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무서운 실력
“정 이모?”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여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화색이 되었다.
“영계야, 넌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영계는 한걸음에 달려와 여인을 꼭 끌어안고 흐느꼈다.
“당신이 날 버린 줄 알았어요.”
“다 내 탓이야. 내가 널 데리고 돌아가지만 않았어도 네 기억이 지워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안 그럼 절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여인이 영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이모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어요. 기억은 잃었지만 이모를 잊지 않아 다행이에요.”
영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너와 목진이 이렇게 만나다니, 인연이구나.”
이에 목진이 웃으며 뒤돌아 낙리를 부르자 소녀는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낙리는 여인의 정체를 알고 나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머니, 이 아이는 낙리예요.”
목진이 소녀의 손을 잡으며 생긋 웃자 여인은 그 손을 보고는 낙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잔뜩 긴장한 소녀는 실수라도 할까 봐 두려웠다. 이는 목진 앞에서만 드러내는 모습으로 다른 사람한테 진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참으로 예쁘구나.”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기품이 남달랐고 절세의 미모를 지니고 있어 목진과 함께 서 있으니 그야말로 선남선녀였다. 이에 낙리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영계처럼 나를 정 이모라고 부르거라.”
여인이 소녀의 손을 잡으며 웃었다.
“네, 정 이모.”
어쩔 줄 모르는 낙리의 반응에 목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는데,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황룡지존과 싸우다가 입은 상처에 기혈이 솟구쳤다. 이에 소년은 재빨리 뿜을 뻔한 피를 삼켰는데 이를 눈치챈 여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상처를 살피고는 한 줄기 빛으로 목진을 휘감았다.
따스한 빛에 목진의 상처는 빠르게 치유되었고 피투성이가 된 등도 어느새 회복되었다.
“어머니, 이대로 사라지는 건 아니죠?”
목진이 잔뜩 긴장하며 묻자 여인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 말거라. 아직은 때가 아니란다. 그러니 일단 저들부터 처리하자꾸나.”
말을 마친 여인은 사람들의 주시하에 천천히 돌아섰다.
여인이 다시 돌아서자 사람들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한없이 상냥해 보이는 여인의 손은 더없이 매서웠는데 용마궁에서 그 아들을 해치려 했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모습에 멀리 떨어져 있던 흑룡지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어머니가 이렇게 놀라운 실력자인데 목진 녀석은 왜 북창령원에 수련하러 와서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귀하…….”
흑룡지존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일은 용마궁의 불찰이니 용서해주게. 사죄의 차원으로 용마궁에서 더는 대서미마주를 찾으려 들지 않을 걸세.”
흑룡지존의 태도에 사람들은 몰래 혀를 끌끌 찼다. 여인의 엄청난 실력에 우쭐거리던 흑룡지존마저도 용마궁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내밀며 용서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영체만으로도 자신을 완벽하게 제압한 여인 앞에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용마궁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당신이 뭔데 감히 나 대신 결정을 하려는 건가?”
여인의 질문에 흑룡지존은 머쓱하게 웃었다
이에 여인은 상대방을 힐끗 쳐다보고는 태창 원장한테 눈길을 돌렸다. 5급 지존인 흑룡지존의 힘이 사라져 다른 네 명의 1급 지존만으로는 더는 그를 가둘 수 없었다.
“5급 지존밖에 안 되는 것이 감히 내 앞에서 훈계를 두는 건가?”
담담하게 웃으며 흑룡지존을 바라보던 여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천지의 영기가 들끓으며 천 장 정도 되는 빛줄기가 형성돼 빠르게 태창 원장을 가둔 곳으로 향했다. 이에 흑룡지존은 버럭 화를 내며 황룡지존의 천금 법신보다 더 강한 영력 법신을 소환해 무서운 위압감을 형성했다.
그러나 여인은 아무렇지 않게 옷깃을 휘날리며 다시 만 장 정도 되는 흑탑을 소환해 흑룡지존에게 내던졌다.
황룡지존이 어떻게 죽었는지 잘 아는 흑룡지존은 황급히 물러났다.
쿵!
천 장이나 되는 빛줄기가 적중하자 종로가 사라졌고 용마궁의 1급 지존 네 명은 피를 토하며 튕겨 나갔다.
슉!
드디어 구속에서 풀린 태창 원장은 굳은 얼굴로 흑룡지존 등을 바라보다 여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감사의 뜻을 표했다.
“고맙네.”
신비로운 여인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자신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태창 원장은 여인의 실력과 수단에 흠칫 놀랐다. 목진은 분명 평범한 곳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도 실력이 아주 평범한데 녀석의 어머니는 왜 이토록 비범하단 말인가?
“태창 원장, 이들은 나한테 맡겨주면 안 되겠나?”
여인이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목진이 북창령원에서 수련 중인 것을 알게 된 여인은 태창 원장을 최대한 존중하며 말했다.
“대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
태창 원장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이 막강한 신비로운 여인이 자신을 돕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고맙네.”
여인이 말을 마치자 바로 정색하며 흑룡지존 등을 노려봤다.
“정녕 용마궁의 적이 되려는 건가?”
흑룡지존은 안색이 잔뜩 어두워져 물었다.
“비록 내 실력이 당신보다 못하지만, 우리 친구인 무량노조도 왔다네. 그는 무려 9급 지존이라네!”
현재로서 흑룡지존이 내세울 만한 것은 무량노조밖에 없었는데 여인은 피식 웃기만 하였다.
“9급 지존이 뭐가 대단하다고, 내 부도탑에 깔려 죽은 9급 지존이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군. 오랜만에 아들을 만나 당신들을 놔주려 했는데 내 자식을 괴롭힌 사람들을 이대로 돌려보내자니 썩 내키지 않아서 말일세.”
말을 마친 여인이 손을 들자 손바닥에 빛이 모여 신비롭고 오묘한 광인이 형성되었다.
“그러니 오늘 당신들은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겠네.”
여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옷깃을 휘날리자 주위가 순간 어두워지며 하늘에 끝없는 별빛 공간이 생겼는데 그 속에 아주 커다란 영진이 깃들어있었다.
영진은 주위 만 리를 둘러싸 독립적인 공간을 형성하였고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끌어들였다.
하천염, 서극지존 같은 실력자들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진 속에서 반짝이는 별마다 무서운 영력 파동이 느껴졌는데 이는 절대 허상이 아니었다. 영진을 가동하면 별들은 운석처럼 쏟아져 내려 수만 리 범위에 살아남을 생명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는 절대 영진 대가가 칠 수 있는 영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종사(宗師)급 실력자였다!
이는 대천세계에서도 절대 흔치 않았다.
같은 영진사인 목진도 화들짝 놀라 중얼거렸다.
“어머니께서 영진에 대한 조예가 제일이라던 아버지의 말씀이 이제야 이해가 가네.”
목진은 그제야 자신이 가진 영진의 천부적인 재능에도 아버지가 전혀 놀라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그는 종사급 수준의 어머니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룡지존 등도 사색이 되어 거대한 영진을 바라봤다.
“얼른 도망갑시다. 영체일 뿐이라 영진의 힘을 전부 끌어올릴 수는 없을 걸세. 영진이 완전히 가동되기 전에 빨리 도망갑시다!”
이내 정신을 차린 흑룡지존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혈둔(血遁)을 사용합시다!”
흑룡지존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한쪽 팔이 폭발하며 혈무를 형성하였고 난폭한 영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에 나머지 1급 지존 네 명도 바로 움직였는데, 이들 앞쪽 공간에 균열이 일더니 혈광이 되어 그 속에 스며들었다.
그들의 반응에 흠칫 놀란 여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눈부신 영광이 황금색 액체처럼 내리꽂혀 신속하게 닫히는 공간 균열 속으로 들어갔다.
퍽!
엄청난 파동이 일며 공간이 부서졌고 공간 파동 속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
공간 소용돌이가 빠르게 사라지며 부서진 공간도 서서히 돌아왔다.
여인이 다시 옷깃을 휘날리자 거대한 영진이 사라지고 이곳 대지에 다시금 햇빛이 드리웠다. 이에 사람들은 한시름 놓은 듯 숨을 내뱉었지만 여인을 보는 눈빛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아쉽군.”
여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태창 원장를 바라봤다.
“저들 중 두 사람은 이미 죽었고 나머지 셋은 중상을 입었을 것이네. 영체일 뿐이라 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 미안하네.”
여인의 말에 태연하기로 유명한 태창 원장마저도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웅장한 파동은 어느새 사라졌고 북창령원과 용마궁의 전쟁도 끝났다. 여인의 도래에 사람들은 잔뜩 긴장하였으니, 북창대륙에서 그녀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편, 흑룡지존 등이 도망가면서 용마궁과 북창령원도 잠시 휴전하였는데 이번 전쟁으로 용마궁에서 치른 대가는 엄청났다. 지존급 강자의 부상과 사망에 용마궁은 이대로 북창령원과 힘을 겨룰 자격을 잃었다.
이에 사람들은 한시름 놓았다. 북창령원이 북창 대륙에서 제일의 세력이긴 하지만 학생을 배양하는 데 치중하였고 북창 대륙의 패주가 될 마음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용마궁에서 이토록 철저히 준비하지만 않았어도 분명 북창령원을 도우려고 나서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인이 나타나면서 북창령원이 완벽한 역전승을 거뒀고 기세등등했던 용마궁은 줄행랑쳤으니 한동안 잠잠할 것이다.
“아쉽군.”
북창령원이 난처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 한몫 챙기려던 누군가가 어디선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여인은 흑룡지존이 도망간 곳을 힐끗 보더니 태창 원장한테 눈길을 돌렸다.
“용마궁이 큰 타격을 입었으니 이번 기회에 그들을 철저히 없애게. 이 몸은 영체일 뿐이라 곧 사라질 것이네. 북창령원에서 저들을 풀어줬다가 언젠가 목진한테 화로 돌아올까 봐 걱정이군.”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태창 원장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는 학부모가 북창령원에 문책하러 온 기분이라 썩 좋지만은 않았다.
“걱정하지 말게. 북창령원에서 절대 저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네. 우리가 여태껏 움직이지 않았던 이유는 용마궁에 상고의 영진이 있어서였다네. 이를 흑룡지존과 육대 지존이 함께 가동하면 북명룡곤이라도 뚫을 방법이 없었는데 오늘 저들이 처참한 대가를 치렀으니 상고 영진의 위력도 분명 많이 줄었을 것이야. 이번에 용마궁을 반드시 없앨 것이네.”
태창 원장이 결연하게 말하고는 살기 가득한 얼굴로 흑룡지존이 도망간 곳을 바라봤다. 수많은 북창령원 학생들이 용마궁 손에 죽은 걸 생각하면 한시라도 빨리 없애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학생들의 대결만 허락하도록 약속했던 것이었다.
이에 여인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무서운 파동이 북창 대륙 전체에 퍼질 것만 같았다.
“북창령원의 북명룡곤이 대결 중인가? 9급 지존인 무량노조라, 나쁘진 않군.”
여인의 말에 태창 원장은 머쓱하게 웃었다. 9급 지존의 실력이 나쁘지 않을 뿐이라니, 5급 지존밖에 안 되는 자신은 말할 권리조차 없단 말인가? 그러다 황급히 도망친 흑룡지존이 떠올랐다.
드넓은 대천세계에는 수많은 실력자가 존재했다. 그러니 자신을 비하하면서까지 상대방을 우러러볼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