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승복
“내키지 않으면 다시 덤벼.”
목진이 은빛을 발하는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구산 등은 씁쓸하게 웃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목진과 같은 1급 지존이지만 그들이 함께 공격해도 그의 육신에는 상처조차 낼 수 없었다. 그 차이가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목진은 그제야 뇌신체를 거뒀는데 옷으로 가려진 가슴팍에 나타났던 뇌문도 하나씩 사라졌다. 뇌문은 어느새 10개가 되어있었다.
목진이 드디어 뇌신체의 수련을 마친 것이다.
그래서 감히 육신만으로 지존급 강자 세 명의 공격을 받아내기로 한 것이었다.
“목진 통령.”
구산 등은 뒤로 한 보 물러나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들은 목진의 엄청난 실력에 이내 감탄했다.
“목진 통령을 뵙습니다.”
구산 등이 고개를 숙이자 나머지 구유위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뇌명 같은 소리가 광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에 소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구유위를 쓰윽 훑더니 구산 등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흰 구유위의 노참이고 구유궁이 가장 힘들 때 의리를 지켰으니 새 통령이 된 기념으로 상을 내리려고 해.”
목진의 말에 구산 등은 순간 흠칫 놀랐다.
“나한테 천염법신의 수련법이 있는데 너희한테 가르쳐줄 거야.”
“천염법신이라니!”
구산 등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소년을 바라봤다.
“혹시 99등급 지존법신 중 97위를 차지한 천염법신 말인가요?”
다른 구유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천염법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천염법신은 비록 97위밖에 안 되지만 순위권에 들지 못한 수많은 지존법신과 비교하면 대단한 존재였다.
대라천역에서 이 정도의 지존법신은 아무나 수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를 상으로 내린다니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통령님, 고맙습니다.”
천염법신이란 말에 구산 등은 이내 화색이 되었고 조금이나마 남았던 언짢은 감정은 어느새 완벽히 사라졌다. 무려 천염법신을 상으로 내린다니, 목진은 나이는 어리지만 그들보다 훨씬 큰 인물이 될 게 분명했다.
이에 소년은 괜찮다며 손을 휘익 젓더니 구유위한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구유위 중에서 구유궁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지존영액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존경에 이르면 천염법신을 수련할 기회까지 줄 거야. 대신 수련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본인한테 달렸겠지?”
구유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맛을 다셨다. 지존경에 이르려면 대량이 지존영액이 필요했는데 구유궁의 상황으로는 장기간에 걸쳐 준비해야 비로소 그 양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더는 지존영액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지존경에 이르면 천염법신이란 엄청난 지존법신을 수련할 기회까지 생겼다.
“우리 구유위가 무슨 수로 구유궁에 큰 공헌을 할까요?”
구유위 중 누군가 조심스럽게 묻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유궁은 여태껏 최약체였고 구유위는 단 한 번도 전장에 나간 적이 없었다. 게다가 구유궁은 땅을 계속 다른 세력들한테 빼앗겼다. 하지만 구유궁에 주인이 없어 아무리 화가 나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건 과거일 뿐이야. 구유궁의 물건은 전부 돌려받을 것이고 앞으로는 누군가 너희를 괴롭히면 반드시 복수할 거니까 더는 한가하게 하루를 보내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걸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은 당장 여기서 나가도 좋아! 앞으로 구유위는 구유궁의 가장 예리한 창이 되어 적을 무찌를 거야.”
목진의 말이 구유위의 심금을 울렸는지 다들 격동에 못 이겨 온몸을 파르르 떨었고 일부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들은 대라천역의 최약체로 지금껏 참으며 살아왔다. 사람들은 그들을 여인이 거느린 군대라 비웃었고 결국 대라금지에 출전할 자격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다들 너무 오래 참다 보니 어느새 그런 생활이 습관이 되었다가 목진의 말에 다들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이다.
“통령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구유위 전체가 허리를 곧게 펴고 큰소리로 외쳤다.
당빙은 입술을 깨물며 목진을 바라봤다. 그녀 역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렇다고 구유위가 그녀를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사내인 목진이 당빙보다 훨씬 나았다. 목진이 공격에 능하다면 당빙은 구유위와 구유궁을 지키는 데 훨씬 뛰어났다.
“어떤 것 같아?”
구유가 미소 지으며 묻자 당빙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구유 언니는 역시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난 것 같아요. 조봉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당빙은 입을 삐쭉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렇게 많은 양의 지존영액을 얻을 수 있나요?”
구유궁 전체를 관리하는 당빙은 지존영액도 함께 관리했다. 지금껏 양이 부족해 선뜻 내주지 못했던 지존영액을 마구 퍼주겠다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지존경에 오르려면 지존영액이 많이 필요했는데 이를 전부 주겠다니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쟁으로 전쟁을 막겠단 소리인 것 같아.”
구유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목진의 말대로 우리 구유궁은 지금부터 태도를 바꿔야 해. 우리의 것은 전부 돌려받아야 하지 않겠어?”
이에 당빙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활기찬 구유궁이 자못 기대되었다.
구유궁은 여태껏 억울한 일을 너무 많이 당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당빙은 앞으로 구유궁을 해치려는 적한테는 꼭 복수하리라고 다짐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기회만 생기면 구유궁을 괴롭히고 그들을 해산시키려고 애쓰는 혈응왕이 될 것이다.
한편, 목진은 구유위가 꽤 마음에 들어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구유한테 돌아갔다. 그는 구유위가 진심으로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의 마음을 얻은 데 꽤 능수능란한걸?”
구유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소년은 히쭉 웃기만 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새롭지는 않았지만 제법 잘 먹혔다.
“구유위가 꽤 괜찮은 것 같아.”
목진은 실력과 기세를 고루 갖춘 구유위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 수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인원이 적기 때문에 다들 똘똘 뭉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당연하지.”
당빙이 으쓱해서 말했다. 그녀는 구유궁을 잃지 않기 위해 구유위의 실력을 키우는데 심혈을 쏟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구유가 없는 구유궁은 여태껏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생했어요.”
목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구유가 없는 상황에서 힘든 일들을 이겨내고 구유위를 이 정도까지 키워내는 것은 절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구산을 포함한 구유위 전체가 당빙을 따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구유위가 구유에 대해 보내는 감정이 경외의 마음이라면 당빙은 진심 어린 존경이었다.
소년의 말에 당빙은 코끝이 찡했다. 그녀는 여태껏 받은 상처를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받은 상처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구유가 자리를 비운 후, 구유궁을 책임이고 운영할 사람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빙 누이. 앞으로는 누구든 구유궁을 괴롭히면 내가 나서서 혼쭐을 내줄게요.”
소년의 따뜻한 미소에 당빙은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무뚝뚝한 표정은 어느새 사라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한 말은 반드시 책임져야 해. 그리고 난 대량의 지존영액을 내놓을 자신이 없어. 이건 나를 팔아넘긴다고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당빙은 금세 마음을 가라앉히고 웃으며 소년을 바라봤다.
이에 목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구유궁의 땅 중 대부분은 다른 세력에게 넘어가 대량의 지존영액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손에 남은 지존영액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해야 해. 대신 혈응왕 쪽은 내가 잘 살펴볼게.”
구유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라천역의 규칙에 따라 왕은 나설 수 없었기에 모든 일은 부하들이 해결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혈응왕이 구유궁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였다.
그는 얼마 안 되는 구유궁 사람들로는 뛰어난 인재가 가득한 혈응전을 이길 수 없다고 확신했다.
목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지개를 켜며 차가운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봤다.
“대라금지의 대결이 끝나면 빼앗겼던 물건을 찾아와야겠군.”
“준비는 잘하고 있어?”
당빙은 목진의 상황이 궁금했다. 대라금지 대결에 구유궁이 참가하는 것은 오랜만이라 다들 그들을 주의 깊게 지켜볼 것이 분명했다.
“큰 문제 없어요.”
목진은 씨익 웃더니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대일불멸신 수련을 성공한 뒤로 그는 같은 등급의 강자를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번 대결이 구유궁에 엄청나게 중요한 만큼 절대 방심하면 안 될 것이다.
목진은 개자탁을 만지작거리다 유명한테서 빼앗은 구룡수상술이란 신비로운 신술을 떠올렸다.
구유궁의 꼭대기에 조용히 앉아있던 목진의 수중에서 황금색 족자가 천천히 회전하며 눈부신 금광을 비췄다.
목진은 꼭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뜨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수중의 족자를 바라봤다.
그것은 유명한테서 빼앗은 구룡구상술로 그가 사흘 동안 연구했는데도 전혀 성과가 없었고 수련 방법조차 터득하지 못했다.
이에 잠시 고민하다 결인했는데 갑자기 웅장한 영력을 끌어올리더니 손바닥에서 보라색 영력으로 만들어낸 용 한 마리가 나타나 포효하였다.
쿵!
잇따라 목진이 장풍을 쏘자 보라색 용은 맞은편의 산맥을 공격했고 거대한 균열이 일었다. 이에 소년의 표정은 더욱 진지해졌다.
그는 구룡구상술의 수련법에 따라 보라색 용을 만들어냈는데 위력이 너무 약했다.
목진의 실력이라면 손을 조금만 흔들어도 산맥이 와르르 무너질 텐데 구룡구상술을 사용하고 나니 오히려 위력이 약해졌다.
구룡구상술은 역시 괴이했다.
“왜 이런 거지…….”
목진은 이토록 괴이한 신술은 처음이란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황금 족자를 꼭 쥔 채 사색에 잠겼다. 구룡구상술의 위력이 절대 이 정도일 리 없으니, 분명 수련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술은 보통 이렇게 수련하지 않나?
목진은 두 눈을 감고 구룡구상술의 수련법을 되새기며 빠뜨린 곳이 있나 확인했는데, 문득 수련 구결 한 마디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기를 모아 용을 만들어라…….”
목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했다. 그 말은 영력으로 용을 만들라는 말인 것 같은데 그대로 해봤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설마 장소가 잘못되었나?”
목진이 바로 영롱한 보랏빛을 발하는 지존해에 들어가자 웅장한 영력이 부단히 휘몰아쳤다.
잇따라 신백이 지존해 속에서 나와 수면 위에 멈춰 서더니 갑자기 결인했는데 속도가 점차 빨라졌고 나중에는 잔영만 보일 정도로 현란했다.
“나타나라!”
신백이 나지막하게 외치자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지존해에 폭동이 일었고 영력 기둥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한곳에 모여 거대한 보라색 용을 만들었다. 강대한 영력 파동을 내뿜는 용은 폭풍 속에서 포효하는 것만 같았다.
녀석은 바로 구룡구상술의 화룡인(化龍印)이 만들어낸 용으로 위력이 상당했는데 뭔가 부족해 보였다.
꼭 신기에 영성이 없는 것처럼.
이에 목진이 손을 휘젓자 녀석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웅장한 영력은 다시 지존해 속으로 돌아갔다.
잇따라 소년은 다시 눈을 감고 반나절 동안 사색에 잠겼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고 보랏빛을 발하는 지존해를 바라봤는데 수면 위에 보라색 화염이 요동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불사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