의 품에 안겼다.
“나와 함께하고 싶어?”
여인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소녀는 최선을 다해 그 따스함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난 엄청 위험한 곳에 갈 거야. 나와 함께라면 죽을 수도 있어.”
여인이 한숨을 쉬며 하는 말에 소녀는 오히려 여인을 꼭 끌어안고 마음껏 온정을 느꼈다. 당장 죽더라도 좋았다.
“이름이 뭐야?”
“영…… 영계요.”
“참 예쁜 이름이구나.”
“그래요? 당신은 뭐라고…….”
“정 이모라고 불러.”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정 이모…….”
* * *
“영계야, 내가 수련하는 법을 가르쳐줄까? 일단 공법 영결부터 선택해. 전부 엄청난 영결이니 마음껏 골라.”
“그럼…… 이걸로 해도 될까요?”
소녀는 눈부신 빛을 발하는 족자가 아니라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족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정녕 이 영결을 수련할 거야?”
“왜요? 안 되나요?”
“그건 아니고 이 영결은 음, 양 두 권으로 나뉘는데 양은 목진한테 줬어. 네가 음권을 수련하면 큰 피해를 볼 거야.”
“목진이라면 혹시 이모의 자식인가요?”
“그래, 아주 귀여운 녀석인데 영계보다 어리단다.”
흐뭇하게 말하는 여인의 모습에 소녀는 목진이라 불리는 아이가 부러웠다.
“그럼 왜 그 애와 함께 있지 않나요?”
이에 여인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안색이 어두워져 답했다.
“그 아이를 지켜주고 싶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단다.”
“그럼 내가 음권을 수련할래요.”
소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를 수련하면 네가 위험해질지도 몰라.”
“괜찮아요. 이모가 목진을 그리워하니까 똑같은 영결을 수련할래요. 그러다 언젠가 목진을 찾으면 제가 그 아이를 데려올게요.”
소녀는 여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여인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곳은 막강한 힘을 가졌으나 인정 따위는 없는 곳이었다. 여인은 자그마한 북령경이 훨씬 좋았다. 그곳에는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떠나야 했다.
* * *
영계가 다시 눈을 뜨더니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정 이모…….”
어느덧 수련을 마친 목진은 체내의 영력이 전보다 훨씬 웅장해진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열흘 넘게 수련해야 이룰 수 있는 성과를 겨우 반나절 만에 이루었다. 이대로라면 한 달 내에 통천경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목진이 기지개를 켜자 뼈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아 아주 시원했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영계를 바라봤는데 여인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움츠리고 앉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영계 누이.”
화들짝 놀란 목진은 바로 달려가 영계를 물에서 꺼내 자신의 옷을 덮어주었다.
“난 괜찮아, 영력이 닳았을 뿐이야.”
영계가 한껏 움츠리고 목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봐?”
상대방의 눈빛에 괜히 어색해진 목진이 머쓱하게 웃었다.
“지금 보니 정 이모와 많이 닮았네.”
영계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정 이모라…….”
목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어머니를 말하는 거요?”
이에 영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방금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
영계는 방긋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다.
“이모가 늘 말하던 목진이 너였구나. 네가 스스로 찾아왔으니 내 운이 좋았던 거야. 공손하게 누이라고 불러.”
영계가 목진의 귀를 가볍게 비틀면서 활짝 웃었다. 이는 목진을 진정한 가족으로 생각해서 나온 자연스러운 손짓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목진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했지만, 갑작스레 변한 태도에 어색해 영계의 손을 피하며 물었다.
“영계 누이, 기억났어? 어머니는 어디 있어?”
북령경을 떠날 때,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아버지와 약속한 목진은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행방을 알고 싶었다. 목진은 아버지가 외롭게 북령경에 있는 것이 안쓰러웠다.
아직은 실력이 턱없이 부족해 대천세계를 휘저으며 어머니를 찾을 수 없었지만, 소식이라도 알고 싶었다.
이에 영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다 기억난 건 아니야. 아주 오래전 일이 조금 떠올랐는데 이모가 간 곳이 아주 위험한 곳인 것만은 확실해.”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곳에 갔던 것 같아. 내가 그곳에서 기억을 잃었을지도 몰라.”
말을 마친 영계는 한기가 가득해져 주먹을 꽉 쥐었다.
목진도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한테서 들은 바로는 어머니는 상고의 어딘가로 갔는데 그곳 사람이 목진 부자를 해칠까 봐 홀로 떠난 것이라고 했다.
아마 영계가 말한 위험한 곳이 바로 아버지한테서 들은 상고의 신비로운 곳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영계는 어쩌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기억까지 잃은 걸까?
이러한 생각에 목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걱정하지 마. 이모는 절대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야. 위험한 상황에 빠져도 금방 해결하실 거야.”
영계가 조금 차가운 손으로 목진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넌 실력 향상에만 신경 써. 안 그러면 이모가 어디 있는지 알아도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적어도 이모한테 짐은 되지 말아야하지 않을까?”
영계의 말에 목진은 순간 정색하였다. 영계마저도 그곳에서 기억을 잃었다고 했으니 현재의 목진은 어머니한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다.
“누이의 실력은 어때요?”
목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북창령원의 천석 장로쯤은 거뜬히 해결할 수 있어.”
영계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자 목진은 흠칫 놀랐다. 영계야말로 최강자란 생각이 들었다. 북창대륙에 놓고 봐도 영계보다 나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북창령원의 천석 장로들은 기껏해야 일급 지존이고 태창 원장은 아마 오급 지존일 거야.”
영계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북창령원의 진원 신수인 북명룡곤은 그나마 구급 지존인데 지지존에 이르려고 애쓰고 있을 거야. 그래봤자 이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야.”
이에 목진은 입이 떡 벌어졌다. 어머니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북명룡곤도 그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난 이모께서 직접 가르쳐서 이 정도 실력을 갖춘 거니까 너무 놀랄 건 없어.”
영계가 상긋 웃으며 말했다.
“이모께서 누이를 직접 가르치셨다면 누이는 나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났을 거야.”
“나는 태어나서부터 어머니를 뵌 적도 없는데 가르침이라니…….”
목진이 쓸쓸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영계는 소년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모는 너의 안전을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어. 이모는 너를 무척 아끼니까 이모가 곁에 없었다고 원망하지 마.”
이에 목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인기척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자 순아가 자신보다 더 큰 빗자루를 들고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진 오라버니, 절대 낙리 언니한테 이르지 않을 테니까 제발 날 죽이지 마세요!”
순아가 잔뜩 놀라 하는 말에 목진은 다가가 소녀의 이마를 가볍게 때리며 웃었다.
“영계 누이는 내 수련을 도왔을 뿐이야.”
순아는 물에 흠뻑 젖어 목진의 옷을 걸쳐 입은 영계와 목진을 번갈아 보고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이렇게 수련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영계가 담담하게 웃더니 목진의 옷을 벗어 영력으로 물기를 말렸다. 그새 영력이 조금 회복된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수련하고 내일 다시 와. 열심히만 하면 한 달 내에 가능할 것 같아.”
영계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내일 또 하게? 하루 정도는 쉬어야 하지 않을까?”
체내의 영력이 닳을 때까지 방출하는 것은 인체에 타격이 컸다. 비록 영계의 실력이 뛰어나나 목진은 자신 때문에 누군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괜찮아. 이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영계가 자연스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순아는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목진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영계가 웃는 얼굴을 보이는 것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목진이 떠나자 영계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이모, 제가 드디어 이모 아들을 찾았어요. 당신을 찾기 전까지 어떻게든 저 아이를 지킬 테니까 걱정 마요.”
“세상에…….”
영계가 혼자 중얼거리며 흐뭇하게 목진을 바라보는 모습에 순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계 언니, 설마 목진 오라버니를 좋아해요?”
이에 영계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럼 안 되나?”
“네, 안 돼요. 목진 오라버니는 낙리 언니의 사람이에요.”
순아의 말에 영계는 소녀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으며 웃었다.
“네가 감히 다른 사람 편을 들어?”
“언니, 강요해서 얻은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에요.”
“순아야, 혹시 영진의 방을 청소하고 싶어서 그래?”
“네? 잘못했어요. 언니야말로 목진 오라버니와 환상의 짝꿍이에요!”
목진은 보름 넘게 매일 영계한테 와서 특별한 수련을 받았다. 그는 자신과 영계의 영력이 한데 모여 이토록 엄청난 효과를 낼 줄 몰랐다.
그런데 날을 거듭될수록 목진의 실력은 부쩍 느는 반면, 영계는 점차 허약해졌다. 이 수련은 영계한테 좋은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여 목진은 미안한 마음에 영계한테 가는 횟수를 점차 줄였다. 그는 영계가 허약해지는 모습을 그냥 무시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 * *
목진이 옥탑에 올라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차분한 발소리와 함께 은은하고 익숙한 향기가 났다.
어느덧 목진의 옆에 다가와 앉은 낙리가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낙리는 목진이 요즘 들어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 조금 걱정되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목진은 소녀한테 기대며 말했다.
“내 선택도 틀릴 때가 있겠지?”
낙리가 어리둥절해하자 목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했다.
“내가 과연 이토록 쉽게 힘을 얻어도 될까?”
영계의 도움을 받으면 통천경에 이르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때, 조용히 듣기만 하던 낙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내가 널 왜 좋아하는지 알아?”
목진은 흠칫하여 소녀의 정교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외모나 실력, 천부적인 재능 때문에 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는 네가 좋은 거야. 예전의 난 낙신족의 변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수련에 임해야만 했지. 내가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그런데 너를 만나고 바뀐 거야. 그 뒤로 난 나 자신을 믿기로 했어.”
낙리의 말에 갈팡질팡하던 목진의 마음이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나한테 이런 마음을 가르쳐준 사람이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낙리가 얼굴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목진은 길게 숨을 내뱉더니 모든 고민을 떨쳐낸 듯 웃었다.
영로에서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겪은 그는 영력 자체를 사용할 수 없었을 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든 곤경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통천경에 이르는 문제 따위로 자신을 옥죄고 다른 사람의 몸을 망치면서까지 실력을 키우려는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목진이 생각해온 절세의 강자가 되는 법은 절대 이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