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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356화 (355/1,000)

356화. 추억

“가자!”

말을 마친 소황과 소왕은 거의 동시에 도망갔는데 어느새 제자리에서 사라진 낙리가 귀신같이 소왕 앞쪽에 나타나 태연한 표정으로 낙신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앞쪽 공간이 찢어지며 눈부신 검광이 빠르게 소왕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순간 안색이 어두워진 소왕은 황급히 우각궁을 당겨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살을 쐈다.

퍽!

검광은 화살을 손쉽게 부수고 사정없이 소왕의 가슴팍을 때렸다.

소왕의 옷이 찢어지자 안에 영광이 번쩍이는 갑옷이 드러났다. 이는 방어형 영기로 짙은 광권을 발하며 소왕을 보호하였다.

그런데 낙신검의 공격을 당해낼 방어형 영기는 거의 없었기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바로 뚫렸다.

소왕은 가슴에서 피를 내뿜으며 뒤로 튕겨 나가 산봉우리에 꽂혔다.

낙신검을 쥔 채 허공에 서서 이를 지켜보던 소녀의 긴 머리가 바람에 가볍게 휘날렸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다들 넋을 잃었다.

쿵!

다른 쪽 허공에서 봉황의 맑은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뒤로 튕겨 나갔는데 스쳐 지나간 나무들은 그 여파에 바로 폭발하였다.

녀석은 수백 장 정도 물러나서야 가까스로 멈춰 섰다. 그는 다름 아닌 소황으로 그의 얼굴은 어느새 사색이 되었고 입가에 피를 머금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앞쪽에 금광 한 줄기가 날아오더니 온청선이 나타났는데 황금색 장창을 든 채 한기 어린 눈빛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소황이 친 영진의 위력은 상당했지만 전투력은 소왕보다 훨씬 뒤처져 절대 온청선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한편, 낙리와 온청선의 실력에 사람들은 너무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청선은 한때 학원 대회 1위, 현재 3위로 그 실력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온청선 못지않게 아름다운 낙리에 대해서는 대부분 몰랐다. 낙리는 외모 못지않게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기세등등하고 오만한 온청선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봉황이라면 조용한 낙리는 고요한 골짜기에 핀 아름다운 연꽃 같았다.

하여 사람들은 목진 옆에 조용히 서 있기만 하던 소녀의 놀라운 실력에 깜짝 놀란 것이다.

묵어 등 중원맹 사람들은 소황과 소왕의 모습에 얼굴이 창백해졌고 패배감으로 사기가 뚝 떨어져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목진은 중원맹 사람들을 쓰윽 훑더니 소황한테 눈길을 돌렸다.

“생각이 안 바뀌었겠지?”

목진은 소황의 답을 듣지도 않고 낙리와 온청선에게 눈치를 주자 두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공격할 준비를 했다.

“잠깐만!”

안색이 확 어두워진 소황은 망설이다가 정말 한쪽 손을 잃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점수를 줄게!”

말을 마친 소황이 고개를 들어 묵어 등을 바라보자 잠시 고민하던 녀석들은 쓸쓸하게 한숨을 쉬며 원패를 건넸다.

그들은 소황과 같은 학원 출신이 아니었는데 소황 등의 실력 때문에 중원맹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득이 되기는커녕 어렵게 얻은 점수까지 전부 토해내야 했다.

이에 묵어 등은 소황에 대해 크게 실망했고 더는 중원맹에 남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묵어 등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소황은 원패를 건네받아 이를 악물고 다시 목진한테 넘겼다.

그런데 목진은 원패를 바로 온청선한테 넘겼다.

“너를 다시 1위에 올려놓겠다고 약속했잖아. 2만 점을 더해도 1위와는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졌지.”

목진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이미 2만 점을 확보한 온청선에 비해 현재 1위인 희현의 점수는 5만 점도 넘었다. 그녀가 영진에 갇혀있는 동안 녀석이 차이를 두려고 애를 쓴 것 같았다.

원패를 건네받은 온청선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점수를 갖기로 했다. 온청선은 결국 2위였던 무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머지않은 산봉우리에 서서 번쩍이는 원패를 확인한 무령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일 뿐, 전혀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순위권에 큰 변화가 생길 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황 무리는 혹 떼러 갔다가 혹만 붙여 온 꼴이 되었구나.”

무령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건 반칙이에요.”

무영영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온청선이 2위에 오른 것이 못마땅하였다.

“저들이 목숨을 걸고 얻은 점수인데 반칙일 것까지 있을까?”

무령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휘익 젓더니 먼 곳에 서 있는 소년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오늘을 계기로 목진과 희현은 완전히 대립하게 되었다.

점수를 취한 온청선은 원패를 대충 소황한테 던졌는데 반이나 줄어든 점수를 본 소황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9위였던 소황 무리는 이렇게 순위권에서 사라졌다.

“가자!”

소황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목진을 쏘아보더니 산에서 막 나온 소왕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묵어 등도 머뭇거리다가 그 뒤를 따랐지만 소황 등과 멀리 떨어진 채 걸었다.

목진은 더는 소황의 앞길을 막지 않고 한기 어린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희현, 이번엔 끝까지 가보자!”

* * *

깊은 골짜기의 높은 벼랑에서 엄청난 소리를 내며 폭포수가 떨어져 골짜기 전체가 진동했다.

폭포수는 무서운 힘을 싣고 쏟아져 내렸는데 일정하게 내려오다가 갑자기 위로 튕겼다가 다시 쏟아져 내렸다. 폭포수가 잠시 멈춘 곳에 은은한 영광이 보였는데 그 속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무서운 물결의 힘에도 끄떡없었고, 한 시진이 지나서야 서서히 눈을 떴는데 눈동자에서 눈부신 빛이 번득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나왔는데 영광으로 온몸을 감싸 피부가 옥석처럼 영롱했다.

만근 무게와 같은 폭포수의 충격은 그한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고 그의 몸에는 물방울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폭포 옆에 있는 암석에 내려앉았다.

하얀색 도포를 입고 검은색 장발을 풀어헤친 채 상냥하게 웃고 있는 청년은 바로 희현이었다.

그의 가슴팍에 걸린 휘장은 태양이 떠올라 빛을 비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성령원의 표식이었다.

슉.

옆에서 미세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희현 옆에 나타났는데 똑같은 옷차림을 한 또 다른 청년이었다.

“소황 등이 16위권에서 사라졌고 온청선이 2위가 됐어.”

“다들 실패했나 보군.”

희현이 무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혀 놀랍지 않은 표정이었다.

“모풍, 목진은 나타났어?”

모풍이라 불리는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목진이 나타나 막수 등을 단숨에 쓰러뜨렸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단숨에 쓰러뜨렸다…….”

희현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목진이라면 그럴 법도 하지. 그런데 이렇게까지 수련 속도가 빠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영로에서 1년은 버린 거나 마찬가지라 수련 속도가 느릴 거라고 여겼는데 말이야. 그런데 막수 등의 점수는 왜 그대로야?”

“목진이 녀석들의 점수를 뺏지 않고 그냥 보냈어. 대신 소황 등은 호되게 혼냈다고 들었어. 점수를 내놓지 않으면 손을 자르겠다고까지 했다네?”

모풍의 말에 희현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한쪽은 관용을 베풀고 다른 쪽으로는 위엄을 과시했다니, 목진은 역시 똑똑해. 적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들라고 막수 등을 보냈는데 속지를 않네?”

“막수 등이 실패할 걸 알면서 보냈던 이유가 그거였어? 그런데 목진은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녀석이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애쓸 필요가 없었겠지.”

희현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날 막수 등은 우리 꾀에 넘어와 빚을 지게 된 거니까. 오늘 일로 목진의 인정을 갚기 위해서라도 더는 우리를 상대하지 않을 거야.”

“그따위 녀석들은 안 보면 그만이야. 저들이 16위권에 들었던 것도 우리 덕분이지. 그 뒤에 실력이 더 뛰어난 소조가 얼마나 많은데 우리의 보호가 없으면 바로 순위권에서 내려갈 거야.”

모풍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이야? 목진은 온청선과 손을 잡은 것 같아. 온청선도 무서운 사람이라 저들의 연합이 우리한테 좋은 일은 아니야.”

모풍의 말에 희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마저도 온청선은 꺼려졌다.

“일단 지켜보자. 저들 때문에 괜히 성급할 필요는 없어. 그해, 영로에서도 목진을 내쫓았으니까 이번에도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줄 거야.”

이에 모풍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희현과 함께 학원 대회에 참석하면서 무서운 실력을 봐온 그는 학원 대회에서 희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희현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모풍을 바라보며 물었다.

“목진 곁에 낙리라는 여인이 있었지?”

희현의 목소리가 이상해진 것을 발견한 모풍은 그를 힐끗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계속 목진과 함께 있고 실력이 엄청나. 아마 온청선 못지않을 거야.”

“낙신족의 차기 황이 평범할 리 있을까…….”

희현이 중얼거렸다. 낙리가 항상 목진 곁에 있다는 말에 속내를 잘 감추는 희현도 질투가 났다.

영로에서 처음 만났을 때, 소녀의 유리알같이 맑은 눈동자와 은하수처럼 눈부신 장발, 남다른 품위에 가슴이 뛰었던 희현은 목진과 누구 하나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사이가 된 것은 전부 낙리 때문이었다.

희현이 뭘 하든 소녀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소녀는 그를 위해 웃어주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온 희현은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사람은 처음이라 나쁜 감정, 심지어 죽이고 싶도록 미워해도 좋으니 소녀가 자신을 기억해줬으면 했다.

그래서 희현은 낙리한테 꼼수를 부렸고 쉽게 화를 내지 않던 목진이 노발대발해 혈화를 저질러 영로에서 쫓겨난 것이다.

목진이 영로에서 쫓겨나던 날, 희현은 멀리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소년의 무덤덤한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낙리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녀는 목진이 떠나는 모습을 조용히 보고만 있었고 희현이 있는 쪽으로는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목진이 시야에서 사라져서야 자리를 떠났다.

그날, 희현은 유난히 화가 많이 났다.

영로는 과정보다 결과가 훨씬 중요한 곳이었다. 희현은 목진을 영로에서 완벽하게 내쫓는데 성공했지만 별로 기쁘지 않았다.

목진이 영로를 떠날 때의 무덤덤한 눈빛과 낙리의 뒷모습만 기억날 뿐 전혀 쾌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목진이 영로에서 나간 뒤로 희현은 단 한 번도 낙리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영로의 종점에서 마주쳤는데 소녀는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장발을 드리운 채 유리알 같은 눈망울로 희현을 쓰윽 훑었다. 그 짧은 순간에 희현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자신을 한껏 뽐냈다.

그러나 소녀는 그것을 전부 무시하고 수많은 천재들 앞에서 수중의 장검으로 희현을 가리키더니 묵묵히 공격을 개시했다.

매섭고 포악한 공격에 두 사람은 결국 중상을 입었다.

소녀는 영관자가 될 자격마저 포기하였고 희현의 자격까지 박탈하였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희현과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여태껏 참아왔던 분노를 터트렸다.

그때, 희현은 만신창이 된 소녀를 바라보며 묵묵히 살기를 품었다. 그러나 그는 낙리가 아닌 목진을 죽이고 싶었다.

녀석은 그저 운이 좋아 자기보다 조금 빨리 낙리와 만났을 뿐이었고, 그것만 아니었으면 소녀는 분명 자신 곁에 있었을 것이다.

목진만 사라지면 희현은 영로에서 진정한 승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영예든 여인이든 그가 모두 차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희현이 주먹을 꽉 쥐자 옥석 같은 피부에 핏줄이 불끈거렸고 눈에 한기가 가득 서려 옆에 서 있는 모풍마저 소름이 끼쳤다.

희현은 먼 곳을 노려보며 속으로 외쳤다.

‘낙리, 이번에야말로 네가 보는 앞에서 목진을 제대로 짓밟아 줄 거야. 네 앞에서 목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반드시 보여주겠어. 수단이든 실력이든 나야말로 너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내라는 걸 증명하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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