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잠시 휴전
어느새 안색이 한껏 어두워진 목진은 검은색 벼락이 떨어진 곳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매의 울음소리는 그곳에서 전해진 것이 분명했다.
“저건 뭐지?”
목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개자탁을 만지작거렸다. 오래된 매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개자탁 속 구유작의 검은 알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주의 깊게 검은색 벼락이 떨어진 곳을 주시했는데 벼락이 사라지자마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목진을 포함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뇌광이 가시자 희현은 다시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는데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고 매서운 공격에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럴 리가!”
서황 등은 안색이 한껏 어두워졌다.
신백난 세 번째 단계를 건넌 고수라도 목진의 완벽한 공격에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정상인데 희현은 왜 끄떡없단 말인가?
이에 낙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온청선을 힐끗 봤다.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방금 우리가 들은 오래된 매의 울음소리는…….”
낙리의 말에 온청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방 지방 8위인 원고천룡매(遠古天龍鷹) 같아. 희현한테 설마 원고천용매의 보물이 있어 저런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걸까?”
낙리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기만 했다. 목진의 완벽한 공격마저 이토록 쉽게 받아내다니, 희현은 역시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희현이 참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목진의 엄청난 공격에도 끄떡없는데 학원 대회에서 그를 과연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령, 온불승, 혈천하, 유청운, 방운 등 최정예들도 이내 정색하여 희현을 바라봤다. 목진도 멀리 떨어진 녀석을 뚫어져라 노려봤다. 이 정도 공격이면 반드시 희현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목진은 희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상대라고 생각했다.
반면, 목진의 무서운 공격을 막아낸 희현은 기뻐하기는커녕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소년을 노려봤다.
“목진, 의외네?”
희현의 말에 깃든 살기는 하늘을 뚫을 것만 같았다.
그는 당장 소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오늘 희현은 목진을 상대하기 위해 너무 많은 걸 보여줬고 조금 전에는 여태껏 감춰왔던 필살기까지 선보였다.
결승전에 들어가기 전에 필살기를 너무 많이 선보이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번 대회에는 목진을 제외하고도 실력이 엄청난 고수가 많았다.
특히 낙리와 온청선은 목진 못지않게 두려운 상대였는데 필살기를 많이 드러낼수록 결승전에서의 위험 부담이 더 커질 것이다.
희현은 목진이 영력난 밖에 건너지 못해 쉽게 쓰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이 자신을 상대로 이 정도까지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
“나도 조금 놀랐어. 보아하니 아직도 숨겨둔 필살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것으로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지 않아? 한 번 시도해보는 게 어때?”
목진은 살기 가득한 희현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에 희현 주위를 맴도는 살기가 더 짙어졌는데 낙리도 이를 눈치채고 낙신검을 꽉 쥐었고 옆에 있던 온청선도 녀석을 잔뜩 경계했다.
사람들은 희현이 내뿜은 난폭한 살기에 감히 입을 열지 못했지만 정작 목진은 무덤덤하게 녀석을 쳐다보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센 척하기는, 못 하겠으면 이만 접어.”
목진과의 싸움을 더 이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 희현은 소년의 말에 입가를 파르르 떨더니 손에 힘을 풀었다. 숨겨둔 필살기를 전부 선보이지 않고서는 계속된 싸움은 무리였다. 결승전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목진한테도 필살기가 있었고 그 전부를 선보였다고 확신할 수 없어 정말 끝까지 싸웠다가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진다면 그건 희현한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희현이 일단 쓰러지면 사람들은 전부 그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하여 이번 싸움은 바로 멈춰야만 했다.
희현이 살기를 거두자 주위에 퍼졌던 위압감도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데 최정예 고수들만은 아쉬운 듯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희현이 목진을 힐끗 보더니 조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목진, 결승전에서 실패가 무엇인지 네게 제대로 알려줄 거야. 그러니까 그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마음껏 즐겨.”
희현 등은 이미 떠났지만 살기 가득한 목소리는 그곳에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그 무서운 기운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한동안 입도 열지 못했다.
희현이 비록 철수하긴 했지만 아무도 그가 목진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아직 진정한 실력을 선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다들 잘 알았다.
오래된 매의 울음소리만 생각해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목진의 검은색 벼락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들 잘 아는데 희현이 결국 이를 무사히 막아냈으니, 아직 선보이지 않은 필살기는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희현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필살기를 전부 내보일 수 없었다. 목진도 절대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실력은 영력난 밖에 안 되지만 목진의 진정한 전투력은 쉽게 가늠할 수가 없었다. 현장에 있는 그 누구도 이제 그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희현 같은 괴물급 신인마저도 혈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떠났으니 말이다.
그가 오늘 목진과 끝까지 싸워 대결에서 이긴다고 해도 엄청난 대가를 치를 것이 분명했고, 낙리와 온청선을 상대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 될 것이다. 그는 두 여인을 상대로 이긴다는 확신이 없었다.
사람들은 오늘, 희현이 먼저 떠났지만 목진과의 대결이 이대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희현은 결승전에서 오늘 못다 한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그는 일단 결승전에 들면 거리낌 없이 숨겨둔 필살기를 선보일 것이고 그때야말로 진정한 용쟁호투가 펼쳐질 것이다.
한편, 태연하게 허공에 서서 희현이 떠난 것을 확인한 목진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는데 안색이 조금 창백했다.
영력난의 실력으로 짧은 시간에 천목신륜, 목신술과 어뢰술 등 세 가지 신술을 부린 탓이다. 엄청난 소모였지만 영력난에 이르러 영력의 힘이 많이 강해져 다행이었다. 만약 목진이 아직도 육신난이었다면 절대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대결은 흐지부지 끝났지만 목진은 희현의 실력을 제대로 느꼈다. 녀석은 역시 엄청났다.
“희현은 역시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야.”
목진은 한기 어린 눈빛으로 희현이 떠난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영력난으로는 역시 부족해.”
희현은 아직 숨기고 있는 것이 많아 진정한 실력을 알 수는 없지만 목진은 처음으로 자신의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특히, 신백난 세 번째 단계를 건넌 상대방과 비교했을 때 영력 차이가 너무 컸다.
목진은 비록 막강한 육신으로 두 사람의 실력 차이를 좁혔지만 역시 영력이 중요했다. 앞으로 위력이 상당한 필살기를 선보이려면 대량의 웅장한 영력이 필요할 것이다.
희현과의 싸움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목진은 실력을 더 끌어올려야 했다.
“결승전이라…… 곧 다시 만나겠네? 희현, 그때 가서 숨겨뒀던 필살기를 전부 보여줘. 그리고 과연 누가 최종 승리를 할지 지켜보자.”
목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벅찬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주위에 퍼졌던 살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사람들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멀리 떨어져 있는 목진을 바라봤다. 그리고 일부는 주위 사람들을 경계하며 질서정연하게 철수하기 시작했다.
희현과 목진의 대결이 끝났으니 계속 남아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다른 강적의 사냥감이 되면 큰일이었다.
이렇게 1각도 안 되는 사이에 떠들썩했던 곳은 다시 조용해졌고 아수라장이 된 전장과 부서진 산봉우리만 떡하니 자리를 지켰다.
“허허, 낙신족의 차기 낙황이 마음에 품은 사내는 역시 대단하군.”
혈천하가 피식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다.
“혈신족에서는 멀리에서 힘들게 학원 대회까지 참가하러 왔으면서 참 한가한 것 같아.”
목진이 무덤덤하게 혈천하를 보며 말했다.
“낙신족의 차기 여황도 여기 있는데 우리가 학원 대회에 참석한 것이 뭐가 이상할까?”
혈천하는 낙리한테 눈길을 돌리더니 씨익 웃었다.
“낙신족의 유일한 희망인 낙리를 죽이면 그들은 아마 완전히 절망에 빠지겠지?”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진의 표정이 표독스러워졌다. 희현을 상대할 때도 이런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혈천하는 순간 흠칫 놀랐다.
“그럼 내가 오늘 여기서 너희를 죽이는 수밖에 없겠어.”
목진은 익살스럽게 웃더니 무서운 살기를 내뿜었다.
이에 주위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혈천하 등이 어쩌다가 소년을 화나게 했는지 궁금했다.
그때 낙리가 목진한테 다가오더니 한기 어린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낙신검을 꽉 쥐었다. 신검이 미세하게 떨리며 주위에 검음이 울려 퍼졌다.
아래쪽에 서 있던 심창생, 이현통, 소훤 등도 바로 싸울 준비를 했고 온청선은 혈천하를 힐끗 보더니 황금색 장창을 소환해 녀석에게 겨눴다.
이러한 광경에 혈천하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유청운과 방운 등을 힐끗 바라봤는데 그들은 히쭉 웃으며 바로 철수했다.
방운 등은 희현과는 관계지만 혈천하와는 가깝지 않았기에 그를 위해 싸울 이유가 없었다. 특히, 목진의 무서운 실력을 확인한 뒤로 더더욱 불가능했다.
목진도 유청운 등이 그냥 떠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도 최정예 소조와 진짜 적이 되어 그들을 완전한 희현의 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에 안색이 어두워진 혈천하가 콧방귀를 뀌며 발을 구르자 혈하가 휘몰아치며 녀석들의 몸을 휘감았다.
“너무 우쭐거리지 마. 결승전에서는 그렇게 웃지 못할 거야.”
혈천하가 말을 마치자 혈하가 폭발해 혈광으로 변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낙리를 잡고 싶었지만 상대방의 진영이 엄청나 정말 싸웠다가는 큰코다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목진은 이번에도 혈천하 등이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결승전에서 녀석들을 만나면 영원히 혈신족에 돌아가지 못하게 할 거야!”
목진은 살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여기서 저들을 죽이면 일이 복잡해질 테지만 결승전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도 낙리 못지않게 혈신족을 없애고 싶었다.
그때 낙리가 고개를 돌리더니 한껏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
목진의 엄청난 살기에 낙리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몹쓸 녀석들이 감히 내 여인을 낚아채려 하다니,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누가 네 여인이라고 그래!”
낙리는 부끄러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목진을 쏘아봤다.
이에 소년은 히쭉 웃더니 소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목진의 서슴없는 행동에 낙리는 깜짝 놀라 바로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창백해진 소년의 안색에 움직임을 멈추고 희현이 사라진 곳을 쏘아봤다.
그때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 목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무령이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고, 그 뒤에는 빨간색 치마를 입은 무영영이 무뚝뚝하게 서서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