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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442화 (441/1,000)

442화. 전진사(戰陣師)

목진과 오천도 멈칫하더니 금세 정신을 차리고 인사를 올렸다.

“수황님을 뵙습니다.”

이에 수황은 느긋하게 손을 휘익 저었는데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은 그의 본체가 아니라 영력으로 만든 영체였다. 영체만으로도 구유위와 혈응위의 전의를 손쉽게 없애다니, 그 실력이 실로 엄청났다.

“너희 대결이 규칙에 어긋나는 건 아니지만 마망성은 작은 도성이 아니라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손해가 엄청날 것이다.”

“혈응전에서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목진이 겁도 없이 밀어붙여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대인께서 녀석을 통령의 자리에서 해임해 주십시오.”

“원래 구유궁이었던 도성을 되돌려받으려는 것뿐인데 혈응전에서 막아섰으면 대가를 치르는 것이 정상 아닌가?”

오천의 가시 박힌 말에 목진은 태연하게 밀어붙였다.

그런데 수황은 두 사람의 말을 끊고 손을 휘익 저었다.

“이곳은 싸우기 적합한 곳이 아니니 적당히들 하거라. 그리고 대라천역의 대수렵전도 곧 열릴 텐데 그때 가서 넓은 땅을 토벌하는 것이 더 낫지 않지 않겠느냐?”

이에 오천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라천역에서 지위가 높은 수황과 달리 오천은 일게 통령일 뿐이라 감히 그의 의견에 반박할 수 없었다. 오늘 일을 이대로 마무리한다면 혈응전에 좋을 게 없었다.

“허허, 수황 님의 말씀도 일리 있긴 하지만 혈응전에서 몇 년 동안 다스린 도성을 이렇게 쉽게 돌려받으려 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그때 갑자기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혈응왕이 혈응위의 위쪽 하늘에 나타났다. 오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쩔 건데?”

잇따라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더니 구유도 모습을 드러냈다.

혈응왕과 구유는 이쪽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다가 수황께서 나타나자 다들 덩달아 나선 것이다.

이러한 광경에 사람들은 몰래 혀를 끌끌 찼다. 도성의 관할권 문제로 구유왕과 혈응왕까지 나서다니. 두 세력은 역시나 엄청난 앙숙이었다.

“몰라서 묻는 거야?”

혈응왕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수황께서 여긴 싸울 곳이 아니라고 하시니 도성을 되찾고 싶거든 사흘 뒤, 군투장(軍鬥場)에서 볼까? 너희가 혈응위를 이길 수 있다면 혈응전에서는 너희 소유였던 도성 50군데는 물론, 다른 도성 50군데에 지천단(至天丹) 다섯 알까지 보태서 줄게.”

혈응왕의 말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랐다. 도성 100곳의 관할권뿐만 아니라 지천단 다섯 알까지 내놓다니 이건 엄청난 대결이었다. 게다가 지천단은 아주 비싼 물건으로 4급 지존경 이하의 수련자가 삼키고 제련하면 실력이 바로 1급은 더 오른다고 하여 다들 탐내는 물건이었다.

구유도 상대방의 말에 깜짝 놀랐다. 혈응왕이 구유궁을 쓰러뜨리기 위해 참 애를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유위가 패배하면 우리 혈응전 휘하로 들어와. 대신 구유궁 일에는 손대지 않을게.”

혈응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당빙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혈응왕은 정말 구유궁의 체면을 깎아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구유궁에서 일단 혈응전으로 들어가면 구유위는 완전히 무너져 더는 기를 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옆에 서 있던 목진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혈응왕을 바라봤고 수황은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대라천역 내부의 경쟁이 치열한 것은 사실이었고 이러한 경쟁 속에서는 승리하는 자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어때? 우리를 상대할 용기가 없다고 해서 비웃지는 않을 거야. 대신 도성들을 돌려받을 생각은 이제 하지도 마.”

혈응왕이 피식 웃으며 한 말에 구유는 안색이 확 어두워진 채 아래쪽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혈응왕은 혈응위와 구유위의 대결을 통해 승패를 가리려고 했지만, 현재 구유위의 통령은 목진이라 구유는 응당 소년의 의견을 존중해야 했다.

이에 다들 자연스레 목진한테 눈길을 돌렸고 오천도 팔짱을 낀 채 히쭉거리며 소년을 바라봤다. 혈응왕은 현란한 입을 놀려 구유궁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런데 이때, 목진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구유를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유는 소년의 반응에 놀랐지만 이를 악물고 답했다.

“좋아, 구유위는 혈응위와 싸우겠어! 그러니 사흘 뒤, 우리한테 줄 물건을 미리 준비해둬!”

“하하, 역시 구유왕은 패기가 넘치는군!”

구유의 말에 혈응왕은 박장대소했는데 정작 눈빛에는 간사함이 잔뜩 묻어났다.

“그럼 오늘 일은 없던 것으로 할 테니 사흘 뒤, 군투장에서 기다리지.”

목적을 달성한 혈응왕은 바로 혈응위와 함께 한 줄기 혈광이 되어 사람들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에 수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비록 3황 중 한 명이나 쌍방이 합의한 대결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그는 구유와 목진을 힐끗 보더니 자리를 떠났다.

구유는 그제야 목진한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오늘은 고생했어. 나머지는 구유궁에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목진은 구유, 구유위와 함께 전송 영진을 소환해 구유궁으로 돌아갔다.

“혈응위와 구유위가 싸우다니, 대단한 볼거리가 생겼군.”

“혈응왕께서 일부러 그러는 걸 정녕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혈응위는 실력과 그 규모가 구유위를 뛰어넘는데 이런 대결은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혈응위의 수가 많긴 하지만 통령 여러 명이 나눠서 관리하고 있지 않나? 게다가 오천은 기껏해야 전체 수의 절반 정도밖에 통제할 수 없고. 강제로 혈응위를 전부 통제하려고 하면 몸이 받아들이지 못할 걸세.”

“아무리 절반이라도 천 명밖에 안 되는 구유위보다는 많지 않나?”

“구유궁에서 대결에 응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글쎄…….”

* * *

어느새 구유궁에 돌아온 구유는 인상을 찌푸린 채 왕좌에 앉아있었고 대전의 분위기는 삭막했다.

“혈응왕은 이번 기회에 우리와 결단을 낼 작정이야.”

혈응왕은 구유궁에서 도성의 관할권을 돌려받아 지존영액을 확보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대가를 제시하며 싸움에 끌어들인 것이다.

이건 구유궁한테 기회인 동시에 상당히 위험한 함정이었다.

“혈응위는 구유위보다 훨씬 많아. 이대로 싸우면 우리에게 전혀 승산이 없어.”

당빙이 잔뜩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구산 등도 조용히 서서 여태껏 입을 열지 않은 목진만 바라봤다. 그들은 오늘 목진의 행보에 완벽히 넘어가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기세였다.

“혈응위의 수는 어떻게 돼?”

목진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5천 명을 넘어요. 대신 오천의 실력으로는 기껏해야 그중 절반을 통솔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 절반의 수를 넘으면 전의 때문에 오히려 해를 입겠지만 그래도 구유위의 수보다 훨씬 많아요.”

구산이 바로 대답했다.

이에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혈응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수적 우세까지 있는 데다가 오천마저 상대하기 쉽지 않아 이번 대결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목진아, 이번 대결에서 이길 자신이 있어?”

당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대결은 구유궁에 상당히 중요했다. 구유궁이 일단 대결에서 이기면 도성 백 군데의 관할권을 받을 수 있어 더는 지존영액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패배하면 대라천역에서 혈응전과 동등한 지위였던 구유궁은 혈응전의 졸개가 될 것이 분명했고 사기도 엄청나게 떨어질 것이다.

“만약 오천이 혈응위 중 절반 정도밖에 장악할 수밖에 없다면 전혀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들 역시 쉽게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거예요.”

목진의 살기 가득한 말에 사람들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 사흘 뒤에 열릴 대결은 아주 치열할 것이다.

그야말로 구유궁의 생사가 달린 대결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사람들은 한껏 진지해졌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 다들 고개를 들어보니 검은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목진의 옆에 앉아 과일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만다라였다.

“저 아이는 누구야?”

당빙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소녀를 바라봤다. 구유위들이 지키고 있는 구유궁에 소리 없이 나타나다니 범상치 않은 소녀였다.

“그게…… 다들 긴장할 필요는 없고……. 이 아이는 내 여동생이에요.”

목진이 한숨을 쉬며 한 말에 만다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도와줄까? 조건이 있지만 말이야.”

“조건이 뭐야?”

목진의 말에 만다라는 생긋 웃었는데 청순하고 귀엽게 생긴 소녀의 모습에 당빙은 바로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놨다.

그러나 목진은 오히려 더 두려워졌다.

“긴장할 거 없어. 내 조건은 간단해. 신비로운 종이를 나한테 열흘만 빌려줘.”

만다라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건 절대 안 돼!”

목진은 단칼에 잘랐다. 신비로운 종이는 목진한테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 절대 체내에서 꺼내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이는 지지존마저 탐낼 만고불후신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야!”

만다라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봤지만 목진이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걸 알고 결국 씩씩거리며 휙 돌아섰다.

“갑자기 신비로운 종이는 왜 빌리려는 거야?”

목진은 자기 곁에만 있으면 만다라 꽃의 무늬에서 비롯된 힘으로 체내의 저주를 억제할 수 있다고 했던 소녀의 말이 생각나 굳이 신비로운 종이를 빌리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에 만다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체내의 저주가 폭주할 기미가 보여서 신비로운 종이로 제압하려고 해.”

“그럼 나도 함께 가. 내가 곁에 있다고 방해가 되진 않겠지?”

목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말했고, 만다라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소년이 정말 동의할 줄은 몰랐다.

“그, 그래. 고마워.”

소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말에 목진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럼 이젠 방법을 알려줄 수 있겠어?”

이에 만다라는 고개를 들어 황금빛 눈으로 사람들을 쓰윽 훑었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엄청난 위압감을 느낀 듯 바로 그녀의 눈을 피했다.

“혹시 전진사라고 들어봤어?”

“전진사라…….”

만다라의 앳된 목소리에 구유만 뭔가 알기라도 한 듯 사색에 잠겼고 나머지는 순간 멍해졌다.

“전진사는 영진사의 일종으로 대천세계에서 일어났던 가장 큰 대전에서도 엄청나게 눈부신 존재였어. 그들은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역외 사족과의 싸움에서 최전선에 나가 싸웠지만 대신 그로 인해 손해도 많이 봤지. 대전이 끝난 뒤, 살아남은 전진사는 아주 적었는데 계승이 끊긴 전진사가 대부분이라 지금은 그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만다라는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전진사는 군대의 힘을 한데 모아 이를 최대한으로 승화시킬 수 있고 최정예 전진사가 강한 군대를 거느린다면 천지존까지 상대할 수 있어.”

소녀의 말에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려 천지존을 상대할 수 있다니, 그렇게 무서운 존재를 상대한다는 것이 정녕 가능하단 말인가!

목진도 몰래 입맛을 다셨고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어떻게 하면 전진사가 될 수 있어?”

“몰라.”

만다라가 생긋 웃으며 한 대답에 목진은 이를 갈며 외쳤다.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소녀의 귀여운 외모와 무서운 실력만 아니었으면 목진은 지금쯤 그녀를 내던졌을 것이다.

“난 전진사가 되는 법은 모르지만, 이 물건이 아마 너한테 도움이 될 거야.”

만다라는 그제야 천천히 손을 내밀었는데 혈흔이 잔뜩 묻은 족자가 나타나면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이에 목진은 조심스럽게 족자를 건네받았고 표면에 빨간색으로 새겨진 글씨를 발견했다.

“전진지심(戰陣之心).”

“전진사는 영진사의 일종이라 영진사인 넌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입문하기 쉬울 거야. 이게 너를 곧바로 전진사로 만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보다 적은 수로 혈응위와 싸워 이기는 것쯤은 문제없다고 봐.”

만다라의 말에 목진은 파손된 족자를 꼭 쥔 채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대천세계에는 역시 신기한 것이 차고 넘쳤다.

그는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 전진지심을 공부할 것이다. 구유궁의 생사가 달린 대결에서 절대 패배란 없었다.

그는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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