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위기
치열한 싸움을 벌이던 성령산은 어느덧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제자리에 앉아 하늘에서 떨어지는 황금색 빗방울 속에 깃든 신비로운 세례의 힘을 흡수하였다.
비록 구천제를 거쳐 내려온 세례의 힘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례의 힘을 조금이라도 많이 흡수할수록 삼난을 건널 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목숨이 달린 중요한 문제였다.
사람들은 구천제의 정상에 앉아 금광으로 온몸을 휘감은 목진을 부러워했다. 그들도 그 자리에 올라 웅장한 세례의 힘을 받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통천경 초기의 실력으로 정상에 오른 목진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오대원 중 하나인 북창령원은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한편, 구천제의 정상에 조용히 앉아있던 목진은 외부의 간섭을 전부 배제하고 집중하여 세례의 힘을 흡수했다.
어느덧 목진의 체내는 황금빛으로 가득 찼고 피와 살에서마저 은은한 금광이 비췄다. 세례의 힘으로 실력이 늘어난 건 아니지만 체내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마 삼난을 건널 때, 크게 작용할 것이다.
황금색 액체는 피와 살, 경맥을 거쳐 부단히 기해에 앉아있는 신백의 손에 모이며 점차 형태를 갖춰갔다.
위잉.
그러다 목진 체내의 세례의 힘이 어느 정도 짙어지자 황금빛이 사라지며 모든 황금색 액체가 신백의 손에 빠르게 모여 엄지손가락 정도의 황금색 결정체를 생성했다.
“세례지정(洗禮之晶)이군.”
세례지정을 만들어내야 성령 세례를 완벽하게 마쳤다고 말할 수 있었기에 목진은 이내 화색이 되었다.
잇따라 목진이 움직이자 신백은 입을 벌려 세례지정을 체내에 흡수했는데 심장 쪽에 멈춘 세례지정에 신백이 점차 단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성공했어.”
그때, 목진이 서서히 눈을 뜨고 숨을 고르자 검은색 눈동자에 깃든 금광이 조금씩 사라졌다. 비록 당장 드러나는 실력의 비약은 없었지만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 꼭 몸에 들어왔던 나쁜 것을 전부 배출해낸 느낌이었다.
하늘에서는 아직도 웅장한 황금색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고 세례가 끝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에 목진은 다시 눈을 감고 세례의 힘을 흡수했다. 이미 세례지정을 만들었지만 낙리를 위해 하나 더 만들 작정이었다.
낙신족의 힘을 사용하면 낙리가 삼난을 건너는 데 큰 문제는 없겠지만 세례지정이 있으면 더 안전할 것이다. 더구나 낙리는 지금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기에, 그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재 목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줄 성령지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목진은 굳게 믿었다, 자신이 언젠가 떳떳하게 낙리의 앞에 나서 그녀를 보호하는 날이 올 거란 것을.
황금색 빗방울은 다시 목진에게 향했고 소년의 손바닥에는 황금빛이 모였다.
사람들은 그런 목진이 얄미웠지만 자기 능력으로 떳떳하게 정상에 올라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자신들이 저 자리에 올랐어도 그랬을 것이다.
그 후로 반 시진 정도가 지나 빗방울이 그칠 기미를 보이자 사람들은 서서히 눈을 뜨며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례를 완벽히 마칠 수 없는 이들은 세례의 힘을 최대한 많이 흡수해 삼난을 위해 준비해야 했다.
하유연, 서청해와 소불후도 씨익 웃으며 눈을 떴다. 이들도 세례지정을 만들어내고 성령 세례를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두 번째 층에 있는 동연 등은 안색이 썩 좋지 않았다. 그들의 몸도 은은한 금방울이 비췄지만 세례를 완벽히 마치기에는 부족했다. 그들은 마형천의 편을 들어준 것이 후회되었다.
“무능한 녀석.”
동연 등이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속으로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다. 마형천이 죽었으니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그때 목진이 마지막 한 갈래의 세례의 힘을 흡수하자 손바닥에서 또 하나의 세례지정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탐욕스러운 눈으로 이를 바라보았다.
이에 목진은 바로 물건을 거뒀다.
“축하해.”
하유연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미 세례를 마친 그녀는 세례지정에 미련이 없었다.
“목진, 이번엔 정말 고마웠어.”
서청해와 소불후도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봤다. 이번에 세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목진 덕분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금광 한 갈래가 쏟아져 내리더니 공간이 일그러지며 공간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이는 성령산을 떠나는 통로로 세례가 끝나 성령산이 곧 닫힐 거란 의미였다.
이에 목진은 입맛을 다시며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빛덩이를 바라봤다. 이 물건이야말로 성령산의 가장 큰 비밀이라 그 속에 깃든 것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지만 지금은 실력이 많이 부족해 감히 빛덩이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는 언젠가 대천세계의 엄청난 강자가 되면 다시 이곳에 와서 빛덩이의 비밀을 파헤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만 갑시다.”
목진이 생긋 웃으며 하유연 등을 바라보더니 먼저 공간 소용돌이를 향했고 아래쪽 사람들도 잇따라 움직였다.
쿵!
이들이 공간 소용돌이에 들어가려 할 때, 지극히 난폭한 영력 충격이 휘몰아쳐 사람들을 튕겨냈다. 갑작스레 닥친 변고에 사람들은 대부분 중상을 입었다.
다행히 목진은 신속하게 피신했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 그곳을 바라봤다.
“어떻게 된 일이지?”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성령산 밖에서 지존급 강자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아.”
하유연이 안색이 어두워져 말했다. 이 정도 영력 파동은 분명 지존급 강자였다.
“지존급 강자들이 싸우다니…….”
갑작스레 몰려오는 불안감에 목진은 흠칫하였다. 북창대륙에는 지존경에 이른 강자가 얼마 없었고 서로 경계해 최대한 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목진이 마형천을 죽였으니 지금 싸우고 있는 세력은 북창령원과 용마궁일 가능성이 가장 컸다.
낙리가 걱정된 목진은 언젠가 용마궁 사람들을 마형천과 똑같이 만들어주리라 다짐하면서 이를 악물고 공간 소용돌이로 뛰어들었다.
* * *
쿵!
웅장한 영력이 퍼지면서 여섯 갈래의 빛줄기가 붉은색 정로를 만들었는데 그 속에 색상이 서로 다른 6마리의 용이 포효하며 날아다니고 엄청난 고온으로 공간마저 무너질 기미를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태창 원장이 앉아있었다. 뒤쪽에 있는 천 장 크기의 영력 광영은 그의 지존 법신이었는데 무서운 온도에 그마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하, 태창, 용마궁에서 당신을 위해 준비한 육룡분천정(六龍焚天鼎)이 어떤가? 그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보지.”
흑룡지존이 붉은색 정로 밖에 서서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오급 지존 한 명에 일급 지존 다섯 명의 손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이에 태창 원장은 지존 법신으로 본체를 보호하는 수밖에 없었다. 북명룡곤이 무량노조를 때려눕힐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비록 흑룡지존이 태창 원장을 상대하려고 그의 손발을 묶었지만 북창령원에는 아직 천석 장로 두 명이 남아있었다. 태창 원장은 흑룡지존의 손에 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한편, 수만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선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쥔 채 지켜보다가 오른쪽에 있는 암영상회의 회장 유암과 북창령원의 영계한테 눈길을 돌렸다.
“암영상회에서 용마궁을 도울 줄은 몰랐군.”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성령성 내에도 강력한 영력 파동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 북창령원의 천석 장로 두 분도 천원상회의 회장과 싸우고 있을 것이네.”
“암영상회와 천원상회에서 용마궁과 손을 잡았단 말인가?”
“그건 아닌 것 같네. 유암이 영계의 앞길을 막긴 했지만 살수를 두지는 않지 않나? 용마궁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른 것 같은데 용마궁이 패배할 것을 대비해서 유암도 살수를 두지 않는 것 같네. 아주 좋은 핑곗거리 아닌가?”
다른 쪽에 있던 구하상회의 회장 하천염도 잔뜩 정색하며 이를 지켜보았다. 암영상회, 천원상회와 구하상회는 북창대륙의 3대 상회로 여태껏 서로 견제하며 성장해왔는데 나머지 두 상회가 갑자기 용마궁과 손을 잡은 것은 구하상회에 전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만약 용마궁에서 정말 북창령원을 없애기라도 하면 북창대륙의 다른 세력들은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선뜻 나서서 북창령원을 도울 수도 없었다.
더구나 용마궁에서 북창령원을 상대하려고 무량노조까지 동원해 북명룡곤과 싸우고 있는데 북창령원의 편에 섰다가 무량노조가 승리하면 구하상회는 이대로 멸망이었다.
“하 회장, 당신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군가의 말소리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고민하던 하천염이 고개를 돌리자 서극지존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서극 전주의 생각은 어떠한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네.”
하 회장이 웃으며 한 말에 서극 전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북창령원과 용마궁 중에서 고르라고 하면 난 전자를 선택할 걸세. 실력이 상당한 두 세력 중 북창령원은 북창 대륙의 패주가 될 생각이 없는 반면, 용마궁은 야망이 엄청나 그쪽에서 북창대륙의 주인이 되면 우리한테 절대 좋지만은 않을 걸세.”
“그럼 서극 전주는 북창령원의 편에 서겠단 뜻인가?”
하 회장의 질문에 서극 전주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북창령원의 편을 들고 싶지만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었다.
“그럼…….”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북창령원이 못 버틸 것 같으면 그때 나서도 되지 않겠나? 중요한 순간에 나서야 북창령원에서 우리를 더 고맙게 생각할 것 아닌가?”
“하하, 하 회장은 이런 상황에서도 이토록 침착하다니, 역시 구하상회의 주인은 남다르군.”
“우리의 생계가 걸린 문제니 반드시 신중해야 하네. 안 그럼 여태껏 한 노력이 순간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네.”
하천염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하늘에 떠 있는 붉은색 정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태창 원장이 북명룡곤이 올 때까지 버티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그럼 용마궁의 계획도 자연스레 무산될 테니…….”
이에 서극 전주도 동의하는 눈치였다.
위잉.
그때 저 멀리 하늘이 갑자기 파르르 떨리면서 공간 통로가 나타나더니 수많은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커다란 붉은색 정로를 보고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진도 깜짝 놀라 그곳을 바라봤는데 밖에 서 있는 흑룡지존과 그 속에 갇힌 사람이 태창 원장인 것을 발견하고 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역시나 용마궁 짓이었어!”
성령산 밖에 서 있던 사람들도 이내 이들을 발견하였다. 흑룡지존은 그 속에서 목진을 찾아내고는 살기 가득한 얼굴로 노려봤다.
“황룡(黃龍), 저 녀석을 잡아 대서미마주를 받아내게!”
흑룡지존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용마궁의 지존한테 말을 건넸다.
“알겠네.”
이에 노란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정로가 이미 형태를 갖춰 지존 한 명이 빠지더라도 태창 원장은 절대 빠져나올 수 없고 죽는데 걸리는 시간이 늘어날 뿐이었다. 그러나 용마궁의 엄청난 보물인 대서미마주는 어떻게든 뺏어야 했다.
황룡지존이 바로 목진한테 달려가자 젊은이들은 순간 정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황룡지존이 목진만 노리는 것을 알면서도 지존급 위압감에 흠칫 놀랐다.
그때, 하유연도 깜짝 놀라 외쳤다.
“목진, 어서 도망가!”
그녀는 목진의 실력을 의심치 않지만 진정한 지존급 강자한테는 아직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 목진은 제자리에 서서 주먹을 꽉 쥔 채 상대방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도망쳐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난 네가 바로 도망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대하구나.”
황룡지존이 목진과 수백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서서 누런빛이 도는 눈으로 녀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대서미마주를 이리 내놓거라. 그럼 널 한 방에 죽여주지.”
황룡지존이 손을 내밀며 한 말에 목진은 피식 웃으며 상대방을 노려봤다.
“꿈 깨요!”
이에 황룡지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목진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럼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내 손에 잡히는 것이 죽기보다 못 한 일이란 걸 제대로 가르쳐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에 웅장한 영력이 휘몰아치며 형성된 지존급 위압감에 하유연 등은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황룡지존이 공격을 개시하려는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기가 날아와 그를 향했다.
“이까짓 것으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황룡지존이 옷깃을 휘날리자 만 장 크기의 영력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검기를 부쉈다.
슉!
낙리가 빠르게 목진한테 다가가 한기 어린 눈빛으로 황룡지존을 바라보았다.
“둘이서 같이 나설 것이냐?”
황룡지존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죽어서 영원히 함께 있으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