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화. 드디어 나타난 구유
끽!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서운 위압감이 형성되자 학생은 물론이고 일부 학원의 원장들도 안색이 잔뜩 어두워졌다.
“저건 원고천룡매의 본체가 아닌가?”
“역시나 정백의 힘이 아니라 본체였군. 그런데 원고천룡매가 왜 희현의 몸속에 숨어있었던 거지? 저 정도 실력으로는 절대 녀석을 제압할 수 없었을 텐데…….”
원장들은 잔뜩 정색하며 희현의 뒤쪽에 나타난 영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원고천룡매는 무려 영수방 8위로 완전히 자라면 지존경과 비슷한 실력을 갖춘다. 그런데 지존해를 겨우 만든 희현은 아직 지존경에 이르지 않아 원고천룡매를 제압해 이를 마음대로 조종하기란 불가능했다. 이에 원장들이 어리둥절해진 것이다.
“희현의 뒤쪽에 서 있는 원고천룡매의 실력은 사품 지존에 이른 것 같은데 대결을 이어갈 필요가 있을까…….”
한 원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품 지존은 보통 학원의 원장급 실력으로 오대원에서도 실력이 최정예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다. 이는 학생이 이룰 수 있는 경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흥, 천성 원장, 이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원고천룡매는 희현의 것이 아닌데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은 규칙에 어긋나는 것 같네!”
광좌에 앉아있던 태창 원장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원고천룡매를 보며 말했다.
“태창 원장, 원고천룡매는 우리 성령원과 아무런 관계도 없네. 이건 희현이 혼자 한 일이고 지금은 녀석과 기생 관계라네. 희현도 그 힘을 얻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렀네.”
“기생 관계라니…….”
천성 원장이 미소를 지으며 한 말에 다른 세 원장은 깜짝 놀랐다.
기생이란 엄청나게 위험한 방식으로 영수가 체내에 기생하면서 언젠가 숙주를 대체하거나 숙주가 녀석을 완벽히 제련해 그 힘을 얻는 목숨을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실패한 쪽은 되돌릴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보통, 사람과 강대한 영수를 막론하고 이런 방식을 선택할 존재는 거의 없었다. 아무도 자기 체내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싶지 않을 것이고 영수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사람한테 기생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말 보기 드문 상황이었다.
“원고천룡매는 희현의 육신이 탐이 나 빼앗고 싶어 하고, 희현도 녀석의 힘이 탐이 나 기생 관계를 맺었다네. 그러니까 희현한테 이 힘은 공짜로 얻은 것이 아니니 반칙이 아니라네.”
천성 원장이 가볍게 웃으며 해명하자 원장들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원고천룡매가 실력이 미약한 희현을 쓰러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희현은 왜 이런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다.
태창 원장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희현이 얻은 힘이 온전한 그의 힘은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한 거래라 뭐라 할 수도 없었다. 하여 그는 목진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녀석한테 진정한 원고천룡매가 있었어!”
온청선은 이를 악물며 상고의 영수를 보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가 희현을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
이에 낙리도 주먹을 꽉 쥐며 목진을 쳐다봤는데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그도 적잖게 놀란 것 같았다.
“네가 먼저 물러나.”
낙리가 속삭였다.
“왜 그래?”
온청선이 깜짝 놀라 물었다.
“목진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난 그 옆을 끝까지 지킬 거고.”
낙리가 가볍게 웃으며 한 말에 결연함이 묻어났다.
“원고천룡매의 실력은 사품 지존과 비슷해서 너와 목진이 함께 싸운다고 해도 절대 그 상대가 안 될 거야.”
온청선은 낙리가 너무 걱정되었다.
“그냥 포기해. 희현이 말도 안 되는 수를 쓰고 있다는 걸 다들 잘 알아. 이런 힘은 절대 수련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잖아!”
“진정한 실력 싸움을 할 거였으면 희현은 영로에서 이미 졌어!”
낙리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렇다고 목진이 물러날 것 같아?”
이에 온청선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목진과 희현 사이의 원한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 무던한 소년은 고집이 유난히 세 희현과 싸워 승산이 없다는 걸 알아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바보 같아.”
온청선이 한숨을 쉬며 말했지만 녀석의 고집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럼 나도 같이 싸우자!”
온청선은 결국 그들과 함께하기로 했다. 여태껏 쉬며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해서 함께 싸울 수 있었다.
소녀의 말에 낙리는 조금 놀랐다. 온청선은 이 싸움에 동참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에 온청선은 괜히 부끄러워 쭈뼛거리며 변명했다.
“목진이 나를 도운 것도 있고 해서 그러는 거야.”
소녀의 말에 낙리는 생긋 웃더니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사람들은 원고천룡매의 등장에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위압감은 그들의 한계치를 뛰어넘었다. 그의 경지는 지금 학생이 닿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화색이 되었던 북창령원 학생들도 어느새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정작 희현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목진을 노려보며 씨익 웃었다.
“절망스럽지 않아?”
그런데 목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희현의 뒤쪽에 서 있던 원고천룡매는 대수롭지 않게 목진을 쓰윽 훑더니 희현한테 고개를 돌렸다.
“저따위 녀석 때문에 나를 소환한 거야? 희현, 내 힘을 사용할수록 네가 더 위험해진단 걸 명심해.”
이에 희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실력이 널 뛰어넘기 전에 네가 내 몸을 차지하길 바랄게. 그런데 그전까지 우리는 한 몸이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저 녀석이나 해결해줘.”
“원하는 대로.”
원고천룡매는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보며 사악하게 웃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눈부신 빛이 되어 희현의 몸으로 들어갔다.
잇따라 희현의 등에 난 날개는 신속하게 커져 백 장 정도가 되었고 두 손은 점차 뾰족해졌으며 어두운 보랏빛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내뿜는 영력 파동은 진정한 지존경에 이르렀다.
희현은 체내의 웅장한 힘에 흐뭇하게 웃더니 한기 어린 눈빛으로 목진을 쏘아보며 날개를 퍼덕였는데 어두운 보라색 영력 폭풍이 사정없이 소년에게 향했다.
이에 목진은 이내 정색하며 대서미마주로 반격했다.
쿵!
영력 폭풍에 맞은 대서미마주가 격렬하게 떨리더니 뒤로 멀리 튕겨 나갔다. 목진은 이를 손으로 잡으려다가 두 팔에 엄청난 고통을 느꼈고 손은 찢어져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그의 육신이 강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너 따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희현은 비아냥거리며 뒤쪽에서 들려오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뒤로 장풍을 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보라색 영력이 휘몰아쳤다.
쿵!
목진을 도우려고 나섰던 낙리와 온청선도 바로 튕겨 나갔다. 역시 두 소녀는 전혀 희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슉!
희현이 날개를 퍼덕이며 바로 목진의 앞에 나타나 어깨를 공격하자 소년 역시 피를 토하며 멀리 튕겨 나갔다.
“속도가 너무 느린 것 아니야?”
목진이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자 뒤쪽에서 희현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또 장풍을 쐈다.
퍽!
목진은 바로 바닥에 꽂혔는데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입가의 피를 닦으며 살기 어린 눈빛으로 희현을 쳐다봤다. 그한테서 두려움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목진 형, 이만 포기해요.”
북창령원 학생들은 목진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고 일부 여학생들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북창령원 학생들한테 절대적인 믿음을 줬던 목진의 이토록 초라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다른 학원 학생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승패를 막론하고 완강한 의지만으로도 목진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누가 이길지 끝까지 싸워보자!”
목진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희현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정말 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희현을 무사히 떠나보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소년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목진, 저따위 근본도 없는 새의 공격에 낭패를 봐야 되겠어?”
목진은 잘못 들은 줄 알고 잠시 넋 놓고 서 있었다.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구유작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들려온 구유작의 목소리에 목진은 멈칫하더니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드디어 잠에서 깬 거야?”
그런데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아 목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환청이라도 들린 건가 싶었다.
“히히, 내가 엄청 그리웠나 봐?”
그때 구유작이 배시시 웃으며 묻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에 목진은 눈을 흘기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구유작이 잠든 지 두 해 정도 지났는데 이제야 드디어 깨어났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목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곧 죽게 생겼는데 별수 있을까? 신수가 된 지 하루도 안 됐는데 바로 죽기는 싫어.”
구유작이 피식 웃으며 한 말에 목진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목진은 구유작과 혈맥을 연결한 사이였고 잠시 잠들어있긴 했지만 둘 사이는 어느새 엄청 친밀해져 있었다.
“상당히 난처한 상황인가 봐.”
구유작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비록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목진은 부서진 검은 알 위에 검은색 옷을 입은 한 소녀가 앉아있는 것이 명확히 보였다. 그녀는 길쭉한 다리를 가볍게 흔들며 알의 껍데기를 깨서 잘근잘근 씹어먹으며 생긋 웃었다.
“상대는 원고천룡매로 사품 지존에 이른 것 같아.”
목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해결할 수 있어?”
“진화할 수 없는 잡종일 뿐이야. 오래 살아 지존경에 이른 것뿐인데 신수가 될 수 없으면 여기서 이제 끝이야.”
구유작이 턱을 괴고 느긋하게 말했다.
“그럼 넌 지금 몇 품 지존이야?”
“음, 나도 사품쯤 될 거야.”
목진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구유작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사품 지존이라고?”
목진은 흠칫 놀랐다.
원고천룡매는 오랜 시간 수련하여 겨우 사품 지존에 이르렀는데 구유작은 2년도 안 되는 사이에 잠만 잤는데도 실력이 이 정도까지 폭등했다. 구유작은 진화에 성공하기 전까지만 해도 현재의 목진과 실력이 비슷했다.
“난 구유작 중에서도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천재이고 혈맥이 가장 순수하니까 저따위와 날 비교하지는 마.”
구유작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저 녀석도 사품인데 가능할 것 같아?”
“같은 등급의 신수는 영수보다 훨씬 강해.”
구유작이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다.
“역시!”
목진은 이내 감탄했다.
“내가 힘을 잠시 빌려줄 건데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지는 너한테 달렸어.”
구유작은 검은 알껍데기의 마지막 한 조각을 삼키더니 두 손을 모아 결인했다. 그러자 보라색 화해가 휘몰아치며 무서운 영력 파동이 느껴졌다.
목진은 속으로 구유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어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무너진 석대에 꿈쩍 않고 서 있기만 하는 것으로 보였다.
“드디어 포기했나 보군.”
허공에 서 있던 희현이 초라한 목진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정한 절망이란 게 무언인지를 보여주지. 그럼 넌 더 이상 지금처럼 자신만만하지 못할 거야.”
말을 마친 희현이 바로 정색하더니 귀신처럼 목진의 앞쪽에 나타나 보랏빛을 발하는 손끝으로 공간을 가르며 목진의 심장을 겨눴다.
녀석의 모진 공격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고 북창령원 학생들도 순간 사색이 되었다.
“이제 끝났어.”
희현은 사악하게 웃으며 점차 빛나는 손으로 목진의 심장을 신속하게 찔렀다.
그런데 그때, 목진이 두 손가락으로 그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냈다. 이에 희현이 한껏 정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럴 수가!”
누군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희현도 두 눈이 휘둥그레져 한껏 초라해진 소년을 쳐다봤는데 어느새 고개를 들고 자신을 보고 있는 소년의 눈에서 보라색 화염이 끓어올랐다.
“너야말로 여기가 끝이야.”
소년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희현마저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그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쿵!
엄청난 소리를 내며 희현은 지면에 수백 장 정도의 깊숙한 흔적을 남기며 튕겨 나갔다.
주위는 순간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멍하니 전장을 바라봤다. 목진을 위해 나서려 했던 낙리와 온청선마저 멈칫하더니 멀리 튕겨 나간 희현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변고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영계는 무언가 눈치챈 듯 목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