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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443화 (442/1,000)

443화. 파손된 족자

혈응전에 돌아온 혈응왕은 새빨간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봤는데 다들 감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오천, 넌 현재 혈응위를 몇 명 정도 거느릴 수 있어?”

“아마 2,500명 정도는 될 거예요.”

혈응왕의 질문에 오천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구유위는 천 명밖에 안 되지만 목진이란 녀석은 요상한 수가 많아 절대 방심하면 안 돼. 그리고 넌 반드시 이번 대결에서 이겨야만 해!”

혈응왕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넌 이제 혈응위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어야 해!”

오천은 화들짝 놀란 채 쭈뼛거리며 말했다.

“제 실력으로 혈응위를 완전히 장악하려다가 되려 큰코다칠 수 있어요.”

이에 혈응왕은 부단히 영광을 발하는 빨간색 단약을 꺼냈는데 그 속에서 기이한 파동이 느껴졌다.

“이건 공령단(空靈丹)인데 대결 당일에 이를 삼키면 잠시 공령 상태가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넌 혈응위의 전의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오천은 순간 화색이 되었다. 혈응왕한테 이렇게까지 신기한 단약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일단 그가 혈응위를 완전히 장악하면 목진과 구유위를 제압하는 데는 절대 문제가 없을 것이다.

목진이 아무리 수단과 방법이 많아도 분명 패배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혈응왕님. 구유궁은 우리한테 밉보인 것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될수록 구유위를 없애거라. 구유위를 잃은 구유궁은 빈껍데기일 뿐이잖아?”

오천이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고 혈응왕도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오천은 5천 명의 혈응위를 거느리고 나타났을 때의 목진의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루빨리 보고 싶었다.

그는 이번에 구유궁을 제대로 짓밟아주리라 결심했다.

* * *

구유위와 혈응위가 싸울 거란 소식이 대라천역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대라천역에서 유명한 혈응위의 실력은 그 구역의 군대 중 3위권에 들 정도로 강했는데 반면, 구유위는 꼴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여 사람들은 구유궁에서 왜 굳이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나서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혈응왕이 내건 조건이 아무리 엄청나도 그것도 누릴 자격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기에 다들 구유궁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구유궁이 대결에서 승리하면 몰라도 일단 패배하면 아무리 천취황이 있어도 그들은 앞으로 대라천역에서 살아남기 힘들어질 것이다.

대라천역의 수많은 부속 세력들은 실력이 강할뿐더러 다들 왕의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 일단 그 자리에 오르면 대라천역의 직계 세력이 되어 완벽한 보호와 수많은 자원을 누릴 수 있는데 이는 엄청난 유혹이었다.

구유궁은 이번 대결에서 절대 패배하면 안 된다.

* * *

대라천역 전체가 두 세력의 대결에 떠들썩해졌는데 정작 구유궁은 이전보다 더 조용했다. 전보다 수비를 훨씬 강화해 사람들은 내부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한편, 검은색 도포를 입은 구유위는 구유궁 깊숙한 곳의 한 산봉우리에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고 그 위쪽 하늘에는 늘씬한 소년이 눈을 감고 앉아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는데 손에는 혈흔이 묻은 족자가 들려있었다.

족자에서 나는 엄청난 피비린내만으로도 절대 보통 물건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목진이 족자를 머리 쪽에 가까이하자 한 줄기 빛이 머리에 스며들었다.

잠시 후, 잇따라 사람들의 고함이 들리더니 목진은 순간 원고의 전쟁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속의 군대는 한결같은 발걸음을 내디뎠는데 이에 천지가 파르르 떨렸다. 목진은 기세등등한 군대의 모습에 조금 놀란 채 그 중심을 바라봤는데 그곳에 누군가가 조용히 앉아있었다.

바로 그 군대의 통령이었다.

“싸워라!”

그때 그 사람이 손을 가볍게 들며 외치자 군대는 이내 포효하였고 엄청난 전의가 하늘 높이 솟아올라 공간이 순간 부서졌다.

크으으으!

웅장한 전의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커다란 용을 만들어 포효하였다. 이에 주위 십만 리 공간이 부서졌고 녀석이 입을 쩍 벌리자 수만 장 정도의 빛줄기가 솟구쳤다.

녀석은 멀리 떨어진 공간에 난 커다란 균열을 향해 공격했는데 균열의 다른 편은 괴상한 파동이 느껴지는 하위면으로, 역외 사족이 점령한 곳이었다.

쿵!

무서운 힘이 깃든 빛줄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백만 리를 넘어 하위면에 닿더니 공간이 일그러지며 공간 균열이 바로 사라졌고 반대편에 있던 역외 사족은 전멸하였다.

그들은 단숨에 하위면을 없앴다.

이러한 광경에 목진은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역외 사족을 상대하는 군대의 실력도 대단하지만 전진사도 상당한 실력자란 생각이 들었다. 만다라의 말처럼 원고 시기, 정예 전진사들이 천지존을 상대할 실력을 갖췄단 것이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군대의 힘을 빌려야 했지만 말이다.

잇따라 오래된 화면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정보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오묘하기 그지없어 목진은 저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전진지법을 힘으로 다스리는 것은 최하수요,”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수다.”

* * *

목진은 오묘한 글귀에 푹 빠져 한참 지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파손된 족자에 전진사의 수련법은 없었지만 뭔가 느낀 바가 있었다.

전의를 장악하는 법 말이다.

그는 일전에 본인의 실력과 의지로 구유위가 형성한 전의를 강제로 조종하였는데 족자에 쓰인 말대로라면 이는 최하수나 다름없었다.

힘으로 다스리는 것은 최하수고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최고수라…….

마음으로 도대체 어떻게 엄청난 전의를 다스린단 말인가?

목진은 아무리 생각해도 단서가 잡히지 않아 고개를 숙여 아래쪽에 앉아있는 구유위를 보더니 손을 휘익 저었다. 그러자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웅장한 전의를 형성했고 그는 눈을 감고 이를 느꼈다.

구유, 당빙, 당유 등은 머지않은 산봉우리에 서서 걱정 어린 눈빛으로 목진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구유 언니, 목진이 해낼 수 있을까요?”

당유가 조심스럽게 묻자 구유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번에는 그녀마저도 확답을 줄 수 없었다. 전진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경험을 전수해줄 사람은 없었고, 목진이 전진사의 수련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일은 더욱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혈응왕은 이번 대결을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목진이 전의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승산이 없어요.”

당빙의 말에 구유도 동의하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벼랑 끝에 앉아 가볍게 다리를 흔드는 만다라를 바라봤다.

“내 도움을 구할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원하는 바가 있지만 않았어도 족자를 내주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이 일은 결국 목진한테 달렸어. 내 신분에 더 이상의 도움은 절대 안 돼.”

“신분이라니?”

구유가 어리둥절하여 물었지만 만다라는 더는 답하지 않고 멀리 떨어진 소년을 바라봤다. 그녀도 목진이 과연 전진지심에서 뭔가 깨닫고 전의를 다스리는 법을 장악할지 궁금했다.

목진은 눈을 꼭 감고 웅장한 전의 속에 앉아 이와 어울리려고 애썼는데 쉽지 않았다.

전의를 조종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어울려 한 몸이 되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고 마음으로 다스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목진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전혀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의 의지에서 비롯된 전의는 힘이 없어 강대해지려면 영력과 융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동의 영력을 한데 융합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렇게 목진은 파손된 족자에 적혀있던 오묘한 글귀를 떠올리며 그 속에서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전의는 의지와 영력의 결합물로 그 속에 담긴 의지를 완벽히 장악해야 비로소 전의를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이는 전진사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이기도 했다.

다만, 피땀을 흘리며 수련한 군인들은 의지가 보통 사람보다 확고해 전의의 힘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면 전진사를 충분히 믿어야 했기에 힘으로 전의를 다스리는 것이 최하수라고 한 것이다.

목진은 천천히 눈을 뜨고 잠시 생각하더니 갑자기 두 손을 벌려 영력을 거두었고 가장 편한 자세로 웅장한 전의를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전의를 상대할 때, 해라도 입을까 봐 조금은 경계한 채로 이를 다스리곤 한다. 일단 전의가 난폭해져 통제할 수 없게 되면 엄청난 후과를 초래할 거라 감히 목진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쿵!

목진은 웅장한 전의가 체내에 스며들도록 내버려 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정신줄을 붙잡고 있었다.

일정한 시간이 흘러 목진은 전의 속에 깃든 수많은 의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크으으으!

목진은 구유위의 포효가 들리기 시작했다.

구유위의 인정을 받은 목진은 전의와 완벽히 융합해야 그 속에 깃든 진정한 힘을 끌어올릴 수 있고 그래야 진정한 전진사가 될 수 있었다.

어느덧 사흘이 훌쩍 지났다. 누군가 일부러 소식을 퍼뜨렸는지 대라천역에서 혈응위와 구유위의 대결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구유위가 대결에서 패배하면 혈응전 휘하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여태껏 왕급 세력이 다른 왕급 세력의 부하가 된 전이 없어 다들 대결의 결과를 궁금해했다.

구유궁이 일단 패배하면 명성은 물론이고 아무리 천취황이라도 더는 구유궁을 보듬어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사람들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간사한 혈응왕에 비해 구유왕은 아직 어렸고 생각이 짧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대라천역이 떠들썩해져도 구유궁은 여전히 질서정연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구유궁의 반응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시간이 흘러 사흘째 태양이 구름을 뚫고 대지를 비추자 사람들은 여전히 조용한 구유궁에 관심을 기울였고, 대라천역의 중심 구역에 있는 어두운 대전 앞에 서 있는 수라왕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구유궁 쪽을 바라봤다. 그 뒤에는 4대 통령 중 으뜸인 서청도 함께 서 있었다.

“수라왕님, 구유궁은 여전히 미동도 없나요?”

서청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자 수라왕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구유왕은 젊긴 하나 절대 경솔한 사람이 아니야. 그녀가 혈응전에서 내던진 도전장을 받아들인 건 분명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 구유궁에 숨어 필살기를 준비하고 있을 거야.”

“구유궁의 새 통령이 혈응전의 결투 신청을 받아들인 거라고 들었어요…….”

서청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참 겁도 없는 녀석 아닌가요? 구유는 왜 녀석이 하자고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지 모르겠네요.”

서청은 구유가 목진을 단순히 부하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 그럼 절대 목진의 ‘만행’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이에 수라왕은 서청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으며 물었다.

“왜, 목진을 질투하는 거야?”

수라왕의 말에 서청은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목진을 쉽게 생각하지는 마.”

수라왕은 고개를 저으며 구유궁 쪽을 노려봤다.

“혈응전에서는 분명 목진을 건드린 것을 후회할 거야.”

서천은 흠칫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수라왕이 젊은 녀석을 이렇게까지 높게 평가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편, 혈응왕은 혈응전 왕좌에 앉아 호탕하게 웃으며 손으로 철구 두 알을 천천히 굴렸다.

그는 구유궁이 무슨 수를 쓰든 결과는 변함없을 거라고 여겼다. 오늘 혈응위가 구유위를 이기면 앞으로 대라천역에서 아무도 감히 혈응전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혈응왕은 대결에서 패배한 구유의 야성미 넘치는 얼굴에 어떤 표정이 걸릴지 궁금해졌다.

이러한 생각에 혈응왕은 의지가 활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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