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주재-419화 (418/1,000)

419화. 9왕 회의

구유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말을 듣지 못한 척 고개를 들고 만장 석제 위에 놓인 오래된 대전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 뒤에는 목진, 당빙, 당유가 조용히 서 있었다.

잇따라 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엄청난 영력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실력자가 도착한 것이 분명했다.

이에 목진이 뒤쪽을 힐끗 바라보니 세 무리가 도착했다. 왼쪽 무리는 무덤덤해 보이는 중년 남자로 검은색 도포를 입은 그의 눈은 암홍색을 띠어 괜히 소름이 끼쳤다.

그 뒤로 젊은 사내들이 따랐는데 청색 옷을 입은 그들은 튼실한 몸매에 얼굴은 준수했고 영력 파동으로 보아 실력을 제법 갖춘 것 같았다.

목진은 늘씬한 한 사내를 보더니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저분은 수라왕으로 9왕 중 최강자셔. 아마 곧 3황에 들 수 있을 거야.”

옆에 있던 당빙이 속삭이자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라왕은 유명의 곁을 지키던 검은색 도포를 입은 노인보다 더 강한 것 같았다.

“수라왕 뒤에 서 있는 사람이 4대 통령 중 1위인 서청으로 실력이 엄청나.”

목진이 수라왕 뒤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봤는데 그는 구유한테 정신이 팔려 목진의 시선 따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역시 당유의 말대로 서청은 구유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만, 구유는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수라왕한테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대라천역에서 수라왕은 친해지기 어렵다고 소문났지만 구유는 비겁한 혈응왕보다는 수라왕이 훨씬 좋았다.

수라왕도 가볍게 웃으며 구유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소녀한테서 압력을 느꼈는데, 몇 년 사이 소녀의 실력이 부쩍 늘어난 것 같았다.

반면, 수라왕 뒤에 서 있던 사내는 씁쓸하게 웃었지만 삶의 희망을 되찾은 것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잇따라 목진은 두 번째 무리로 고개를 돌렸는데 우두머리는 튼실한 중년 남자로 커다란 주먹에 핏줄이 불끈거리는 것이 맨손으로 산을 부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분은 열산왕으로 9왕 중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분이셔.”

당빙이 조곤조곤 건넨 말에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 뒤에 서 있는 튼튼한 사내의 눈빛이 느껴졌다.

사내는 목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냉미녀 당빙을 보고 있었다.

“히히, 저 녀석은 4대 통령 중 2위인 주악인데 우리 언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몰래 구유궁에 와서 언니를 훔쳐보다가 들켰어. 언니가 녀석을 발견하더니 칼을 뽑아 죽이러 들었어.”

옆에 있던 당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언니가 인기가 많은가 봐.”

보아하니 주악은 당빙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정작 당빙은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다.

당빙이 인상을 찌푸리며 노려보자 목진은 방긋 웃었다. 그러자 소녀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녀는 목진을 아무리 노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았다.

“하하, 구유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축하해.”

그때 호탕한 듯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가 인파를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에 사람들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머리가 빨간 중년 남자가 음침한 눈빛으로 사냥감을 노려보는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든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입힐 준비를 해둔 것처럼 보였다.

사내가 히쭉 웃으며 구유를 바라봤는데 바람에 피비린내가 확 퍼져나갔다.

목진은 바로 그가 구유가 극도로 혐오하는 혈응왕임을 알아챘다.

당빙과 당유는 어느새 씩씩거리며 혈응왕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백의를 입은 훤칠한 사내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감히 구유를 쳐다보지 못했다.

목진은 바로 그자가 구유궁을 배신한 조봉임을 눈치챘다.

그런데 옆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내가 히쭉 웃으며 당빙과 당유를 쳐다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그는 꼭 자매를 집어삼킬 것 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목진은 그가 4대 수령 중 3위인 오천일 거라 짐작했다.

한편, 구유는 혈응왕의 말을 무시하고 그 뒤에 서 있는 조봉을 바라봤다.

“허허, 조봉, 옛 주인한테 인사는 해야하지 않겠어?”

혈응왕의 말에 조봉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구유님.”

구유는 생각보다 느낌이 없었다. 어제 조봉이 배신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조금 슬펐는데 정작 만나자 완전히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전장에서 직접 구해온 청년이 이렇게 바뀐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역시 모든 사람이 강자가 되는 길을 걸으며 목진처럼 온화한 미소, 완강한 의지, 고집 등을 잃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조봉은 구유의 무덤덤한 표정과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에 고개를 푹 숙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먼저 구유를 배신했지만 그녀가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이 왠지 언짢았다.

구유는 조봉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한기 어린 눈빛으로 혈응왕을 힐끗 보더니 돌아서서 대전으로 향했다.

“혈응아, 구유궁에서 빼앗은 물건을 그대로 돌려줄 각오나 해.”

구유가 떠나자 사람들은 어색해진 분위기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오늘의 9왕 회의는 평화롭지 않을 것 같았다.

“허허, 자리를 비우더니 성질이 더 고약해졌어.”

혈응왕은 앞장선 구유의 뒷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손에 들어온 물건을 다시 뺏어가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거야.”

혈응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는 구유의 위협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비록 구유가 천취황이란 엄청난 뒷배를 두고 있지만, 그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천취황이 3황 중 한 명이라고 해도 대라천역의 모든 일을 장악할 수는 없었다.

“이만 가자꾸나!”

혈응왕도 손을 휘익 젓더니 만장 석제에 올랐다.

한편, 수라왕과 열산왕은 조용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9왕 중 동맹이 없는 구유와 달리 명망을 꽤 두텁게 쌓은 혈응왕은 늘 소녀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곤 했는데 이번엔 결과가 어떨지 궁금했다.

그때 수라왕 뒤에 서 있던 서청이 미간을 찌푸리며 혈응왕을 노려봤다.

“실력이 안 되면 괜히 나설 생각하지 마. 지금의 넌 아직 멀었어.”

수라왕은 서청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에 서청이 머쓱해서 그저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지금의 구유는 네가 걱정할 만큼 나약하지 않아. 그녀는 곧 5급 지존에 이를 거고 신수의 체질까지 더하면 아무리 혈응왕이라도 꼼짝 못 할 거야.”

수라왕은 앞으로 나아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구유는 보통 여인들과 달라. 그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넌 아직 멀었어. 적어도 통령의 신분은 벗어나야 하지 않겠어?”

수라왕의 말에 서청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뒤에 서서 함께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은 어느새 활짝 열려 있었고 구유 역시 목진 등과 함께 대전으로 들어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타원형 석대의 높이도 높아졌다.

석대는 대전 변두리를 감싸고 끝까지 뻗어 있었고 중심은 텅 빈 채 정상에 왕좌 하나만 놓여있었다.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지만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 자리는 대라천역의 진정한 지배자이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역주의 자리였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황금색 연화대(蓮臺)가 놓여있었는데 몸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중에 중심에 앉아있는 사람은 삐쩍 마른 노인으로 눈에 빛이 모였는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무서운 파동이 느껴졌고, 왼쪽에 앉아있는 백발노인은 갓난아이처럼 매끈한 피부에 주름 하나 없었다. 백발마저 윤기가 흐르는 것이 전혀 노인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흰자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눈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기운에 저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내는 나이를 알 수 없었는데 느긋한 상태를 보니 언제든지 잠들 것처럼 보였다.

대전에 들어간 구유는 가운데에 앉아있는 노인을 바라보고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어머, 우리 구유가 돌아왔구나. 정말 기쁘구나.”

노인도 구유를 발견하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갓난아이처럼 피부가 고운 백발노인도 꼭 감았던 눈을 뜨고 소녀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옆에 있던 잠에 취해 보이는 사내도 구유를 힐끗 보더니 다시 비스듬히 눈을 감았다.

“중간에 앉아있는 분이 바로 천취황이신데 구유작 종족과 모종의 관계가 있어. 구유 언니의 웃어른이기도 하지. 그래서 그가 여태껏 언니를 돌봐주고 있었던 거야.”

당빙이 조곤조곤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왼쪽 분은 영동황으로 혈응왕 등의 뒷배야. 혈응왕은 영동황을 믿고 저렇게 우쭐대는 거야.”

이에 목진은 백발노인한테 눈길을 돌렸는데 상대방도 눈치채고 목진을 바라봤다. 눈동자에서 괴이한 빛이 흘러 빠져들면 다시 헤어나오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 차가운 손이 목진의 손을 잡자 정신을 차린 목진은 잔뜩 경계하며 상대방을 바라봤다.

영동황은 역시 범상치 않았다.

“영동황과 눈을 마주치지 마. 저 사람이 수련한 신술은 눈에 있어.”

구유는 목진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는 안심하며 조용히 귀띔해주었다.

“마지막 한 분은 수황(睡皇)으로 난 저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린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어. 그래서 대라천역의 대부분 일은 천취황과 영동황께서 처리하시곤 해.”

당빙은 이상한 눈빛으로 수황을 바라보았다.

구유의 말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목진은 당빙의 말에 깜짝 놀라 수황을 바라봤다. 이 세상에는 참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그렇다고 수황을 무시하면 절대 안 돼. 저분은 역주와 함께 대라천역을 만든 분으로 실력을 가늠할 수 없고 천취황마저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않아.”

구유가 나지막하게 말하자 목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실력은 천현전의 인마 장로 못지않아 적어도 7급 지존에 이르렀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역주는 지금 어디 계셔?”

“역주께서는 종적을 감추신 지 몇 해 됐어.”

목진의 질문에 당유가 조용히 답했다.

“역주께서는 우리 대라천역에서 가장 신비로운 존재야. 그분은 지금 어딘가에서 수련하고 있는데 그곳이 어딘지 아무도 몰라.”

이에 목진이 피식 웃었다. 대라천역은 참 신기한 곳이었다.

그때 구유가 목진 등과 함께 자리를 찾아 앉았고 나머지 8왕도 대전에 들어와 각자 자리에 앉았다.

“허허, 오랜만에 자리가 찼구나.”

천취황은 꽉 찬 대전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9왕 회의를 시작하겠다.”

대라천역은 땅이 엄청 넓고 강대한 세력들을 곁에 두고 있어 서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 논쟁이 벌어질 일은 9왕 회의를 통해 해결하곤 했다.

구유는 대라천역에서 떠나 있은 지 오래되어 조용히 눈을 감고 석대를 가볍게 두드리며 조용히 앉아있었지만, 한기 어린 표정은 가시지 않았다.

목진과 당빙, 당유도 구유 옆에 조용히 서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 시진 정도가 흐르자 회의 역시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 천취황이 화두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두 달 뒤에 있을 대라금지 건에 관해 의논해볼까?”

그 말에 대전에는 정적이 흘렀고 9왕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는 듯 정신을 바짝 차렸다. 대라금지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구유도 눈을 번쩍 뜨고 혈응왕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대라금지 대결에 구유궁도 참석할 거예요.”

사람들은 막 귀환한 구유왕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는데 정작 혈응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자리를 오래 비워서 모르나 본데 구유궁의 몫은 혈응전(血鷹殿)에 넘긴 지 오래됐어.”

혈응왕의 말에 당빙과 당유는 녀석의 뻔뻔한 태도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동의한 적 없는데 너희한테 넘어갔다니! 혈응왕은 혈응전의 우두머리라 잘 알 텐데, 그건 전주의 동의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 아닌가?”

구유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내 동의가 없는 일은 당연히 무효 처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 안 되면 내가 지존영액 2천 방울을 낼 테니 너희 혈응전의 몫을 우리한테 넘겨.”

이에 혈응왕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 채 씨익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