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승리를 위해
“목진, 네가 과연 이번 공격도 막을 수 있을까?”
혈우 속에서 사악하게 웃는 오천의 모습이 가증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목진은 소름 끼치는 혈마 신창을 보고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너희만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난 그 어떤 상대든 이길 자신이 있다.”
잇따라 구유위의 마음속에 목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구유위는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수중의 장창을 지면에 꽂더니 이를 잡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목진을 향해 절을 올렸다.
쿵! 쿵!
순간, 검은빛 기둥들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소용돌이처럼 목진의 주위를 감쌌는데 그 속에는 구유위의 끓어 넘치는 의지가 잔뜩 깃들어 있었다.
잠시 후, 목진이 두 손을 벌리자 전의로 이루어진 소용돌이에 소년의 의식이 스며들어 빠르게 커졌다.
그 모습에 오천을 포함해 다들 화들짝 놀랐다.
목진 주위를 감싼 전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엄청나게 늘어나 혈응위의 전의를 훨씬 뛰어넘었다.
“이건 불가능해…….”
사람들은 전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두 손을 펼친 채 서 있는 소년의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소년의 전의에 대한 장악력이 엄청났다.
목진 주위에 전의로 이뤄진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었는데 그 웅장함에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구유위가 선보인 전의는 그 수가 훨씬 많은 혈응위보다 뛰어났다.
“이건 불가능해!”
누군가 목놓아 소리쳤다. 1천 명밖에 안 되는 구유위에 비해 혈응위는 5천 명이나 되는 데다가 각자의 실력도 엇비슷했다. 그런데 다들 왜 구유위의 전의가 이렇게까지 강력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라왕, 열산왕 등 눈치가 빠른 왕들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폭풍 속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우리가 녀석을 너무 쉽게 생각했어.”
수라왕이 서청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진의 전의에 대한 이해와 장악도를 보니 전진사가 될 가능성이 보여.”
“네? 전진사요?”
서청은 순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통령으로서 군대를 거느리는 그는 전진사가 얼마나 희귀하고 강력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전진사가 되고 싶었지만 영진에 대한 재능이 부족해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전진사는 영진사보다 훨씬 희소해서 누군가의 지도가 없으면 뛰어난 전진사가 되기는 어려울 거야.”
수라왕은 조금 아쉬운 듯 말했다. 만약 대라천역에서 전진사를 키워낸다면 그건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일반 통령은 전의의 힘을 1할 정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목진은 구유위의 전의를 완벽히 체현(體現)하고 있어.”
수라왕은 이내 감탄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 대결의 결과는 이미 결론 났군. 구유위는 역시 믿는 구석이 있어 혈응위와 싸우려 했던 거였어. 이번에 혈응전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겠군.”
그때 서청이 고개를 들자 전의가 이룬 소용돌이가 점차 커져 전장을 마구 부쉈다.
“센 척하기는!”
오천은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목진을 노려봤지만 목진이 선보인 실력에 조금은 두려워졌다. 그는 아무리 애를 써도 목진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앳된 소년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오천 역시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목진한테 죽지 않아도 혈응전에 돌아가 혈응왕의 손에 죽을 것이 분명했다.
“네가 1급 지존의 실력으로 하늘도 뒤집을 수 있을까!”
오천이 이를 악물고 손을 휘익 젓자 허공에 떠 있던 선홍색 혈마 신창이 공간을 가르며 전의 소용돌이의 위쪽에 나타났다. 그 무서운 위력에 공간마저 미세하게 균열이 일었다.
혈응위의 최강수는 위력이 상당해 3급 지존경에 이른 강자라도 당해내기 어려워 보였다. 목진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그윽한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가볍게 두 손을 모아 결인하였다.
위잉!
목진 주위를 맴돌던 전의 소용돌이는 미친 듯이 일그러지며 점차 그윽해졌는데 멀리서 보면 거대한 흑룡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구유지령(九幽之翎)!”
목진이 손을 휘두르자 전의 소용돌이 정상에 커다란 검은색 깃털이 서서히 나타나더니 검의 모양을 갖췄다. 미세한 돌기가 난 칼날이 발하는 어두운 빛이 공간을 가를 것만 같았다.
잇따라 목진이 허공에 길쭉한 손가락을 내리찍자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색 장검이 빠르게 진동하다가 사라지더니 혈마 신창의 앞쪽에 나타나 공격을 개시했다.
창끝과 검 끝이 힘껏 부딪치자 금속이 부딪치는 명쾌한 소리가 들리더니 두 갈래의 무서운 전의가 미친 듯이 포효하며 각자 반쪽 하늘을 물들였다.
“부숴버려!”
오천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선홍빛 전의가 미친 듯이 휘몰아쳤고, 그는 최선을 다해 대결에 응했다.
“그럼 내가 부숴주지!”
목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오천을 보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내리찍으며 말했다. 검은색 검 끝이 갑자기 어두운 빛을 발했다.
슉!
빛이 사라지자 검은색 장검이 혈마 신창의 뒤쪽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는데 신창에 미세한 균열이 일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반으로 갈라져 추락해 산산이 부서졌다.
풉!
이와 동시에, 오천은 순간 사색이 되었고 혈응위도 얼굴이 한껏 창백해진 채 피를 토했다. 난폭하기 그지없던 전의마저 신속하게 사라져 빨갛게 물들었던 하늘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대결에서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던 혈응위는 결국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러한 결과에 사람들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꽤 놀란 듯했다.
다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혈응위는 수적으로든 실력으로든 구유위보다 훨씬 뛰어났고 그 통령인 오천도 실력이 2급 지존 정상에 이르러 1급 지존인 목진보다 강했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목진한테 눈길을 돌렸다. 구유위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목진 덕분으로 구유궁의 새 통령은 엄청난 존재였다.
대라천역의 강자들은 더는 목진을 하찮게 보지 않았다. 실력이 1급 지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년의 실제 수준은 놀라웠고, 경험이 풍부한 강자나 9왕을 제외하면 그를 이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다들 몰래 혈응왕을 힐끗거렸는데 안색이 한껏 어두워진 그는 당장 사람도 집어삼킬 것처럼 무서워 보였다.
한편, 구유위는 경외의 눈빛으로 전의를 거두고 있는 목진을 바라봤다. 구유위는 여태껏 대라천역에서 최약체로 불려 다들 무시했는데 오늘 목진 덕분에 드디어 명성을 되찾았다.
앞으로 대라천역에서 구유위를 무시할 사람은 더는 없을 것이다.
“허허,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혈응전의 선물은 잘 받을게.”
목진은 사색이 된 오천한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말했다.
이에 오천은 화가 치밀어 피를 토하며 목진을 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소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목진은 오천을 뒤로한 채 죽상이 된 혈응왕에게 고개를 돌렸다.
“혈응왕님, 언제쯤 도성 백 군데를 구유궁에 넘길 건가요?”
“통령 따위가 감히 나를 상대하려 하다니!”
혈응왕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말하고는 무서운 영력 위압감을 형성하였다.
쿵!
그런데 그때, 십수 갈래의 자염이 깃든 영력 빛줄기가 빠르게 혈응왕의 급소를 공격했고 그는 선홍빛 영력을 끌어올려 보호막을 형성했다.
퍽! 퍽!
영력 빛줄기가 닿자 영력 파동이 휘몰아쳤고 보라색 화염에 닿은 보호막은 빠르게 녹아내렸다.
혈응왕은 체내의 영력을 한껏 끌어올려서야 겨우 보라색 화염을 물리치고 음산한 눈빛으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구유를 바라봤다.
“혈응왕이 언제부터 얼굴에 철판을 깔았지?”
구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직도 내키지 않으면 우리도 한 번 싸워볼까?”
“누가 겁난대!”
“그만하거라!”
그때 천취황이 주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황급히 예를 갖췄다.
“대결에서 패했으면 약속을 지켜야지. 안 그럼 다들 앞으로 뭘 믿고 자네를 상대하겠나?”
천취황이 혈응왕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결이 끝났으니 9왕은 나를 따르거라. 대라천역의 토벌전이 곧 시작될 것이다.”
천취황이 손을 휘익 저으며 한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대라천역에서 드디어 토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단 말인가?
구유위와 혈응위의 대전 결과에 대라천역 전체가 들끓었다. 다들 수적으로나 실력으로나 뒤처진 구유위가 기세등등한 혈응위를 이길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 사건이 대라천역에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전에 사람들은 다른 일에 주의를 빼앗겼다. 바로 대라천역의 토벌전이었다.
대라천역은 북계에서 손에 꼽히는 정예 세력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 한 세력이 바로 대라천역 서북쪽에 있는 백전역(百戰域)이었다.
백전역은 세력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명으로 북계에서 혼잡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수많은 세력이 모여있는 백전역에서 최강은 각각 만검곡(萬劍谷), 마시종(魔屍宗)과 대비천(大悲天)이었다.
그중, 만검곡과 마시종은 북계에 존재한 지 한참 된 세력이고, 대비천의 창시자는 하위면에서 올라온 유명인사로 이들은 대라천역의 정예 세력에 미치지는 못해도 일류라고 불리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들이 협력하면 아무리 대라천역이라도 경계해야 했다.
그래서 백전역의 대부분 세력은 이들을 우두머리로 모시고 대라천역의 땅을 부단히 빼앗아 왔다. 비록 대라천역에서 가끔 반격하기는 했지만 신비로운 역주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탓에 다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 백전역은 점차 기세등등해졌고 대라천역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라천역의 강자들은 원성이 자자했지만 역주의 말씀 없이는 3황이라도 감히 전사들을 이끌고 백전역에 따지러 갈 수 없었다.
이는 곧 엄청난 대전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취황께서 곧 토벌전을 벌인다고 하니 다들 화색이 된 것이다. 이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대라천역에서 오직 한 사람뿐으로 바로 역주였다.
오랜 시간 수련에만 집중하던 역주께서 드디어 바깥세상에 나왔다.
비록 대라천역은 3황이 도맡아 하지만 정신적 지주인 역주가 건재해야 대라천역의 진정한 정예 세력이라 할 수 있었다.
* * *
현재 대라천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대라전에는 대라천역의 고위층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무형의 압박감에 사람들은 숨도 편히 못 쉴 정도였다.
목진도 구유를 따라 대전에 들어갔는데 가장 앞쪽에 서 있는 3황마저 공손하게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평소의 위엄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전의 가장 높은 곳에는 금빛 찬란한 왕좌가 놓여 있었는데 아무도 감히 그곳을 직시하지 못했다.
목진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역주의 모습이 궁금해 왕좌를 힐끗 쳐다봤는데 갑자기 눈부신 빛이 비치더니 공간이 일그러지며 엄청난 위압감을 형성하였다. 이에 다들 저도 모르게 굽신거렸다.
그때 대전의 가장 앞쪽에 서 있던 3황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역주님을 환영합니다.”
이에 사람들도 덩달아 인사를 올렸고 우쭐거리던 혈응왕마저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역주님을 환영합니다.”
목진도 함께 고개를 숙이고 왕좌 쪽을 힐끗거렸는데 어느새 나타난 황금빛 그림자는 황금색 외투를 입고 있다는 것밖에 보이지 않아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역주가 형성한 위압감에 주위의 공간마저 버티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그래.”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대라천역에서 곧 토벌전을 벌일 것이다. 목표는 백전역이다.”
이에 사람들은 순간 의기양양해졌다. 드디어 백전역에 본때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