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화. 대라천
“구유령이라…….”
흑갑 대장이 흠칫 놀라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고 뒤따르던 흑갑 전사 수백 명도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구유왕을 뵙습니다.”
구유는 영패를 거두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진을 데리고 광문을 지나 빛의 통로로 향했다.
잇따라 흑갑 전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중 한 명이 대장한테 다가가 물었다.
“대장, 저 여인이 바로 몇 년 동안 사라졌던 구유왕인가요?”
“구유령이 있는 것으로 보면 아마 그럴 거야.”
대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구유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그런데 구유궁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 않나요? 천취황(天鷲皇)만 아니었으면 이미 없어졌을걸요. 현재의 구유궁은 이름만 남은 거나 다름없지 않나요?”
흑갑 전사 중 한 명이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구유왕이 직접 키운 구유궁의 통령마저 혈응왕(血鷹王) 왕중(王重)한테 넘어갔잖아? 그는 구유왕이 전장에서 구해내 대량의 수련 자원을 들여 키운 사람인데 말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참 배은망덕한 놈이죠.”
* * *
구유와 목진은 흑갑 전사들이 수군대는 걸 듣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빛의 통로를 지나 웅장한 대라천에 입성했다.
목진은 눈앞의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디부터 가야 해?”
목진이 다가와 묻자 구유는 생긋 웃더니 서북쪽을 바라보며 답했다.
“일단 내 구역인 구유궁부터 가자.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어떻게 됐을지 궁금한걸.”
“따로 궁전도 있어?”
목진은 흠칫 놀랐다.
“난 9왕 중 한 명인데 당연한 소리를 하네? 난 이곳 대라천역에서 지위가 꽤 높아.”
구유는 목진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저 사람들처럼 나한테 깍듯이 인사해야 해. 안 그럼 엄히 다스릴 거야.”
이에 목진이 히쭉 웃으면서 말했다.
“꿈 깨.”
구유는 주먹을 꽉 쥐며 소년을 노려보더니 피식 웃으며 서북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목진은 질서 정연하게 대라천의 위쪽 하늘을 스쳐 지나가는 빛줄기를 봤는데 그들은 이곳을 호위하는 사람들이었다.
목진은 그들의 위엄에 몰래 혀를 끌끌 찼다.
반 시진 후, 구유가 드디어 속도를 늦추자 목진이 앞쪽을 바라봤는데 우뚝 솟은 산봉우리는 커다란 새가 날개를 활짝 편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 정상에 웅장한 궁전이 세워져 있었다.
구유는 미소를 지으며 궁전을 보더니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궁전 앞은 넓은 수련지로 수천 명도 넘는 사람이 조용히 앉아 수련 중이었다. 가장 앞쪽에는 두 명의 소녀가 있었는데 검은색과 연한 빨간색 수련복을 입은 두 소녀의 얼굴이 같은 것으로 보아 쌍둥이인 것 같았다.
검은색 수련복을 입은 소녀는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미녀였고, 연한 빨간색 수련복을 입은 소녀는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수련자 대부분이 두 소녀의 미모에 빠져 계속 힐끗거렸다.
그런데 그때, 검은색 수련복을 입은 소녀가 눈을 번쩍 뜨더니 고개를 들며 물었다.
“누구냐?”
이에 수련장에 있던 사람들은 바로 영력을 끌어올리며 잔뜩 경계하였다.
“허허, 우리 빙아의 위엄이 상당하구나.”
구유가 미소를 지으며 궁전 앞에 내려앉았는데 검은색 수련복을 입은 소녀가 그녀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옆에 있던 소녀도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바로 달려가 안겼다.
“구유 언니, 드디어 돌아왔군요!”
구유는 빨갛게 상기된 소녀들의 눈을 보더니 코끝이 찡했다.
“그래, 내가 돌아왔어.”
그녀는 품속에 안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련장에 서 있던 사람들은 멍하니 구유를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구유궁에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그들은 구유궁의 주인이 돌아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구유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줄만 알았다.
귀청을 찢는 소리에 구유마저 흠칫 놀랐다. 그녀가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구유궁에는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관리에 능하지 않아 내부가 늘 지저분했는데 지금은 전혀 달라 보였다.
“너희 두 사람이 여태껏 구유궁을 잘 이끌었구나.”
구유는 품속의 소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건 다 언니 덕분인걸요.”
연한 빨간색 수련복을 입은 소녀는 괜히 부끄러워 눈을 비비며 말했다.
이에 구유는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검은색 수련복을 입은 소녀를 바라봤다. 그녀 역시 무척 기뻤지만 가볍게 몸을 굽히며 말했다.
“대장이 돌아온 것을 환영합니다.”
“빙아야,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구유가 다가가 소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여태껏 이곳에서 살아남느라 고생이 많았지? 그렇다고 나를 너무 원망하지는 마. 나도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할뻔했어.”
“대장…….”
소녀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려다가 구유가 노려보자 바로 말을 바꿨다.
“난 언니를 원망하지 않아요. 그리고 언니가 떠날 때, 우리한테 구유궁을 맡겼는데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죠.”
“구유궁은 형식적인 존재일 뿐인데 넌 꼭 이러더라.”
구유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직 신수가 되지 않았던 구유는 9왕 중 실력이 가장 뒤처져 대라천역에서도 그녀가 왕의 자리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천취황과 뒷배 덕분에 감히 건드리지는 못했다. 구유가 떠났으니 두 소녀는 분명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당빙(唐冰)처럼 고집이 센 사람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이를 악물고 견뎌낼 것이 분명했다.
구유는 두 아이가 대라천역에서 고생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참…….”
구유는 주위를 쓰윽 훑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조봉(曹鋒)은 어디 있어? 그자더러 널 도와주라고 당부하고 떠났는데 왜 보이지 않지?”
이에 두 소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다. 특히 당빙은 입술을 깨물며 잠시 생각하더니 깊게 숨을 들이켜고 말했다.
“언니, 조봉은 지금 혈응왕한테 넘어갔어요. 그는 더 이상 우리 구유궁 사람이 아니에요.”
구유가 순간 정색하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이때, 구유의 품에 안겨있던 소녀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조봉은 엄청난 배신자예요. 언니가 다년간 소식이 없는 걸 알고 구유궁을 배신하고 혈응왕한테 갔어요. 언니가 그를 시체 무덤에서 구해내 성심껏 키웠는데도 저러네요!”
구유는 씩씩거리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한숨을 쉬었다.
“조봉이 욕망이 큰 사람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성급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어.”
구유는 실망한 듯했다. 그녀는 조봉이 불쌍해서 성심껏 도와줬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절대 그 배신자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당빙이 이를 갈며 말했다. 구유는 조봉의 배신이 대수롭지 않았지만 소녀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해, 당빙의 가족은 전쟁 때문에 전부 죽었고 구유가 아니었다면 그들 자매는 죽기보다 끔찍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그들은 구유를 은인으로 생각했고 그녀한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구유궁에 강력한 지배자가 없어 그들은 여태껏 지존경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두 소녀가 조봉을 여태껏 살려뒀을 리 없었다!
정작 구유는 조봉의 배신에 그렇게까지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그녀한테는 두 소녀가 더 소중했고 여태껏 이곳에서 버텨준 것이 고마웠다.
“더는 너희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구유가 생긋 웃더니 당빙을 훑어보며 물었다.
“빙아, 넌 아직도 지존경에 이르지 못한 거야?”
구유가 대라천역을 떠날 때, 당빙의 실력은 이미 통천경에 이르렀고 삼난도 곧 돌파할 것 같았다. 소녀의 천부적 재능과 대라천역의 자원이라면 지금까지 지존경에 이르지 못할 리 없었다.
이에 당빙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유 언니, 이건 절대 언니 탓이 아니에요. 언니는 여태껏 지존영액을 한 방울도 사용하지 않고 수련했고 대라천역에서 받은 지존영액은 신인들한테 전부 나눠줬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구유궁은 지금처럼 성장하지 않았을 거예요.”
연한 빨간색 수련복을 입은 소녀 당유(唐柔)는 언니를 위해 대신 해명해 주었다.
“구유궁은 1년에 지존영액 만 방울 정도를 받을 수 있고 담당 지역에서도 비슷한 정도의 지존영액을 바쳤을 텐데 그마저도 부족했단 말이야?”
구유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질서 정연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수천 명의 사람을 보며 물었다. 당유는 말을 하려다가 당빙의 눈치를 보고는 이내 조용해졌다.
“빙아, 네가 말해봐.”
구유는 뭔가 눈치채고 한껏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가 떠난 뒤로 대부분은 구유궁이 대라천역에서 진정한 왕급 세력이 되기에 부족하다며 함께 장로회(長老會)에 의견을 제출해 이곳을 해산시키려 했어요.
그나마 천취황 덕분에 다행히 보존은 했지만 해마다 받는 지존영액의 수가 만 방울에서 5천 방울로 줄었고, 우리의 관할 지역 중 번화한 도시는 대부분 약탈당했죠.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실력이 부족해서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구유궁은 한 해에 받는 지존영액이 사실 5천 방울도 안 돼요.”
당빙이 씁쓸하게 웃으며 한 말에 당유가 덧붙였다.
“언니가 지존경에 이르려면 대량의 지존영액이 필요한데 매번 다른 사람들한테 양보하느라 여태껏 제자리걸음인 거예요.”
“너무하네!”
구유는 인상을 찌푸리며 씩씩거렸다. 그가 구유궁을 떠나자마자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할 줄 몰랐다. 이곳을 이 지경까지 만든 사람들은 다름 아닌 다른 왕들이었다.
나머지 9왕 들은 구유가 있을 때도 실력이 미달인 그녀가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에 불만을 가졌었지만 엄청난 뒷배 때문에 감히 뭐라 하지 못했다. 그런데 구유가 떠나자마자 이런 일을 벌이다니!
구유는 저도 모르게 영력을 끌어올렸고, 엄청난 영력 위압감에 사람들은 다시 바닥에 철썩 엎드렸다.
당빙도 뒤로 몇 보 물러서더니 이내 화색이 되어 물었다.
“구유 언니, 겁난을 건너는 데 성공한 건가요?”
구유의 영력 위압감은 다른 8왕 못지않게 강했다. 소녀는 그녀가 실종된 동안 겁난을 건너는 데 성공했을 거라 추측했다.
이에 구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
“너흰 일단 물러가거라. 너희들이 여태껏 당한 불공평한 대우는 내가 다 처리할 것이다. 이젠 아무도 우리 구유궁 사람을 괴롭힐 수 없을 것이다!”
“네!”
구유의 말에 구유궁 사람들은 격동된 마음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이구동성으로 답하고는 빠르게 퇴장했다. 구유궁 궁주가 돌아왔으니 이제 더는 눈치를 보며 살 필요가 없어졌다는 생각에 이내 화색이 되었다.
“목진아, 그만 나와.”
잠시 후, 광장이 조용해지자 구유는 손을 휙 저으며 말했다. 당빙과 당유는 바로 구유의 곁에 나타난 소년을 보고 흠칫 놀랐다.
목진이 나타나 상냥하게 웃자 당유는 부끄러운 듯 눈길을 피했고 당빙은 경계의 눈초리로 소년을 노려봤다. 조봉 사건 때문에 그녀는 구유에게 접근하는 사내라면 일단 경계했다.
“이 사람은 목진이야. 내가 겁난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건 다 얘 덕분이야.”
구유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두 소녀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이 아이는 당유고 저 아이는 당빙이야. 다들 내 친한 동생들이야.”
목진이 구유를 도와줬단 말에 당유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봤고 당빙은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