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동행
채소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고림과 목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너희가 반대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네가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난 따로 사람을 찾을 거야. 어차피 용봉천에 가는 사람은 많아. 한 명쯤 찾는 건 일도 아닐 거야.”
이에 목진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 사람이 자신만 아니면 누굴 찾든 상관없는데 고림은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
“누이,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예요!”
청년의 처량한 목소리에 목진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 녀석은 엄청난 실력자임에도 소녀한테는 꿈쩍도 못 했다.
“두 가지 선택이 있어. 목진과 함께 가게 할 거야, 아니면 사람을 찾게 할 거야?”
채소가 생긋 웃으며 묻는 말에 고림은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누이는 성격상 결정한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누이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난 먼저 갈게.”
목진은 불똥이 튀기 전에 바로 떠나려고 뒤돌아섰는데 고림이 어느새 다가와 목진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상고 염룡의 정혈을 다섯 방울이나 준 것을 봐서 제발 날 보내줘.”
목진은 눈물이 글썽해진 고림을 보며 간절하게 빌었다.
소녀는 낙리 못지않게 예뻤지만 냉정한 낙리와 달리 상당히 매혹적이라 데리고 다니면 이목을 끌 것이 분명했다.
“나한테 별다른 선택권이 없어.”
고림은 한껏 괴로운 표정으로 목진의 어깨를 다독였다.
“뭘 믿고 나한테 네 누이를 맡기려는 거야?”
목진은 고림을 흘겨보며 물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누이를 맡기다니, 목진은 고림이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채소는 실력이 고림보다 훨씬 뒤처져 보였으니 말이다.
“걱정하지 마, 이 세상에서 누이를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
고림은 씨익 웃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누이를 쉽게 생각했다가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
이에 목진은 흠칫 놀라며 괜히 소녀를 쳐다봤다.
“이번만이라도 도와줘. 비록 안 지 하루도 채 안 됐지만 다른 사람보다는 네가 훨씬 믿음직스러워.”
고림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한테 상고 염룡의 정혈을 다섯 방울이나 빼앗기고도 태연하게 앉아 담소를 나누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고림은 손으로 채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이는 엄청 예민해서 아무나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데 너와 함께하려는 걸 보면 절대 문제없을 거야.”
목진은 마지막 이유가 썩 내키지 않았다.
“거절해도 돼?”
목진이 미간을 만지작거리며 묻는 말에 채소가 방긋 웃으며 답했다.
“그럼 난 용봉천이 끝날 때까지 널 이곳에 묶어둘 거야.”
“같이 가.”
목진은 바로 동의하였다. 그는 소녀가 한 말이 절대 장난이 아님을 굳게 믿었고 두 사람의 실력으로 목진 정도를 가두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걱정하지 마, 너한테 나쁠 건 없어. 난 체질상 문제로 실력에 한계가 있긴 하지만 절대 네 발목을 잡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네 말대로라면 용봉천에는 북계 젊은이 중 최정예만 모여 대결을 펼친다고 했으니 그때 가서 내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어.”
소녀는 손을 가볍게 털더니 씨익 웃었다.
“암튼 나와 함께 가는 건 너한테 엄청 좋은 일이니까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어.”
목진이 말문이 막힌 듯 조용히 있자 고림은 동정의 눈빛을 보내며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내가 뭐랬어, 누이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지?”
“언제 떠날 거야?”
목진은 고림을 흘겨보더니 더는 결과를 번복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반항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움직이자.”
고림은 누이가 바로 목진과 떠나려 할까 봐 황급히 말했다.
다행히, 채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가 휴식을 취했다.
고림은 그제야 시름을 놓고 목진한테 고개를 돌렸다.
“목진아, 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을 테니 누이를 잘 부탁한다.”
이에 목진은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난 그냥 현재 상황에 따른 것뿐이야. 네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내가 끝까지 거절하면 너무하잖아.”
고림 정도의 실력자는 절대 목진 따위의 의견을 묻지 않는다. 목진은 고림과 채소의 태도에 조금이나마 호감이 갔다.
“허허, 네가 반대했어도 정말 너를 어떻게 하지는 않았을 거야. 어머니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절대 우릴 가만두지 않으실 테니까.”
고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목진은 그가 부쩍 마음에 들어 모닥불 근처에 앉아 한참 담소를 나눴다. 한편, 소녀는 두 사내의 대화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고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쳇, 목진이라고 했지…….”
* * *
이튿날 이른 아침, 목진은 옆에 서 있는 채소를 보며 한숨을 쉬더니 앞쪽을 쳐다봤다. 고림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목진이든 고림이든 별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목진아, 누이를 잘 부탁해. 누군가 감히 덤비면 사정없이 때려줘.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
검은색 도포를 입은 고림은 준수한 외모에 행동거지가 기품 있어 목진은 그와 채소가 절대 평범한 출신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때가 된 것 같으니 우리는 먼저 떠날게. 임무를 마치면 용봉천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럼 이만.”
목진은 고림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채소를 힐끗 보고는 먼저 떠났다.
고림은 그제야 채소한테 고개를 돌리고 쓸쓸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누이, 제발 살살해. 두 분께서 아시면 난 정말 엄청나게 혼날 거야.”
“이번에 잘 넘어가면 후하게 한 턱 쏠게.”
채소는 생긋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나도 이만 갈게.”
채소는 동생이 뭐라 말도 하기 전에 한 줄기 빛이 되어 목진의 뒤를 따랐다.
“소주, 아가씨가 저 사람을 따라가게 놔둬도 되나요?”
고림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흐릿한 검은색 그림자가 나타나 말을 건넸다.
이에 고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뜩 무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용의 정혈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어릴 때부터 수많은 보물을 봐온 누이가 용봉천에 가려는 것은 절대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걱정하지 마. 누이의 실력이 봉인되긴 했어도 북계의 젊은이 중 그녀를 뛰어넘을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러다 눈먼 누군가가 기어코 덤비면 죽을 각오를 해야만 할 거야. 누이한테는 아버지께서 남긴 영혼의 인이 있잖아? 그럼 우리도 이만 가볼까?”
말을 마친 고림이 손을 휘익 젓자 앞쪽 공간이 바로 일그러졌고 그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검은색 그림자도 함께 사라졌다.
이렇게 숲속은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 * *
목진은 1각도 안 되는 사이에 숲에서 빠져나와 뒤쪽을 힐끗 쳐다봤는데 소녀가 뒷짐을 쥔 채 느긋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역시나 따돌리지 못했다.
이에 목진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나를 따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
채소가 옆에 다가와 히쭉 웃으며 묻자 목진은 괜히 콧등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한 가지만 부탁해도 돼?”
“뭔데?”
“가면을 쓰면 안 될까? 아무에게나 생긋생긋 웃으면 금방 문제가 생길 거야.”
목진의 진심 어린 조언에 소녀는 못 들은 척 그를 흘겨보다가 간결한 한 마디만 남기고 앞장섰다.
“절대 안 돼!”
용봉산맥은 북계가 존재해서부터 이름을 날린 오래된 곳이로 용봉천이 발견되면서 북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 되었다.
용봉천이 열리는 현재, 주위 수십만 리 범위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그친 적 없었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용봉산맥으로 몰려들었다.
용봉천은 북계에서 유명했고 나이만 부합되면 거의 모든 이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다들 이 기회를 빌려 이름을 날리고 싶어 했고 용봉천의 치명적인 유혹을 마다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목진과 채소는 용봉산맥에 도착해 벌레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각 세력의 정예들이 가득 모인 이곳에는 빛조차 스며들지 않은 듯했다.
목진은 북창대륙에서도 실력이 뛰어난 젊은이들을 많이 봤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절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이야말로 대천세계의 진정한 강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또한, 목진은 이제야 북계가 얼마나 큰 곳인지 알게 되었다. 아무리 대라천역이라도 북계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었고 북계는 또 천라대륙의 일부였다. 천라대륙은 역시 엄청난 대륙다웠다.
“우린 용봉고성(龍鳳古城)으로 갈 거야. 그곳이 용봉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거든.”
목진은 용봉산맥의 깊숙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들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상당히 웅장한 도성이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았다. 이에 채소는 그쪽을 기웃거리더니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목진은 채소와 함께 1각 정도를 다시 달리다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앞쪽을 바라봤다.
우뚝 솟아오른 산맥은 강력한 힘으로 억지로 뭉쳐놓은 것 같았고 그 위에 거대한 장인이 보였는데 그 위쪽에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오래된 도성이 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도성은 창망하고 오래된 기운을 내뿜어 주위를 가득 채웠고 그 변두리에는 만 장 크기의 석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목진은 익숙한 영진의 파동을 느꼈다.
원고 시기, 이곳에 분명 극강의 영진이 있었을 텐데 오랜 세월이 흘러 천지를 부수고도 남을 영진은 그 위력을 잃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래된 도성으로 몰려들었지만 크기가 너무 커 전혀 비좁아 보이지 않았다.
목진과 채소도 바로 도성을 향해 청석 거리에 내려앉았는데 목진은 바로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다들 목진과 동행한 채소를 힐끗거렸다.
정작 채소는 사람들의 눈길이 습관이 되어 대수롭지 않았는데 목진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목진한테도 눈길을 돌렸는데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한기에 등골이 오싹했다.
“화근이네, 화근이야.”
목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말에 채소는 그를 흘겨봤는데 이 모습에마저 목진은 하마터면 소녀의 미모에 넘어갈 뻔했다. 목진도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목진은 더 늦기 전에 얼른 채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채소가 있어서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상대방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지면 그는 알고 있는 걸 모두 털어놓았기에 정보를 얻기가 상당히 쉬웠다.
“그럼 용봉각에 가볼까?”
채소는 또 다른 사내를 홀려 정보를 알아내더니 도성의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보에 의하면 용봉고성에 용봉각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에 용봉천에 관한 최신 정보가 있다고들 했다.
두 사람은 떠들썩한 거리에서 벗어나 고성의 북쪽 어딘가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 황금으로 빚은 것 같은 건물 한 채가 놓여있었다.
정교하게 새겨진 누각에서 용음과 봉황의 울음소리가 함께 들리며 진정한 용의 위압감이 느껴졌는데 적잖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목진은 이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고성에서 본 사람들보다 실력이 훨씬 강하다는 걸 한 눈에 알아챘다. 아마, 실력 미달인 사람들은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이곳에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용봉각을 잠시 훑어보더니 채소와 함께 들어갔다.