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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399화 (398/1,000)

399화. 이별

“이름이 무엇이냐?”

“목진이에요.”

목진이 조곤조곤 답했다.

“낙리가 너한테 낙신족에 관해 말했을 테니까 저 아이가 우리한테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겠지?”

낙천신은 목진을 힐끗 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낙리가 떠난 사이, 낙신족은 수백 차례의 전쟁을 치렀고 수천만 명의 백성을 잃었다.”

목진은 순간 전장의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듯했다. 두 종족 사이의 전쟁은 상당히 잔혹할 것이다.

낙천신은 탄뢰학에 앉아 묵묵히 이쪽을 바라보는 손녀를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더러 낙리를 포기하라고 단둘이서 대화를 나누고자 한 것은 아니다.”

낙천신은 낙리를 데리러 왔던 두 청년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두 아이가 보이냐? 저들 중 한 명은 낙청애(洛青崖)라고 하는데 낙신족 젊은이 중에서도 최정예급 천재지만 전혀 자만하지 않고 수많은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젊은 나이에 뇌학 군단의 통솔자가 되었단다. 그는 지금 낙신족 사대 군단에서 명망이 상당하지.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낙수(洛修)로 낙신족의 말단 황족으로 지위가 그럭저럭했고 어릴 땐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이라고 불렸단다. 녀석의 아버지가 전장에 버렸는데 그 전쟁에서 오히려 아버지는 죽고 정작 10살이었던 낙수만 살아남았지. 지금은 낙신족 젊은이 중 최정예가 되어 앞길이 창창하단다.”

이에 목진도 동의하는 바였다. 두 사람의 영력 파동으로만 봐도 목진은 희현보다 더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낙리의 기사로 너처럼 내 손녀를 좋아한단다.”

낙천신이 목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소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쳐다봤다.

“낙 족장님께서는 저보고 알아서 물러나라고 그리 말씀하시는 건가요?”

“낙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고 있으라고 말한 거란다. 네가 능력이 안 되면 너나 내 손녀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지. 네가 낙리 옆에 서면 누군가는 분명 너를 싫어할 텐데, 실력이 약해 멸시당하거나 비참해졌다고 낙리를 앞세울 수는 없지 않겠느냐?”

목진이 잠시 머뭇거리자 낙천신은 드디어 소년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미소 지으며 진지하게 답했다.

“낙 족장님, 제가 오만하고 무식하다고 여기실 수도 있지만…….”

목진은 북창령원의 천재들마저 고개를 푹 숙이게 만드는 두 청년을 보더니 결연하게 말했다.

“제가 저만큼 나이가 들면 분명 저들보다 훨씬 뛰어난 성과를 이룰 거예요.”

이에 낙천신은 깜짝 놀라 소년을 바라봤다. 목진의 눈부시게 밝은 눈은 패기와 자신감으로 흘러넘쳤다. 소년의 용기가 참 가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기로 하자. 모든 건 시간에 맡기자꾸나. 낙리의 선택이 과연 보잘것없는 바위인지, 눈부신 보석인지는 언젠가 알게 되겠지…….”

낙천신은 이쯤에서 말을 마치려 했다. 그는 목진처럼 젊었을 때, 패기와 자신감으로 넘쳤던 천재들이 대부분 요절하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그러니 모든 건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소년이 학원에서 나와 현실의 벽에 부닥치면 낙리와의 진정한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낙리가 계속 두 사람 사이를 이어가고 싶어도 목진이 먼저 포기할지도 모른다.

낙천신이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낙리가 이 일을 너한테 알리진 않았을 테고, 내가 알리는 것도 원치 않겠지만 어쩔 수 없구나. 대서천계의 서천전황이라고 들어봤을 거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잘 알 거고. 대천세계의 진정한 거장인 서천전황이 낙리를 대서천계에 들이려 했어. 그리되면 낙신족은 서천전황의 보살핌을 받아 모든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데 낙리는 결국 그 제안을 거절했지…….”

목진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서천전황은 무한의 화역의 염제, 무경의 무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무서운 존재로 지금의 목진과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안색이 어두워진 목진은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낙천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낙 족장님, 오늘 족장님께서 저한테서 낙리를 데려가시지만, 다음에는 제가 직접 그녀를 데리러 가겠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저를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소년은 어느새 혈안이 되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가 되면 낙청애든 낙수든 서천전황이든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람이 잔잔하게 불고 하늘은 맑았지만 그곳의 분위기는 더없이 삭막했다.

낙천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혈안이 된 소년을 바라보다 그 광기 어린 집착에 조금 놀랐다.

소년은 자신감으로 넘쳤는데 그건 뼛속 깊은 곳, 심지어 혈맥에서 우러러나오는 자신감이었다.

낙천신은 그제야 손녀딸이 왜 소년을 좋아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목진은 다른 젊은이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러나 낙천신은 목진의 말에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에 대한 첫인상은 비록 나쁘지는 않지만 앞으로 변하지 않을지는 장담할 수 없구나. 난 말만 잘하는 사람은 싫단다. 그리고 낙리는 내 손녀니까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게다. 그러니까 나한테서 낙리를 데려가려거든 행동으로 보여주려무나. 참, 낙리는 평생 너만 기다릴 수 없으니까 아니다 싶으면 포기하거라. 그게 너나 낙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란다.”

이에 목진도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족장님께서 저를 대신해서 낙리를 잘 보살펴주세요. 언젠가 그 편견을 꼭 깨드릴게요.”

“그러길 바란다. 나도 우리의 다음번 만남이 기대되는구나.”

말을 마친 낙천신은 가볍게 웃으며 뒤돌아서 떠났다.

낙천신은 목진이 상상 이상으로 집착과 고집이 세서 말로 녀석의 생각을 바꾸기란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다. 어차피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 그는 전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목진이 언젠가 낙리와의 엄청난 차이를 실감하고 포기할 거라 믿었다.

한편, 목진은 낙천신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고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낙천신과의 짤막한 대화를 통해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그는 전혀 비아냥거리지 않았지만, 낙리와 목진 사이의 거리감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목진이 절세의 강자가 될 거라 여기지 않는 듯했지만 그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낙천신은 천재들을 수도 없이 봐왔기에 목진이 아무리 결연하게 말해도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낙천신을 기다리고 있던 낙리는 한껏 차가워진 말투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낙천신을 노려보며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내가 위협이라도 했을까 봐 그러는 것이냐? 그따위 위협에 물러날 녀석이었으면 우리 손녀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

낙천신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돌아가면 낙신족을 물려받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요? 얼마나 어렵고 힘들든 전 끝까지 이겨낼 거예요.”

낙리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이어갔다.

“대신 목진의 결정을 간섭하지 마세요. 저 사람은 제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고 마지막 사람이 될 거예요. 앞으로 대성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낙리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여황의 위엄을 내뿜으며 말했다.

“저 사람한테는 적어도 내가 있잖아요!”

그 말에 낙리 뒤에 서 있던 낙청애와 낙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멀리 떨어진 목진을 보는 눈빛이 복잡해졌다.

낙천신은 손녀의 결연한 눈빛에 멈칫했다. 그는 문득 목진과 낙리 사이를 너무 쉽게 여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낙천신은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도대체 뭐가 좋아서 네가 이렇게까지 감싸는지 모르겠구나.”

“목진이 아니었다면 전 낙신족을 물려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 점은 고맙구나.”

낙천신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소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너와 목진 사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내를 감싸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저 녀석은 겉으로는 온순해 보이지만 자존심이 상당한 것 같은데, 과연 나한테서 다시 너를 데려갈지 궁금하긴 하구나.”

“목진은 분명 해낼 거예요.”

낙리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 지켜보마.”

낙천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럼 이만 떠날까?”

이에 낙리는 멀리 떨어진 소년을 보더니 다시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탄뢰학의 깃털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뇌명과 함께 녀석은 날개를 퍼덕이며 커다란 공간 소용돌이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목진이 힘껏 외쳤다.

“낙리야, 부디 날 기다려. 내가 절세의 강자가 되어 널 꼭 데리러 갈게. 그때 가서 너를 괴롭혔던 나쁜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거야!”

웅장한 영력을 실은 목진의 목소리는 뇌명처럼 퍼졌고 이를 들은 북창령원 학생들은 순간 넋이 나갔다.

“녀석도 참…….”

북명룡곤과 태창 원장도 멈칫하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풉.

공간 소용돌이에 들어가려던 낙리도 피식 웃었는데 눈시울이 더 빨개져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힘껏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람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를 뇌학 군단이 따랐다.

가장 마지막에 따라붙은 낙천신은 목진의 모습을 보고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가 금세 지웠다. 그리고 북명룡곤, 태창 원장과 인사를 나눈 뒤 공간 소용돌이로 뛰어들었다.

공간 소용돌이는 서서히 회전하다가 조금씩 사라졌고 하늘은 다시 조용해졌다. 그 순간, 북창령원 전체에 형성된 위압감도 함께 사라져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목진만은 제자리에 조용히 서서 공간 소용돌이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에 낙신회 회원들은 목진을 그냥 내버려 뒀고 엽경령 등도 가볍게 한숨을 쉬며 돌아갔다.

목진은 반 시진 정도 지나서야 그 자리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영계가 조용히 다가와 소년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구유가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대로 의기소침해지는 거야? 그럼 정말 실망이야.”

“목진에 대해 그것밖에 모른다면 혈맥 연결은 왜 했나 싶네.”

영계가 구유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뭐?”

구유는 하얀색 치마를 입은 여인한테 고개를 돌리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우리 혈맥 연결에 생각이 많나 봐?”

“내가 할 수만 있으면 너희 혈맥 연결을 풀 거야. 난 목진이 너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걸 용납할 수 없어.”

“혈맥 연결을 푼다고?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구유가 피식거리며 말했다.

“어디 한번 해볼까?”

“그래, 어디 해봐!”

두 미녀는 첫 만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대화에서부터 불씨가 튀겼다.

“그만해!”

그때 목진이 눈을 번쩍 뜨고 한껏 정색하며 두 여인을 바라보며 외쳤다.

“녀석, 꽤 위엄 있는걸?”

구유가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주먹을 꽉 쥐며 물었고, 영계의 손에서도 눈부신 빛이 반짝였다.

“그, 하던 거 계속해.”

목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헛기침하며 말했다. 두 여인이 목진을 쓰러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에 두 여인은 입을 삐쭉 내밀며 고개를 휙 돌리다 서로 눈이 마주쳤는데 바로 눈을 흘기며 콧방귀를 뀌었다.

“괜찮아진 거야?”

구유가 먼저 물었다.

“난 그렇게까지 나약한 사람이 아니야.”

목진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공간 소용돌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벌써 낙신족에 가는 그날이 기대돼. 난 그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아무도 날 막을 수는 없어!”

구유와 영계는 자신만만한 소년의 익숙한 표정에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

목진은 문득 북창령원에 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그전까지 지존경을 돌파해야만 했다.

지존경에 이르러야 북창령원을 졸업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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