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어두운 공간
어두운 공간 속, 연로한 노인이 잔뜩 화가 난 듯 하얀색 치마를 입은 여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하얀색 치마를 입은 여인은 다름 아닌 목진의 어머니로 무뚝뚝하게 상대방을 바라보며 답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청연정(清衍靜), 언제까지 발뺌할 것이냐? 너와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소녀를 데리고 와서 부도결 음권을 수련하게 하면 우리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냐?”
노인이 정색하며 물었다.
“난 영계로 누굴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리고 그 아이가 내 아이란 말도 한 적 없고요. 우매한 당신들이 너무 멍청해 그 아이를 의심했던 거죠.”
여인이 한기 어린 눈빛으로 노인을 노려보며 답했다.
“일부러 그 아이한테 부도결 음권을 가르쳐준 것이 정녕 아니란 말이냐? 진짜 네 아이를 위해 한 짓이 아니냐?”
노인의 말에 여인은 피식 웃었다.
“영계 스스로 부도 신결을 수련하겠다고 한 것이고 난 당시, 그 아이가 너무 가여워 데려온 것뿐이에요. 그런데 당신들이 그렇게까지 의심이 많을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그토록 어린 여자아이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나요?”
“네 체내의 신맥은 분명 네 몸을 떠났어. 이는 필경 네 자식한테 갔을 텐데 그 몸에 봉인이라도 걸어둔 것이냐? 그래서 우리가 여태껏 찾아내지 못한 것이냐? 청연정, 넌 우리 종족의 신녀로 천부적 재능이 뛰어나고 지위도 남달라. 대천세계에서 너와 걸맞은 사내는 오직 마하신족의 마하천(摩訶天) 뿐이다. 너희 둘이 결합하면 우리 종족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너도 우리 종족의 왕이 될 수 있을 거야!”
노인이 포효하듯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근본도 모르는 녀석 따위와 사랑에 빠져 자기 신맥을 망치고 아이를 낳다니! 우리 종족의 계승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으면 그런 선택을 한 것이냐? 도대체 마하천과 천지 차이인 벌레만도 못한 그 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 것이냐? 마하천이야말로 진정한 패주로 마하신족은 분명 그의 손에서 휘황한 미래를 맞이할 것이야. 그와 결합하면 너도 분명 엄청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텐데…… 널 성심껏 키운 우리한테 미안하지도 않더냐?”
이에 여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하천의 실력이 막강하다고 꼭 좋아해야 하나요? 대장로, 우리 종족의 힘을 비축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영혼까지 팔 수 있을 것 같네요. 당신이 사랑을 알기나 해요?”
“청연정! 우리 종족이 존재하는 의미와 대천세계에 대한 의미를 정녕 모르는 것이냐?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사랑 같은 불필요한 감정을 품은 것이냐?”
대장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대장로, 나도 우리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감정에 너무 빠지면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어요. 우리 종족이 이 자리에 오기 전에는 규칙 따위는 없지 않았나요?”
청연정의 말에 노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사랑에 눈이 먼 것이 틀림없구나.”
여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인을 말로 설득하기란 역시나 불가능했다.
“네가 아무리 그 아이를 숨기려 해도 우리는 언젠가 그 아이를 찾아내 체내의 신맥을 꺼낼 것이다. 네 아이한테서도 우리 종족의 피가 흐르지만 그 아버지는 너무 미천해 절대 받아들일 수 없구나. 우리는 반드시 그 존재를 없앨 것이다!”
대장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인은 갑자기 영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서 있는 공간이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곧 부서질 것 같았다.
“청연정, 설마 명령을 위반하려는 것이냐?”
대장로의 말에 여인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엄청난 기세를 억누르고 차가운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봤다.
“대장로, 내가 여태껏 이곳에서 조용히 벌을 받는 이유를 알았으면 좋겠네요. 난 절대 당신이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종족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내 아이를 해치려 한다면 절대 보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적어도 당신 목숨줄은 끊고 떠날 거예요.”
“청연정, 네가 감히!”
이에 대장로가 두 눈을 부릅뜨며 영력을 끌어올리자 무서운 기세에 어두운 공간이 미친 듯이 떨렸다.
그러나 여인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위잉.
그런데 그때, 어두운 공간에 물결이 일더니 연로한 노인이 여러 명 나타났다.
“대장로, 진정하시게.”
“정아, 대장로를 자극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이들은 나타나자마자 두 사람을 달래기 바빴다.
“장로님들, 전 전혀 나쁜 뜻이 아니었어요. 그저 진부한 규칙은 바꿨으면 했어요. 우리 혈맥이 처음부터 신성하고 고귀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선조도 일반인이었고 부단히 노력한 끝에 지금의 성과를 이뤘는데 우리한테 저들을 무시할 권리가 있긴 한가요? 그리고 내 아이가 나보다 뛰어나지 못할 거란 확신은 어디서 온 생각인가요?”
“네가 오늘의 성과를 내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아느냐? 그에 비하면 네 자식은 뒷배가 탄탄하지 않은 데다가 네 도움까지 받지 못했는데 무슨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신맥이 그런 녀석한테 있다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구나.”
대장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대천세계에는 수많은 강자가 있고 그중에는 출신이 미천한 사람도, 하위면의 출신도 있어요. 그들한테도 뒷배란 없었는데도 결국 대천세계에서 이름을 날리지 않았나요? 심지어 당신이 좋아하는 마하천도 무한한 화역을 빼앗으려다가 염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도망가지 않았나요? 대천세계에는 염제를 제외하고도 무경의 무조(武祖), 검역(劍域)의 청삼검성(青衫劍聖), 불사지지(不死之地)의 수묘인(守墓人)…….”
여인은 무덤덤하게 대천세계에서 이름을 날린 거물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이들 중 강력한 뒷배가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전부 확고한 의지로 대천세계에서 이름을 날린 거예요. 그러니까 진정한 강자는 키운다고 된다는 당신의 관념은 완전히 틀렸어요.”
여인의 말에 대장로는 반박하고 싶었으나 따로 할 말이 없었다.
“네가 아무리 변명해봐야 우리 생각은 바뀌지 않을 거다.”
이에 여인이 고개를 살짝 젖히고 말했다.
“내가 당신의 선택을 좌우할 수 없듯 당신도 내 선택에 간섭할 권리는 없어요. 나는 비록 우리 종족을 사랑하지만 필요하면…….”
여인은 더는 말하지 않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진부한 노인네들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에 대장로는 씩씩거리며 다른 장로들과 함께 떠났고 여인은 그제야 다시 눈을 뜨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말이 노인네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언젠가 목진을 찾아낼 것이 분명했다. 다만, 자신의 말이 그들한테 어느 정도 위압감을 형성했으리라 믿었다.
그녀가 등을 돌리면 종족에 엄청난 피해라 장로들도 분명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실력은 배양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장로들은 여인을 너무 옥죄지는 못했다. 그것은 목진한테 시간을 벌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인은 아들이 조용히 북령경에 남아 보통의 사내로 살아가기를 바랐었다. 자식의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품속에서 울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덧 북령경에서 나와 오대원 중 하나인 북창령원에 들어갔다. 천부적 재능도 엄청나니 언젠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가 될 것이다.
여인은 험난한 길을 걷고 있는 목진의 곁을 지켜주지 못해 아쉬웠지만 언젠가 소년이 엄청난 성과를 거뒀을 때, 전 세계가 그를 우러러볼 것을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뿌듯했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진정한 강자는 시간을 가지고 갈고닦아야 마침내 대천세계에서 가장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다.
여인은 다시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목진아, 네가 이 길을 선택한 이상 난 최선을 다해 널 지지할 거란다. 네가 대천세계에 이름을 날릴 그 날을 기다리마!”
북창령원과 용마궁의 전쟁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용마궁에서 갑자기 북창령원을 노린 것부터 그 뒤로 일어난 변고들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게다가 완벽한 승리를 거둘 줄 알았던 용마궁은 신비로운 여인이 나타나면서 열세에 처했고, 육대 지존 중 일부가 중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 그중 세 명은 사망했다.
잇따라 여인은 9급 지존에 이른 무량노조도 손쉽게 물리쳤으니, 이토록 놀라운 실력에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시각, 용마궁에는 이제 지존급 실력자가 세 명밖에 남지 않아 더는 북창령원을 상대할 수 없었다. 흑룡지존 등은 돌아가자마자 고생해서 지은 곳을 버리고 본부에 모였다.
북창령원에서 용마궁을 완전히 없애버릴 이 절호의 기회를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이튿날, 북창령원 장로와 선생들은 기세등등해 용마궁으로 찾아갔다. 북창령원이 여태껏 조용히 지내 아무도 그 진정한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그들을 무시했는데 오늘을 계기로 더는 그런 마음을 품을 사람은 없었다.
북창령원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면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느꼈을 것이다.
북창령원의 기세에 용마궁 사람들은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었고 그중 일부는 심지어 용마궁을 배신하고 떠나기까지 했다.
흑룡지존마저 숨어든 상황에서 나머지 사람들만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후로, 사흘이 지나자 북창령원에서는 북창대륙에 있는 용마궁 별궁을 전부 없애버리고 그 본부인 땅 밑에 숨겨진 오래된 궁전에 이르렀다.
북창령원에서는 이곳에 와서야 공격 속도를 늦췄다. 용마궁 본부에는 오래전부터 전해진 상고의 영진이 존재했는데 이를 가동하려면 지존급 실력자가 적어도 다섯 명은 있어야 했다.
그해에도 용마궁은 북창령원과의 싸움에서 지고 이곳에 숨어들었는데 북명룡곤마저도 이 영진을 깨지 못해 결국 물러났었다.
태창 원장은 이번에도 북창령원의 모든 강자에게 상고의 영진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는데 역시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용마궁에는 비록 지존이 세 명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턱대고 공격하는 것은 괜히 힘을 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태창 원장은 영계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사람을 보냈다. 다만, 영계가 이런 일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 걸 잘 알아 긴가민가했는데 소녀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소녀도 용마궁이 엄청 싫은 모양이었다.
영계는 도착하자마자 상고의 영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비록 영진 방면의 조예가 목진의 어머니보다는 못 하지만 소년에 비하면 훨씬 나아 며칠 동안 연구한 끝에 그 규칙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 * *
어두운 지하에 엄청난 파동이 일었고 가장 깊숙한 곳에는 마룡처럼 내려앉은 거대한 광막이 놓여있었다. 이는 조금 혼탁하긴 했지만 오래된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 묵직해 보였다.
한편, 영계는 허공에 서서 한기 어린 눈빛으로 상고의 영진을 바라보고는 태창 원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말한 대로 준비되었나요?”
“그렇단다.”
태창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우리가 상고의 영진에 교란 작전을 펼치면 북명 선배께서는 한 방에 이를 부수세요!”
이번에는 북명룡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래.”
북명룡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용마궁 쪽을 바라봤다.
“공격하라!”
영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창령원의 강자들은 웅장한 영력을 끌어올리며 하늘 높이 날아올라 이곳 하늘을 밝혔다.
빛줄기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며 상고 영진을 계속 공격하자 광막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영진 속 무늬도 점차 어두워졌다.
이때, 영계가 손을 휘두르자 태창 원장, 맥유 전주, 촉천 장로 등 지존급 강자들은 경천의 기둥 같은 영력을 내뿜어 어두워진 영진의 무늬를 공격했다.
그때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상고의 영진이 더 세게 진동하였고, 영력 기둥 아래쪽에 있던 상고의 무늬는 점차 사라지다가 영력 기둥을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