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소녀와 청년
쏴아아.
그때 여인 뒤쪽에서 파문이 일더니 일곱 가지 색을 띤 거대한 이무기가 나타나 여인에게 향했다.
목진은 금세 정색하며 신속하게 여인한테 다가갔는데 가볍게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멈칫했다. 여인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거대한 이무기는 손바닥만큼 작아져 그녀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이무기는 여인이 기르는 영수였다.
이에 목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러나려 했는데 갑자기 살벌한 눈빛이 느껴졌다.
“들켰군.”
여인은 무척 아름다웠지만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 것이다. 이에 목진은 속도를 한껏 끌어올린 채 뒤로 물러났다.
슉!
목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천 장 정도 물러나 무성하게 자란 나무 위에 다시 내려앉았는데 앞쪽에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이 배시시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에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을 보자 목진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는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한테서 아주 위험한 파동을 느꼈다.
“이대로 가면 내가 혼나지.”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더니 목진한테 다가갔다.
이에 목진이 다시 도망치려 하자 청년은 귀신처럼 바로 앞에 나타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순간, 목진 체내의 영력이 움직임을 멈췄다.
목진은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의 실력에 화들짝 놀랐다. 녀석의 절대 생긴 것처럼 젊은 청년이 아닌 듯했다.
청년은 목진과 함께 호숫가에 다가가서야 어깨를 풀어줬는데 목진은 잔뜩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예쁘장한 여인이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목진은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아직 성인이 아닌 듯했는데도 고혹한 느낌이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아마 소녀의 풋풋함과 타고난 매력 때문일 것이다.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은 배시시 웃으며 다가가더니 금세 죽상이 되어 말을 건넸다.
“누이, 내가 근처에 있는 영수를 전부 물리치러 간 틈을 타 녀석이 몰래 호숫가에 왔어요. 다 내 탓이에요!”
목진은 금세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녀의 영력 파동은 청년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이는데 이 소녀가 엄청난 실력자인 청년의 누이란 말인가?
이에 소녀가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을 흘겨보더니 목진한테 고개를 돌리자 어깨에 누워있던 녀석이 혀를 날름거리며 목진을 노려봤다.
“저기…….”
목진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는데 소녀가 손을 내밀며 먼저 입을 열었다.
“너한테서 상고 염룡의 정혈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다섯 방울만 내놔.”
목진은 순간 넋이 나갔다.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지자 목진은 멍하니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상고 염룡의 정혈이라니, 나한테 그런 건 없어.”
목진은 어렵게 얻은 상고 염룡의 정혈 아홉 방울 중 네 방울을 수련에 도움이 되라고 구유한테 주었고 현재 다섯 방울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를 전부 내놓으라니. 소녀는 나이는 어려 보이지만 욕심은 정말 엄청났다.
“그래?”
말을 마친 소녀가 미소를 짓자 맑고 투명한 눈이 눈부신 빛을 발했는데 순간 달빛마저 암담해진 것 같았다.
목진은 어느새 소녀의 눈에 푹 빠져들었는데 마음속에서 누군가 그에게 상고 염룡의 정혈을 내주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다.
꽈르릉!
그때 체내에서 유명심마뢰가 울렸고 목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깜짝 놀라 소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사람을 현혹시킬 수 있었다.
슉!
잇따라 목진은 제자리에 잔영만 남긴 채 뒤로 신속하게 물러났다.
“림아.”
자신이 쓴 방법이 목진한테 아무런 소용도 없자 소녀는 흠칫 놀란 채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러자 검은색 도포를 입은 소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리에서 사라졌다가 어느새 숲속에 들어간 목진을 잡아 왔다.
“도망가지 마, 우리 누이가 화라도 나면 큰일이야.”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이 옆에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한 말에 목진은 소름이 쫙 끼쳤다. 청년의 실력은 목진을 훨씬 뛰어넘었다.
목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녀한테 고개를 돌렸다.
“미안, 난 방금 이상한 파동을 읽고 온 거지. 절대 일부러…….”
“나도 알아.”
소녀는 어깨에 누워있는 녀석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지 않았으면 상고 염룡의 정혈만 달라고는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왜 너한테 상고 염룡의 정혈을 내줘야 해?”
목진이 이를 갈며 물었다. 우연히 본 것만으로도 상고 염룡의 정혈을 다섯 방울이나 내줘야 한다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어차피 넌 도망갈 수도 없잖아.”
소녀가 방긋 웃으며 한 말에 목진은 입가가 파르르 떨린 채 잠시 생각하더니 통쾌하게 옥병 하나를 건넸다.
그러자 소녀의 어깨에 누워있던 녀석이 신속하게 옥병을 부수고 입을 쩍 벌려 그 속에 든 상고 염룡의 정혈 다섯 방울을 꿀꺽 삼켰다.
목진은 멍하니 그것을 쳐다봤다. 상고 염룡의 정혈에는 상고 염룡의 의지가 깃들었는데 녀석은 이를 삼키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채아(小彩)는 대천세계의 신수는 아니지만 일단 각성하면 신수방의 상위권 신수들 못지않을 거야.”
소녀는 녀석의 반듯한 몸을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목진은 녀석이 대천세계의 영수가 아니란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럼 청년과 소녀도 하위면 사람이란 말인가?
잇따라 녀석이 상고 염룡의 정혈에 깃든 힘을 제련하려고 소녀의 옷 안으로 들어가자 소녀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는데 그 모습이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상고 염룡의 정혈이 채아한테 상당히 유익한가 봐.”
소녀는 생긋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다.
“고마워.”
이에 목진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야심한 밤에 상고 염룡의 정혈을 잃은 것이 분통해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이제 가도 되지?”
목진은 출신이 불명확한 두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아 바로 떠나려고 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하하, 너무 화내지 마.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우리도 답례로 요리를 대접할게.”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은 목진과 사이가 좋은 것처럼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목진은 어이없어 어쩔 바를 몰랐다. 저들이 협박만 하지 않았어도 그는 절대 상고 염룡의 정혈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육신을 단련하려고 아껴뒀던 것이었다!
“됐어.”
그런데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은 목진의 거절을 무시한 채 그를 끌고 가더니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자, 먹어!”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은 목진이 거절하기도 바쁘게 다 구운 고기를 입에 쑤셔 넣고 허겁지겁 식사하기 시작했는데 그 엄청난 속도에 입이 떡 벌어졌다.
목진은 참 이상한 사람을 만났단 생각이 들어 조용히 하늘을 쳐다보다 경계를 풀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무슨 수를 쓰든 도망가지 못할 게 뻔했고 그러느니 포기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다.
한편, 소녀는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목진과 고림을 바라보기만 했다.
식사를 마친 목진은 나무에 기대어 배를 쓰다듬었다. 경지가 어느 정도쯤 되면 식사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렇게 많이 먹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허허, 참 활달한 친구군. 난 고림이고 내 누이는…….”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은 입가를 정리하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목진을 바라보며 웃었다.
“채소(彩瀟)야.”
소녀는 검은색 도포를 입은 청년을 힐끗 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에 목진은 언짢은 듯 딴 곳을 쳐다봤다. 가명도 좀 성의 있게 지으면 얼마나 좋을까?
“난 목진이라고 하고 용봉천에 가던 길이야.”
“요즘 들어 용봉천이란 이름을 자주 듣는 것 같군.”
고림이라 자칭하는 청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너흰 북계 사람이 아니야?”
북계 사람이라면 용봉천을 모를 리가 없었다.
“우린 천라 대륙 사람이 아니야. 용건이 있어 이곳에 온 것뿐이야.”
고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목진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청년을 한참 보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수련은 몇 년 정도 했어?”
고림은 목진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지만 실력은 그를 훨씬 뛰어넘어 조금 주눅이 들었다. 만약 청년의 실제 나이가 보이는 것과 똑같다면 목진은 당장 죽고 싶을 것이다.
“나와 비교하지 마. 너보다 훨씬 오래됐어.”
고림이 머쓱하게 웃으며 한 말에 목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녀석의 나이가 목진과 비슷했다면 절대 사람이 아닐 거라 확신했을 것이다.
목진은 다시 옆에 조용히 앉아있는 아름다운 소녀한테 눈길을 돌렸다. 고림이 누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나이가 분명 더 많을 것이다.
목진은 어린 소녀의 모양을 한 늙은이를 떠올리고는 왠지 소름이 끼쳤다.
한편, 채소는 목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난 노인네가 아니야!”
이에 옆에 있던 고림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누이는 체질이 괴상해서 자주 잠들곤 하는지라 실제 나이는 보이는 것과 똑같아.”
목진은 소녀의 괴상한 체질에 대해 캐묻고 싶었지만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용봉천에 진정한 용의 정혈이 있다며?”
채소의 말에 목진은 드디어 두 사람이 용봉천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말을 믿고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역시 있었군.”
채소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고림은 흠칫하더니 황급히 말했다.
“누이, 우린 용봉천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주신 임무가 우선이에요.”
“그건 네가 하면 되니까 난 용봉천에 갈까 해. 진정한 용의 정혈을 얻으면 채아는 완벽히 진화할 수 있을 거고, 나도 더는 긴 잠에 빠지지 않아도 될 거야.”
“뭐요?”
채소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고림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혼자 가려고요? 절대 안 돼요. 아버지께서 절대 누이더러 혼자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들키기라도 하면…….”
“너만 말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알 리 없어.”
채소는 생긋 웃으며 고림을 보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를 배신하면…… 알지?”
“그러지 마세요, 누이!”
말을 마친 고림은 괜히 목진을 쏘아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진을 그냥 보내는 건데 잠시 후회했다.
반면, 목진은 모르는 척 떠나려 했다. 지금 자리를 뜨는 것이 그한테 최적의 선택인 것 같았다.
“야.”
그런데 그때, 채소가 고혹스러운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나를 데리고 용봉천에 가줘.”
목진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고림을 힐끗 보자 그는 용봉천에 대해 말해준 것이 후회되었다.
목진은 달빛에 더 아름다워진 소녀의 눈빛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괜한 말을 했단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보기에는 상당히 아름다웠지만 목진은 왠지 두 사람한테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이에 대답하려고 하는데 고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절대 안 돼요!”
고림이 채소를 혼자 용봉천에 보냈을 뿐만 아니라 정체 모를 사내한테 맡기기까지 했다는 걸 아버지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다.
반면, 목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우린 아직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너와 함께 다니는 건 너희뿐만 아니라 나도 불안해.”
고림은 목진의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데 정작 소녀는 못 들은 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