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금신
마망성의 중심 주역에 널찍한 광장이 있고 그 중심에 천 장 정도 높이의 마망 조각상이 놓여있었는데 그곳엔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내려오지 못한 사람들로 인해 위쪽 허공마저 인산인해가 되었다.
그들은 전부 마망 조각상을 바라봤는데 거기 놓인 수십 개의 의자에 웅장한 영력을 내뿜는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과 영력 파동으로 보면 그들은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중, 중심에 앉아있는 세 사람의 영력이 제일 그윽하였다. 가장 중심에 앉아있는 검은색 도포를 입은 사내는 튼튼한 체구에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움푹 파인 눈이 독사처럼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목에 검은색 이무기의 무늬가 얼핏 보였는데 입을 쩍 벌리고 무언가를 집어삼키려는 모습이 섬뜩하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의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구유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그가 바로 마망성의 성주 나망이었다.
교활하고 독한 나망은 실력이 이미 2급 지존의 정상에 이르렀고 대라천역의 성주 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양쪽에 앉아있는 조금은 야윈 두 중년 사내는 각각 혈취성(血鷲城)과 흑암성(黑巖城)의 성주로 실력은 역시나 2급 지존경에 이르렀으나 나망처럼 태연하지는 않았다. 구유궁을 상대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현재의 구유는 겁난을 건너는 데까지 성공해 실력이 혈응왕 못지않았다.
“걱정할 필요 없네. 구유의 실력은 비록 혈응왕과 비슷하지만 그녀만 제외하면 구유궁에서 내세울 만한 사람은 새로 부임한 통령 밖에 없지 않나? 그런데 그 녀석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녀석이라고 했으니 우리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네.”
나망은 곁에 앉아있는 두 사람의 속이라도 꿰뚫어 본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혈취성과 흑암성 성주는 조금이나마 안심되었다.
“녀석이 이곳에 와도 우리가 이렇게 나온 걸 보면 감히 뭐라 하지 못할 걸세. 그때 가서 우리가 뭐라 하든 녀석은 우리 말을 들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망은 히쭉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우리가 구유궁만 물리치면 앞으로 혈응전 사람이 되게 해준다고 혈응왕께서도 약속하지 않았나? 그때 가서는 더는 구유 따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걸세.”
두 성주는 그제야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라천에 들어 혈응왕의 사람이 되는 것은 굽신거릴 줄밖에 모르는 성주가 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비록 도성의 수입이 꽤 있는 편이었지만 대부분 윗전에 바쳐야 해서 그들한테 떨어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오늘, 이곳에 사람이 많이 모이긴 했지만 대부분은 구유궁을 상대하지 못할 걸세…….”
혈취성 성주가 조심스럽게 한 말에 나망이 씨익 웃었다.
“그래서 우리가 나서서 구유궁의 기를 꺾어야 한단 말이네. 오늘 저들이 보는 앞에서 구유궁 사람을 물리치면 누구 편에 서야 할지 다들 잘 알게 될 걸세.”
이에 두 성주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데 서북쪽에서 갑자기 커다란 빛의 기둥이 솟아올라 다들 고개를 휙 돌렸다.
그것은 바로 전송 영진의 빛이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드디어 왔군.”
나망은 거대한 빛의 기둥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기둥 속에서 흑운이 기세등등하게 나타나 엄청난 살기를 형성하자 사람들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다들 그들이 형성한 위압감에 흠칫 놀랐다. 구유위는 9왕 중 최약체였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기세가 상당했다.
구유위는 바로 광장에 다가가 멈춰 섰고 수천 명이 조용히 서서 아래쪽을 훑어봤다.
이에 성주들은 멈칫하였고 나망도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유궁에서 우리 나망성에 오셨다니 영광이네요. 그런데 어느 분이 구유위의 새 통령인지…….”
나망의 말에 구유위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늘씬한 소년이 그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목진은 앞에 나서서 기세등등한 성주들을 쓰윽 훑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법이군.”
그러다 그는 금세 정색하며 말을 이어갔다.
“너희한테 두 가지 선택권을 주겠다. 구유궁에 돌아오거나 성주의 자리를 내놓거나!”
소년의 차가운 목소리에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패기 넘치는 구유궁의 새통령의 모습에 다들 깜짝 놀랐다.
“성주의 자리에서 물러나.”
목진의 강단 있는 말에 떠들썩했던 구역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검은 옷을 입고 허공에 뜬 소년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들은 새로운 통령이 이렇게까지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는 줄은 몰랐다. 대라천역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성주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 건가?
게다가 이곳에는 무려 성주가 50명도 넘게 모여있었다.
사람들은 목진의 말에 기가 죽어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나망 등마저 적잖게 놀란 표정이었다.
그들은 구유궁 사람들의 기를 꺾으려고 사람들을 잔뜩 모았고 1급 지존 밖에 안되는 새로운 통령을 꺾기에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엄청난 위압감을 형성하면 그 뒤부터는 수월할 거라 여겼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구유궁의 새 통령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전부 무시하며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에 잔뜩 화난 나망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소년을 노려보며 외쳤다.
“새로 부임한 통령의 위엄이 참 대단하군요. 당신의 말 한마디로 정녕 성주들을 파면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가요.”
나망 뿐만 아니라 다른 성주들도 조금 화가 난 것 같았지만, 목진의 기에 눌려 감히 뭐라고 하지 못했다. 소년은 그들의 생각을 바로 알아채고는 달래기는커녕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려면 실력으로 제대로 짓밟아주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이분의 말은 곧 구유궁의 뜻을 대표한다.”
목진의 뒤에 서 있던 당빙이 한기 어린 눈빛으로 성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키지 않으면 3황을 찾아가거라!”
이에 나망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당신들이 구유궁에 돌아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지만 이를 빌미로 조건을 걸고 위협할 생각이라면 그 생각은 바로 접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유궁이 이 도성의 주인이란 걸 주먹으로 알려줄 테니까. 누구라도 불만이 있다면 언제든지 구유궁으로 찾아와도 좋다. 그런데 성주의 자리를 탐내는 사람은 아주 많을 것 같구나.”
목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성주들을 바라보며 말했고 다들 그 말에 흠칫 놀랐다. 한꺼번에 이 많은 성주를 전부 물리치려 하다니. 그러다 도성들이 소란을 피울까 봐 걱정도 되지 않는단 말인가?
구유궁에서 성주들을 모조리 파면하면 손실이 엄청날 테지만, 땅이 넓은 대라천역에서 성주 자리에 앉힐 사람을 찾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목진의 말에 일부 성주들은 자신들이 너무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구유궁은 뒷배가 든든해 이번 일로 손해가 조금 나더라도 무리 없이 살아갈 테지만, 그들은 일단 성주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대라천역이란 엄청난 뒷배와 자원들을 잃게 된다. 그럼 앞으로 수련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들자 일부 성주들은 어느새 화가 가라앉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망은 그런 성주들의 모습을 보고 불안해졌다. 구유궁의 새 통령은 어리긴 하지만 결단력이 있어 단숨에 갈팡질팡하던 성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흥, 혈응전에서 우리 도성을 관리하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따위 말을 하는 거요?”
나망은 성주들의 마음이 상대편으로 기울까 봐 황급히 입을 열었다.
“다들 저따위 녀석의 말에 속지 말게, 혈응왕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네!”
혈응왕이란 말에 성주들은 깜짝 놀랐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구유와 비교하면 역시나 혈응왕이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이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성주들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실 그들은 누가 관리하든지 상관없었다. 다만, 한쪽의 편을 들면 다른 한쪽의 적이 될 텐데 구유궁이나 혈응전은 이들이 감히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당빙은 목진의 말에 이들한테 기울이기 시작했던 성주들이 다시 나망의 말에 주눅이 든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이를 꽉 깨물었다.
반면, 나망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피식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다.
“구유궁의 새 통령님, 우리를 구유궁으로 돌아가게 하려면 일단 혈응왕님의 의견부터 여쭤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쪽에서 동의한다면 우리도 아무런 이견이 없어요!”
이에 사람들이 전부 목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구유궁의 새 통령이 이대로 물러선다면 아마 대라천역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목진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나망을 바라봤다.
“나망 성주는 구유궁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으로 생각해도 될까?”
“그건 아니고 일단 혈응왕님의 의견부터 여쭤보라는 것뿐이오.”
나망이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그럼 더는 말할 것도 없네.”
말을 마친 목진은 살기 가득한 얼굴로 나망을 바라봤다.
“그러네요, 의논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 같네요.”
나망도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꼈는데 튼실한 몸집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형성했다. 그는 몇 마디 말로 자신을 제압하려 하는 목진이 우스워 목진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나망은 목진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때 목진은 씨익 웃으며 앞으로 나섰는데 용음이 들리더니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나망도 뒤로 물러났지만 뒤쪽 공간이 찢어지며 그 사이로 용의 그림자가 나타나 그의 등을 향해 보라색 화염이 깃든 장풍을 쐈다.
퍽!
나망은 바로 눈치채고 웅장한 영력을 끌어올려 반격했는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난폭한 영력 파동이 미친 듯이 휘몰아쳤다.
이에 두 사람이 서 있던 곳의 지면은 움푹 파였고 그곳을 중심으로 균열이 신속하게 일어 다른 성주들은 부랴부랴 물러났다.
그때 목진의 몸 표면에서 뇌광이 번쩍였고, 그는 바로 뇌신체를 한껏 끌어올려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당신만 육신을 수련했다고 생각하는 거요?”
나망이 피식 웃으며 발을 힘껏 구르자 몸에 새겨졌던 검은색 이무기가 꿈틀거리며 그의 목덜미를 물었다. 그러자 그의 육신이 까맣게 물들며 흑철처럼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가 어두운 빛을 발하는 주먹을 휘두르자 목진의 뇌광이 번쩍이는 주먹과 부딪쳐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을 제외하고 주위 대지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 무서운 힘에 사람들은 심장이 파르르 떨렸다.
나망의 실력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망이 그해, 마망성의 성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수련한 마망지신(魔蟒之身)이 가진 무서운 힘과 단단한 육신이 2급 지존 중에서도 정예에 속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1급 지존밖에 안 되는 소년에게 밀리고 있었다.
“제법이네요. 그런데 나를 이기기는 그렇게 쉽지 않을 거예요!”
나망은 사악하게 웃었지만, 그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때 목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씨익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럼 금신의 힘 좀 맛볼래?”
목진의 눈에서 갑자기 금광이 발하더니 은빛으로 빛나던 피부가 빠르게 눈부신 금광으로 변했다. 멀리서 보면 꼭 황금으로 빚어진 것처럼 보였다.
“꺼져!”
목진이 다시 황금색 주먹을 휘두르자 무서운 힘이 솟구쳤다.
퍽!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나망은 바닥에 수천 장 정도의 깊숙한 흔적을 남기며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소름이 끼쳤다.
소년이 나망을 한 주먹에 날려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