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대라금지 대결
흑운이 몰려와 9번째 석대에 내려앉자 떠들썩했던 현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져 그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8왕이 이끄는 최강 부대 못지않은 기세를 선보였다.
“저들은 구유궁의 구유위인가?”
“구유위는 대라천역에서 최약체라고 들었는데 기세등등한 것이 전혀 그렇지 않아 보여.”
“역시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군. 구유궁이 여태껏 조용히 지내며 실력을 키워왔던 거야. 더구나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웠던 궁주까지 돌아왔으니 지금부터는 진정한 빛을 발하겠군.”
* * *
사람들은 꿈쩍 않고 서 있는 구유위를 두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구유궁은 대라천역에서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신수가 되기 전, 구유의 실력은 평범했기에 궁주가 된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천취황과 구유작 종족을 적으로 돌릴 수 없어 아무도 감히 뭐라 하지 못하고 몰래 투덜대기만 했다.
“저 소년은 누구지?”
사람들의 눈길이 자연스레 구유위 맨 앞쪽에 서 있는 소년에게 머물렀다.
“저 소년은 구유궁의 새 통령 목진이야. 구유왕이 데려온 신인이라고 들었어.”
“저렇게 젊은 나이에 통령이 되었단 말이야? 허허, 구유왕은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군. 대라천역에 아무나 들여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누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린 나이에 통령이 된 목진의 모습에 질투가 난 것이다.
“목진은 나이가 어려도 이미 지존경에 이르렀고 두 달 전에는 혈응왕 휘하의 통령까지 한 방에 쓰러뜨렸다는군.”
“허허, 조 통령을 쓰러뜨린 것이 뭐가 대단해? 구유왕께서는 목진이 대라금지의 대결에 참여해 그 자격을 따내길 바라는 것 같은데, 제아무리 대단해 봐야 4대 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
“일리 있는 말이야. 이번에는 구유왕께서 성급하셨어. 체면을 세우려다 괜히 창피만 당하게 생겼군.”
* * *
슉!
그때 또 다른 빛줄기가 날아와 9번째 석대 위의 왕좌에 내려앉았다.
소녀는 찰싹 들러붙은 검은색 갑옷을 입어 아름다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고 머리를 묶어 얼굴이 더 돋보였다. 게다가 하얗고 긴 다리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사내들은 소녀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소녀는 바로 구유였다. 그녀는 주위를 쓰윽 훑고 자리에 앉았고 당빙과 당유가 그 옆에 다가가 조용히 섰다. 두 사람은 얼굴은 똑같았지만 성격이 달라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하하, 구유궁에서 드디어 왔군. 난 너희가 포기라도 한 줄 알았어. 그럼 어렵게 얻은 기회를 날리게 되잖아?”
누군가의 웃음소리에 구유가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혈응왕이 미소를 지으며 구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구유는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쏘아봤다.
“구유궁 일은 혈응왕께서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네만.”
구유의 말에 혈응왕은 씨익 웃더니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는데 빨갛게 그을린 두 눈이 한기로 가득 찼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에 다들 흠칫 놀랐지만, 나머지 7왕은 못 본 척했다. 다들 두 사람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대라천역에서 9왕의 지위는 상당한 편이었다. 예전의 구유궁을 제외하고 다들 실력이 비슷해 적으로 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비록 이익과 자원 때문에 몇 번 싸운 적은 있지만 그것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 다들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구유가 신수가 되어 돌아왔으니 그녀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목진도 구유위의 가장 앞쪽에 서서 혈응전 쪽을 바라봤는데 석대에 서 있는 선홍색 갑옷을 입은 군대에서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다. 그들은 싸움에 능한 군대임이 틀림없었다. 혈응전에는 실력이 좋은 이들이 가득했다.
“목 통령, 저쪽은 혈응전의 혈응위로 오천과 조봉이 함께 다스리고 있어요. 구유궁에 속해 있던 도성들은 대부분 저들한테 빼앗긴 거예요.”
목진 뒤에 서 있던 구산이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유 궁주만 아니었어도 조봉 저 녀석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도와 우리를 공격하네요. 나쁜 녀석, 기회만 되면 절대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구산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는 조봉의 배신이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에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려고 했는데 등골이 오싹해 고개를 들어보니 혈응위의 가장 앞쪽에 서 있는 오천과 조봉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과 눈을 마주치자 오천은 씨익 웃었고 조봉의 무덤덤한 표정에 살기가 가득했다.
구유궁에 있을 때는 그가 구유위를 이끌었는데 목진이 그의 자리에 오른 것을 보니 구유가 소년으로 조봉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것이 분명하단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가 먼저 구유궁을 배신했지만 마음은 썩 좋지 않았다. 만약 목진이 그보다 훨씬 잘하면 다들 조봉이 목진보다 못하다고 떠들어 댈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 다 구유가 데려온 탓도 있었지만 조봉은 속이 좁아 이런 상황을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타인을 배신할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은 절대 그를 배신하면 안 된다는 괴상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기회가 오면 저 녀석을 영원히 금지봉에 묶어둘 거야.”
조봉이 오천한테 조용히 말을 건넸다.
“허허, 저 녀석이 어지간히 싫은가 보구나!”
오천이 히쭉 웃으며 조봉의 어깨를 다독였다.
“대라금지 대결에서 사망자가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녀석이 죽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먼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최우선이니 일단은 여기에 집중하는 게 좋을 거 같아. 그리고 왕께서 따로 사람을 불러 저 녀석을 상대하게 했으니 아마 금지를 볼 기회조차 없을 거야.”
이에 조봉은 아쉬운 듯 웃더니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정상에 오르지도 못한다면 그 무능함은 자연스럽게 증명되니 구유궁은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목 통령님, 대라금지 대결에서 저 두 녀석을 반드시 조심해야 해요.”
구산이 조용히 말을 건네자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오천과 조봉의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눈빛에 피식 웃었다. 과연 누가 먹잇감일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때 향긋한 냄새가 나서 돌아보니 당빙이 어느새 앞쪽에 나타나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바라봤다.
“당 집사님, 무슨 일인가요?”
목진이 히쭉 웃으며 묻자 당빙은 소년을 흘겨보며 답했다.
“구유 언니가 오늘, 대라금지의 대결에 참석한 사람이 백 명 가까이 된다는 사실을 너한테 알려주라고 했어. 그리고 그들 중 호락호락한 상대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했어.”
“그렇게나 많아요?”
목진은 생각보다 많은 숫자에 깜짝 놀랐다. 대라금지 대결은 분명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3황께서 이번 대결의 참석 인원수를 늘리기로 하셔서 9왕 휘하의 통령들 외에 대라천역의 일부 세력에도 자격이 주어졌어.”
당빙은 혈응전 쪽을 힐끗 보더니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너한텐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야. 그들 중 혈응전과 사이가 좋은 세력이 꽤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들이 나서서 네 앞길을 막을 거야.”
이에 목진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오천과 조봉도 전력을 다해 상대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까지 끼어들면 일은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혈응전은 역시 마음에 안 드는 세력이었다.
소년의 표정에 당빙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멀리 떨어진 한 석대를 힐끗 보고 돌아서려 했다.
“당빙 누이, 뭘 하려는 거예요?”
“그게…….”
목진이 어리둥절하여 묻자 당빙은 순간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주악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하려고. 그럼 네가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당빙은 주악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그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목진은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당빙 누이가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이에 소녀는 안색이 어두워진 채 목진을 노려봤다. 소년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라천역에 와서 처음이었는데 순간 소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저기, 목통령님, 당빙은 별다른 뜻이 아니라 구유궁을 위해 뭐라도 해보려는 거예요. 구유 궁주의 체면은 지켜내야죠.”
옆에 서 있던 구산이 황급히 해명했다. 그는 비록 당빙보다 나이는 많지만 소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구산은 눈가가 붉어진 당빙한테 고개를 돌렸다.
“당빙이 주악을 찾아가면 구유궁 체면은 바닥을 칠 뿐만 아니라 목통령님이 승리를 거두려고 여인까지 이용한다고 소문날 거예요. 우리는 목통령님의 실력을 잘 알지만 다른 사람은 그게 아니잖아요?”
당빙은 눈가를 훔치고는 두 눈을 부릅뜨고 목진을 바라봤다.
“난 너를 무시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야. 이번에 혈응왕께서 실력이 1급 지존 정상에 오른 사람 네 명을 불러들여 너를 상대하라고 시켰대. 거기에다 오천과 조봉까지 합세하면 네가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이에 목진은 인상을 조금 찌푸린 채 당빙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요, 당빙 누이. 저들이 정말 여럿이서 공격한다고 해도 난 절대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만약 금지봉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한다면 저들도 나와 함께 있어야 할 거예요.”
소년의 무덤덤한 말투에 엄청난 살기와 자신감이 묻어났다.
당빙은 그런 목진을 힐끗 보고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입술을 깨물기만 했는데 꼭 억울한 일을 당한 소녀처럼 보였다.
목진은 순간 범상치 않은 시선을 느꼈는데, 구유위 중에는 아직 목진보다 당빙한테 더 마음이 있는 이들이 많았다.
이에 소년은 헛기침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건넸다.
“당빙 누이, 이러지 마세요. 나를 죽이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네가 죽든 말든 내가 걱정할 게 뭐 있어? 내가 괜한 말을 했어. 넌 한 대 맞아야 해.”
당빙은 피식 웃더니 소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녀한테 이렇게 말한 사람은 목진이 처음이라 한 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당빙 누이, 내가 살아있는 한 우리 구유궁의 체면을 구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떠나가려고 돌아섰던 당빙은 목진의 말에 바로 멈춰 섰다.
“알았어! 그럼 잘하고 와. 안 그럼 앞으로 나한테 지존영액을 한 방울도 얻어가지 못할 줄 알아.”
“네, 당 집사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목진이 웃으며 대꾸하자 당빙은 입을 삐쭉 내밀며 구유한테로 돌아갔다. 당빙이 떠나자 목진은 한기 가득한 눈빛으로 혈응전 쪽을 바라봤다.
“너희가 뭘 하든 얼마든지 받아주지.”
쿵! 쿵!
어느덧 시간이 흘러 분위기가 한껏 끓어오르자 종소리가 들리며 하늘에 빛이 모여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 속에서 3황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대라천역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천취황, 영동황, 실력을 가늠할 수 없는 수황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경외의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고 9왕을 포함해 전부 허리 굽혀 인사를 올렸다.
이에 천취황이 옷깃을 휘날리자 다들 부드러운 힘에 저절로 허리가 펴졌다.
“대라금지의 규칙은 다들 잘 알 것이니 더는 말하지 않겠다. 우리는 결과만 볼 것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거라. 대라금지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네 명뿐이니 다들 계획을 잘 짜고 움직이기 바란다.”
천취황의 말에 분위기는 순간 숙연해졌고 다들 살기를 품은 채 정상을 바라봤다. 대라금지 경쟁에 참여한 사람은 정예나 다름없었기에 수많은 사람 중에서 4위 안에 드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된 것 같군.”
눈에서 영광이 번쩍이는 영동황이 입을 열자 천취황과 함께 나긋나긋한 수황을 바라보며 웃었다.
“몽 형, 금지봉을 엽시다.”
그들도 대라천역의 내부 일에 거의 간섭하지 않는 수황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세 사람 중에서 수황이야말로 대라천역의 역주가 가장 믿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럽시다.”
수황은 하품을 쩍 하더니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