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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467화 (466/1,000)

467화. 의외의 선택

아수라장이 된 대지 위에는 늘씬한 소년이 서 있었다. 비록 치열한 싸움을 겪어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예리했다.

놀라운 대결 결과에 사람들은 더 이상 소년을 무시하지 못했다.

다들 멍하니 목진을 바라보기만 했는데, 아직도 일전의 대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고 대라천역 측은 하늘이 떠나가라 환호했다.

가장 시시할 것 같았던 대결이 대전 쌍방의 승패를 가를 줄 누가 알았겠는가.

9왕도 큰 짐을 덜어낸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구유도 활짝 웃으며 허공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소년이 정말 대견했다.

그 외, 서청과 주악도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경외의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봤다. 목진이 오천을 쓰러트렸을 때만 해도 그냥 무시하지 않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소년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서청이나 주악이었다면 진비와의 대결에서 처참하게 패했을 것이고 엄청난 압박감을 견디면서 역전하기는 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혈응전의 오천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앞으로 목진과의 실력 차이가 더 크게 벌어질 거라 직감했다.

대결이 끝나자 가장 열광하는 무리는 당연히 구유궁이었다. 거의 웃지 않던 당빙마저 흥분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소년을 바라봤다. 구유궁이 대라천역에서 이런 영광의 순간을 맞이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허허, 역시 역주께서 사람 보는 눈이 있군.”

천취황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목진은 구유가 데려온 사람이라 진심으로 기뻤다.

“제법 쓸만하군.”

과묵하던 수황마저도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때 왕좌에 앉아있던 대라 역주 주위의 빛이 파르르 떨리더니 주위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법이구나. 구유가 대라천역에 진정한 천재를 데려왔어.”

역주도 목진이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대라천역과 달리, 백전역 측은 유난히 조용했고 사람들의 안색이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 그들은 반드시 이길 거라 여겼던 대결에서 패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특히 장검 노인과 시산노귀 등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들은 미리 결과를 예상하고 판을 벌였고 첫 두 차례 대결의 결과도 예상대로였다. 마지막에 이런 변수가 생길 줄은 생각지 못했다.

진비 정도의 실력이라면 대라천역의 모든 통령을 손쉽게 이겨야 정상이었다. 서청, 주악도 그의 상대가 아닐 텐데 갑자기 목진이란 신인이 나타나 판을 뒤집을 줄이야…….

이번 내기는 지존영액 백만 방울과 도성 수천 군데가 달린 엄청난 도박으로 일단 패배하면 백전역 같은 세력한테도 큰 타격이었다.

하여 장검 노인 등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목진을 노려봤다. 그들은 당장에라도 소년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세 차례 대결 중 대라천역이 두 차례를 승리로 이끌었으니 백전역에서는 지존영액 백만 방울과 도성 수천 군데를 최대한 빨리 준비하여 넘기거라. 내가 직접 나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대라 역주의 말에 백전역 사람들은 심장이 철렁하였다.

이에 장검 노인과 시산노귀가 이를 악물며 유천도를 쳐다봤는데 무덤덤한 얼굴로 멀리 떨어져 있는 목진만 노려보았다.

목진도 바로 유천도의 살기를 느끼고 다시 경계 태세를 취했다.

“허허, 패배했으면 약속을 지켜야지.”

유천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말에 장검 노인 등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약속을 어기려 하면 대라 역주는 분명 백전역을 처참하게 짓밟을 것이다.

“유 종주는 역시 약속을 잘 지키는군.”

대라 역주의 말이 끝나자 유천도는 다시 목진한테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전에 대라천역의 목진 통령한테 묻고 싶은 말이 있네.”

목진은 상대방의 한기 어린 눈빛에 멈칫하였다. 유천도가 갑자기 이러는 것이 유명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이에 뒤에 서 있던 구유도 깜짝 놀랐다.

“유 종주께서 무엇이 알고 싶어 그러시나요?”

“몇 개월 전, 내 아들이 상지대륙에 가서 큰돈을 주고 구룡구상술이란 신술을 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와 그를 몰래 보호하던 장로, 그리고 동행하던 장로까지 함께 사라졌다.”

유천도의 한기 가득한 말에 그 구역의 온도가 조금씩 내려갔다.

장검 노인 등도 흠칫 놀라 유천도를 보고는 다시 목진한테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구룡구상술이 뭔지 잘 몰랐지만 목진이 마지막에 선보인 강대한 신술이 그와 비슷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한참을 헤매다 결국 아들과 두 장로가 지하에 봉인되어 있는 곳을 발견했는데, 이들을 봉인한 사람이 지지존이더구나.”

유천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방금 네가 구룡구상술을 부렸으니 이에 관해 설명해줄 수 있을까?”

목진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유천도가 유명이 봉인된 장소를 알아내다니, 역시 실력이 엄청났다.

“구룡구상술이 보기 드물긴 하나 유일무이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꼭 내가 그쪽 아들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고 여기는 건가요? 설마 내가 지지존까지 불러 당신의 아들을 봉인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전 그 정도로 뒷배가 엄청나지 않습니다.”

목진은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그가 일단 인정하면 유천도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다.

“과연 그럴까?”

유천도가 목진을 노려보더니 씨익 웃으며 옷깃을 휘날리자 뒤쪽 공간이 찢어져 공간 통로를 형성했다. 그 속에서 영광이 번쩍이더니 두 사람이 나타났다.

목진은 두 사람 중 눈에 익은 한 청년을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바로 임정의 어머니께서 직접 봉인한 유명이었다.

녀석이 살아남았다니!

그리고 유명의 옆에는 하얀색 옷을 입은 사내가 뒷집을 쥔 채 서 있었는데 유명과 생김새가 비슷했지만 기품이 전혀 달랐다.

“명아, 저 사람을 알겠느냐?”

이에 유명이 고개를 들어 목진을 보고는 히쭉 웃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내가 네 녀석을 찾기 위해 얼마나 애먹은 줄 알아!”

목진은 순간 어쩔 바를 몰랐으나 양측 강자들은 바로 눈치챘다. 목진은 일전에 유명을 상대하다가 봉인 당하게 한 주범이었는데 그가 이렇게 빨리 풀려날 줄 몰랐던 것이다.

이에 안색이 어두워진 대라천역 사람들과 달리, 백전역 사람들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대라천역에서 천현전과 완전히 적이라도 되면 그 후과는 엄청날 것이다. 천현전이야말로 대라천역과 맞먹는 정예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네가 모신 지지존이 제법이더구나. 나 혼자서 그 봉인을 뚫을 수 없어 큰돈을 들여 대단한 분을 청해서야 겨우 아들을 구했다. 다만, 그의 경맥은 대부분 부서져 영력이 전부 사라졌다. 비록 영단으로 조금 회복하긴 했다만 이번 생에 큰 성과를 이루기란 불가능해졌지.”

유천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는데 그 속에 담긴 살기는 점점 짙어졌다.

“유명의 영력을 잃게 한 사람이 너냐?”

그때 유명의 옆에 서 있던 백의 사내도 미간을 찌푸리며 목진을 노려봤다.

“그럼 너도 영력을 전부 잃는 게 공평하겠지.”

말을 마친 사내는 귀신같이 목진 앞쪽에 나타나 옥으로 만든 부채를 꺼내 빠르게 미간을 공격했다.

백의 사내는 바로 살수를 뒀는데 대전을 치러 영력 소모가 심한 목진은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목진 역시 당하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영력을 끌어올렸고 구유가 갑자기 앞에 나타나 길쭉한 손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았다.

퍽!

놀라운 영력 파동과 함께 소녀는 온몸을 파르르 떨었고 백의 사내는 뒤로 십수 보 정도 물러나더니 멈춰서 부채를 폈다. 그러자 적홍색 화염이 활활 타올랐다.

“유명이 목진 곁에 실력이 상당한 여인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너구나.”

백의 사내는 목진 앞에 나선 구유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건넸다.

이에 구유는 못 들은 척 조용히 서서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전개는 구유마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때 유천도가 백의 사내를 멈춰 세우더니 막연한 눈빛으로 목진과 구유를 본 뒤, 왕좌에 조용히 앉아있는 대라 역주한테 고개를 돌렸다.

“내 아들을 폐인으로 만든 두 녀석을 나한테 넘기게. 그럼 우리 천현전에서는 지존영액 이백만 방울과 더불어 대수렵전에서 대라천역을 상대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유천도의 말에 백전역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라천역의 수많은 강자도 화들짝 놀랐다. 유천도가 제시한 조건이 구미가 당겼기 때문이다. 대수렵전은 대라천역과 같은 정예 세력의 생사가 갈리는 엄청난 대결로 천현전 같은 정예 세력을 적으로 돌리면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

하여 목진과 구유 두 사람을 내주고 이 엄청난 걸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대라 역주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했다!

구유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유천도가 이렇게까지 궁지로 몰 줄 몰랐는데 그가 제시한 조건을 마다할 세력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이에 그녀는 조금 차가운 손으로 목진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변고가 생기면 바로 도망가자!”

구유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다. 아무리 대라 역주라도 절대적인 이익 앞에서는 이들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제아무리 대라천역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말이다.

이곳은 잔혹한 천라대륙이지 아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북창령원이 아니었다. 태창 원장처럼 조건 없이 그를 보호해줄 거라 여기는 것은 욕심이었다.

순식간에 그곳의 분위기는 상당히 삭막해졌다.

한편, 유천도는 물끄러미 대라 역주를 바라보고 목진과 구유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대라 역주가 제정신이라면 반드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절대적인 이익 앞에서 구유와 목진 따위는 기꺼이 버리리라.

그때 왕좌에 앉아있던 대라 역주 주위에 비치던 빛에 파동이 일었다.

“허허, 참 솔깃한 제안이군…….”

목진과 구유는 흠칫하더니 바로 체내의 영력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대라 역주는 유천도를 비웃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겠네!”

사람들은 그의 결정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절하겠네!”

대라 역주의 말에 떠들썩했던 현장은 조용해졌다.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를 바라봤고 도망치려 했던 목진과 구유도 멍하니 역주를 쳐다봤다.

심지어 유천도마저 잠시 넋을 놓고 역주를 바라봤다.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재차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백전역 사람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대라 역주가 천현전에서 제시한 엄청난 조건을 거절하고 구유왕과 하찮은 통령 따위를 보호하려 할 줄 몰랐다.

냉철하기로 소문난 대라 역주가 언제부터 이렇게 부하를 위했단 말인가?

사람들은 괜히 헛웃음만 흘렸다.

반면, 대라 역주 뒤에 서 있던 천취황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역주를 쳐다봤다. 그마저도 역주가 구유와 목진을 포기할 거라 여겼는데 다행이었다.

영동황은 눈빛이 조금 흔들렸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수황도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역주를 바라보고는 목진과 구유한테 눈길을 돌렸다.

“대라 역주, 자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그러는 것인가!”

지지존의 경지에 이른 유천도는 바로 정신을 차렸지만 무덤덤했던 얼굴에 화가 조금 깃들었다.

“당신은 본좌가 말하는 것까지 결정하려 드는 건가?”

대라 역주는 여전히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

“저 아이들은 대라천역 사람들이니 당연히 지켜줘야 하지 않겠나?”

“허허, 매정하던 대라 역주가 언제부터 그렇게 다정해졌다고, 내가 멍청한 줄 아는가?”

유천도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득을 보는 일에 배신이란 더없이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겨우 5급 지존인 왕과 2급 지존인 통령 따위에 엄청난 이득을 마다하는 역주의 모습에 유천도는 우습고 화가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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