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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444화 (443/1,000)

444화. 구유위와 혈응위의 대결

수라왕과 혈응왕 외에 다른 왕급 세력도 구유궁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구유궁에서 끝까지 나서지 않으면 그들은 결국 웃음거리가 될 것이고 그것은 바로 혈응전이 바라는 바였다.

그런데 정작 구유는 조용히 산봉우리에 서 있었다. 검푸른 옷에 긴바지를 입은 구유의 차가운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뒤쪽에 서 있는 당빙과 당유는 손에 땀을 쥔 채 목진이 있는 쪽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사흘째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곧 대결이 시작될 텐데 끝까지 움직임이 없으면 구유궁은 앞으로 대라천역에서 살아가기 힘들 것이고, 다들 구유궁에서 겁에 질려 숨었다고 떠들어댈 것이다. 이는 구유궁에 상당히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구유 언니.”

당빙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구유를 불렀다.

“목진을 강제로 깨울까요? 아예 출전하지 않는 것보다야 실패하는 것이 낫지 않나요?”

이에 구유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구유의 말에 당빙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다라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벼랑 끝에 앉아있더니 기지개를 켜며 조금은 실망한 표정으로 그윽한 구역을 바라봤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만다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다 고개를 돌려보자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던 구유위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쿵!

이와 동시에 위쪽 하늘에 모였던 전의가 수많은 소용돌이를 일으켜 장관을 이루었다.

구유 등도 화들짝 놀라 눈길을 돌렸는데 미동도 없던 소년이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소년한테서 소름 돋는 전의를 느꼈다.

“성공한 것 같군.”

만다라가 흠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당빙과 당유는 금세 화색이 되었고 주먹을 꽉 쥔 채 서 있던 구유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목진이 눈 깜짝할 사이에 구유 등한테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이제 전리품을 받으러 가볼까?”

구유 등은 소년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소년은 늘 엄청난 기적을 만들어내곤 했는데 이번에도 분명 그럴 것이다.

떠들썩했던 대라천이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다들 구유궁 쪽을 바라보며 그쪽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람들은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구유궁에서는 역시나 출전을 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인제 와서 숨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혈응왕은 구유궁의 체면을 박살 낼 작정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니 숨는 것보다는 대결에서 패하는 것이 타격이 적을 것이다.

쿵!

그런데 이때, 구유궁 쪽에서 엄청난 전의가 느껴졌다. 구유궁 위쪽 하늘에 먹구름이 나타났는데 이는 구유위로 가장 앞쪽에 서 있는 늘씬한 소년한테서 하늘을 찌를 듯한 무서운 살기가 느껴졌다.

“구유위는 군투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혈응위는 당장 나오거라!”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웅장한 영력을 싣고 대라천역 곳곳에 퍼졌다.

슉!

잇따라 구유위가 하늘을 가르며 대라천의 군투장으로 향하자 대라천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보아하니 구유위는 혈응전과 정면 승부를 볼 작정인 듯했다. 지금 이것보다 흥미로운 대결은 없을 것이다.

슉! 슉!

이에 사람들은 곧바로 군투장으로 향했다.

한편, 혈응전에 앉아 미소 짓던 혈응왕은 수중의 철구를 부수며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오천!”

“네!”

함께 대전에 있던 오천은 바로 대답했다.

“혈응위와 함께 가봐라. 난 앞으로 목진을 대라천에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잘해.”

“네!”

혈응왕의 말에 오천도 사악하게 웃으며 대전에서 나와 혈응위와 함께 살기를 가득 품은 채 군투장으로 향했다.

* * *

군투장은 대라천의 서북쪽에 있는 가장 큰 훈련장으로 대라천의 군대들도 이곳에 자주 와서 힘을 겨루곤 했기 때문에 이 구역은 전쟁터로 꾸며졌고 살기로 흘러넘쳤다.

그런데 오랜만에 그곳은 구유위와 혈응위의 대결로 유난히 떠들썩해졌다.

슉!

그때 하늘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먹구름 한 덩이가 몰려와 내려앉자 대지가 흔들렸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끄떡없었다.

잇따라 목진도 구유위의 앞쪽에 가볍게 내려앉았는데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전사들의 눈빛을 보더니 만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유위는 그 수가 적긴 하지만 기세로는 절대 밀리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지존경에 이르면 5급 지존과 싸워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슉! 슉!

곳곳에서 군투장으로 향하는 불빛들을 볼 수 있었는데 다들 그 주위를 둘러싸고 멈춰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구경꾼 중에는 다른 9왕도 있었는데, 그들의 대결이 대라천역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잇따라 구유, 당빙, 당유 등도 구유궁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구유궁은 전원을 이끌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사람들이 구유궁의 여인들에게 눈길을 돌렸다가 흠칫 놀라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슉!

그때 하늘이 빨갛게 물들더니 전투장으로 신속하게 몰려와 폭우처럼 떨어져 내렸는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흔들렸다.

혈응위가 드디어 도착하자 다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혈응왕도 어느새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는데 음침한 눈빛으로 구유위를 바라보더니 사악하게 웃으며 구유한테 눈길을 돌렸다.

“구유, 구유위가 오늘 대결에서 패하면 혈응전은 왕급 세력을 섭렵할 수 있겠군.”

이에 구유는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네 뜻대로 되지 않을 테니까 도성 백 군데와 지천단이나 준비해둬.”

“허허, 구유위의 실력이 충분하다면 난 얼마든지 도성과 지천단을 내줄 수 있어.”

혈응왕이 히쭉 웃으며 말하더니 손을 휙 저었다.

“잔말은 그만하고 바로 시작할까?”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혈무가 그윽한 곳에 광풍이 일더니 혈광이 천천히 사라지고 선홍색 갑옷을 입은 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무리가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다. 이들의 선홍색 갑옷에는 하나같이 선홍빛 그림자가 새겨져 있었고 엄청난 살기를 내뿜었다.

혈응위의 가장 앞쪽에 서 있는 오천도 똑같은 옷을 입은 채 혈창을 들고 씨익 웃으며 목진과 구유위를 바라봤는데 곧 잡힐 사냥감을 보는 것 같았다.

“목진, 같은 대라천역 사람인 것을 봐서 지금 당장 패배를 인정하면 너희를 사지로 내몰지는 않을 거야. 이러다 구유위가 중상을 입어 대라천역이 앞으로 열린 수렵전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면 안 되잖아?”

오천의 말에 목진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을 나한테 하면 어떡해?”

“참 어리석군.”

오천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끝장을 보기 전에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네? 그럼 혈응전이 잔인하다고 탓하지 마.”

이에 목진이 혈응위를 쓰윽 훑더니 오천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뭐지?”

구유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주위를 살폈는데 혈응위 뒤쪽의 혈운이 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쿵!

그때 대지가 미세하게 떨리며 가지런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 다들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윽한 혈운을 바라봤는데 그곳에서 혈응위가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들은 앞서 나타난 혈응위의 수와 거의 비슷했다.

이러한 광경에 서청과 주악마저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혈응전에서 혈응위를 전부 내세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오천의 실력으로 과연 이들을 전부 통제할 수 있을까? 녀석은 혈응위의 전의에 오히려 해를 입을까 봐 걱정되지 않는단 말인가?

다들 혈응전의 예상치도 못한 한 수에 수군대기 시작했다.

“혈응전에서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참 애를 썼군.”

목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혈응위를 바라봤다.

“허허, 지금 후회해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어.”

오천은 히쭉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다.

“네 실력으로 이 정도 수는 감당하지 못할 텐데. 전의에 몸이 상할까 봐 걱정되지 않나 봐?”

이에 오천은 미소를 지으며 영광이 번쩍이는 단약을 꺼내 꿀꺽 삼키더니 씨익 웃으며 답했다.

“인제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졌어.”

“저건…… 공령단이잖아! 비겁한 녀석!”

당빙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녀는 공령단의 효과를 잘 아는 모양이었다.

구유의 안색도 점차 어두워졌다. 혈응전은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허허, 구유, 공령단을 사용할 수 없다는 규칙은 없었어.”

혈응왕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구유는 주먹을 꽉 쥐며 그를 노려봤다.

사람들은 혈응왕의 수법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혈응전에서는 굳이 공령단을 사용하지 않아도 구유궁보다 실력이 뛰어나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혈응왕의 말대로 공령단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구유궁의 상황은 조금 더 나빠졌다.

그러나 구유는 사람들의 동정 어린 눈빛 따위는 무시하고 목진을 바라봤는데 소년도 미소를 지으며 구유를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진의 반응에 구유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시름이 놓였다. 목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런 비겁한 수법이 우리한테 잘 통하길 바래.”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목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오천은 한숨을 쉬더니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앞으로 더는 그따위 소리를 하지 못할 테니까!”

말을 마친 오천은 바로 수중의 장창을 힘껏 휘둘렀다.

쿵!

잇따라 뒤쪽에 서 있던 혈마위도 수중의 혈창을 힘껏 내리찍자 대지가 진동하며 선홍빛 전의가 혈해처럼 휘몰아쳤다.

엄청난 광경에 사람들은 바로 정색하였다.

엄청난 선홍빛 전의가 휘몰아치자 주위는 점차 어두워졌고 그윽한 피비린내가 풍겼다.

사람들은 이내 정색하여 무서운 전의를 내뿜는 혈응위를 바라봤다. 혈응위는 혈해에서 기어 나온 절세의 흉수처럼 앞을 가로막는 적을 전부 물리칠 기세였다.

대라천역의 군대 중, 혈응위는 최강 군단은 아니지만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누적된 살기만은 손에 꼽힐 정도로 무서웠다.

여태껏 얼마나 많은 세력이 혈응위의 혈창에 숨졌는지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혈응위가 수많은 이들의 피로 물들인 혈창으로 구유위를 겨눴으니, 과연 구유위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다들 궁금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구유위로 고개를 돌렸는데 검은색 갑옷을 입은 군인들은 여전히 똑바로 서서 엄청난 전의를 내뿜었다.

목진과 오천은 눈이 마주치자 각자 웅장한 영력을 끌어올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혈응 전의!”

오천은 피식 웃더니 바로 손을 휘두르며 외치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선홍빛 전의가 휘몰아쳐 혈해를 만들었다.

“통령이 된 지 3개월도 안 된 네가 무슨 수로 천 명밖에 안 되는 구유위를 이끌고 이번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나 보자!”

오천은 피식 웃더니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볍게 찔렀다.

“혈응 전의, 혈창마진(血槍魔陣)!”

위잉!

혈해는 혈광을 내뿜어 오천의 위쪽에 선홍색 장창을 형성했다. 온전히 전의로 만들어진 예리하기 그지없는 장창에 맞으면 아무리 3급 지존이라도 상처를 입을 것이다.

이는 오천 한 사람의 공격이 아닌 5천 명이나 되는 혈응위의 전위가 모인 것으로 절대 무시할 수 없을 위력이었다.

혈창마진은 이름으로 보면 영진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오천이 정녕 전의로 영진을 칠 수 있다면 목진은 바로 패배를 인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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