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부서진 유적 대륙
목진 등이 전송 영진에 뛰어들었을 때, 다른 영원에서도 북창령원과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웅장한 대전이 수두룩하게 서 있는 성령원의 광장에서도 사람들이 잔뜩 모여 하늘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렀다.
광장의 중심에는 학생 20명이 전부 하얀색 도포를 입은 채 서 있었는데 가슴팍에는 성령원의 휘장을 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왼쪽에 있는 소조의 한 젊은이가 수많은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훤칠한 외모에 태연하게 웃고 있는 그는 다름 아닌 희현이었다.
“희현 조장, 역시 네 인기가 제일이야.”
젊은이 뒤쪽에 서 있던 한 소년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나머지 조장들의 불만이 가득할 거야. 네가 신생의 신분으로 그들과 동등한 지위에 섰다는 것이 잔뜩 언짢아 보이던데 이번 기회에 저들한테 본때를 보여줘.”
이에 희현은 담담하게 웃으며 뒤돌아봤다.
“모풍(慕楓)아, 우리는 성령원을 대표해 출전하는 데 서로 돕고 의지해야지 싸우면 될까? 그리고 저들은 선배인데 내가 그렇게 까불면 안 되지.”
“역시 조장은 속 좁은 저들과는 완전히 달라.”
모풍이 씨익 웃으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 다들 최정예들만 파견할 거라고 들었는데 이들을 뚫고 1위를 따낼 자신은 있어?”
“나만 따르면 무조건 결승에 갈 수 있어. 대신 내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해야 해. 안 그러면 난 그 누구도 봐주지 않을 거야.”
모풍의 말에 희현이 피식 웃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절대 허세가 아니었다. 그는 성령원의 4대 성장 중 한 명이었는데 신생의 신분으로 성자가 된 것은 희현이 처음이었다.
성자는 성령원의 제일가는 강자를 뜻하는데 4대 성자 중 누구 하나 무능한 사람은 없었다.
한편, 희현의 말에 모풍 등은 흠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그 말에 부응하였다. 그들은 비록 성령원의 노참이지만 절대 희현 앞에서 우쭐대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풍 등보다 나이가 어린 소년은 상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영락없는 악마였다.
그가 성자를 따낸 과정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성령원의 성자는 네 명밖에 없어 누군가 그 자리에 오르고 싶으면 그중 한 명과 싸워 이겨야만 했다. 하여 희현은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아 성자가 되었는데 그 손에 패배한 소년은 아직도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요즘 북창령원의 정보를 알아보는 것 같던데 곧 오대원에서 제명될 학원이 뭐가 궁금하다고 그래?”
모풍이 자연스레 화두를 돌리며 물었다.
“북창령원에…….”
희현이 고개를 들어 북창령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그곳에 내 상대가 있어.”
“그래?”
모풍과 다른 조원들은 흠칫 놀라 희현을 바라봤다.
“그 사람이 북창령원에서 명성이 자자하다고 들었어. 역시 영로에서 나를 여러 번 이긴 사람이라 그런지 대단해.”
희현은 이리 말하며 씨익 웃더니 순간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에 모풍 등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희현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잘 아는 이들은 똑같이 영로에서 나온 신생이 자못 궁금했다. 희현이 이렇게까지 신경 쓴다는 것은 상대방도 절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런데 결국 승자는 나였지.”
희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뒷짐을 쥐고 하늘을 바라봤다.
“영로에서는 소꿉장난일 뿐이었지만 학원 대회에서 만나면 제대로 알려줘야지. 영로의 혈화자가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지 궁금하긴 하네. 나를 실망시키지 말았으면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이때, 종소리가 울리며 광장에 있던 전송 영진에서 눈부신 빛을 발하자 희현의 오른쪽에 서 있던 대장 세 명이 서서히 눈을 뜨고 조원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희현도 피식 웃더니 그 뒤를 따랐다.
“희현, 성령원의 올해 목표는 대회에 참석한 네 개의 조가 모두 결승전에 들어가는 것이야. 부디 우리 발목을 잡지 말았으면 해.”
평범하게 생긴 청년이 피식 웃으며 희현한테 말을 던지고 전송 영진에 뛰어들었고, 나머지 두 소조는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누가 발목을 잡을지는 두고 봐야 알지.”
희현은 앞서간 노참들을 보더니 비웃듯 피식 웃으며 모풍 등과 함께 전송 영진에 들어섰다.
* * *
다른 학원들과 달리 여인으로만 가득 찬 만봉령원은 공기마저 더 부드러운 것 같았다.
이곳 학생들도 생화로 수놓은 높은 전망대 주위에 모여 그곳의 맨 앞쪽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몸에 달라붙는 황금색 갑옷을 입은 소녀는 새하얀 피부에 잘록한 허리, 기다란 다리에 예쁘장한 얼굴까지 갖춘 완벽한 실력자로 무척 자신만만해 보였다.
그녀는 한 마리의 봉황처럼 고귀하고 자신감 넘쳤고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소녀의 모습에 남자를 막론하고 여인들마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 옆에는 다른 여인들도 서 있었지만, 그녀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 소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영로의 종점에서 벌어졌던 왕들의 전쟁을 떠올렸다. 마지막까지 갔던 사람 중 어느 하나 호락호락한 상대가 없었는데 그중에 희현도 포함되었다.
소녀는 그날, 희현과 제대로 싸울 거라고 여겼는데 검은색 그림자가 나타나 희현을 막을 줄은 몰랐다.
검은색 그림자와 희현이 모두 중상을 입어 소녀가 1위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승리를 거둔 소녀는 희현과 싸우다가 다친 검은색 치마를 입은 소녀를 바라봤는데 절세의 미모에 유리구슬같이 맑은 눈망울을 가진 소녀는 크게 다쳤는데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온청선 자신의 실력과 비슷하다고 느낀 첫 여인으로 그녀가 마음에 쏙 들었다. 검은색 치마를 입은 소녀의 이름은 낙리로 북창령원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위잉.
그때 앞쪽 공간에 있던 거대한 전송 영진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을 발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녀는 씨익 웃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함성 따위는 무시하고 기세등등하게 전송 영진으로 향했다.
‘낙리, 넌 나의 것이야!’
* * *
같은 시각, 무령원, 청천령원과 같이 실력이 뛰어난 다른 학원들의 전송 영진에서도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학원을 대표하는 학생들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곧 학원 대회의 전장에서 만나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일 것이다!
수많은 학원이 하나같이 유적 대륙으로 눈길을 돌렸다.
* * *
전송 영진의 눈부신 빛 때문에 목진 등은 머리가 핑 돌았다. 그러나 공간 파동이 금세 안정을 되찾았고 눈부신 빛도 빠르게 사라졌다.
곧 전송을 마칠 거란 의미였다.
목진 등은 바로 체내의 영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낯선 전장에서 잠시라도 방심하면 바로 탈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눈부신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목진 등의 눈앞에 낯선 곳이 펼쳐졌다. 끝없이 뻗은 대지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골짜기가 가득하였는데 이는 전부 무서운 전쟁이 남긴 흔적이었다.
또한, 상고의 느낌이 물씬 나는 이곳은 황량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부서진 유적 대륙이었다. 이곳이 바로 학원 대회의 전장이었다!
목진은 주위를 쓰윽 훑더니 바로 눈길을 거뒀다. 이들은 만 장 정도 크기의 거대한 암석 위에 서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빛의 기둥이 아직도 쉼 없이 암석에 내리꽂혔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암석 위에 수백 개의 소조가 나타났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잔뜩 경계하여 주위를 살폈고 누군가는 웅장한 영력의 영기까지 선보였다.
“심창생 등이 우리와 갈라진 것 같아.”
낙리가 목진한테 다가가 속삭였다. 거대한 암석 위에 심창생 등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원패를 소환했는데 그 위에 숫자 ‘10’이 적혀있었다. 이것이 바로 학원 대회의 최초 점수였다.
“이곳에 들어올 때 각 소조에 10점씩 부여하는군.”
목진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어떡할까?”
서황이 물었다. 목진이 조장이니 그의 말에 따라야 했다.
“일단 이곳을 떠날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곳은 절대 안전하지 않아.”
조청삼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기 학원 학생들 외에는 전부 적이라 그들의 점수를 빼앗아야 결승전에 올라갈 희망이 있었다.
목진도 주위를 쓰윽 훑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급할 것 없어. 최강자가 강자를 잡고 강자는 약자를 잡고 약자는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법칙이야. 그러니 점수를 올리려면 무조건 다른 소조의 손에서 점수를 빼앗아야 하는데 이곳이 우리한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그럼 바로 나서려고?”
모풍양이 흠칫 놀라 물었다. 목진이 이렇게까지 빨리 손을 쓰려고 할 줄 몰랐다.
“오대원 소조는 우리뿐이야.”
낙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주위를 쓰윽 훑었다.
“여기엔 대형 학원 출신이 몇 개 있고 실력도 괜찮아. 나머지는 절대 우리 상대가 아니야. 그런데 누군가 힘을 합쳐 우리를 상대하려 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는 게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승산은 있어.”
이에 목진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실력이 괜찮은 소조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실력이 비교적 약한 소조를 노리고 있었다. 곧 학원 대회의 잔인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목진은 깊게 숨을 들이켰는데 공기 속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어느새 살기 가득한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에 서황 등은 흠칫 놀랐지만 정작 낙리는 이제야 영로의 혈화자를 보는 것 같았다. 목진은 영로에서 늘 이런 모습이었는데 북창령원에 들어와서부터 그곳 분위기 때문에 잠시 꼬리를 내렸던 것이었다.
영로에서 피바람이 불게 했던 소년은 점차 억눌렀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야?”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씩씩거리는 소리에 다들 고개를 돌려보니 상대편에서 씨익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가 뭘 하긴, 어서 원패나 내놔. 굳이 따지자면 괜히 우리 만령원(蠻靈院)의 눈에 띈 너희 탓이 아닐까?”
피식 웃으며 말하는 청년은 통천경 후기에 이르렀다.
“꿈 깨!”
만령원의 소조에 포위된 사람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외쳤다.
“뺏어!”
만령원 사람들은 더는 말을 섞지 않고 공격을 개시했다. 대장마저 통천경 후기에 이르지 않은 소조를 이기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쿵!
만령원에서 웅장한 영기를 싣고 공격하자 상대방은 바로 강력한 공세에 패배를 인정했다.
만령원을 시작으로 수백 갈래의 영력이 폭발하며 하늘 높이 솟아올라 이곳 하늘을 수놓았다.
퍽! 퍽!
사람들은 굶주린 맹수처럼 약자한테 달려들었고 목진 등은 옆에서 조용히 아수라장이 된 전장을 지켜봤다. 맹수들이 최약체를 잡아먹으면 사냥꾼이 나서 맹수를 잡으려는 생각이었다.
“우린 언제 싸워?”
모풍양은 손이 근질근질했다.
“최약체를 공격하는 것은 너무 귀찮은 일이야.”
목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곧 정리될 거야.”
“그래?”
목진의 말에 조청삼 등은 흥미진진하게 전장을 바라봤다. 싸우고 있는 사람 중에는 그들보다도 실력이 강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육신난을 건넌 낙리와 그런 상대와 맞서도 끄떡없는 목진이 있어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한편, 비명으로 가득 찬 전장에서 사람들은 싸우기 바빠 조용히 서 있기만 한 목진 등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이것도 잠시뿐이었다. 언젠가 첫 번째 싸움이 끝나면 이들을 노리는 사람이 없어도 목진 등이 먼저 나설 것이다. 학원 대회에서 같은 학원 출신을 제외하면 모두 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